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전까지 즉조당과 더불어 석어당은 경운궁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석어(昔御)라는 이름처럼 옛날에 임금님이 머물던 곳이다. 사실 선조 당시에는 딱히 이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어당이란 이름은 이후 영조가 붙인 것이다. 본래 즉조당에 석어당이란 현판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건물이 석어당으로 불리어졌다. 여하튼 석어당은 즉조당과 더불어 경운궁의 핵심공간이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당시에도 즉조당과 석어당 영역은 임금의 침전 공간이자 업무공간이었다. 이 부근에 있던 청목재, 대유재에서 사신 접견이나 조회와 같은 업무를 보고, 즉조당-석어당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 화재 전 모습을 보면, 즉조당과 석어당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두 전각은 서로 유기적으로 역할분담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환궁 이후, 경운궁이 법궁으로 고착되면서 궁역이 점점 넓어진다. 그래서 즉조당-석어당을 중심으로 했던 경운궁의 모습도 많이 달라지지만, 여전히 이 구역은 경운궁의 가장 신성한 곳이자 상징적인 공간이다. 1899년 10월에는 경복궁 다경합(多慶閤)을 헐어서 옮견 온 재목으로 석어당 권역을 확장하고 행각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는 석어당은 별루 눈에 띄는 역할이 없다. 하지만 석어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징성이 크다. 선조가 머물던 곳이며, 인목대비의 거처이자, 인조반정 때 광해군이 옥새를 넘겨주던 곳이었다. 그 만큼 이곳은 신성한 공간로 여겨졌을 것이다.

경복궁 다경합(多慶閤)을 헐어와 정비공사를 한 이후의 모습이다. 석어당 부근의 행각을 설치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1902년 즉조당 옆 덕경당을 관명전으로 승격시킨 당시의 모습이다. 이 공사 당시 석어당 권역도 일부 정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달리 석어당 남쪽에 담장이었던 곳이 행각으로 바뀌었다.
석어당은 궁궐 전각 중 몇 안 되는 중층구조로 되어있다. 본래 중층구조의 건물은 단층구조보다 위엄이 있고 웅장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용도로 사용된다. 예로 궁궐의 정전(正殿)이나 외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노출도가 높은 궁궐의 정문이나 도성의 문루는 중층구조로 지어진다. 특히 궁궐의 정문이나 도성의 문루는 외부인들에 대한 노출도가 높기 때문에 국왕이나 지방 수령의 권위를 보여주고 제대로 인식시키기 위해 웅장한 중층구조로 많이 지어졌다. 이런 상징적인 기능도 있고 또한 중층구조는 실용적인 목적에서도 지어졌다. 예로 연면적을 확보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중층구조와 같이 상부공간을 활용하게끔 하는 경우다. 석어당 같은 경우는 아마 상징적인 용도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중층구조로 지어졌을 것이다. 경운궁은 위치상 도심지역에 있기 때문에 공간확보에 곤란한 점이 많다. 그래서 석어당과 같이 중층구조의 건물을 만들어 공간의 효율적 이용을 도모하지 않았나 싶다. 그 근거로 석어당은 정전과 같이 통층구조로 되어있지 않고 1층, 2층 구조의 각층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외부 과시용으로 중층구조를 채택했다면 굳이 내부를 각층구조로 만들어 실용성을 도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 정전과 문루 외의 건축물 중 중층구조의 예가 없다. 다만 동궐도를 보면 창덕궁 징광루가 석어당과 같이 중층구조로 되어있다. 다만 석어당과의 차이가 있다면 징광루(澄光樓)는 정전을 이건하여 지었기 때문에 중층구조가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본래 인경궁(仁慶宮)의 정전이었던 홍정전(弘政殿)을 옮겨짓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중층구조가 되었다. 그래서 정전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기붕도 청기와로 덮여있고 단청도 상당히 화려하다. 홍정전 건축 당시에 근정전 단청의 예를 따랐다고 한다. 여하튼 징광루는 상징적 중층구조의 정전을 옮겨지었기 때문에 석어당과 같은 중층구조이더라도 애초에 실용성을 염두에 두었던 석어당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창덕궁 징광루(澄光樓)는 석어당과 같이 궁궐의 몇 안되는 중층구조의 건물이다.(정전과 궁궐 문루를 제외하고) 특히 이 건물은 인경궁(仁慶宮)의 정전인 홍정전(弘政殿)을 옮겨 지었기 때문에 중층구조를 이어받았다. 청기와로 덮여있고 단청도 화려하다. 위층이 징광루이고 아래층은 경훈각(景薰閣)이다. 통층구조의 정전을 옮겨지었더라도 용도가 달라졌기 때문에 각층구조로 지어졌다.

일제 때 찍은 징광루 실물 사진이다. 중층구조임을 엿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1916년 창덕궁 화재 때 소실되었고 이후 단층구조로 경훈각만 새로 지어졌다.
안타깝게도 선조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석어당은 경운궁 대화재 당시 즉조당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는 이후 중건한 것인데 중건 당시, 화재 전 모습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중층구조로 짓고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고 한다.
첫댓글 정겨운사람님께...
하자하자님의...
잡초가 무성하고 성곽이 파괴된 흑백사진을
툭 던져 놓고 그게 중국황제가 사는 곳인가...라는 것이.
이게 논리적으로 추측인가요...
그런데...님은 다시.
조선의 잡초가 무성한 궁궐 사진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왜늠이 만든 세트장으로 묘사하던군요.
이게 논리적인 것일까요...왜 저렇하지?
내심 이해가 안되지만...뭐.
시대적 배경과 사진(작가의 의도)의 중요성.
사진에 대한 분석은...
시대(배경),목적,작가,의미,연관성(나라,도구,소재,인물 등)
여러가지 구체적 상황과 관련 사진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되는데...
뭔가 다른 게 있다는 식으로...넘어가거나
다른 주제로 바꿔버리더군요.
그렇게 느꼈습니다...그렇다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도 우스운 거고...에혀~
덕수궁과 경복궁은...
우선 인용하기위해 퍼 왔습니다.
님들의 자료와 비교하시고...
주장 하실 것이 있으면 하십쇼.
http://cafe.daum.net/sisa-1/f8lD/761
대륙에 있었던 우리 조선의 황궁
http://cafe.daum.net/sisa-1/f8lD/763
<조선부>를 쓴 동월이 본 조선은 고려와 얼마나 다른가?
http://cafe.daum.net/kor-uni/90cU/5
이것이 18C 조선(朝鮮)의 서북방 영토 경계다.
http://cafe.daum.net/sisa-1/dqMu/25664
대륙조선사의 실체...지명위치
주장하세요...흐미.
늘 하던 방식?
제가 올린 것은 읽지도 않음인게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