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교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이며, 또한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어느 날 문득 인생을 돌아보며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잘 살고 있는지에 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학창시절 교실에서나 배웠던 자아실현이라는 의미를 새삼스럽게 들춰내어 보기도 한다. 젊거나 늙거나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생각을 자주 또는 깊이 할수록 마음은 복잡해질뿐더러 성공한 삶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젊은 날 더 높은 곳과 더 많은 것을 성취하려 애썼던 순간들을 끈임 없이 노력했으니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돈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는 세상이니 만큼 부와 명예까지 성취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말한다. 그러다가 돈이 되는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들면 그들이 희망하는 노후는 인간적인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부하고 봉사하며 자아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 말한다. 역시 살면서 그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끔 현직에서 물러난 퇴직자들의 안부는 재산이 얼마나 있으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명예롭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토록 인생을 걸고 부와 명예를 좇아 왔음에도 말이다. 다만 얼마나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물론 누군가도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며 안부를 묻는다. 나 역시 평생 쉼 없이 열심히 살았으니 나이 들어 퇴직을 하면 데만데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젊음의 교만이었다. 나이 들어 보니 보이지 않고 보장되지 않는 것이 건강이라는 것을 알겠다. 즉 젊은이보다 늙은이에게는 각자의 기준에서 똑같은 미래가 있다하더라도 거기에 건강을 살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더해진다는 것이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식탁에는 무심한 듯 약봉지가 늘어가고 몸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소리가 느낌 없이 흐른다. 젊음의 교만은 그뿐만이 아이었다. 몸에 좋은 음식은 살이 찐다는 이유로 눈 흘기며 외면했다. 여자는 평생 다이어트 하면서 늙어간다는데 나 역시 그랬다.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다이어트보다는 멋진 몸매 관리를 위하여 내 몸을 스스로 혹사시키다 보니 나이 들어 그 혹독함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다. 이제는 신진대사 활동의 노화로 인한 비만이 자연스럽게 동행하고 있음을 거부할 수 없으니 비만과 다이어트에 관한 상식을 후배들에게 어떤 현명한 방법으로 전달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해본다. 누구나 젊음의 교만으로 다이어트에 꽂히면 누구의 어떤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몸무게를 줄이는 목적에만 온 심혈을 쏟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인간의 신체에 대하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에 공감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긴장을 한다. 그것은 80대와 90대 어르신들을 가까이 접하다보면 문득 문득 내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렇듯 건강한 노년은 누구에게나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축복으로 받은 내 몸뚱이 하나 만큼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쩌면 나만 몰랐던 듯 새삼스러운 깨달음으로 무릎을 친다. 이 시대를 100세 시대라 한다. 목숨 줄 놓지 않고 살아있음의 의미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국민 어머니들의 연세에 희망사항은 죽음에 관한 짧은 편안함이다.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며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지는 현실 앞에서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혹여 고통이 온다면 짧게 그리고 편안하게 생을 마치고 싶은 소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이 들어도 몸이 건강하면 당당하다. 또한 멀어져가는 젊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지 않는다. 늙어가는 모습이야 오래 살았으니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며 연륜이 쌓이면 시간에서 배어 나오는 노년의 멋이 있지 않던가. 젊음에게 열정이 있어 아름답다면 노년은 중후함과 여유가 있어 아름답다. 다만 한 살이라도 더 채워지기 전에 내 몸뚱이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이 건강도 늙어보면 알게 된다. 건강만큼은 젊음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끔 노인이 젊은이를 보면 “좋은 시절이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젊어서 좋겠다는 생각만 버리면 노년기도 충분히 좋다. 다만 젊은 시절부터 건강관리를 충실하게 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름다움은 젊은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륜의 멋이 우러나오는 노년기에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시절 시절마다 서로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늙는다는 의미는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함께 약화되어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늙으면 주의력이 떨어지면서 가벼운 일상에서 몸도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걷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누군가의 작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는 과연 언제부터일까? 누구에게나 노후는 다가오고 있으나 같은 시기에 같은 현상으로 노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즉 나이가 먹어서 모두가 어렵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백세시대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가벼운 감기로 동네의원만 가도 모두가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다. 병색으로 찌들고 지친 모습들로 인간다운 삶과는 멀리 있는 모습이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쉽게 말한다. 내 몸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되면 내 스스로 깨끗하게 마감하겠다고. 이 또한 젊음의 교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 그리고 삶의 교만으로 살아간단다. 그러나 세월은 이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젊음의 교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의 교만은 질병에 종속되며 삶의 교만은 죽음에 종속된다하지 않던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하여 일상에서 퇴직한 사람들이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거나 듣도 보도 못했던 병마에 시달린다는 의외의 대답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숙연해진다. 자신의 노년을 객관화하면서도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느껴져서다. 젊음의 에너지는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상쾌하고 싱그러운 자유로움으로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즉 내 몸 돌보는 일이다. 시대적 정서로 보아 스스로 건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본인만 힘들고 고생이 아니라 주변과 가족 모두의 불행으로 몰고 가는 어쩌면 재앙일 수도 있겠다. 젊어서 가족을 책임져야하는 삶의 무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늙어서의 건강으로 인한 불행이다. 젊음의 교만으로 너무 세상을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나이 들면 돈벌이가 부족했었거나 더 명예롭게 살지 못해서 후회하는 일은 없다. 힘 있을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몸 바쳐 일했다면 무엇보다 후회스러움이 될 것이다. 이만한 복지 국가에 살면서 노년에 건강하면 충분히 당당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넘치는 에너지와 열정을 평생 나누어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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