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7. 큐티
여호수아 22:19 ~ 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관찰 :
1)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 19절.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 => 비느하스는 놀라운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비를 뽑아서 소유지를 다 분배했는데, 만일 두 지파 반이 자신들이 받은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신을 찾는 것이라면, 아홉 지파 반이 가지고 있는 땅 중에서라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두 지파 반의 불평 혹은 어떤 다른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나은 일이지 두 지파 반이 우상숭배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를 보낸 아홉 지파 반의 결의는 대단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땅이라도 내어줄테니 그것이 문제였다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 20절.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 => 비느하스는 “바알 브올 사건”을 경험한 자로서 여리고 성 정복 때 범죄한 아간의 죄를 다시금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아간으로 인해서 아이성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보았던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간 한 사람의 죄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죄악으로 하나님이 인식하시고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게 되었던 것임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느하스는 두 지파 반에게 그들이 쌓은 제단이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라면 그 죄악에서 최대한 빨리 돌이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두 지파 반의 변호
- 21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이 오해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가 오해를 불러왔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온전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 22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אֵל ׀ אֱלֹהִים ׀ יְהוָה, 엘 엘리온 여호와). 여기에서 두 지파 반은 하나님에 대해서 세 가지의 명칭을 모아서 두 번 반복하여 고백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엘”은 고대 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신의 이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할 때 주로 사용한 것으로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I will be who I will be’의 의미로서 이후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자존적인 성격을 보여주시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총 6823회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사용했다는 것은 두 지파 반의 대표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하기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어떠한 행위,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구원해주시지 않으셔도 당연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오해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엘 엘리온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자신들의 변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가르침 :
1) 비느하스는 아홉 지파 반의 대표로서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만일 두 지파 반이 쌓은 제단이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고, 그 이유가 자신들이 받은 땅에 대한 어떤 불만 때문이었다면, 아홉 지파 반의 땅을 실로에 와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더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동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우격다짐으로 두 지파 반의 회심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그들을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타인만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은 바른 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비느하스는 철저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민감성을 가진 자였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을 그냥 그것으로 치부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요한 태도로 붙잡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두 지파 반이 쌓은 제단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라면 그 문제는 두 지파 반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의 생사가 갈릴 수 있는 문제로까지 확대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자신들의 어떠한 것도 희생하고자 하는 자세를 통해서 그의 진정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3)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이 받은 오해에 대하여 억울함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억울함이 아니라 도리어 엘 엘리온 여호와의 신앙으로 반응합니다. 자신들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한 고백을 통해서 자신들이 결코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억울함을 모면하고자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믿음의 고백을 더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
1)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중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교화할 수 없습니다. 바른 교훈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는 분명하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양을 맡기시고, 그들을 목양하게 하시는 것은 나의 희생을 통해서 그들을 살리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지 나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라도 나를 통해서 유익이 얻어지게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조그만 범죄라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움으로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의 태도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옛날에는 그러하시고 지금은 다르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에 더러운 죄악이 들어오는 것을 언제나 경계, 또 경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오해는 변명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참된 신앙의 고백, 바른 생활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오해를 풀기위한 변명은 그야말로 변명에 변명을 낳는 일이 이어질 따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렇기에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선되어야 하는 중심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