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에서 짧게 머무른 뒤 드디어, 그리고 그리던 영동선 열차를 타봤다.
백두대간을 가로질러 낙동강의 협곡을 따라 올라가는 기차를,
여태껏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가 이제서야 처음 타게 되었다.
기대 이상의 멋있는 절경에 넋이 나간 듯 차창 밖을 바라만 보다가,
어느덧 열차는 동백산역에 도착하였다.
청명한 하늘을 낀 11월의 태백은 쌀쌀한 칼바람이 반겨주는 추운 곳이었다.
저녁노을이 슬슬 붉게 온 세상을 물들일 때쯤,
10여 년 만에 태백터미널이라는 곳으로 몸을 향했다.

내게 있어 태백은 친숙한 곳이었다.
기차 여행에 눈을 떴을 때 가장 자주 찾았던 곳이 여기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답게, 산골 한가운데 보이는 이색적인 풍경이 왠지 좋았다.
그때의 그리움이 얼핏 생각이 나 갑작스레 이곳을 찾게 되었다.
2008년 2월 24일, 눈 쌓인 추전역을 찾아 태백에 왔을 때를 사진으로 남긴 적이 있다.
제대로 된 카메라도 없이, 핸드폰으로 찍고 글을 올린 초창기의 기록이다.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 - 태백역'.
https://blog.naver.com/goyasoul88/150028656458
아재의 상징 궁서체의 진지함이 지금은 왜 이리 쑥스럽고 오글거리는지 모르겠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터미널 - 태백터미널'.
https://blog.naver.com/goyasoul88/150028710261
부족한 사진과 필력으로 저렇게 진지하게 글을 남겼을까 싶다. ㅎㅎ
블로그/카페 활동의 첫 시작점 중 하나였기에 언젠가는 다시 오고자 했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다. 나 자신은 너무나 많이 바뀐 환경 속에 있거늘,
태백은 10년이라는 공백을 채우기엔 너무나 많은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특히 버스터미널은 도저히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대로였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고 싶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10년 전 그 시간 그 장소에 타임머신을 타고 뚝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전 글을 살펴보니 이 건물을 두고 엄청나게 혹평을 쏟아낸 글귀가 보인다.
'굉장히 멋없는 사각건물' '단조로운 3층짜리 벽돌건물' '1층 빼고는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다' 등등.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혹평을 쏟아냈는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느끼는 바는 별반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대합실 인테리어까지 10년 전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도, 붉은 벽돌로 만든 벽면도, 풋내 나는 석유난로까지도 모두 다 그대로다.
저 멀리 보이는 분식집과 슈퍼 주인분들도 그대로 계실까?

심지어 매표소까지 10년 전 그대로 박제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승차권 발매기 두 대가 놓인 것이 그동안 생긴 유일한 변화이다.
궁금하다면 위에 걸어놓은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비교해봐도 좋다.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 그 자리에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30년은 족히 사용했을 것 같은 영암매점 간판은 영암고속이라는 버스회사에서 따온 게 확실하다.
정겨운 버스 그림과 붓으로 그린 듯한 오래된 글씨체를 보아하니 확신이 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은 2008년인가, 2018년인가?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다.

요새는 보기 힘든 석유난로도 아직까지 이곳에선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호호 손을 불며 차가운 칼바람을 피해 몸을 녹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가끔은 군고구마와 군감자, 군밤을 올려놓고 호호 불어먹기도 했었는데...
추억 속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다소 묘한 기분이 든다.

감성을 깨고 이성의 영역에서 생각해보자면, 10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게 태백이 쇠퇴하는 도시라 운영이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합실에 있는 승객 수만 해도 같은 날 방문했던 김천과 영주보다 훨씬 많았다.
버스 노선 수나 배차 간격을 살펴보면 아직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10년 전보다 횟수가 증가했다.
동서울행만 보더라도 25회 → 28회 + 첫차 5시 → 3시 40분으로 이용이 편리해졌다.
수원, 안산, 인천행 등도 각각 1회 증가했으며 10년 전에는 없었던 부천-안양, 성남행도 보인다.

게다가 대구, 안동, 영주 방면의 경우 당시에는 하루 11회였으나 현재는 계통이 분화되었으며,
부산행도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천안, 인천공항행 모두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행선지였다.
배차가 줄어든 부분이 있다면 같은 강원권을 운행하는 노선들이다.
특히 정선 / 강릉방면으로 가는 노선들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10년 전보다 수도권 노선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졌으며,
상대적으로 강원권 안에서의 수요가 적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에 간 영주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는데,
점점 수도권으로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변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수도권에 나간 태백 출신 주민들이 많아지면서 태백을 오가는 수도권 노선이 많아지고,
반면에 태백을 포함한 주변 지역 인구의 감소로 왕래가 줄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급격하게 세가 커지고 있는 KD 그룹의 확장,
그리고 지방에 연고를 둔 향토업체의 쇠퇴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전국 어딜 가도 빠지지 않고 보이는 KD 그룹은 수도권을 연고로 둔 대표적인 회사이며,
적극적인 시외버스 영역 진출과 함께 지역 업체들의 쇠퇴가 가속화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태백의 주요한 특징은 고속도로가 멀다는 점, 그로 인해 버스값이 비싸다는 점이다.
강릉까지 거리가 100km가 조금 안 되는데 가는 데만 두 시간에 1만 원 이상 드니 말이다.
수도권 노선 중에서도 2만 원 밑으로 내려가는 노선이 없으며,
대구, 대전 등등 어지간한 타 지역을 가려면 2만 원 이상 고비용이 지출되는 리스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할만한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은 탓에 장사는 잘 된다.

분명한 사실은 터미널 건물이 지어진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태백이라는 동네는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현대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쇠락 지역이지만,
버스터미널은 전혀 그렇지 않고 꾸준히 수요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타임머신을 탄 듯 그 때 그 시절 비주얼을 유지한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터미널 건물은 그대로지만 버스들은 전부 변했다.
당시에 보았던 글로벌900, 로얄미디, BH116 로얄럭셔리 같은 차량들은 간데없고,
유니버스, FX시리즈, BS시리즈 등으로 완벽히 세대교체가 되었다.
잠시 시간 속에 살다가도 주차장을 오가는 차량들을 보면 현실 자각이 된다.

당시에 태백시내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동굴 가는 버스도 타고 했는데...
그 당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에 처음 보는데도 어디선가 탔던 듯한 버스와 마주친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고 있는 태백터미널의 모습에서,
10년 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 지를 잠시 상상해본다.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는데.... 싶은 구석이 있다가도,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 성장했지 싶은 대견하고 뿌듯한 구석도 있다.

지금의 모습을 남기고 떠난 후, 2028년이 되면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10년이 더 지난 태백은 지금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 지,
아니면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있을 지 사뭇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 자신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지도 기다려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여행.
과거행은 재밌게 잘 구경했으니 이제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을 탈 차례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먼훗날의 태백 터미날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길요.
감사합니다.
안티선진님도 추운 겨울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셧어요
저 역시도 항상 감사드립니다.
태백은 첫차 시간이 굉장이 빠르군요. 서울 3시40분,, 잘봤습니다.
시간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에도 차가 출발하나 싶더군요.
제 생각에는.. 수도권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도 있지만 도박하러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ㄷㄷㄷ
ㅎㅎㅎ도박 영향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다만 강원랜드를 찾는 사람들은 수도권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죠~ 사실 강원랜드 말고도 하이원리조트(여기도 강원랜드 소유이긴 합니다만), 오투리조트, 석탄박물관, 동굴 등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수도권에서 오는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접근성이 떨어지는 태백까지 다녀 오셨군요.
20여년 전 삼척-강릉행이 30분정도의 간격으로 자주 운행했었는데
세월의 흐름 앞에 많이 감회되었군요. 호산-울진행은 아예 자취를 감췄네요. 그 구간 경치가 제법 좋았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하네요.
분지 지형이라 겨울이 몹시 춥고 길어 4월에도 눈을 볼수 있는 곳 태백,
오래전에 나홀로 몇번 다녀온 여행이 떠오릅니다.
덕분에 따끈따끈한 여행기 잘 봤습니다.
수도권 노선만 유지되고 지역 간 노선이 많이 사라지는 바람에, 이제 버스만 타고는 여행하기가 많이 힘들어졌구나...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호산-울진노선은 포항-부산 노선에 흡수된 것 같습니다. 영암/화성은 고한-태백-호산-울진-포항-부산, 금아는 태백-울진-포항-부산 으로 운행중입니다.
@목포역 그렇군요. 1990년대 중반에 태백-호산-울진 구간을 여행했는데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했으며
주변 경치가 아주 멋졌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산속길로 다니다 보니 이용객도 많이 떨어졌을거라 짐작이 갑니다.
중간 정류장도 꽤 있었고 태백-호산 사이에 산골마을을 들어갔다 나오는 구조도 있었지요.
다음에 시간되면 승용차로 다녀와야 겠습니다.
첫차가 타지역보다 되게 빠른 지역이지요. 인근정선의 사북고한 터미널을경유하는 버스들이많아서 그런지 수요도 많은가봅니다
사북고한과 세트로 묶인다고는 해도 인구에 비해 수요가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
태백은 기차가 워낙 구불구불다녀서 대부분의 시외버스가 감차되는시기에 나름 활발한듯 합니다. 90년대인가
대원고속? 지금의 kd인지.. 성남 ㅡ 태백 거진 5시간 가까이 걸린거같은데 요샌 다 터널에 고속도로같은 국도라 강원도가 오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여행자 입장의 느낌도 있네요. 사진 잘봤습니다. 다음 터미널이 궁금하네요 도계, 정선을 조심스레 찍어봅니다만ㅎ
중간에 춘양은 안들르셨는지 ㅎ
태백쪽도 부분부분 개량은 많이 되었는데, 적자가 심한 모양인지 열차 횟수가 많이 줄었더군요. 오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말씀이 너무나 공감됩니다. 도로가 잘 뚫려서 오가기는 편해졌지만 오지로 가는 과정에서의 매력이 반감되네요.
광주가는 첫차가 4시인데 사람많이 타나요?
대부분 카지노 수요로 알고 있습니다. 카지노 폐장시간 맞춰서 광주로 가는 시간입니다.
목포역님 말씀처럼 카지노 수요가 많고, 폐장시간이 변경되면서 광주뿐만 아니라 일부 노선들이 첫차 시간이 빨라졌습니다
제가 태백 주민도 관계자도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윗분들 말씀처럼 카지노 덕분에 고정 수요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태백 노선들 대부분이 강원랜드가 있는 고한을 지나기 때문에 카지노 개장 시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