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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답사기(南原 踏査記 2024. 7. 14)
광주민학회 송 태 종(宋泰鍾)
요사이 장마철이어서 답사하는 날에 비가 올까 걱정을 하였고, 또 오늘 일기 예보가 남부지방에 비가 온다고 하여 우산을 챙겨 답사에 나섰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에는 흰 안개가 일어 찌푸린 하늘로 솟아 합쳐지면서 더욱 하늘을 흐리게 한다.
雨氣朝天踏査行(우기조천답사행)
散灰山霧淡雲平(산회산무담운평)
三年旱魃望晴日(삼년한발망청일)
不患隨心出發情(불환수심출발정)
비 올 것 같으나 답사를 떠나니
회색의 산안개는 하늘 구름 합해진다.
삼 년 가뭄에도 맑은 날을 바라듯이
근심 없이 마음 따라 출발하였다.
다행 비는 소강상태(小康狀態)다. 10시쯤 강천휴계소에 쉬고, 10시 40분쯤에 남원(南原)에서 처음 찾은 곳이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南原市立金炳宗美術館)이다. 아무리 시대 변했다고 해도 고유 명칭은 한자 표기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 전북 남원시 함파우길 65-14 에 있는데 가까운 언덕에는 춘향타워에 늘씬한 모노레일이 있고, 멀리 산 위에 우주 천문대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산으로 둘러싸인 미술관과 배경인 듯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 버스는 정문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고 언덕 위의 좁은 주차장에 내려 작은 언덕을 넘어 미술관으로 갔다. 멀리 보이는 미술관은 창문이 없는 네모 상자를 멋있게 포개 놓은 듯하여 그 멋은 표현이 어렵고, 앞 정원은 중앙 보도의 좌우로 모두 다섯 층의 장방형의 논 모양의 검은 수조를 깔아놓아 잔잔하게 물이 고여 흐르고 있어, 보도를 걸어서 미술관으로 가는데 물에 반사된 광경은 황홀 지경이었다. 또 2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유일한 창문이 있는데. 앞에 조그마한 동산의 소나무와 확대한 광장과 선경을 이루고 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대를 주제로 한 작품과 조선백자 국보 전시가 있어 구경하였다.
一人意志大何如(일인의지대하여)
變化無窮天地居(변화무궁천지거)
騷客覽看深感動(소객람간심감동)
色光妙味自然舒(색광묘미자연서)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가?
변화가 무궁한 천지가 모여있네,
내 또한 둘러보고 감동 받으니
색과 빛의 묘미를 자연에 펼쳤네.
위키백과에서 김병종 씨에 대하여 알아본다.
[단아(旦兒)김병종(金炳宗, 1953년 ~ ) 대한민국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자적 화풍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서울대학교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9년 전국대학미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과 희곡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석사 과정 이후인 1983년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 1985년에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의 교수로 부임한 뒤 2001년에는 미술대학장과 서울대학교 미술관장, 조형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92년~2001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8년 36년간 봉직한 서울대학교 퇴임식에서 예술계 대학교수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표 연설을 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및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중략-- 2018년 3월, 전북 남원에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종략--
佳景留心表現難(가경유심표현난)
不肖能力每時嘆(불초능력매시탄)
此書後日能參考(차서후일능참고)
不足應知一覽看(부족응지일람간)
아름다운 경치는 마음에 담고 표현이 어려우니
불초한 능력인 나는 매시간 감탄한다.
이 글은 후일에 참고할 것이니
부족함을 알지만 한번 둘러보노라.
50m 정도 아래에 별관이 있어 내려가니 교육관인 듯하고 뜰에 대형 요지경 설치로 비춰보지는 여러 개의 영상이 인상적이었다.
11시 45분 경 광한루원(廣寒樓苑)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옛날 광한루(廣寒樓)가 아니라 크게 확장하고 정문도 도로변으로 하여 이름도 광한루원(廣寒樓苑)이라 한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 같은 담을 따라 걸어가니 호랑이 석상 두 마리가 좌우에서 버티고 있는 정문인 솟을대문이 있다. 현판이 청허부(淸虛府)라 했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썼으니 아마 일중(一中)이 살아계실 때 건축된 듯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잔디밭 너머 건물이 보인다. 다가가서 보니 연못가에 정자각 모양의 우람한 완월정(玩月亭)이다. 달이 떠오르면 정자에 올라 앞 연못에 비치는 달을 감상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안내 간판을 읽어 본다.
「완월정은 달나라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전통적 조선 건축양식이다. 완월정에서는 남원의 민속행사인 춘향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玩月亭中照月時(완월정중조월시)
衆仙傾酒詠吟詩(중선경주영음시)
每年地上姮娥誕(매년지상항아탄)
姿態娟娟反影池 (자태연연반영지)
만월정에 둥근 달이 비칠 때에는
신선들 술 마시며 시를 읊었으리
매년 이곳에서 항아가 탄생하여
곱고 고운 자태가 연못에 비친다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의하면 「지금의 광한루는 1170년(의종 24) 전중감(殿中監)이었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뒤, 그의 후손 황감평이 이곳에 일재(逸齋)라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때부터 유래된다.
광한루의 시초는 조선 세종 원년(1419) 황공유의 아들인 황희(黃喜)가 한때 남원(南原)에 유배(流配)되었을 당시, 일재(逸齋)의 옛터에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각(樓閣)을 지어 산수(山水)를 즐긴 것에서 비롯된다.
1444년(세종 26)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의 아름다움을 월궁(月宮)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1461년(세조 7)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누원(樓院) 일원(一圓)에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호수(湖水)를 만들었다.
1582년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부임(赴任)하여 또다시 은하(銀河)의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방장섬에는 녹죽(綠竹)을 심었는데, 영주섬에만 영주각(瀛洲閣)을 건립하고 섬과 섬 사이에는 사다리꼴 다리로 연결하였다. 이로써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천체(天體)와 우주(宇宙)를 상징하는 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1607년(선조 40)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1639년(인조17)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영주각을 재건하였다.
1869년(고종 6) 무렵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누의 북쪽에 다락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놓았다. 1925년 수리 공사 때에 누의 동쪽 구석에 직실(直室)을 마련하였다.
1963년에는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1964년에는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1965년에는 영주각을 단청하고, 1969년에는 호수를 확장하고 수중 누각 완월정을 세우는 한편, 지금까지 북쪽을 정문으로 써 오던 것을 후문으로 삼고 따로 남쪽에 정문을 신축,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써 걸었다. 1983년에는 다시 경역을 확장하여 누원 주변을 정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광한루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춘향전」으로 더욱 유명하여졌는데, 1931년에 지어진 춘향사에는 ‘만고열녀춘향사(萬古烈女春香祠)’라는 현판이 걸리고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누원에는 호수와 오작교(烏鵲橋), 삼신산(三神山), 춘향사(春香祠), 충혼각(忠魂閣), 남원국악원, 수중 누각인 완월정(玩月亭)과 광원 광한루(보물, 1963년 지정 등이 펼쳐져 있다.
누원의 북쪽으로는 교룡산(蛟龍山)이 우뚝 서 있고, 남쪽에는 금괴같이 보배롭다는 금암봉(金巖峰)이 있으며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은하수에 가로막힌 견우성과 직녀성이 칠월칠석에 만난다는 오작교를 가설하였으며, 배를 띄워 상한사(上漢沙)라 이름하고 베틀바위를 호수에 넣어 지기석(支機石)이라 불렀다. 오작교에는 4개의 궁륭식 무지개 구멍이 있어 양쪽 호수의 물이 통하고 있다.
광한루의 전 · 후면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새로 마련한 남쪽 정문 문루에는 청허부(淸虛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玉京 : 달나라의 서울)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부’의 현판이 걸려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있으며,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상징한다.
광한루 현판은 신익성(申翊聖)이, 호남제일루, 계관, 영주각의 현판은 1855년(철종 6) 부사 이상억(李象億)이 본관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으며, 이 중 ‘계관’ 현판은 동학운동 때에 강대형(姜大炯)이 다시 써 걸었다.」
자세한 설명(說明)이어서 부언(附言)을 할 필요(必要)가 없어, 느낌만 간직하려고 누원을 둘러본다.
오작교(烏鵲橋)에 위에서 광한루(廣寒樓)를 바라본다. 난간(欄干)이 없는 석교(石橋)를 사람들은 조심조심 건너고 있다. 마치 견우(牽牛) 직녀(織女)라도 되는 기분(氣分)으로---
銀河橫築四虹橋(은하횡축사홍교)
烏鵲留名數鯉嬌(오작유명수리교)
織女牽牛逢落淚(직녀견우봉낙루)
只今傳說眼前邀(지금전설안전요)
은하를 가로 쌓은 네 무지개 다리
오작은 이름만 남기고 잉어가 교태부린다.
견우 직녀가 만나서 눈물 짓던
지금은 전설로 눈에 어른거린다.
웅장(雄壯)한 광한루(廣寒樓)를 바라보며 춘향(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天帝玉京如此雄(천제옥경여차웅)
銀河岸上偉容宮(은하안장위용궁)
春香柳裏鞦韆態(춘향류리추천태)
李夢龍魂分散蒙(이몽룡혼분산몽)
천제의 서울은 이와 같이 웅장하니
은하수 언덕에 위용 자랑 궁전이네.
춘향이 버들 속에 그네 타는 자태에
이몽룡은 혼이 빠져 버렸단다.
광한루 앞뜰에 물로 들어갈 듯한 커다란 자라석이 있고, 옆의 표지돌 설명은 알아보기 어려우나 대개 이런 뜻이다.
“한서(漢書)에 쓰여 있기를 발해(渤海)에 큰 자라가 있는데 삼산(三山)을 질 수가 있다는 구절(句節)이 있어서 이를 연상(緣想)하여 누앞 은하수(銀河水)에 조성된 삼산(三山)을-- 선조 15년에 ------- 화재예방-- ”운운
구름다리를 지나서 구름다리로 연결된 삼신산(三神山)으로 들어간다. 마치 신선(神仙)이 된 기분이다. 방장산(方丈山)에서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 1913~1993) 글씨의 아담하고 곱게 단청된 방장정(方丈亭)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에 아름드리 고목이 용트림을 하고 있고, 봉래산(蓬萊山)에는 당시에 심었다는 죽림(竹林)이 지금도 우거졌으며, 영주산(瀛洲山)에는 영주각(瀛洲閣)이 묵직한 현판에 단청이 화려하고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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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人幸運爲神仙(범인행운위신선)
方丈淸風老樹邊(방장청풍노수변)
靑竹蓬萊塵俗遠(청죽봉래진속원)
瀛洲華閣感心先(영주화려감심선)
평범한 사람이 행운으로 신선 되니
방장산 맑은 바람 늙은 나무에서 맞고
봉래산 푸른 대에 세상일을 잊었으며
영주산 영주각에 감명을 받았도다.
영주각(瀛洲閣)에 올라보니 많은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모두 광한루육백주년기념(廣寒樓六百週年紀念) 시회(詩會)의 시로서 기록만 했다.
廣寒樓 廣寒樓六百週年紀念設詩
刱建斯亭六百年 竹林楊柳繞西東 創建斯樓六百年
翠飛樣相最超然 畵閣飄然在水中 依稀景觀思悠然
鵲橋坦坦橫銀漢 此地登臨何最好 三山曾歷多烟月
湖水滔滔帶蓼川 秋多明月履靑風 河水近因帶蓼川
幽苑已知遊巨擘 辛未夏學岡金瑞圭 秘景遠移淸淨府
三山將異降神仙 鵲橋幾渡往來仙
龐翁昔日遺珍蹟 誰將玄妙邯鄲夢
烈女春香共暢傳 別有風流此世傳
杜齋 尹烈相 戒陽 朴
南原廣寒樓
廣寒創建昔何年 韻柳疎篁小水東 樓生六百有餘年 憶昔三韓定鼎年
君有聖慈臣有賢 飄然仙閣出塵中 重創隨時尙屹然 南州雅府更依然
三千國土干城守 襟懷灑落登軒日 此地長臨閒日月 西呑漢界蛟龍嶽
六百文顯竹帛傳 如坐三淸上界風 別天從古好山川 東接扶桑蓼水川
芙蓉堂下慕光霽 大山 宋寅萬 鄕襲良風眞樂土 堪與 ?書無垠界
烏鵲橋邊尋偓佺 人能淳俗卽神仙 ? 流香案盡神仙
風景南湖如此足 外來文化嗟多變 山河第一廣寒殿
停驂誰不聳比肩 感彼南原古事傳 天作靈區萬歲傳
昌寧成百曉 溪堂 朴金奎
홍교(虹橋)를 통해 영주각(瀛洲閣)을 나오면 ‘충혼비(忠魂碑)’ 곁에 ‘충혼불멸(忠魂不滅)’이라는 비(碑)가 있다. 이 비(碑)는 한국동란(韓國動亂) 전후(前後)로 공비(共匪)로부터 희생(犧牲)된 청년단원(靑年團員)과 민간인(民間人) 286명의 영혼(靈魂)을 기리는 비라고 한다.
移天仙境覽看中(이천선경람간중)
意外忠碑疏忽功(의외충비소홀공)
民族相爭悲劇大(민족샹쟁비극대)
當時回想不忘窮(당시회상불망궁)
하늘을 옮겨 놓은 선경을 구경하면서
의외로 충혼비는 소홀히 보는구나
민족이 서로 싸운 커다란 비극
당시를 회상하며 잊지 말세나.
문 앞의 소나무가 멋이 있는 사당(祠堂) 문을 들어서면, 전서(篆書)로‘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라고 현판 된 춘향각이 있다. 예전에 와서 보았던 고운 얼굴에 정숙한 자태(姿態)의 춘향(春香) 영정(影幀)은 친일파 김은호 화백의 작품이라고, 2020년 10월에 철거하고 김현철에게 의뢰해서 새로 제작(制作)한다고 했는데 다른 영정(影幀)으로 바뀌었다.
誰能判斷是非眞(수능판단시비진)
藝術何如理念淪(예술여하이념륜)
傳說春香崇烈女(전설춘향숭열녀)
丹粧畫閣拜多人(단장화각배다인)
누가 판단할 것인가 진짜와 가짜를
예술이 어찌하여 이념에 빠졌는가.
전설의 춘향이는 열녀로 숭앙하여
단장된 춘향각에 많은 사람 참배하네.
광한루(廣寒樓) 뒤로 돌아가 웅장한 모습과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 쓴 멋진 현판 글씨를 감상하고, 뒷문을 나서니 넒은 광장(廣場)에 좌우(左右)로 새로운 건물(建物)이 늘어섰는데 이곳이 ‘예술촌(藝術村)이란다. 광장에 조성된 춘향과 이몽룡의 동상(銅像)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다시 원(苑)으로 들어와 월매집을 찾았다. 집 옆에 있는 높다란 그네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초가(草家)이지만 5칸 집과 별채 들을 갖춘 당시 부잣집 규모(規模)로 지었다. 월매(月梅)가 당시 기생(妓生)으로 잘 살았던가 보다.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우리가 어려서 밝은 달과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로 전(傳)해 듣던 천상(天上)의 꿈의 세계(世界)인 은하수(銀河水), 월궁(月宮)과 오작교(烏鵲橋), 견우직녀(牽牛織女), 신선세계(神仙世界)를 지상(地上)으로 가져와 남원(南原)에 설치(設置)하고, 여기에 춘향(春香)의 사랑이야기가 올라타면서 둘도 없는 명소(名所)가 되었다.
少時每夜望明星(소시매야망명성)
橫帶銀河牽織靈(횡대은하견직령)
廣寒樓邊皆展布(관한루변개전포)
春香美說合乘馨(춘향미설합승형)
어려서 매일 밤 밝은 별 바라보면
은하수 가로질러 견우 직녀 뚜렷했지
광한루 가에다 모두 펼쳐 놓았으며
춘향 설화 올라타 향기가 진동하네.
남원(南原)에서는 추어탕(鰌魚湯)이 유명(有名)하다. ’새집추어탕집‘에서 추어탕을 먹으며, 남원 막걸리도 맛보았다. 12시 40분이 넘었다.
다음 답사지는 아담원(我談園)이다. 입장료가 1만 원이라 해서 굉장한 곳인가 했다. 차(車)가 산속으로 들어가더니 다듬어지지 않은 주차장(駐車場)에 내려 돌로 포장된 길을 100여 미터 오르니 잔디밭을 안고 커다란 찻집이 나온다. 커다란 실내는 신을 벗기가 어려워서 앞으로 돌아가니 푸른 잔디밭이 있고, 옆에 연못이 있는데, 둑에 의자가 있어 앉아 쉬면서 자연(自然) 품속의 상큼함을 맛보았다.
앞 기슭에 산책로(散策路)가 있어 임교수와 숲속을 거닐고, 내려와 또 실내에서 커피를 사줘서 마시는데, 창밖에서는 빗줄기가 거세다가 멈춘다. 차를 마시며 잔디밭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생활이 고달파서일까? 이런 산속의 카페를 선호한다니, 가족들이 찾아와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곳에서 1시간 30분을 보냈다.
綠樹靑山憧憬天(녹수청산동경천)
門前萬象自然連(문전만상자연련)
日常塵事忽忘裏(일상진사홀망리)
茶傾淸風夢作仙(다경청풍몽작선)
녹수청산은 모두가 그리워하니
문 앞에 모두가 자연과 연해 있네.
일상의 모든 일을 모두 잊어버리며
맑은 바람에 차 마시며 신선 꿈에 젖는다.
몽심재(夢心齋)를 찾아간다. 남원 수지면 호곡리에 위치한 몽심재(夢心齋)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9호로 조선(朝鮮) 후기(後期) 전북(全北) 지방 상류(上流) 가정의 전형적(典型的)인 가옥(家屋)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가옥이란다. 마을 입구에 사각의 옛 우물과 멋을 부린 돌 수로가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죽산(竹山) 박씨(朴氏)가 살게 된 연유(緣由)는 조선 건국을 반대(反對)하고 개성에 있는 만수산(萬壽山) 남쪽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高麗) 왕조(王朝)에 충성(忠誠)을 지킨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시호(諡號) 충현공(忠顯公)] 후손(後孫)들의 집성촌(集姓村)으로서, 충현공(忠顯公) 손자인 박지량(朴之亮)이 조선조 제2 왕자란 대 이방원(李芳遠)의 반대편이었기에 후환(後患)을 피해 이곳으로 집단 이주(移住)하여 마을을 형성(形成)하였다고 한다. 나는 고건축(古建築)에 전문적(專門的)인 지식(知識)이 없고, 또 오늘 안내자나 해설자도 없는 방문이라 눈에 보이는 것과 느낌만 기록하려 한다.
충현공(忠顯公)이 지어서 정몽주(鄭夢周)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지며 보냈다는 시
〈격동류면원량몽 (隔洞柳眠元亮夢)〉
“마을을 등지고 졸고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 는 듯하고.”
〈등산토미백이심(登山吐嶶伯夷心)〉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 다”
는 이 2구(句)의 시(詩)는 충현공(忠顯公) 자손(子孫)들이 사는 이 마을의 정신(情神) 사상(思想)이 되고 있다. 즉 마을 한가운데 팔각정인 몽심정(夢心亭)의 주련(柱聯)이 이것이고, 몽심재(夢心齋)의 주련(柱聯)도 이것인데, 이 시(詩)의 끝 글자를 따서 “몽심재(夢心齋)”라는 당호(堂號)로 삼았다 하며. 종가(宗家)의 충현공(忠顯公) 부조묘(不祧廟)의 주련(柱聯)도 이 시(詩)이다.
몽심재을 들어서면 큰 호석(虎石)을 만나는데 사방에 글자가 새겨져 이끼에 덮여 있다. 더듬으며 읽어 보니. [주일암(主一岩)], [청와(淸窩)], [존심당(存心堂)], [천창애(千蒼崖)], [미타기적(靡他基適)] 등이나 깊은 뜻은 모르겠다. 마당에서 머리 들고 보니, 높은 석축(石築) 위에 팔각기둥의 5간 몽심재가 고풍스럽다. 몽심재를 지켜오던 자손이 원불교(圓佛敎)에 심취(心醉)하여 원불교(圓佛敎)에 기증(寄贈)함으로 지금은 원불교 수련원으로 쓰고 있다니 선조들의 뜻은 그렇지 안았을 것인데 아쉬움이 크다. 중앙 창틀에 몽심제 현판 좌우에 충헌공(忠獻公) 시(詩)가 있다. 중앙 네 기둥에는 큰 글씨의 짧은 주련이 걸렸다. 즉 정행이궁(正行以躬 : 바른 행동은 몸으로 하고), 잠심이거(潛心以居 : 조용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동정무위(動靜無違 : 쉬고 움직임에 어김이 없고), 표리교정(表裏交正 : 겉과 속이 서로 바르게 하라)인데 아마 원불교(圓佛敎) 가르침을 써놓은 듯하다.
안내 표지판에 보면, 몽심재는 숙종(肅宗) 20년(1700)에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오른편 중문(中門)을 지나 안채를 보니 구례(求禮) 운조루(雲鳥樓) 안채와 닮았다. 집이 여러 채 인데, 비어 있어 한적한 가운데 둘러보고 나오면서 생각해 본다.
虎死遺皮古有言(호사유피고유언)
名門巨族又知根(명문거족우지근)
彼雲忽忽不休去(피운홀홀불휴거)
先祖所望何處論(선조소망하처론)
호랑이 죽으면 가죽 남긴다는 옛말이--
명문 거족이 또한 뿌리 있음을 알겠네.
저 구름은 홀홀 쉬지 않고 가버리니
선조들의 소망을 어느 곳에서 알아보나.
동쪽 담을 같이 하고 있는 죽산(竹山) 박씨(朴氏) 충현공파(忠顯公派) 종가(宗家)를 찾아간다. 입구에 돌 표지석이 있고, 20m 정도 들어가지 솟을대문이 나온다. 대문에는 [삼강문(三剛門)이라는 현판을 높게 달았고, 세계의 정문(旌門)이 걸렸다. 중앙의 정문(旌門)은 [고려충신두문동칠십삼인수위륜성보조공신가정대부중추원사도평의사찬성사우정승휘문수증시충현공송산박선생불천지위존봉세가(高麗忠臣杜門洞七十三人首位輪誠補祚功臣嘉靖大夫中樞院事都評議事贊成事右政丞諱門壽贈諡忠顯公松山朴先生不遷之位尊奉世家)] 즉 충현공(忠顯公) 부조묘(不祧廟) 정문(旌門)이며, 우편은 [열녀학생박태현처능성구씨지려(烈女學生朴泰鉉妻綾城具氏之閭)]이고 좌쪽의 정문은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죽산박공동형지려(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竹山朴公東衡之閭)]이다. 문앞에 [송암 박선생 충현공 문수 부조묘(松菴 朴先生 忠顯公 門壽 不祧廟)]에 대한 큰 안내판(案內板)을 세우고 깨알과 같은 글씨로 설명(說明)이 있으나 시간을 내어 누가 읽겠는가?
안으로 들어가니 중문(中門)만 없을 뿐 내 눈에는 사랑채 안채가 모두 몽심재와 비슷하게 보였다. 오른쪽 위로 화려하게 단청(丹靑)된 충현공(忠顯公)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입구(入口)의 주련(柱聯)으로 충현공의 증시문(贈諡文)을 걸었는데
[불사이군왈충(不事二君曰忠)] :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을 충(忠)이 라 하고,
[행견중외왈현(行見中外曰顯)] : 행하고 보는 것이 틀리지 않는 것을 현(顯)이라 한다.
부조묘(不祧廟)는 3칸이며 몽심시(夢心詩)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문을 나서며 다시 한번 뒤돌아보면서 생각해 본다.
三綱門屹偉容姿(삼강문흘위용자)
一孝二忠閭又曦(일효이충여루희)
先祖精神流綿綿(선조정신류면면)
竹山朴氏羨皆宜(죽산박씨선개의)
삼강문이 높이 솟아 위엄있는 자태이고
일효 이충의 정려는 또한 빛이 나는 구나,
선조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
죽산 박씨를 모두 부러워 함이 마땅하다.
마을에는 담 넘어에 석류꽃과 나리꽃이 한창이고, 앞들의 밭에는 꾀꽃이 시들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