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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의 완성자 그리스도
히 1:1-3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1-3 / [하나님 아들의 위대성] 오랜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으로나 꿈으로나 또는 직접 말씀하시거나 하여 예언자들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부신 광채를 드러내고 인격과 모든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 그 자체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아들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시려고 죽으셨으며, 지금은 지극히 높은 영광을 받아 하늘에 계신 위대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리서는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변증하는 말씀입니다. 1장은 예수의 뛰어나심을 증거합니다. 그 중에 본문은 예수를 계시의 완성자로 소개합니다.
아들을 통하여(1-2a)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과 형식은 다양합니다. 환상으로(사 6장), 불타는 덤불 가운데서(출 3장), 세미한 음성으로(왕상 19장), 드라마 같은 가족사를 통해(호세아), 여름 과일 한 광주리라는 비유를 통해(암 8:1), 때로는 시 또는 잠언으로,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그밖에 여러 가지 통로로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지막은 시간적인 종말이 아니라 메시야(그리스도)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한 기간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써 완성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구약의 계시들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자이십니다.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해 구약의 율법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고 비난한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곱 가지 기술(2b-3)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에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독자를 의미하며, 1세기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아는 동시에 헬라식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율법주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들라는 것인데 그 근거는 예수의 뛰어난 존재와 사역의 우월성입니다. 기자는 예수의 뛰어난 존재와 사역의 우월성을 헬라식 사고로 설명하는데 모두 일곱 가지로 기술합니다. 예수는 첫째, 만물의 상속자입니다. 이는 만물이 예수에게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둘째, 모든 세계를 지으신 분입니다. 여기서 세계는 시간을 뜻하며, 예수께서 물질 세계 뿐만 아니라 시간의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형상은 도장으로 찍힌 모양이란 뜻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십니다. 다섯째, 만물을 능력의 말씀으로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여섯째,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일곱째,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은 위엄과 존귀, 영광과 권세의 자리입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은 죄가 사해지기 위해서는 죄 없는 거룩한 사람이 대신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죄사함을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죄사함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고 우리를 대신해 죄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 설 교 >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히 1:1-3 / 유기성 목사
히브리서를 강해하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남미 집회를 다녀온 후 신약 성경 중 한 책을 강해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는데, 남미 여행 중 주일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히브리서를 강해야 해야 한다.” 강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갑작스럽고 거역할 수 없을 것처럼 강한 이 마음, 아무 준비도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이 주신 것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히 성경 읽기부터 시작하여 히브리서 강해를 준비하다 보니 히브리서가 성경 중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온전하고 조직적으로 다룬 성경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빠, 최고!”하지요. 브라질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따봉!” 하면 금방 관계가 좋아진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따봉“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입니다! 좀 싱겁지요! 그 말하려고 이렇게 길게 써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뻔한 것이라면 듣고자 하는 흥미가 없어진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아간다는 것, 결국 예수님이 최고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남미 여행 중 이과수 폭포를 가 보았는데, 브라질 쪽에서 보고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강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폭포 바로 앞까지 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쪽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쪽에서 본 광경이 너무 놀라와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주위에서 하도 권하길래 다음 날 아르헨티나 쪽에 갔습니다. 가보니 역시 강 위로 다리를 만들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브라질 쪽에서는 강 아래에서 위로 보며 갔기에 가는 내내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쪽은 그저 평범한 큰 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들어가 보니 굉음이 울리며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폭포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과수 폭포 위에서 폭포를 내려다 본다! 이것은 브라질 쪽에서 보던 것과 또 비교가 안되는 광경이었습니다. 이과수 폭포를 보아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한 시간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과 친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인생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보인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확신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군에서 훈련받을 때 독도법 훈련이 있었는데, 생전 가보지 않았던 산 정상에서 지도 하나 주고 가라는 것입니다. 지도가 없으면 앞이 캄캄합니다. 사방이 산인데, 어느 산으로 가야 하나, 길은 어디에 있나? 답답합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갑자기 눈이 뜨입니다. 강이 있고 산이 있고 장애물이 있어도 길이 보입니다. 가야 할 방향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이처럼 인생이 보입니다. 전혀 달리 보입니다.
황홀합니다. 기쁩니다. 담대함이 생깁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서 모든 유익한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겠습니까?
솔직히 이과수 폭포는 보지 못해도, 아르헨티나 쪽에서 보지 못했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인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영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를 왜 기록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저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성경이고 수신인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는 히브리서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가 정경이 된 것은 히브리서의 메시지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인은 히브리서를 읽어 보아야 알 수 있는데, 본래 유대교인이었던 히브리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인데 예수 믿고서 기가막힌 어려움을 당한 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유를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위협에 처해졌습니다.
먼저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라고 지목되어 핍박받았습니다. 재산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성전에 관한 모든 특권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당국에 의하여도 더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할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마귀는 춤을 추고 있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믿은 것이 큰 실수요 환각이요 죄라고 생각하게 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평생 존경하고 따르던 산헤드린 공회원과 제사장들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따르니까 하나님께서 너회를 ‘번성케’ 하던가?‘ ’이것이 축복인가? 이것이 구원인가?‘ ’왜 예수는 재림해 오지 않는 거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편지를 쓴 것은, 이들이 체포된다면 로마가 제시하는 석방의 조건 -즉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것- 을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급히 기독교가 유대교와 무엇이 다른지, 왜 이런 핍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심지어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권위 있고 명료하고 조직적으로 밝혀주어야 하였습니다.
그가 배교의 위기를 맞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 보다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다, 천사들보다 우월하다. 모세보다 우월하다, 여호수아보다 우월하다, 아론보다 우월하다, 유대교의 어떤 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낫다’ ‘크다’는 비교급 어휘가 굉장히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또 ‘앞을 바라보라’는 말이 돋보입니다.
1절에 선지자가 나옵니다.
히 1: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란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모든 은사 중 가장 큰 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선지자를 폐하신 분입니다.
2절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 욕심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제가 할 일은 교인들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저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제게 가장 유익한 것은 예수님만 드러나고 저는 잊혀지는 것입니다.
설교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지나고 나면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귀가 열리면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그 분이십니다.
3절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러 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알고서도 힘들다고 어렵다고 예수님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재산을 다 잃고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하는 위협을 받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당합니다. 손해 보고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받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까 떠날까 저울질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상처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한테 만큼은 야박하세요. 저는 하나님이 무서워요. 저는 아직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라는 게 실감이 안 돼요.”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용서가 안됩니다. 제 지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힘듭니다.”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발광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최고입니까? 그 무엇 보다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까?
어제 상계 백병원 최영민박사가 오셔서 우울증 강의를 하셨는데,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다고 합니다. 한국 아줌마들의 드라마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 보기가 싫어졌다, 그러면 우울증이랍니다. 한국 아저씨들에게는 아마 스포츠 중계일 것입니다. 스포츠 중계가 싫어졌다 하면 우울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 아니라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드라마, 스포츠 다 시시해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좋고,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까? 죽어도 좋습니까?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예수믿고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믿어서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여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니 자녀를 위하여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아십니까? 사랑하십니까?
히브리서 설교를 들으면서 히브리서 큐티를 꼭 하십시오. 영성일기를 쓰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을 잘 모르는 분은 이번에 예수님을 더욱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지 못하는 분은 이번에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여러분, 아들을 아느냐? 딸을 아느냐? 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목사를 아십니까? 자신없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모른다고 하면?
그러므로 예수님을 지식으로도 관계로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초년 목회 때 참 존경하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새문안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동익목사님이셨습니다. 1998년 4월 56세의 나이로 소천하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온 몸에 암이 퍼져서 사경을 헤매다가 잠깐 다시 강단에 서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콩팥의 암, 내장에 다 퍼짐, 고관절을 썩게 함, 6개월 판정, 병원에서 모두 잠든 시간에 눈물이 비오듯이“하나님, 제게 기회를 주세요! 이제 쉰여섯입니다. 오라 하시면 가겠지만, 허락하시면 한국교회 모태교회 담임목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뜻깊은 목회 발자취를 남기고 가고 싶습니다.”
새벽 녁에, 너무나 강한 음성이 마음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이번은 살려 준다. 그러나 이전같이 목회하면 안돼, 말로만 하면 안돼, 직접 체험한 능력으로 나를 증거하라. 그래야 너도 살고 성도도 살 수 있어!’
한양대 병원에서 치료 불가, 퇴원 권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재 검진, 의료진 사이 일주일 고민 의사들이 찾아와 “목사님, 결정해 주십시오.”하나님의 응답을 다시 확인한 후에 “수술합시다.”오전 콩팥제거, 내장 암제거, 오후, 다리 절단, 인공관절 시술하였습니다.
수술 후, 마취가 깨어날 때 손을 꼭 붙잡고 있음을 느낌.“내가 너를 붙들었노라!”그제야 손을 놓고 떠나심.
한 달만의 김동익목사님의 예배, 눈물의 예배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목회 초년생으로 너무나 궁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훌륭하신 목사님께 왜 ‘이전같이 목회하면 안돼, 말로만 하면 안돼, 직접 체험한 능력으로 나를 증거하라. 그래야 너도 살고 성도도 살 수 있어!’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문제입니다. 이제 예수님 정말 붙잡고 사십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1907년, 세계에서 알아주는 부홍이 한국에 임하였습니다.
그 후 불과 몇 년 안돼 무서운 영적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던 성도들이 협박당하고 고문당하는 힘든 과정에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시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교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동의했고 엄청난 신앙의 위기가 왔 습니다.
하지만 1907년 성령으로 예수님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났기에 다 죽어서 끝난 것 같았지만,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한국 교회를 세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생겼습니다. 무명의 성도들도 “하나님 믿어 뉘 좋은 게 뭐가 있어! 하나도 없잖아!" “며느리가 이상한 서양 잡신을 믿어서 이렇게 되었다.”면서 모든 책임올 뒤집어쓰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굶어도 목회하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어 보려고 모든 것 다 버려두고 피난을 떠났습니다.
초라한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켰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마음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황제 주위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공직이냐? 기독교 신앙이냐?”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당연히 공직을 택할 줄 알았는데,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을 택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통령도 장관도 사장도 해야 하지만, 어느 때는 다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소돔과 고모라 때가 우리에게도 오는 것입니다.
어디서 버릴 힘이 나옵니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예수님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영광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모든 것보다 뛰어난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히 1:1-3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교인)와의 관계를 8개의 전치사를 사용하여 말씀합니다. 이 전치사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전치사로 ‘Through [θrú]’ ‘… 을 통하여’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Throug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해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Through’를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올려 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부산과 경남을 연결하는 거가대교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리가 필요할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 바다가 부산과 경남을 갈라놓았듯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서 아르헨티나처럼 너무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르헨티나를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듯이 죄를 지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가려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십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장 1-2절을 통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통하여’ 라는 전치사가 2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십니다. 히브리서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에도 예수님이 중보자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십니다. 수학에서 집합 A와 집합 B가 있을 때 A와 B에 공통으로 속하는 집합을 교집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교집합처럼 하나님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을 이해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사람이어야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어야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장 3절 중반 절을 통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친히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구적으로 효과가 있습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짓고 회개하기를 반복했지만 예수님의 피는 한번으로 충분했습니다. 단번에 효과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카니발의 타이밍 벨트를 교환했습니다. 카니발의 타이밍 벨트는 8만 킬로 전후에 교환하지만 타이밍 체인은 반영구적입니다. 타이밍 벨트는 또 다시 8만 킬로가 되면 교환해야 하지만 타이밍 체인이라면 교환하지 않아도 됩니다. 짐승의 피는 타이밍 벨트처럼 일시적이지만 예수님의 피는 타이밍 체인처럼 영구적입니다. 타이밍 체인은 반영구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구적입니다. 한 번으로 끝납니다. 어쨌든 짐승의 피로도 사람의 죄를 씻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피로는 우리의 죄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뿐만 아니라 로마서에도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나옵니다.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10-11절을 통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미암아’ 가 3 번 나오는데 말미암아는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불화했을 때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북군 병사가 전쟁 중에 아버지와 형들을 잃었습니다. 이 병사의 집안은 농사를 지었는데 농장에서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려면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병사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돕기 위해 전역하기 위해서 상관의 허락을 받고 링컨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비서가 면담을 거절했습니다. “자네는 대통령을 만날 수 없네. 지금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대통령은 매우 바쁜 분이야. 이제 돌아가게 젊은이. 전장으로 돌아가서 저 남군과 싸우게 그게 자네가 할 도리야!” 그 병사는 낙심한 채로 백악관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 때 어린 소년이 다가왔습니다. “군인 아저씨 왜 슬퍼하세요? 뭐가 잘못 되었나요?” 그 병사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소년은 그 병사의 손을 잡고 백악관 뒷문으로 들어가서 보초병들을 지나고 장군들의 회의실을 지나고 장관들의 사무실을 지나더니 대통령 집무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년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덜컥 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국무장관과 회의를 하다가 소년을 쳐다봤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토드?”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이 군인 아저씨가 아빠와 얘기 할 일이 있대요.” 그 병사는 아버지와 형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국무장관과 상의를 하더니 승낙을 했고 그 병사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병사를 데리고 대통령에게 찾아갔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고 하나님께로 나가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졌을 때 우리 대신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십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오십니다. 소년이 병사를 대통령에게 데리고 갔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아들 예수의 말씀
히 1:1-3 / 김근중 목사
지난해에 캐나다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행 중 주일이 있었기에 어느 한국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처음, 시작시간에 강대상 위에 있는 십자가를 향하여 찬송하는, 특이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친교시간에 제게 다가오신 몇 분의 장로님들이 바로 그 십자가를 향해 찬송하는 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그 시간에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1950년대, 우리 교단 모교회가 강대상 앞 벽에 십자가를 달아놓은 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 철거할 것을 결의한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캐나다 모한인교회는 그 십자가를 향해 찬송 부르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십계명 제 2계명 때문입니다.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인 줄 압니다. 특별히 우리 장로교는 우상과 형상에 대하여 더욱 철저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인간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출 33:20, 삿 6:22).
1.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 율법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친척,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으로 방주를 만들 것을 명령하시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노아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홍수 때에 온 가족과 함께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말씀으로 부르셔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많은 예언자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선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내린 만나를 먹고 4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성막의 구름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형체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여러 선지자들과 조상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증거였습니다.
2.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런데 본문 말씀에 보시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2)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되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어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 2:7)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형편과 입장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979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선거 유세를 하고 다닐 때 어느 늙은 한 노파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시면 나같은 노인들을 잊지 마시오.” 이 말을 들은 레이건이 대답했습니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당신처럼 늙은 노인의 한 사람인데요.” 그렇습니다. 그보다 더 분명한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레이건의 대답은 나도 당신들의 처지와 필요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들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던 하나님은 친히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 죄악의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것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은 피하여 숨어 있는 아담에게로 친히 가셔서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있는 아담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입혀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죄악의 사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체험하시고, 사단의 유혹을 친히 당하여 보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섭리에 따라, 말씀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육체를 입으신 채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찬송할 뿐입니다.
한편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영접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심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되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증거로는 먼저 그의 순종을 들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께 복종하여 영광을 돌리시기 위함이라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빌 2:8).
더욱 우리를 감동시키는 사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온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찾아와 가룟 유다를 앞세워 예수님을 체포하려 할 때, 베드로가 하속들 중 한 사람의 칼을 빼앗아 휘둘러 밀고하는 하속의 오른쪽 귀를 베었다고 합니다(요 18:10).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듯 만류하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허락하신 십자가의 잔이라면 결코 피하지 않겠다는 신뢰감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도 마지막 남기신 말씀을 통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전부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신뢰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최고의 영광스러움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인 순종과 신뢰성을 분명하게 보여 줌으로써, 우리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본을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기피하면서 내가 원하는 축복만을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은 거절하면서 우리의 평안과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의 인물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분들은 다 순종하므로 구원을 받았고 은총을 입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고, 그렇게 하므로 자신과 모든 가족을 홍수에서 구해 낼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역시, 끝까지 거절하려고도 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 앞에 굴복하고 순종했기에 죄악의 도성에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던 자기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면, 우리 성도들은 더욱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
히 1:1-3
히브리서는 신앙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일종의 변론서라고 말할 수 있다. 재판정에 가보면 원고와 피고를 세워놓고 검사와 변호사가 불꽃 튀는 설전을 벌인다. 피고를 위하여 변론하는 변호사는 고도의 설득력을 드러낸다. 그렇게 아니하면 상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은 낭비 같으나 재판에서 이기기 위하여서는 사실 투자할만 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변호하려면 변호하려는 그 인물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강대강 알고 있다가는 오히려 밀리기 쉽다. 기독교인들이 이단종파 사람들에게 밀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 그들은 한가지를 알아도 분명하게 체계를 갖추고 말할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많은 것을 알면서도 단 한가지라도 설득력 있는 변론을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 나는 예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야고보가 말 한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마귀도 알고 떠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게와라 하는 유대인의 한 제사장이 있어 그의 일곱 아들이 귀신을 내어 쫓다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가 덤벼드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한 사건이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소위 인류의 4대 성현 중 한 사람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분이 나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이 믿으니까 따라 믿고 남이 교회에 가니까 나도 한번 가 볼까 하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오늘 이 즐거운 성탄절에 이 성전을 찾아온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란 영어로 CHRISTMAS라 쓴다. 이 단어는 CHRIST와 MAS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말한다. 사람들이 성탄절을 가리키는 단어를 X-MAS라고 사용하는데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헬라어 크레스토스의 첫문자가 X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것을 따서 X라고 사용하는 줄 안다. 그러나 수학공식에서 X는 무엇인지 모르는 가상의 수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함수이다. 그러므로 X-MAS는 누군지 모르는 이에게 예배를 드린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지나친 말일까?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 이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은 그저 성탄절이면 선물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 한다. 청소년들은 전날 밤부터 온 밤을 지새면서 연인과 함께 즐거워 하는 날인 줄로 안다.
상인들은 이 날이 대목 즉 대단한 수입을 기대하는 날로 여긴다. 유흥업소들도 나름대로 많은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고 수입을 늘리려고 안간 힘을 쓴다. 어른들은 이 성탄절이 하필이면 신정과 함께 설정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성탄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 커다란 백화점에 그려져 있는 것은 산타클로즈할아버지이다. 선물을 가져다 주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를 그려 놓았는데 이 그림이성탄절 즉 예수님의 탄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그려 놓았다. 그러나 아니다. 정작 제 자리에 모셔져야 할 예수님은 백화점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디에 모셔야 하는가? 교회를 들여다 보아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성탄목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교회의 종탑마다 명멸되는 깜박이 등은 눈부시도록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 추운 겨울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계신지 궁금하다. 1993 년도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1. 믿을만 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는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들의 사고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게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메시야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유대인의 희망이었다. 그들은 메시야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메시야가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 갈릴리 나사렛동네에서 무슨 지도자가 나겠는가 하는 의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사람들은 동네에서 쫓겨나야 했고 가족들은 흩어져야 했다. 그들의 재산은 빼앗겼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여러날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 예수는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요, 또한 만물의 상속자이다.
-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 예수는 능력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예수는 과연 이 세상의 어떤 분 보다도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공자보다도 석가보다도 더욱 위대하신 분이시다. 저들은 오늘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내일 일을 어찌 알리요 하였으나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우리와 함께 세상 끝날까지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유대인들은 천사와 선지자들을 매우 존경하였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였다. 그러나 천사도 선지자도 우리 인간의 죄를 해결할만 한 능력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실만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바울은 많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자기의 고뇌를 해결할 수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고 호소하였다. 그의 고민은 언제 해결되었는가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결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분토같이 버리고 따를만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과연 믿을만 한 가치있는 분이신가?
2. 천사보다 더욱 크신 분이시다. (4)
천사는 무엇인가? 천사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선지자가 위대한 인물로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이다. 선지자 처럼 천사들도 존경받는 대상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천사들이란 하나님의 바람, 불꽃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이 신속하고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냄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 천사를 향하여 '내 아들' 이라 부르신 일이 있는가 ?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천사에게 명하셨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라.' 예수님은 모든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시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를 원망한다. 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우리로 고생하며 유리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가 아담인가 ? 누가 하와인가 ?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은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솔직하게 그건 너가 아니라 바로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여야 한다.
예수는 모든 인생들의 잘못을 보시고 '너희 잘못을 너희가 담당하라.' 하지 않으시고 친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이렇게 나타났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고 헌신을 말하면서도 부분적인 헌신을 나타낼 뿐인 우리 인생을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헌신하셨다.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의를 심은 사람은 화평을 거둔다. 열심으로 땀 흘린 개미가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처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
천국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잡지를 창간하면서 이런 말을 썼다. '우리는 한국교회에 범람하는 또 하나의 잡지를 만들어 내고 싶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뭐 좀 색다른 책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새로 출간되는 잡지 뿐인가? 목회자들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자기를 차별하려고 한다. 기성 목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에 수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우리 교회를 그런 교회와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그것은 평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다른 교회 교인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두 제가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탄의 정신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그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는 죄 없이 고난을 받으셨다. 그분은 오직 고난을 받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시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힘 주어 기도하셨는가 ? 그러나 예수는 곧 자기의 기도를 포기하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세례요한은 와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다.
에수님은 철저하리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른 분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신을 쳐서 복종하셨다.
오늘 우리가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수는 바로 이러한 분이시다.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히 1:1-3
♠ 서론
▶ 새신자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일곱 가지를 놀라게 된다. 일곱 가지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성경에 대해서 놀라고, 또 하나는 나보다 앞서 나온 교회 신자를 보고서 놀란다. 일단 성경에 대해서 무얼 가지고 놀라느냐. 선물로 받거나, 돈을 주고 성경을 샀다. 교회 목사님이 성경말씀을 설명해 주시니깐, “나도 성경을 봐야겠다”하고 구입을 했다. 두껍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깐 굉장히 떨면서 본다. 성경을 보고 놀란다. 성경의 첫 책이 창세기다. “아 그러면 태초에 세상이 창조된 기록이구나”알고 성경을 읽는다. 조금 읽어보면, 창세기는 세상이 창조된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아브라함과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한 80%가 다 아브라함 이야기다. 그런데 왜 창세기라고 했을까.
▶ 두번째 책은 출애굽기이다. Exodus는 out of Egypt라는 뜻이다. 우리 어르신 분들은 찰턴 헤스턴이 나오는 십계라는 영화를 보았을거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디즈니에서 나온 Prince of Egypt를 봤을 것이다. “아 그러니깐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구나”라고 열어보니 그 얘기가 아니다. 첫 판부터 하나님이 선포하신다. 열 가지 재앙과 기적이 일어나고 나서 너희들이 나올 것이다. 영화로 보자면, 스포일러다. 기대감이 전혀 없이, 하나님께서 이룰 것이다며 미리 던져준다. 그리고는 출애굽기 내용의 대부분은 광야와 성막에 관한 내용이다. 이집트 탈출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언약대로 출발시키고, 탈출시키고 나서 광야 이야기와 성막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 세번째 책 레위기도 마찬가지다. 열두 지파중에 레위지파의 특별한 이벤트나 러브스토리가 있는가 보면은 그게 아니고 제사에 관한 이야기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너무 많다.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온 인류를 저주 가운데 집어넣은 사랑없는 하나님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축복하실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 아브라함은 마누라를 두번이나 팔아먹었다. 그 후대들이 행했던 악행들이 그대로 다 적나라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출애굽기에서도 모세의 장인어른 이름이 루엘이냐 이드로냐 헷갈리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400년 있었느냐, 아니면 430년 있었느냐 헷갈리게 되어 있다. 성경을 보고서 당황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 말씀이기에는 너무 앞 뒤가 안 맞고 이상한 내용들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 두번째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이상한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 믿게 되면 그 말씀이 성취가 되어진다. 무당 점쟁이 안 찾아가도 될 만큼 말씀을 붙잡으면 말씀이 이뤄진다. 두번째로 놀란다. 세번째로 놀라는 것은 성경에 많은 사람, 많은 장소,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66권의 성경책이 합해졌는데, 다 저자들이 다르다. 쓰여진 시대들도 다 다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딱 한 주제를 가지고 말한다. 될 수가 없는 일인데 참 놀라운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얘기한다.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세가지 정도 놀란다. 또 신자에 관해서 세가지 정도 놀란다.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되면, 아무래도 처음 나온 것이니깐 주위를 살피게 된다. 나보다 번저 신앙생활을 했으니깐, 아무래도 조금 거룩해 보이기도 하고, 기대의 수준이 높아보인다. 조금 다녀보면 놀란다. 자세히 보니 세상의 불신자보다 못한 것을 보면서 놀란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교회에 하나님이 불러 모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치유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수술을 하게 되면 옷을 다 벗는다. 민낯을 하나님이 사건을 통해서 다 드러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지금 수술 중 치유 중이시라는걸 모르면 놀라서 교회를 떠난다. 저 집사님이 돈 먹고 떼어먹고 당해서 놀란다. 저 장로가 사기쳤다. 하나님께서 민낯을 다 드러내시는 것이다. 모르면 교회를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못 되먹은 집사, 장로가 이상하게 기도응답을 받는 것이다. 저런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가야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거기에 두번째로 놀란다. 교회 이상한 곳이다. 세번째 놀라는게 있다. 자기도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쭈욱 하면서 “나도 저들과 똑같구나”라는 것을 알면서 놀란다. 안 해야 하는데 알면서 나도 똑같이 그들과 한 통속이라는걸 알게 된다. 그러면서 마지막 일곱번째 최종 결론을 내린다. 말이 필요없구나. 서로 비교할게 필요없구나. 따질게 아무 소용없구나. 오직 교회다니는 이유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구나를 그 때 가서야 놀라며 깨닫게 된다. 그 때 가서야 이제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사실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을 못 깨닫게 되면, 교회 안에서 자꾸 좌충우돌하는 것이다. 시간을 다 허비한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모세처럼 저와 여러분을 80세에 부르신다. 이땅에 있는 바로왕을 만나게 하던지, 아니면 저 세상에 있는 바로왕을 만나게 하던지 만나게 하신다. 나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놀랄 필요가 사실 없는건데 모르면 당황하고 놀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실 부질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 집중하는 것이 교회생활이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실제적인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그 때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교회생활을 처음하면서 놀라게 되는 서론 말씀이다.
1.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복음을 말씀하셨다.
▶ 본론을 말씀드리겠다. 첫번째이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은 두껍고 내용은 많은데 딱 한 가지 이외에는 결론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이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오늘 성경본문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구약시대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즉,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구약시대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주시기로 했는데, 그분이 오시기 전. 그걸 구약시대라고 한다. 그분이 오신 후를 신약시대라고 한다. 그분이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이 대언자, 선지자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그 구원자가 오신 것이다. 그걸 신약시대라고 한다. 왜 계속 그분에 대해서 말씀하셨을까? 왜 계속 우리에게 복음만 말씀하신 것일까? 인간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수준으로 보게 되면 피조물은 구원받지 못한다. 너무 연약하고, 무능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존재가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능력을 주실 자를 보내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연히 우리에겐 기쁜 소식이고, 좋은 소식이고,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로 복음은 무엇이냐? 우리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분을 보내시겠다라고 하는 뜻이 복음이다. 구약은 그분이 오실 것이다. 신약은 그분이 오셨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간절히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여러분도 그분들처럼 간절히 기다리시는가?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구약시대 성도들처럼 메시아가 다시 오시기를 재림하시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 성경의 몇가지 구절들을 소개하겠다.
▶ 오실 그분을 이 말씀을 붙잡고 기다렸던 것이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누구냐? 세상을 미혹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는 사단의 머리를 깰 분으로 예언되어 있다. 또 출애굽기 6:14 인류를 구원하실 방주로 예언되어 있다. 창세기 22:18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예언되어 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또 출애굽기 3:18에는 희생제사 즉,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그리스도로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남자와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동정녀로 부터 태어날 것이다 미리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9에는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근데 그 아이가 왕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를 설명하고 있다. 놀라운 부분 중에 하나가 “그 아이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다”라고 되어 있다. 아이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이해 못 할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감추고 싶어하는 성경구절이다.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같은 이사야에 보시면 53장에 또 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음당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시편 22편에는 모든 뼈가 어그러졌다고 되어 있다. 여성분들이 출산할 때 큰 고통을 수반한다. 뼈가 다 늘어나서 아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이다. 예레미아 23장에서는 때가 되면 다윗으로 부터 한 의로운 가지가 나온다고 되어 있다. 미가서에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얘기하고 있다. 스가랴서 9:9에는 나귀를 타고오실 것이라고 다 예언되어 있다. 앞으로 오실 분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서 전하는 말씀을 늘 붙잡고 기다린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이 그분이 오신 것이다.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여러 선지자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예언됬던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셔야만 되는 분이 오셨다. 그 온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오늘같은 성탄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거룩한 탄생”이란 뜻이다. 그분이 실제로 이 땅에 오셨다. 인류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다라고 한 날을 기리는 것이다. 첫번째로 내가 정말 이들 처럼 신앙의 인물들 처럼 내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가 점검하는게 첫번째이다. 먹고 살기 바뻐서 그러지 못했다면 오늘 돌아가서 깊은 기도를 하시라. 정말로 주님을 연인이나, 배우자나, 가족보다 더 간절히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가 돌아보면서 그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면 응답하신다.
2. 마지막 시대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이시다.
▶ 여러분 성탄절, 크리스마스라고 하게 되면 기억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아기 예수, 마굿간, 목동, 목자, 동방박사, 헤롯왕,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 여러분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지식과 정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예수님에 대한 성탄절에 관한 다른 일곱 가지 지식을 알려드릴 테니깐 평생 기억하시길 바란다. 그게 오늘 히브리서 1장에 나온다. 기다린 예수님에 대해서 일곱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복음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만물의 상속자란 말이다. 이유가 있다.
▶ 2절에 보시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벌써 두가지 내용이 나온다. 만유의 후사라는 얘기는 모든 만인과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앞에 통일되게끔 되어있단 말이다. 죽었던 사람이나 천국간 사람이나 전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정리정돈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날이 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만물이 그분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분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만들어진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이 창조 주인이기 때문에 다 상속받는게 맞다. 기억하시라. “아 만유의 후사고 창조주이시구나”
▶ 3절에 보시게 되면 이게 나온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라는 말이다. 놀라운 분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우리와는 다른 거룩한 분 구별된 분이라는 뜻이다. 이유가 바로 그분은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분의 빛과 그분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셋째, 넷째를 기억하시라. 아기 예수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영광의 빛이시고, 하나님 형상의 본체이시다. 이걸 영원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가진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만물의 창조주시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 본체이시다.
▶ 일곱 가지 중에 네가지를 했다. 나머지 세가지다. 잘 들어보시라.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말씀으로. 태양이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우주의 별이 부딛히지 않고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딱 잡혀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신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딱 붙잡고 있는 것이다. 심장의 박동은 뛴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 하시면 심장은 멈춘다. 위와 장이 연동 운동을 계속 소화 때문에 한다. 혈액이 순환된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은 이런 것이구나”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엄청나구나 이 뜻이다.
▶ 그리고 “죄를 정결케 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다. 과거의 어떤 죄, 모든 죄를 전부 다 처리하신 것이다. 여러분 죄를 진 것이 있는가? 없는가? 나도 엄청 많다. 그 모든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높은 곳에 가장 최상자에 위엄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무슨 뜻인가? The highest 이 세가지를 다 합하게 되면 무엇인가? 말씀, 용서, 왕 그리스도라는 얘기다. 말씀은 선지자다. 죄를 사하는건 제사장이다. 가장 높이 앉으신 분은 왕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을 합해서 그리스도라고 한다. “아 그분께서 선지자이시구나! 아니 영원한 선지자이시구나! 그분이 참된 제사장이요. 만왕의 왕이시구나. 이 일곱 가지 부분을 바울이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이걸 보내준 것이다.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들 이 비밀을 여러분이 갖고 가셔야 한다.
▶ 내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게 되면, 교회에 그냥 못 들어온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엉금 엄금 기어 올 수 밖에 없다. 너무나 감동되고, 죄송하고, 고맙고, 울면서 기어 들어와야 한다. 사실 교회에. 나는 그러고 싶은데, 여러분 때문에 못 그런단 말이다. 드디어 김목사가 돌았구나. 기어 들어오면 여러분이 돌았다 그러지 않겠는가. 멀쩡하게 양복입고서 기어 들어오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 교회는 맛이 갔구나 그럴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누르면서 나는 찬양할 때 일부러 크게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마음이다. 우리 어머니가 계시지만 내가 음치인걸 어머니가 아신다. 나는 맨날 초등학교 때 음악이 양, 가, 양, 가였다. 그럼에도 우렁차게 부를려고 애를 쓴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두번째는 반주자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 대부분 찬양시간에 성도들이 찬양을 안 한다. 강요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반주자가 반주를 할 때 찬송을 안 하면 힘이 다 빠진다. 함께하는 형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분들이 집에서 요리를 하는데, 요리를 잔뜩 준비해서 애를 썼는데, 먹지도 않거나, 먹으면서 퉤퉤 거리거나, 깔짝 깔짝대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겠는가 안 좋겠는가? 그리고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내가 우렁차게 찬양을 한다. 여러분 중에 다음주에는 엉금 엉금 기어 올 수 있는 분들이 생기길 바란다.
▶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이런 일곱 가지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면 매일 성탄절이 되는 것이다. 매일 주일이고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길 바란다. 그분이 바로 나를 찾아오셨구나. 그분이 나를 구원시켜 주셨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분의 품으로 안으셨구나. 그 사실을 보게되면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인걸 알게 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안에서 아브라함고 함께 만유의 후사가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승리하기기 바란다.
▶ 마지막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억한다고 했다. 성경에는 그분이 오신 직접적인 이유를 몇가지 밝히고 있다. 요한일서 3:8에 보시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다. 만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마귀 피조물의 일을 깨뜨린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우리를 갇히게 하는 운명과 팔자. 우리가 당할 수 밖에 없는 재앙과 심판. 여기서 완전히 해방시켜 버린 것이다. 이 마귀의 궤계를 깨뜨려 버린줄 믿는다. 여러분은 염려하지 말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끝내셨구나. 마귀의 일을 박살냈구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오신 일을 깨닫고 매일 성탄절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 두번째 이유가 있다. 마가복음 10:45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어느 정도로 우리를 섬기시는가. 우리의 필요, 우리의 꿈을 이루시기까지 섬기신다는 말이다. 나를 향하신 하늘의 계획을 이루기까지 섬기실 줄로 믿는다. 여러분은 절대 미래를 두려워 하지말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믿음을 회복하시길 바란다. 지금은 정말로 미약하고 보잘것 없지만, 반드시 나를 창대케 하실 것이다. 나를 치유하고 회복할 뿐만 아니라. 재창조 할 것이다. 사람도 바꿀 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도 뒤집을 것이다. 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시기 때문에 그렇다.
3. 성탄절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우리가 알고 감사하는 날이다.
▶ 마지막이다. 누가복음 4장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 왜 임했느냐?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아시다시피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은 탁월하시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왕들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이 나라를 건설하고, 구재사업도 하고, 세계를 통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아니하고, 복음만 전하다 가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일, 복음 전하는 일을 조금만 동참하게 되면, 하나님이 난리가 나신다. 나는 재앙당하고 지옥 심판에 빠져야 하는데, 그걸 구원해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주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를 주신다. 여러분이 행복을 진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하나님이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시구나. 나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시분초 추적하고 계시구나. 내 피부보다, 내 호흡보다, 더 가까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이 있다.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지만, 이상한 희열이 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해서 감사와 믿음과 참된 회복하는 주인공 되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비밀을 평생 기억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