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마나 뻔한 상황이다. 전면전 기념으로 세상에서 제일 비싼 불꽃놀이까
지 벌렸는 데 난리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편,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환된 살라딘은 부하들이 헐레벌떡 가지고 달
려온 술탄의 전갈을 읽고 있었다.
<친애하는 총사령관 각하, 살라딘님께>
살라딘님. 그동안 요새방어에만 전력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어
요. 하지만 이제 드디어 살라딘님의 화려하고도 완벽한 이도류솜씨를 발휘
할때가 왔습니다! 자! 나가서 저 인류의 해악이요, 안타리아의 기생충과도
같은 파렴치의 극치를 달리는 팬드래건의 병사들을 회쳐주세요!
추신 : 아아... 살라딘님의 멋진 모습이 눈 앞에 선해요! 응원할게요!(경님)
추신 2 : 돈 많이 벌어오세요! (소연)
"............"
한동안 코마상태. 살라딘은 무의식중에 두 번 세 번 읽어보며 과연 이 것
이 술탄이자 칼리프인 사람에게서 온 전갈이 맞는 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
했다.
이성은 그렇다라고 수차례 대답하고 있었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머리가
가자는 데로 가는 게 아니지 않는가...
"저.....각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가서 멋지게 싸워달라는 건데....
도저히 뭐라 말할 수 없이 어지럽고 헷갈리고 아득해지는 가운데....
"푸웃...."
"에?"
"푸훗.. 쿡쿡쿡쿡...쿠쿠... 하하... 하하하하하...."
갑자기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아하하하...."
"대, 대장님?"
정말 과거의 부하들은 이래서 안된다. 툭하면 옛날 호칭이 그대로 나온다.
"아하하하하! 쿡. 푸하하하하!"
"....?????;;;;;"
한참을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 되어서야 살라딘은 겨우 웃음을 멈출 수
가 있었다. 너무 웃어서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애검 히랄 하르로데
를 지팡이삼아 숨을 골랐다.
"하아......"
많이 생각하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망설여도....
결국 말한마디에 주저없이 나가 싸우게 되는가.....
'힘을 낼 때다.'
결판은 이 전쟁을 끝내고 나서 내도 늦지 않아.
"나쁘지 않아."
그래. 정말 나쁘지 않다. 많이 낯설지만... 그래서 많이 어색하지만 이상하
게도 망설임은 없다.
그녀의 이름으로 보내졌지만 아마도 이건 그 친구들이라는 사람이 쓴 것
일 거다.
........생전 처음보는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그러나 시선은 현실에서 조금도 비껴나가지 않은...
아, 맞다. 스승님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
내가 그로 인해 변했듯....
그녀도......... 그들로 인해 .........변해가는..... 거겠지?
언제나....
소녀다운.... 그런 웃음을 웃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 데...
언젠가... 기필코 그 가녀린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주겠노라고...
그대를 사랑하며, 그대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했었는 데....
지켜주겠다.
그렇게 계속 변화해가고 강해져간다면... 그래서 설사 언젠가 내가 필요없
어진다고 해도....
그때까지는 지켜주겠다.
검을 집어들고 한번 기합을 넣은 뒤, 밖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
그때까지도 멀뚱이서서 자신을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부
하를 발견했다.
한편, 자기네들의 엉망진창 서신이 살라딘에게 예상치못한 활력소가 되주
었다는 것도 모른 채 일행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너무 오버하지 않았을까?"
"오버는 이미 했어. 문제는 정신분열증 초기증세로 보이지 않았을까이지."
"끄응...."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더 이상 거리를 두고 싶지 않다며? 하지만 정
중함과 친근함의 중도를 지킨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게 뭐야?"
"게다가 그정도로 분위기가 굳어있을 땐 정중한 게 자칫 밀어내는 걸로
보여진단 말이야. 너 요새 들어서 하루 몇시간이나 살라딘과 함께 있었던
거냐?"
"몇시간은 무슨... 몇 분도 안된다."
"얼씨구~ 내가 러브러브모드 발생시키지 말라고 했지 세라자드랑 파토내
라고 했냐? ......아무래도 안되겠군. 좀 보기 괴롭긴 하지만 두 사람을 붙여
놔야 겠다."
"하긴, 안 그래도 싱숭생숭 할꺼야. 자기 조국이 마녀에게 당하고 있는....
끄악! 잘못했어~~~"
우지근 뚝딱, 와장창창, 울라불레~~~~~
"어머? 무슨 소리죠?"
어리둥절한 얼굴로 들어오는 세라자드를 향해 경님을 깔아 뭉개고 있던
유나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암 것도 아니에요~~~"
"....음....뭐, 일단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까.."
그리고는 일행들 옆에 털썩 주저앉는 세라자드.
경님은 순식간에 잊혀지다.
'우에에에에... 배신이에요~~ 제가 세라자드님을 얼마나 좋아했는 데~'
그러나 안 들리면 그만이다.
"저도 전투에 나가겠어요."
"안돼요!"
"절대로요!"
"정 전투에 참전하시려거든 절 밟고 가세요!"
........요란한 삼중창에 세라자드는 순간 멍해져버렸다.
"어, 어째서요? 유나씨의 몸은...."
"제 몸이야 마장기죠!"
"얘 몸이야 무적이에요!"
"파괴신이 부활해도 살아남을 인간이 있다면 이 인간이죠."
"그래도 안돼요! 만약이라는 게 있다고요!"
"그럼, 그럼. 세라자드님의 문제는 그 능력이 아니라 성격에 있는 거니
까.."
"세라자드님의 몸을 뒤집어쓴 유나는 걱정없지만 유나의 몸을 뒤집어쓴
세라자드님은 걱정돼요."
"그러니까 요컨데 세라자드님은 마음이 너무 약하시다고요."
"오랜 세월 축적된 인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피아를 가리지 않는
박애정신은 버몬트같은 미친 놈을 상대로 할 때는 너무 위험해요."
"......피아를 가리지 않는 박애정신은 아니라고 보는 데......."
푸욱-
유나는 그대로 옆구리 어택을 가한 뒤, 아파서 기절하려는 경님을 끌고 천
막 구석으로 갔다.
"모두를 용서하세요 라는 그 말을 잊은 거냐!"
"........으윽... 아파 죽겠다..."
"내가 그 말 듣고 뒤집어진 거 기억 안나냐! 문라이트는 어째서 대인공격
용이냐고 내가 누누히 미친 듯이 소리쳤지! 그 데미지가 일인용으로 모아
지면 아론다이트도 순식간에 간다. 쩝, 어째서 대마장기용 마법이 이리도
없는 거지? 에너지필드따위야 움직이지 못하고 잡아두는 것 뿐이고....근데
어쩌다 여기로 말이 샜지? 다시 가자."
휙- 다시 경님을 끌고와선 제자리 복귀.
"아무튼 이번 적이 너무 벅차요. 못난이 알파라비도 아니고 앞 뒤 꽉꽉 막
힌 예니체리들도 아니고 이건 앞 뒤 패턴없이 미친 놈이라고요! 절대 안
돼요! 무슨 짓을 할 지 알아서! 세라자드님은 hp 가 30000이 아니라 40000
이라도 어린애하나만 인질로 잡으면 따라가실 분이니까요!"
".....그, 그럼 유나씨는 따라가지 않으실건가요?"
"저요? 음.....어린애라면......"
"......너 어린애한테는 약하지 않았냐?"
"어, 어린애라면.... 따라가는 수 밖에 없겠네요...하, 하지만 전 다르죠! 전
어디까지나 술탄전권대리인이지, 술탄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가 잡혀간
다고 해서 살라딘님이 미칠 리도 없고... 크윽, 갑자기 가슴 아프네..."
"요주의사항이 바로 그거에요! 살라딘님의 안전!"
"버몬트랑 일기토하면 끝이에요. 아셨죠!?"
"....어째서요? 그 사람, 강한 사람이니까.... 살라딘님께서 상대해주시면..."
"강한 정도가 아니라서 문제라니까요."
"미쳤다니깐요. 미친 놈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 놈 미친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지나가는 바람이 알고 제가 알고
저 녀석이 알고 전 커티스 국민이 알아요."
"미친 개는 피해가는 게 약이에요."
씹어도 너무 씹는 거 아닐까하고 경님이가 잠시 동정론을 펼쳐볼까 했으
나.... 쿠에틀란의 참사도 기억나고 무엇보다 유나와 더불어 모니터를 부여
잡고 절규했던 나날들을 잊을 수는 없으니....
결국 침묵했다. 침묵할 뿐만 아니라 고개까지 끄덕였다.
"아무튼 세라자드님은 그 엄청난 hp를 믿고 요새방어에 충실해주세요. 세
라자드님께서 저희들의 마지막 보루에요. 부상병들도 그렇고...."
"오옷! 정말이다! 턱살이 빠졌어!!!!!"
"그러고보니 세라자드님 옷 갈아입으셨네요?"
"아....그.....옷이 좀 커서....."
"만쉐이~~~~~"
"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좋아할 만도 하지. 너도 이 기회에 살도 빼보지 그래?"
"이경님~~~~ 니가 지금 슬슬 살고 싶지 않아지는 모양이구나~~~ 응~~~?"
"아앗, 왜 그래~~~ 나는 그냥 제안을 한 것 뿐인데....."
"변명은 필요없다! 네가 날씬하다고 살찐 사람을 이렇게 구박할 수가 있는
거냐~~~~"
"내가 언제 구박을 했다고 그래~~~"
"만세 삼창! 내 몸무게가 줄었다네~~~~"
"야, 야, 목소리 좀 낮춰. 밖에 있는 사람 다 듣겠다."
"아차차차...."
시간은 흐르고 흘러..... 또다시 중간과정을 서술하는 게 귀찮아진 작가에
의해서 포커스는 전투맵으로 건너뛴다.
뿌옇게 흐려지는 흙먼지, 지면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열기, 내리쬐는 태양과
더운 기온에 비해 바람은 날카로웠다.
"주력부대는 우리가 상대할까? 그 사이 살라딘님이 알아서 한 군데를 고
장내주시겠지."
"정확한 명을 내리지 않으셨군요."
"불필요한 일이잖아. 안 봐도 뻔하지. 보나마나 보급부대를 노리고 있을
거다."
".....보급부대보다는 그 옆의 주둔부대를 섬멸하는 것이...."
"소모전이라니까. 여기는 우리 나라야. 보급물자부터 끊는 게 우선이라
고.... 잘먹고 있는 것들을 건드려서 애꿎은 목숨들 내버릴 순 없잖아? 고
사시키고야 말겠어. 우다비나는 내주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저 수많은
병사들이 우다비나의 피를 짜기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우다비나 역시
말라죽는다."
케먈의 얼굴위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우다비나는 희생양입니까?"
"빼돌려야지."
"예?"
"대상들의 힘이 필요하다. 상인들이 못하는 것은 없어. 우다비나를 거점으
로 삼고 있는 대상들을 불러모아. 부탁해야 할 것이 있어."
"부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부탁이다. 상인에겐 명령따위 통하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유능 그자체의 비서겸, 참모인 케먈을 보내고 난 뒤, 유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모전이라고 하지만 적들은 이미 우다비나를 손에 넣었다. 좋게 말해 지
방색이 강하고 제대로 말해 제멋대로인 투르의 상인들 중에 분명 남부와
그곳을 연결하여 버몬트의 물자를 대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어느 때고
매국노는 있기 마련이니까.
북부의 호족들을 미리 숙청해서 버몬트편에 붙는 것을 방지시켜놓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고사작전, 일명 자일리톨 전법은 애시당초 성립
이 불가능하다.
(자일리톨이 충치균을 죽이는 원리가 고사작전이다. 자일리톨은 균들이 소
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균들은 흡수되는 열량도 없이 끊임없이
분해시키다가 지쳐죽는 것이다. 아~ 잔인한 껌들..)
상인들에게 뭔가 큰 이상이나 이념을 따라 행동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들은 이윤을 따라 움직인다. 버몬트가 우리보다 더 많은 이익
을 줄 수 있다면 그들은 아무리 내가 목에 피가 맺혀라 외쳐도 저쪽에 붙
는다.
만일..... 그렇다면.....
유나는 주먹을 쥐었다.
또.... 다시..... 그것 뿐인가....
숙청
전쟁종결 후, 투르의 상권이 다시 안정되기까지 꽤 많은 시일이 걸리겠지
만 어쩔 수 없다. 백성들이 당하게 된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제엔장! 빌어먹을!!!!'
이런 엿같은 경우가 있나.... 버몬트만 죽이면 저 무례한 침입자들은 물러
날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 데도.....
그를 죽일 수는 없다.
절대로 안돼. 그렇다고 해서 당장 팬드래건을 묵사발로 만들어놓을 수도
없다. 커티스는 순식간에 부활하고 말거다. 안 그래도 버몬트의 입지는 불
안하기 짝이 없어.
그는 말하자면 반왕이다. 강함으로 모든 불만과 부조리를 누르고 있는.
최악의 경우다. 이겨야 하지만,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도 없는....
"미치겠군....."
그러니....제발....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애국심 좀 발휘해줘, 상인 아찌들!.
.
.
.
.
.
날카로운 너클이 예리하게 뻗어나간다. 그러나 곧 거대한 대검으로 막히
고...
"방패겸 검이군."
"그따위 시시한 것으론 힘들걸세."
".....시시하다라...."
소연은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 앞의 상대를.... 솔즈베리의
죠엘 남작을 쳐다보았다.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양가집 규수 전소연, 오늘 하루 경로사상을 잠
시 접어둘 테니 먼곳에 계신 아버님, 어머님 잠시동안만 딸자식을 잊어주
세요~~~'
"과연...."
".....음?"
소연은 너클을 슥슥 벗더니 그대로 등 뒤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방금 자기 손으로 끝장난 크루세이더의 대검을 집어들었다.
"역시 검에는 검이지."
"......재주가 많은 아가씨로군."
"아아, 놀라기는 아직 이릅니다. 남작님."
소연은 몸을 깊숙이 수그리고는 잠시 기운을 모았다.
새파란 오오라가 전신으로 퍼지며 이윽고 무딘 칼날 위에 맺혔다.
"서, 설마....."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합니다! 플라즈마 슬래쉬-!!!"
퍼버버버벙-
죠엘남작의 몸을 통과한 검기는 쭉쭉 뻗어나가 등 뒤편에서 막 사경을 헤
매고 있던 몇 명의 병사들을 그대로 저승길로 보내버렸다.
"설마.... 자네는....성기사!"
"하앗!"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두꺼운 검날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닥쳐왔다.
"크윽!"
"그렇게 여유부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대, 대단한 힘이군....."
"제 2격!"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하압! 플라즈마 슬래쉬!"
"이얍! 플라즈마 슬래쉬!"
퍼버버버벅- 파바바바방!
푸른 화살처럼 쏘아져나가 불꽃처럼 흩어지는 검기는 그 하나하나가 데미
지를 줄 만큼 위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맞부딪힌 두 갈래의 검기는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으윽-"
아니다. 소연쪽이 약간 더 우세!
"이대로라면 이름없는 한족출신의 어린 여자애가 팬드래건의 살아있는 전
사라고 불리우는 솔즈베리 남작을 꺾겠군요. 좀 더 힘내보시지요. 기껏 이
정도로 무너지는 주제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왔습니까?"
"어, 어떻게.... 한족이 안타리아 성기사의 검술을....."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요. 이렇게 시시하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
닙니다!"
운동화가 땅을 박찼다. 파공음과 함께 날아드는 칼날, 격한 움직임, 벅찬
방어, 남작은 확실하게 밀리고 있었다.
"엑스칼리버가 아닌게 오늘의 악운이군요!"
"나도....후회.....하고 있는 중이........일세!"
휘말렸다가 풀어지고 기운과 기운이 맞부딪히며 검날과 검날사이에서 검
기가 춤춘다. 모래가 일어나고 뜨거운 기운이 상승한다.
"코, 콜록...."
"흐에취~ 역시 이래서 사막은 싫으이.."
"콜록, 콜록.... 이런 모래투성이 땅을 정복하려고 온 게 누군데요!"
말싸움으로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어느새 주위 병사들은 둘의 화려한
검무를 구경하느라고 넋이 빠져있었다.
"뭘 구경하고 있어요! 사람 싸우는 거 처음 봅니까! 나중에 폐하한테 다
일러줄거예요!"
후다다다다닥-
"와아아아아!"
"적군을 무찌르자!"
"투르의 무서움을 알게 해줘라!"
"사막이여! 그대의 아들들을 보살피소서!"
".............."
구경꾼에서 순식간에 기세오른 군대로 변신. 남작은 전투중인데도 불구하
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들 여술탄이 꽤나 무서운 모양이군."
"아아, 무섭다기보다는 공포스럽죠."
"그, 그 정도인가..."
소연은 빙긋 웃으며 상큼하게(?) 답변했다.
"당해보시면 알아요."
그리고.....
퍼억-!
"으윽!"
"싸움 중에 한눈 판 게 잘못이에요~"
과연 경로사상따위 확실하게 집어던졌군. 불의에 옆구리를 가격당한 남작
은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당연하다. 권법가이기도 한 소
연의 발차기를 무방비 상태에서 맞았으니...
"자, 다시 갑니다."
이미 뿌옇게 된 안경이건만 그 안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과 하나가 되어 달려오는 소녀의 모습을 본 순간, 죠
엘남작의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버틴다!
죠엘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대검을 쥐고 자세를 바로했다.
원래의 힘에다가 가속도까지 보태졌지만......!
차앙----!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것일까. 검이 맞부딪힌 소리는 들려오는 데 손목
에는 느껴지지 않는.......!
죠엘은 황급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기게 있는 것은...
사막의 태양아래서 더욱 빛나는 금발, 아직은 가녀린 등.
"대공.....전하?"
뼈에 새겨진 핏빛 살기, 사막의 햇살을 받고 있는 것이 맞는 지 의심스러
운 희고 매끈한 얼굴, 얼음같은 무표정함, 그리고 무엇보다....
엑스칼리버!
뿌드득-
다문 입술 사이에서 이가 갈린다.
소연은 잠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분기를 삭히는 듯 나지막
히 읖조렸다.
엑스칼리버의 차가운 빛이 뜨거운 태양아래서 푸르게 빛났다.
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다 낡아빠진 검으로는 상대하기가 벅차.
"2대 1이라니, 팬드래건도 갈데까지 다 갔군."
"원래 전쟁이란 건 갈데까지 다 간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
"그건 네 놈의 정신상태겠지. 우리 투르는 멀쩡하기 그지 없다."
어느새 편들어버렸다. 무의식중으로...
우리... 투르....
당신은 어떤가요?
어때요? 뭐라고 할 거죠?
당신은 뭐라고 말할 건가요.....!
언제나.... 고개를 반쯤 숙인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 데.... 절대로 그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는 데...
대답해봐요, 살라딘!!
"흥, 썩어들어가는 게 너무 익숙하다보니 그렇게 여겨질 뿐. 헛된 소모전
을 끝낼 때가 왔다. 내가 그것을 끝낼 것이다."
차가운 검의 광택과도 같은, 적갈색의 눈동자....
"안타리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지....."
그때였다.
"거짓말..!"
그리고 뒤이어 날아드는 얼음의 칼날!
"크윽!"
엑스칼리버로 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일단 데미지는 이쪽이 먼저 입고 말
았다.
"경님아!"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시지! .......거짓말쟁이!"
아직은 어리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여자?
햇살을 등진 채 무너진 전차의 잔해를 딛고 올라선 소녀의 모습은 역광
때문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 식으로 둘러싸고 포장하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착
각이야! 당신이 원하는 건 정복자로서의 명예도 아니고, 그로 인해 얻는
이득도 아니야! 어린아이를 죽이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 따윈 당신한테
없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모르리라고 생각해?"
".........!"
"알고 있다면 어쩔거야? 당신이 뭘 바라보고 있는 지 내가, 아니 우리가
알고 있다면!"
".........."
버몬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검을 들어올려......
"허튼 짓은 거기까지야."
그러나 소연역시 괜히 hp 10000씩이나 받아가며 전장에 나와있는 게 아니
다.
"크윽-"
"블리자드 스탐을 쓰는 순간, 이 노익장의 목숨은 없어."
"......죄송합니다. 대공전하."
죠엘 아저씨, 오늘 하루 완전히 스타일 구겨지는 날이로군. 샌드백에다 인
질에다가.... 하긴 어차피 이 아저씨야 중반까지 방패막이로 쓰던 캐릭이긴
해.
"우리가....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렇지 않나, 대
공?"
흙먼지와 땀, 피로 얼룩지고 더러워진 안경은 잘 보이질 않았다.
이래서 안경잡이는 불편해.
"허나! 이건 아니야! 당신이 틀렸어! 당신의 방법은 아니란 말이야! 이래서
는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따위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게 된다고!"
아니야. 확실히 있어.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어둠을 없애는 태양처럼, 일그
러지고 삐뚤어진 저 정신상태를 순식간에 제대로 바로잡아줄 사람이.
하지만......
하지만!
"우리가...막을 거야. 네 놈의 광기를."
".....마음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이 투르는 나의 것이 된다."
"투르의 땅은 팬드래건에게 속해도, 투르의 정신은 살아있어. 폐하께서 계
시는 한,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
"살라딘님이 있는 한!"
"........."
"그리고 그 두분만 계시다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투르에 의한 팬드래건정복이라는 역사가 세워질지도 모르지."
이것은 거짓말. 절대로 이루어질리 없는 일.
우리가 그렇게 되게 하지 않을 거야. 전쟁은 이걸로 끝.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은 아닐 거야.
팬드래건의 왕자로 태어나 투르를 사랑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의 힘.
그렇지요? 당신이 해줄 거죠?
우리가 도와줄게요. 혼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제발.....
저 바보같은 동생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아줘요.
"꿈도 꾸지 마라."
"내가 할 말이야. 투르정복이라니.... 꿈만 꿔도 망령이다."
쉬이이이익-----
거대한 날개가 일순간이나마 따가운 햇살을 가린다.
끼이이이이!!!!!
창공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
아지다하카다!
"다들! 철수합니다!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뭐?"
"좋았어! 경님, 가자!"
"알았어."
아지다하카를 탄 용병이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아지다하카의 등 위로 올
라탄 소연과 경님은 다시 한번 버몬트를 바라보았다.
기분나쁘게도.....저 재수없는 얼굴 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너도.....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고 있니?"
"무슨 생각하는 데?"
소연은 옆에 있는 용병을 의식하며 작게 속삭였다.
"..........닮았어.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응.....형제니까."
그렇게 점차 멀어지는 버몬트의 모습을 보며..... 둘은 살라딘이 팬드래건에
두고 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다.
"야, 경님아."
"응?"
"만약.... 카디스에서 죽은 게 필립이 아니라 존이었고... 살아남은 필립이
버몬트 대공이 되었다면.... 그 역시 투르로 쳐들어왔을까?"
"........존이랑 세라자드님은 안 어울리는 데...."
"아니아니.... 존이 정말로 죽었다면 말이야."
"....그랬겠지?"
"맞아. 역시 그랬겠지."
"그럼 우리는 이렇게 아파하거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겠
지."
"유나도 그렇게 골머리 썩고 있지 않을 거고."
"무엇보다.... 그 누구에게도 미래를 맡길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아르케로 보내진 않을 거야."
"그래. 그래야지."
핏빛 노을이 번져오는 사막의 하늘.... 어디까지라도 날아갈 듯, 아지다하카
는 드넓게 펼친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