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말, 말씀
1열왕 19,19-21; 마태 5,33-37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2024.6.15.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요한 1,1).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는(요한 1,14)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빛을 주시어(요한 1,4) 생명의 빛을 통해 동물에게는 소리를, 사람에게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진화시키셨습니다. 소리에는 단순한 신호만 있고, 말이라야 비로소 의미가 생겼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하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습니다. 요한의 ‘소리’는 제자들의 ‘말’이 되어 말씀이신 예수님과 공생활 동안 내내 소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어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말의 진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사람들도 반복합니다. 이것이 소리와 말로 본 인류 역사입니다. 이제 좀 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해 낸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합니다. 이 의사소통의 결과로 개인은 자기 존재를 의식할 수 있게 되고, 인류는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속에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건강과 위생, 치안과 안보 같은 생활의 기본 필요는 물론이고, 인류가 깨우쳐 온 지혜를 후대에 전달하는 교육과 문화, 학문과 예술, 교통과 통신, 생산과 상업 같은 필수적 필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망원경으로 보면 물질문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정신문화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기 시작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 말씀을 처음으로 알아들은 아브라함 이래로 수많은 예언자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류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알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하느님의 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 그리고 이 말을 표현하는 글의 진실성,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언어의 진실성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미 거짓 증언의 죄악성에 대해서 십계명이 경고하고 있는 바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더욱 철저하게 함부로 맹세하지도 말고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이를 따라서 교회도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에 더해서 교회의 언어는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언어의 오염 현상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 저널리즘의 타락 현상입니다. 신문과 방송의 언론인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워낙 없다보니 ‘기레기’니 ‘기더기’ 하는 멸시적 호칭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입니다. ‘기레기’란 오보를 양산하는 기자 쓰레기란 말의 약칭이고, ‘기더기’란 기자 구더기의 합성어로서 말을 오염시키는 구더기 같은 존재라는 멸칭입니다. 이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은 언론인들이 진행하는 방송이나 제작하는 신문에서도 다루는 기사들이 온통 죄와 관련된 뉴스들입니다. 빛과 어둠으로 분류하자면 어둠의 기사들을 다루는 것이 일상의 언론 환경입니다. 주류 언론으로 한때 여론을 주도하던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Legasy Media)’는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하고 유투브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 미디어에 밀려 나버렸습니다. 아마도 21세기 초반인 현재의 한국 사회 언론은 후대에 타락한 언론 환경의 교과서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의 주된 취재원이 정치인들과 경제인들과 법조인들과 교수들로 보이는데 이들도 개인적으로는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들일 터인데도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들은 온통 죄와 이익을 위한 단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또 아무리 보아도 선과 빛의 구석이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말이 품위를 잃어 버렸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개인의 각성이 언어의 진실성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가 오염되면 사회의 정신적 통합이 심각하게 지장을 받게 됩니다. 한 개인의 인격의 성숙 정도에 대해서도 그가 쓰는 언어의 진실함에 좌우되지만, 한 집단의 경우에도 그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의 진실성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과연 공동선에 기여할만한 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글로 표현되어 교회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도 오염되어 가는 세상의 언어를 정화시키는 역할도 자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에 바탕한 의사소통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바탕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에서 세상과 화해하고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 속에서 걷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서 화해의 도구로 우리를 쓰실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강생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비로소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교회만의 전통적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하면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여 결국 외면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속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먼저 세상의 그 속된 환경을 성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방향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글을 진실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귀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십자가 죽음을 겪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도 현재적 사실을 공유함에 있어서 진실성을 담보하는 일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중차대한 관심사여야 합니다. 교회의 언론과 사목자들의 강론은 하느님의 언론으로서 진실한 말과 글의 도구여야 할 것도 물론입니다. 타락해가는 사람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잔잔한 바람 소리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생애 말년에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이르시는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이 수행해 온 예언자 역할을 물려줄 후계자를 고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눈 여겨 보고 자기 겉옷을 걸쳐 줌으로써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1열왕 19,19 참조). 이 행위가 엘리사를 예언자로 부르는 ‘말씀’이 되어 농사를 짓던 그를 엘리야를 따라나서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그 당시에 예언자로서 명성을 떨친 엘리야라고 해도, 하느님의 기운이 그에게 함께 하지 않았다면, 엘리사가 자신의 일생과 운명을 걸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직자가 자신의 사제 성소를 결심하거나,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 성소를 또는 평신도들이 자신의 혼인 성소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그 과정을 생각해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소리와 말의 차이는 의미 여부에 있고, 말과 말씀의 차이는 실행력 여부에 있습니다. 우리가 발설하는 사람의 말이 말씀이 되어 실행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진실에 기초하되 진리를 향해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엘리야처럼 세례자 요한도 그 시대의 엘리야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마르 9,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와 같은 반열의 예언자로 인정하셨지만, 실제 엘리야와도 영적 통공을 이루고 계셨습니다(마르 9,4 참조).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얼굴이 변하실 때의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말은 말씀으로 진화되어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미래를 창조하는 실행력이 있습니다. 그 실행력의 백미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일컬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말씀으로 진화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실행력을 갖추려면,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해야 합니다. 우리네 인간 이성이 하느님의 영성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 의미 없는 소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말이 되려면 진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에 바탕한 우리네 말이 실행력을 갖추도록 하자면 우리가 내뱉은 말대로 실제 행동함으로써 말씀이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함께 사는 이들과 진실하고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오늘이 분단 이후 남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서 합의한 ‘6 15 공동 선언’이 온 겨레에게 발표된지 24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한반도 남측의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북측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전문을 인용합니다.
남북공동선언문 (남측 발표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