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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초로 자랐다
나는 1945년 해방되던 해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선조의
묘소를 돌봐야 한다는 효심으로 4살에 부모님에 업혀 압록강과 북한을
거쳐 심심산골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길현리에서 자랐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호적이 3살이나 늦어 10살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는데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겨울을 제외하곤 팬티
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발가벗은 나를 보면 세준이‘뭐’보라고 놀렸다.
그래서 지금도 꿈을 꾸면 발가벗은 내가 부끄러워 그곳을 두 손으로 가리
고 당황하다 깨는 생시 같은 꿈을 자주 꾼다.
산간벽촌 그 시골도 바가지를 든 거지가 많았으며, 사회적으로는 죄
없는 사람을 공연히 구타하는 깡패, 성폭력, 연필 한 자루를 주면서 거금
을 요구하는 강매 등 무법천지였다. 우는 아이에게 상감이 온다면 그칠
정도로 밀주를 단속하는 세무공무원과 지게작대기를 허가 없이 벌목
했다고 단속하는 산림계공무원의 위세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굶주리고 무법천지였던 시절에 5·16 군사혁명이 세상을 바꿨다‘.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구호로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상감보다 무섭던 공무원이 앞장서 야산을 개간하여 허기진 배를 불리
도록 지도했다. 그 덕분에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도 심고 고구마도 심어
허기진 배를 채우니 열심히 노력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꿈과 용기,
자신감이 생겼다.
이 세상에 배고픔 보다 더 심한 고통이나, 서러움이나, 슬픔은 없다.
누구든 먹을 식량이 없어 3일만 굶어보라. 똥도, 돌도 먹을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며 도탄에 빠진 나라를 재건한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영면하신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지날 때 마다 마음속으로
은혜에 감사드린다. 그래서 나는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써 그분의
덕으로 교육혜택을 받은 사람이 5·16혁명과 그분을 비하하는 말을
들으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내 보따리 내 놓으라는 속담이 사실임을
느낀다. 만약 당시 혁명이 없었다면, 당시 북한보다 가난했던 한국이었음
으로 오늘날 북한동포와 같이 기아의 설움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서
숨어사는 신세가 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산을 두 개 넘어 6km를 걸어야 초등학교에 등교할 수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왕복 12km를 걸어야
하는 어린시절은 무척이도‘돌머리’였다. 집에 형들이 배우던 한자책
천자문이 있어 12k m를 걸으면서 외우면 겨우 10자를 암기하는데
다음날은 절반은 잊고, 3일이 지나면 아는 게 한두 자에 불과했다. 그런
돌머리가 밤을 낮처럼 강하게 가르치는 서당에서 3개월을 불철주야로
한문을 외우니 옥편에서 50자를 찾아 쓰고 한두 번만 암기해도 며칠간
절반은 기억할 정도로 암기력이 향상되어 1년에 맹자, 논어 등 사서를
암기했다. 그래서 필자는 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이 체험담을
빼 놓지 않는다. 그 후 주역을 배웠다. 주역은 金水木火土 상생상극(相生
相剋) 자연의 이치와 이를 응용하는 학문이다. 그 후 서예와 사군자에
능한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주야로 먹을 갈았다. 얼마나 먹을 갈았는지
벼루가 구멍이 뚫렸다. 구멍난 벼루를 부모님께 바칠 정도로 서화를
배웠으나 써 먹을 곳이 없었다. 부모님을 도와 쌀밥 먹는 부자의 꿈을
실현하고자 남의 논밭은 빌려 고추농사, 담배농사 등 불철주야 노력
했으나 농사로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자 23세에 결혼했다. 아내에게 결혼
조건으로 첫째도 둘째도 부모님을 모시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런 내가
불효자가 생각하는 분가를 결심하고 부모님께 사업자금을 말씀드리니
애지중지 하시던 소를 팔아 반 마리 값 12만원을 주시며 다시 더 요청
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27세에 분가하였다.
12만원으로 1972년 대전에서 필자의 아호인 효천(曉泉)을 인용하여
학원명칭을‘효천서예연수원’이란 간판을 걸고 주야를 불문하고 배운
것을 가르쳤으나 임신한 아내를 굶기는게 다반사였다. 그렇게 2년을
가르치며, 공부하고 서화개인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판매한 돈이 이것
저것 정리하고 30만원이 남았다. 죽어도 서울가서 죽자는 생각에 보따리
를 싸서 서울에 보증금 3만원에 3천원 월세방에서 밤에는 작품을 만들고
낮에는 인사동 화랑을 찾아 구걸하듯 그림을 선보였으나 작품이 뛰어나
지 못하고 유명세가 없어 월세 3,000원도 못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졸업식에 어느 내빈이 축사를 통해 파카만년필을
발명한 파카를 소개하면서‘발명을 하면 부자된다’는 말을 늘 상기하고
있었는데 을지로 어느 실크인쇄소에서 간단하게 인쇄되는 과정을 보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
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언제 보아도 평화롭고 안식이 되는
주옥같은 성경과 반야심경, 생활에 지표가 되는 명언, 명시를 공단과
같은 옷감에 스크린 인쇄로 간단한 족자를 만드는 아이디어였다. 떼돈을
벌 것 같았는데 사업자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어느 교회 장로님이
500만원을 투자하여 동업을 시작하였다. 월세사는 시민아파트 옥상에
실크인쇄공장을 차려놓고 밤에는 붓으로 원고를 만들고 실크인쇄를 해서
아내와 함께 족자를 만들고 낮에는 교회와 사찰을 찾아다니는 1인사업,
1년에 투자자는 손을 들었고, 나는 떨어져나간 구두뒷굽을 보수할 돈이
없어 한쪽마저 떼내고 신어야 하는 거지 중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죽자니 서러운 막다른 골목에 자존심을 버린 아이디어가 있었다. 지필묵
을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가훈이나 좌우명, 사훈을
써주거나 사군자 등 5분이내 작품이 가능한 간단한 작품을 그려주고
소비자가 주는 대로 사례금을 받는 일이었다.
사무실 정문‘잡상인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들어가 지필묵을 펼쳐놓고
숭덕광업(崇德廣業)(덕을 숭상하여 업을 넓혀라) 글을 쓰고 회사명과
날로 발전하기 기원한다는 내용(日益發展之禱)을 써서 낙관하여 사장님
에게 선물하니 사장님이 금일봉도 주시고 사원들이 가훈과 좌우명도
부탁하여 봉투를 받았는데 첫날 첫 방문에서 23만원을 벌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삼겹살을 배부르게 먹고 또 다시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업
으로 태평로, 서소문로, 종로, 을지로를 무대로 돈을 벌어 롯데백화점에
화랑도 경영하고 꿈에도 그리던 내집을 마련하여 응접세트 등 가구를
장만하고 농촌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모셨다.
1979년 어느 날 응접세트에 앉아 차를 들다가 응접세트에 걸쳐 놓은
십자수 등걸이를 보고 일확천금 아이디어가 나왔다. 응접세트에 장식
하는 등걸이와 커튼, 여성들 한복에 지워지지 않는 나염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디어였다. 을지로 화공약품 상가와 나염공장 공장장을 찾아가
사정하여 노하우를 얻어 세탁에도 문제가 없는 물감을 개발하여 견본을
만들어 시장조사를 하는데 모두 대박나겠다고 평가하고 밤마다 눈을
감으면 돼지가 들어와 새끼를 낳는 꿈을 꾸는 등 부자가 되는 꿈이
연속되니 정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에 전 재산을 투자하여‘대주
물산’이란 상호로 공장을 만들고 그림에 소질 있는 사원 등 80명을
모집해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가진 돈이 금방 바닥나 백화점 화랑을 정리해도 부족하여 은행에 당좌
어음과 약속어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내일은 좋아지겠지,라는 기대로
빚이 늘어 살아도 죽은 사람보다 못한 생불여사(生不如死)생활이 연속되
었다. 죽고 싶어도 처자식과 부모님 그리고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업체를 매도할 의사를 주변에 밝혔더니 마침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내가 경영학을 배우지 못해 이렇게 좋은 아이
디어를 망했다며 인수를 요청하여 평가액에 절반을 받고 양도하여 받은
돈으로 빚을 갚고도 어음으로 발행된 빚이 1억 8,000만원이 남았다. 당시
양옥 한 채가 2,000만원에 불과했으므로 지연, 학연, 혈연이 없는 내겐
엄청난 금액이자 빚이었다.
부도가 나도 암으로 투병하시며 사경을 헤매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부도가 나기를 기도했다.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어 경매되는 꼴을
보이면 저승에서도 걱정할 부모님에게 이보다 더 불효는 없기 때문에
가슴이 저려왔다. 뜬 눈으로 밤잠을 못자는 날이 쌓여 피로해지면 숙면을
위해 만취해서 귀가하여 엎드려 잠을 청하면 가슴이 금방 답답하고
옆으로 누구면 옆구리가, 방바닥에 등을 대면 등에서 불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작고하셨다. 고향선산에 모시고 삼우제도 올리지
못하고 귀경하여 어음을 막는데 혼비백산이든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
변을 보는 순간‘돈 없이 돈 버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도자기공장을 찾아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그림이 없는
도자기를 1대1로 받아다가 유명화가그림과 교환하여 빌딩로비나
빈사무실을 며칠간 임대하여 작품을 전시하는 사업아이디어였다‘. 한국
미술문화원’원장 박세준 명함을 만들어 지필묵을 들고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어느 도자기공장을 찾아가 그림과 도자기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도자기가 불황이고 도자기에 좋은 그림이 있으면 고가에 매매가
쉬워 실력만 있으면 어떤 도자기공장이든 대환영이다. 도자기공장에
사장님을 만나 의중을 말하니 그림실력을 보자는 것이다. 1분이면 완성
하는 서예작품, 5분이면 완성하는 사군자, 달마, 게, 금붕어, 산수화 등
그림실력을 보였다. 자꾸만 가져와 만든 작품의 수가 80점이 넘었다.
다음날은 다른 도자기공장을 찾아가 그렇게 며칠을 작업하니 도자기가
엄청나게 모였다. 이 도자기를 가지고 한국과 중국(대만)에 유명화가들을
찾아가 도자기와 내 작품을 보여 주면서 사업계획을 말하며 이번만 물물
교환하고 다음부터는 대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그림과 바꿨다.
표구비가 없어 이곳저곳 표구사에 도자기를 주고 표구하여 여의도 사학
연금빌딩로비를 임대하여 그림을 멋들어지게 전시하고‘한중동양화중견
작가작품비교전시회’라 현수막을 걸었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필자가 직접
작품을 만들어 값비싼 작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공짜로 주는 마케팅
작전에 값싸고 품질 좋은 대만(중국)화가들 작품이 날개 단 듯이 팔렸다.
여의도빌딩을 돌고 강남 테헤란로, 중구 태평로, 세종로 일대를 무대로
< 작가 효천 박세준 >
3개월에 부도없이 빚을 청산하고 몇 개월이 지나니 통장에 돈이 제법
있었다. 빚에 쫓기다 독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천하에 나보다 더 부자는
없는 것 같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고향을 찾아 돌아가신 아버지묘소를 참배하고 부모
님의 친구인 어르신들을 찾아뵙는데 그분들이 모두 부모님으로 보여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난하여 부모님을 관광 한 번도 못해드린
불효를 부모님의 친구들께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실패에도 불구하고
매년 전국관광과 마을회관건축 등 고향발전을 위해 20여 년간 꾸준히
실천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르신들이 자신들이 돌아가시면 그 공을
기릴 사람이 없다면서 필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이름을 새긴
‘공덕비’를 2001년 건립해 주셨다.
또한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아내는 가난으로 입원시켜
드리지 못한 노환의 시아버지와 치매로 고생하는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2년이나 받아내며 불평불만 없이 모셨다하여 서울시장‘효부상’을
수상했고, 형제를 돕는 일과 조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아내에게 항시
감사한다.
다음번 연제 내용 : 효(孝)와 우애(友愛)
첫댓글 자꾸내용을 읽고궁금해하는 일인^?^
네. 박세준님은 정말 드라미틱한 삶을 사셨어요.
만나면 놓아주질 않으세요.
이야기가 봇물터지듯 쏟아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