칫솔의 기억력
변윤제
피를 보고 맙니다.
솔이 완전히 뭉개져 있습니다.
이빨을 기억하는 일을
칫솔은 자신의 힘으로 삼고
혀에는 백태의 눈보라 몰아칩니다. 때마침 나가 버리는 화장실 전구. 혀에 스며드는 쇠 맛.
혈관에 흐르던 어둠이 바깥의 어둠과 만날 수 있도록.
칫솔이 잇몸을 그어 버린 것입니다.
화장실 천장엔 줄기처럼 별이 매달리고 온갖 별자리가 달리는데 사수자리에서. 긴 화살의 꼬리가 날아가는데.
칫솔이란 망가지기 위한 기억력입니다.
칫솔을 주기적으로 갈아야 하는 이유는
망가진 칫솔이 우리를 망가뜨리려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솔이 우리를 기억하는 한, 우리의 치아 또한 그것을 기록하려 시도합니다. 뭉개질 결을 따라 벌어지는 치아.
구역질이 변기 물처럼 쏟아지고.
목젖 뒤의 별똥별. 어긋난 치열이. 잇몸서 새어나오는 빛이.
칫솔이 그래서 우리를 배반합니까.
교도소에 넘어간 칫솔 줄 몇 개는 날카롭게 갈려 무기가 되었다 하고.
탈옥범을 성공시키기도.
칫솔에게는 칫솔만의 무수한 가능성이란 게 존재하고 있을지도요.
칫솔의 욕망을 이해해야 할 시간입니다.
성정에 대해. 취미나 특기. 그가 어쩌다 이빨을 닦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 평생 버린 칫솔을 모아서.
책상 옆 화병에 꽂아 봅시다.
피어나는 것이 있습니까?
사실 칫솔이란 참.
눈치가 빠른 자들입니다.
우리가 버리고 싶을 때쯤 칫솔은 이미 망가져 있죠.
스물 몇 개의 치아를 신경 쓰느라. 그는 이미 누구보다 눈치에 도달한 자가 되었고.
눈치가 빠른 자들이란 잔인한 자들입니다.
칫솔의 기억력은 제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니.
저는 칫솔에 묻은 피로 거울에 칫솔의 본을 뜨고
살펴봅니다.
그가 무슨 굴곡을 가졌는지. 어디서 주저앉았는지. 벌어진 이빨의 틈새에서. 이제는 어떤 걸 더 망칠 수 있을지.
— 계간 《시작》 2022년 여름호
퍼스널컬러
썩은 구름 그림자가 햇볕과 잘 어울린다
두 발이 두 발의 뒤늦은 절망과 더욱 잘 어울린다
그러니 초콜릿 케이크란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 법
이십사시 카페
시폰에 올려진 한 점 체리를 들어 올리며
과일이 흘리는 자줏빛 색상을 불길하다 믿으며
나는 마네킹과 자꾸 눈이 마주치는 사람
혀에 도착한 붉은 소식이 축축이 젖어버리고 말았다
사탕을 씹으면 설탕의 흰 빛이 되고
화염과 연기를 씹으면 카카오 열매의 색을 머금고
의자를 씹으니 네 개의 다리가 달리던
나의 혀끝은 나의 영혼과 제법 잘 어울리고 말았다
의자는 해안가의 절벽처럼 부드러운 폐곡선
우리가 어울린다는 말, 정말 희한해
어제의 엄지발가락은 폼페이의 체리 나무였고
양말은 만개하는 화산 열매였는데
낮고 찬 하늘이 케이크 위에 얹어지고 있다
은빛 스푼 햇볕이
코발트색 과일을 도려내고 있다
마네킹이란 우리가 우리를 들여다보는 방식
내 발목이 내 발끝과 어울려주어서 정말 다행이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 3-4월호)
변윤제
1990년생. 서울예대 졸업,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2021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등단.
▲출처: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