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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 이규승입니다.
# 살며 생각하며(강석우 영화배우)
* 복수 대상 없는 행복한 삶
문화나 언어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언제나 변한다. 문화와 언어는 아무래도 서서히 변하기에, 사라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 학창시절, 골목골목마다 지금의 편의점만큼이나 많던 만화방은 물론 자취하는 친구의 방에 대여섯 권에서 수십 권씩 쌓여 있는 무협지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협지의 내용은 대개 악당들에게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강보에 싸인 아기가 유모에게 안겨 피신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구사일생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목숨은 건지나 한쪽 팔을 잃게 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 아이가 외팔이 검객이 되어 복수한다는 권선징악 스토리였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진 ‘무협지’, 그리고 ‘복수’라는 말! “무덤까지 따라가서 반드시 복수할 거야”라며 핏줄 선 눈동자로 어금니를 꽉 물던 드라마에서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에서 ‘복수’라는 단어는 왜 사라졌을까? 이제는 우리들 사이에 복수할 일이 안 생겨서일까, 아니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면서 주먹을 휘두른 결과 그 값이 너무 크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서일까. ‘그럼 법대로 해!’ 분기탱천해서 자리를 박차며 뱉고 가는 그 소리는 알고 보면 현명함의 극치였다. 이제는 각자 주관적인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세상에서 법의 판단으로 해결하려는 삶으로 바뀌고 있다. ‘법대로’를 우리는 ‘정이 없다’ 했지만,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개인이 ‘직접’ 응징하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복수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니까.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아름다운 이름의 청계천에 잔인한 복수의 역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옛날 옛날 어느 무더운 날, 말을 탄 장수가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우물가에 있는 처녀를 보고는 물을 달라고 했고, 아리따운 처녀는 이내 바가지에 물을 떠서 거기에 버들잎까지 띄워 주었다. 그런데 목이 마르고 지친 장수는 급한 마음에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웠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이에 그 처녀가 “더위에 급하게 물을 드시면 몸이 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예를 갖추어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 고려 말 이성계가 황해도 谷山(곡산)을 지나던 때의 이야기다. 훗날 ‘버들잎 사연’을 밝히라는 정조의 명으로 곡산 부사로 있던 다산 정약용이 조사해 기록한 ‘여유당전서’에 실려 알려진 이야기다.
그 아리따운 ‘버들잎 아가씨’는 후에 태조 이성계의 사랑을 한없이 받는 조선조 초대 왕비인 神德王后(신덕왕후)가 된다. 이성계에게 咸興(함흥)에는 향처가 있고 開京(개경)에는 경처인 康氏(강씨) 부인이 있었는데, 나라를 세우자 강씨는 조선 최초의 왕비인 顯妃(현비)로 책봉되었다. 향처의 5남이자 개국 공신인 방원은 자신이 세자로 책봉된다고 믿고 있었으나, 신덕왕후의 둘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어린 왕을 세워서 권력을 휘두르려는 정도전의 야심 찬 계략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현비 강씨는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 태조는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데 신덕왕후의 내조가 실로 컸고, 政事(정사)에 임할 때도 충고하며 돕기를 부지런히 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니 어진 보좌를 잃은 것 같다”며 몹시 슬퍼하며 경복궁 가까운 곳에 능을 만들고 貞陵(정릉)이라 했고, 수호사찰인 흥덕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신덕왕후의 명복을 빈 후에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세자 책봉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을 살해했고, 이성계 사후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를 이어간다. 성안에 능을 둘 수 없다며 정릉을 성 밖 경기 양주군 성북면(현 성북구 정릉동)에 옮기라 했다. 원래 능이 있던 자리는 貞洞(정동)이란 지명으로 역사의 흔적만 남아 있다.
방원의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는 집요했다. 파헤쳐진 능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를 놓는 데 써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고,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제사 지내게 했다.
‘태조 때 중전의 자리에 앉은 정당한 왕비인데 신하들이 예를 잘못 의논했고,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태조가 사랑한 왕비를 언제까지 황폐하게 방치할 것인가.’
1669년(현종 10년)에 우암 송시열은 신덕왕후에 대한 조치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10월 1일 조선 초대 왕비 신덕왕후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실로 26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정릉 골짜기에 능을 봉하고 제사를 지내던 날 소낙비가 쏟아져 계곡에 물이 가득 찼고,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권되던 날에도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백성들은 이 비를 ‘洗願雨(세원우)’, 곧 원통함을 씻어주는 비라고 했단다.
청계천 맑은 물길을 거슬러 걷다 보면 다동과 서린동을 이어주는 돌로 만든 오래된 다리, 복수심에 당대 최고의 석공들이 새긴 예술적인 문양의 돌로 거꾸로 쌓은 광통교를 만나게 된다. 신덕왕후 강씨의 후손인 나는 다리 밑 기둥으로 나뉜 세 칸 통로를 보면서 武將(무장) 이성계에게선 보기 힘든 온화한 모습과 그가 진실로 사랑한 신덕왕후의 환한 얼굴을 그려 본다. 그리고 햇살을 덜 받는 한쪽에는 무뎌진 복수의 칼을 쥐고 있는 방원의 모습이 보이는 듯.
청계천 흐르는 물에 비친 구름을 본다. 아! 나는 어느새 복수하고 싶은 누구도, 응징하고 싶은 누구도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구나!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