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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갈림길 없는 오로지 하나의 도
공자는 <논어>에서, 선택 혹은 책임에 관한 말을 세심하게 논의하지 않았다. 가끔
그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기도 ㅎ지만, 이 말들은 서양의 철학적, 종교적인 인간
이해에서 중추적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런 (서구적) 특색으로 발전되지도, 엄밀하게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에서는) 이런 선택이나 책임의
개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으로 궁극적인 힘과 서로 함께 묶여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개인들은 이런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힘을 통하여 개개인 자신의
영적 운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나
책임의 개념은 (그 개개인들은 그들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된 궁극적인 존재론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들은 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며, 또한 그 저지른 죄에
대하여 회개도 할 수 있고, 아니면 그에 합당한 심판도 받을 수 있다는 (서양 고유의)
관념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선택과 책임이라는 말을
그런식으로는 다루지 않았다.
우리 서양인들은 위와 같은 맥락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깊이 안주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 즉 공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한 번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공자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이란 무엇이며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해야 할 위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는 우리들이 (오늘날) 도덕적인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문젯거리를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위대하며 창조적인
교육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선택>과 <책임>을 둘러싼 그런 (서양식)
관념들의 체계를 간과할 수 있었을까?
선택과 책임에 관한 말이 (중국의 사유 체제에서) 발전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선택하거나 책임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리는 즉각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자 시대에도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보다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또한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진지한) 선택을 했으리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혼의)
죄책감이나 회개 또는 죄에 따른 응당한 징벌 등의 말들이 우리 (서양사람)들이
지금 그것들을 쓰는 그런 의미로 (고대 중국 사회에서도) 통용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확신이 나에게 없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서양적인) 이런
관념들이 지시하는 실재 대상들이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전혀 부재했다는 확신 또한
나에겐 없다. 물론 고대 중국에 있었던 징벌 관념은 (범죄 행위의 결과를
처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범죄 행위의 발생 자체를 미리 차단하려는) 예방적인
징벌 관념이었다. 즉 저질러 놓은 죄를 씻어 내기 위한 응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악행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엄혹한 <교훈> 또는 글자 그대로
(자유 자재로 활동할 수 없게끔) 절름발이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런 (동서양간의 관념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후자의 논점을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과 <책임>의 경우, 이 말들이 지시하는 실제
대상들이 (중국의 사유 체계에도)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서양에서는 그런 실재 대상들을 표현하고 그들 내부의 모습과 움직임을
자세하게 추적하기 위한 정교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공자'그리고 그
당대의 사람들'는 그와 같은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고대 중국인들은, 같은 시대의 그리스나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서는 핵심적인
의미를 지녔던 그런 도덕적 실재 대상들에 대해 별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관심 부재>를 뚜렷이 밝힐 수 있는 가장 계발적인 방법은 <논어>
속에 제시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논어>의 관심은
<타오>이다. 타오란 도, 즉 길이나 도로이다. 비유적으로 확장된 일반적 의미로
그것은 고대 중국에서 삶의 올바른 도, 통치의 도, 인간 존재가 걸어야 할 이상의
도, 우주의 운행 방식, 만상의 존재 자체를 생성시키고 규범화하는 (즉 만물의
소이연지고와 소당연지칙으로서의 도 '이치, 길, 과정') 등을 의미한다.
'<논어>에서 <도>는 그것의 가능한 또 다른 하나의 의미인 <말> 혹은
<말하다>의 의미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논어>에 제시된 도의 형상적 의미는 걸어가는 길의 비유가 가장 많다. <논어>
원전에 대표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문자는 걸어다니는 길, 도로, 걷다, 궤도,
따라가다, 통과하다, 부터, 까지, 들어가다, 떠나다, 도착하다, 나아가다, 곧다,
굽다, 평탄하다, 부드럽다, 멈추다, 위치를 정하다 등등의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도의 관념은 당연히 공자의 핵심적 과념인 예와 상통하는 관념이다. 공자에서
예는, 사회적 교제, 즉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예식을 명백하고 세세하게 나타내
주는 패턴이다. 참된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과 예식을 멋들어지게 올리는
모습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를 특정한 도로 체계, 다시 말해 길이 그려진 지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어지면, 이 길이라는 형상적 의미를 발전시켜서 선택,
결정, 책임 등의 관념을 이끌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서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다듬어진-도의 이미지에서 파생되어 나온-갈림길의 이미지를
이끌어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라는 관념을 표현하기에 이렇듯 딱
들어맞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바로 이 갈림길의) 비유가 정작 <논어>에서는 결코
한번도 쓰인 적이 없다.
사실 갈림길의 모습은 자세하게 그려진 도로 그림에서는 어디에라도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요소이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처럼) 우주를 기본적으로
명명백백하고 단일하며 확정된 질서를 가진 것으로 보다는 관념에 깊이 빠져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갈림길의 이미지로부터는 도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의 관념을) 생각해 내지 못할 수 있다. 참된 도를
바르게 걸어가 살펴볼 때, 이런 단일하고 확정된 질서에 대한 공자의 애착 또한
자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다른 선택이란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도를 잃은 것이거나 (도를 찾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질서
(즉 도) 이외의 <다른 선택>은 모두 무질서이며 혼란인 것이다.
우리가 도를 따라 계속 간다면 결국 어디에 이르는 것일까? 이 여행을 종결시키는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일까? 공자가 제시하는 (도의) 형상적 의미는-말하자면 그곳이
항구이거나 고향집 혹은 황금의 도시이거나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묘사되든-어떤 미리
정해진 혹은 이상적인 목표점에 도달하려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신적으로 고귀한 사람(군자)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상태, 즉
아무런 애를 쓰지 않고도 적절하게 도를 따라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그 자체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를 따라가는 것을
터득함으로써 그런 평정한 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지도 위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목표점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다. 목표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의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올바로 잘 터득하여 지금 자신이 도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 도를 얼마나 잘 따라와서 그것을 몸에 잘 익혔는가 하는
수준에 관계없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얼마나 배웠는가하는 수준과도 관계없이
우리는 진실로 도를 따라갈 수 있다. 왜냐하면 도에 아직 완벽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 도를 배우는 일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 그 자체가 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이에게는 배우는 이의 도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상태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짐은 무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모든 것을
마무리지운 인자, 즉 예에 완벽한 사람,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견습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타나 있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인간이란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이 세상-좀 더 구체적으로 한 사회-에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처음에 태어날 때는 다듬어지지 않은 덩어리. 물질적 재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조야한 존재는 학문과 문화, 즉 예를 통해 꼴이 잡히고 잘
조절됨으로써 정품으로 다듬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르고 다듬도, 쪼고,
윤을 내는> 일은 잘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 자신이 고통을 참아 내고 적절히
제대로 노력하고 그리고 교사들에 의해 잘 훈련을 받아서 이런 수련 과정이 잘
진행된다면 그만큼 그 사람은 도를 향하여 똑바로 걸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상적인 것에 따라 모양이 잡히지 못하면 바로 그 결점으로 인해 그 사람은
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의 선택이란 없으며 중요한 것은 도를 따라가거나 못 따라
가거나이다. 도가 아닌 다른 <통로>를 선택했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진정한
길을 택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단지 심지가 연약하여 그 진정한 길을 따라 가기에
실패한 것일 뿐이다. 만약 선택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러 가지 똑같이 실재적인
선택사항들 중에서 하나를 행위자 자신이 자기 힘으로 고르라는 뜻이라면, 공자가
제시하는 가르침의 형상적 의미는 그러한 선택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공자의 가르침은 도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 자신이 자기 힘을 쏟느냐, 아니면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여, 즉 힘이 없어서 삐뿔어지고 결국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여 물질적 이득, 유리한 이점, 개인의 안락과 같은 환상을 헛되이
쫓고자 넘어지고 자빠지고 이리저리 헤맨다는 식으로 문제를 보고 있다.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고 끊임없이 반문하지 않는 사람이면, 나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이 문장의 언급만을 따로 떼어 우리 서양인의 경향대로 읽는다면 이것은 선택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그것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기에는 동등하게 가치 있는 선택사항들이라는 관념이 함축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실천해야할 하나의 올바른 것만이 전제되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반문의 실제 내용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올바른가? 그것은
도인가?> 하는 것이 된다. 좀더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이런 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행동을 객관적으로 옳거나 옳지않다고 확정지으려는 시도라고
사료된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일이다. 즉 어떤 행위를 적절히 분류하여 예에
맞게끔 그 틀 안에 자리매김 해주는 일이다.
<논어>에는 <현혹된> 혹은 <착각> 또는 <의심>에 빠져있는 마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문제에 관해서 공자가 언급한 두 문단이 있다. 그에 대해 웨일리(A.Waley)는
그의 <논어>(The Analects of Confucius)에서 두 가지 마음이 있을 때 어느 하나로
결정하는 것에 관한 문제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비록 웨일리가 선택 혹은
결정이라고 번역했지만, 이런 관념에 대한 공자 자신의 세심한 논의를 놓고 보면,
오히려 웨일리의 번역은 공자 철학 사상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두 구절 모두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저하고)
의심하는 마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나 행위 면에서 수미일관되지 못하는
사람에 의미를 둔 것이다. <논어> 원문의 내용을 쉽게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마도 가까운' 어떤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만 때로 화가 날
때는 그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맹목적인 흥분으로 실상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와 같은 갈등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이나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일관되지 못한 성향들을 구별 혹은 변별해 내는
일이다. 더욱이 각 구절에서, 우리가 그 성향들 각각을 변별해 내기만 한다면 어떤
성향이 바른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하여 의심할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일은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식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핵심적인 용어인
혹은 여기에서는 <현혹된, 또는 예와 맞지 않는 성향이나 경향에 잘못 이끌려진>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할까 선택을 할 때 가지게 되는 의심이 아닌 것이다.
선택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흥미있는 구절이 <논어>에 있다.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더욱 이 구절은 도덕 규범 내에서의 충돌, 우리식으로 정의하자면,
개인(당사자)의 선택에 의해서 해결을 볼 수밖에 없는 충돌의 문제가 발생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정직한> 궁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궁은 자기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 사실을 말한
제후(즉 섭공)는 자기 백성 궁의 정직함에 대해 공자에게 뽐내듯이 말했지만
공자는-자기 나라의 정직한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숨겨 주었다고 말하면서-그에게
재치 있게 반대했다.
이 구절은 두 가지의 대립, 충돌하는 도덕 요구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해결하는 데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이 경우
'법을 존중하는 것은 옳다. 자신의 부모를 보호하는 것도 옳다. 두 가지가 다
깊은 의무라는' 지식을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들 두 가지 깊은
의무가 서로 충돌할 때는 우리가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선택의 논의를 어쩔 수 없이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쩔 수 없는
필요성 안에서 비극, 책임소재, 죄책감, 회한 등 각종의 씨앗을 낳는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란-우리(서양인)들에게는 지극히 자명할 수 있지만-공자로서는 전혀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다. 매사를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로 보는 우리(서구인들)
시각의 자명성은 바로 공자의 그런 관점의 부재를 우리들에게는 그만큼 더 황당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실재하는 몇 개의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참되게 선택하는 일이
공자에게서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적어도 그런 선택이 근본적인 도덕적 과제라는
점이 결코 공자에게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증거를 우리는
댈 수 없다. 공자는 단지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그 자신의 생각만을 선언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예에 따르는 관습을 지키는 일이 의미 있다고 말함으로써 재치
있게 이 문제를 넘어갔다. 여기에는 결정의 문제로 생각해 볼만한 어떠한 것도 없다.
다만 그 제후쪽(즉 섭공)의 지식의 결핍, 단순한 도덕 판단의 잘못만이 생각되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즉 명백하게 선택의 제시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공자는
뚜렷하게 아무것도 주목하지 못했으며, <논어> 전체에서 오직 한 번 이런 경우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주장은 입증된 셈이다. 사실 공자
당시-극히 예외적인 일대 혼란과 변력 시기-의 중국인들의 실제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처한) 상황이 많았으리라고 사료된다. 더욱이 우리가
도덕가로서의 공자의 크기와 그의 임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감안한다면,
공자가 이와 같은 (구체적인) 경우에서도 내면의 도덕 충돌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거나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의 관심사나 생각들이나 배려들이 요컨대 그의
도덕과 지성의 전체 방향이 (우리들 서양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해명될 길이 없다.
선택하는 일로 상정되는 어떠한 일도 또한, (서양 방식) 대신에, 공자 방식으로도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예의 질서 안에서 언뜻 보기에 선택적인길들을 객관적으로
분류하는 일이며, 어떤 것이 진짜 길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리고 어떤 길이
유일하고 분명한 길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가시덤불로
이어져 있는 숲을 헤쳐 나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다만 도가 존재한다-즉
우주적 크기의 자기 일관성과 자기 진실성을 확신시키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 존재의 중심적인 특징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관념은 오직 서로 밀접하게 짜여진
관념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다. 이런 선택 개념의 결여는 그러한 관념 체계의 나머지
관념들도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주요한 관념들은
도덕적 책임, 죄책감, 응분의 징벌과 회개 등등이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할때, 우리는 그 일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자로 (간주되는) 그의 역할만을 언급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는 문제는 복잡하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방식의 일반적인 추세는 책임 소재를
도덕적 의무에서 찾기 보다는 일의 발생 혹은 인과 관계의 문제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다.
책임에 대한 이러한 인과적 관념은 고대 중국인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누가 혹은
무엇이 어떤 특정한 사태를 발생시켰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 놓고 따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그것을 <책임>이라 번역될 수 있는 주제 아래서
따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책임이라는 말의 어근적 의미는 도덕적인 것인데,
그것을 단지 인과관계와 연관지어 사용하는 것은 이미 탈도덕의 범주로 파생되어
나온 용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있는>이라는 말의 어근은 <일으키다> 혹은
<산출하다>가 아니라 <대응하다>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들이 되어가는 길(과정)에
대해 누가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일들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 대응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은 일들이 그렇게 진행되어 가는 데에 대해서 실제적 혹은 잠재적인
인과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들이 되어 가는 길에 대하여 인과적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물론 다 그 일들의 실제 진행 상황에 대하여 대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자의
깊은 관심은 책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한 측면만을 반영한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가진 책임이라는 관념이 갖고 있는 특징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부한 군소리, 즉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관념에 특징적인 내용을
주는 것은 <대응>이라고 하는 어근으로부터 도출된다. 여기에-내가 이 행위에 대해
대응한다. 이 행동은 나의 것이다라는-특별히 개인적인 동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대응 행위가 이번에는 바로 '도덕적' 책임의 관념을 죄책감, 응분의 벌
그리고 회개라는 관념들과 연결짓는다. 대응해야만 하는 사람의 그 대응의 결과는
죄를 지어 벌을 받거나. 회개하여 보속을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공덕을 쌓아 긍지를
가지고,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이러한 책임에 관한 논의들은 책임이란 요컨대 궁극적으로는 순수하게
인과적 관념으로 따져야 된다는 특정한 공리주의적 관점때문에 사실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책임>이란 단지 과거의 원인들을 분석 진단하여
미래의 사태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제재 조치와 포상은
미래의 잘못에 대한 예방을 약속하는 인간(행위)의 모든 인과적 연결 고리의 어느
부분에든지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제재 조치들이 내일의 악행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것들은 정당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재 조치들이 악행을 막지 못하거나
혹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악행들을 오히려 조장하게 되면 그때는 그 반대의 제재
조치가 제시되게 된다. 회개를 하는 근거나 가치는 그 회개를 통해 미래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효과를 거두는 데에 있지, 결코 과거 행위의 도덕적 측면과의 어떤
관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 같은 것이 가지는 가치도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그와 유사한 합리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 될 것이다. 최근의 철학 토론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보다 복잡한 형태의 공리주의적 견해들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하게 발전된 형태들도 결코 (과거의) 보다 간단한 견해들에 의해 명백하게
발생되었던 그런 혼란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범법에 대한 제재와
연관하여 공자가 한 말씀을 번역자들이 <벌>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이는 조심성 없는
독자들로 하여금 공자가 그 말을 우리'서구인')들의 '도덕적인
죄책감이라는 근원적인 함축적 의미를 지닌' 벌 개념과 똑같이 이해하고
사용했다고 잘못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공자에게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히브리-가독교 전통에만 특별히
있는, 그리고 그 대부분에서 공리주의와 깊이 대조되는 이러한 견해는, 단지 (미래의
범법을 예방하려는) 벌의 효과에 의해서 형벌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벌이란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행위자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에
대한 적절한 도덕적 응답이다. 또한 회개의 의미도 그 나름으로 보자면 단지 적절한
(범죄 억제) 장치, 또는 그 회개 나름대로의 심리적인 (범죄 예방적) 효과들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나쁜 행위에 대한 회개라는 점에 있다.
회개란 자신이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어떤 과거의잘못에 대한 도덕적 대응이다.
죄책감이란 이미 저질러 놓은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어떤 도덕적 '혹은
영적인' 속성이다.
만약 벌이 참된 도덕적 체험으로 주어지고 또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도덕적 채무를 갚는 것, 즉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에 있을 유사한 잘못이나 그 잘못에 의해 수반될 죄책감뿐만이 아니라, 또한
벌에 부수되어 나오는, 도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물리적, 신체적) 불쾌감이나
고통을 더욱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회개가 진실하다면, 그 회개는
이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기 혐오이며 도덕적 죄책감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회개는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겠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죄책감, 벌, 그리고 회개가 도덕적 품성에 그리고 도덕성과 관련된 행위에
끼치는 결괴적 효과들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것이다. 여기에도 분명히 공리적으로
효과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 각자의 도덕적 근거, 즉 각자에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당사자가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벌>, <죄책감> 그리고 <회개>가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할 이전의 도덕적 잘못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도덕성보다는
(단순히 기게적 물리적인) 사회 공학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공자가 주된 공격 목표로서 <벌>의 사용을 지목하고 그 자신의 적극적인 가르침을
그런 것과 직접 대조되는 것으로 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이다.
공자에게서 도덕 교육이란 예의 규정들을 몸으로 익히고 문학이나 음악 그리고
일반적인 교양 과목들을 배우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미는 힘>은 마련할
수 있지만, <당기는 힘>은 목표가 본래 지니고 있는 고매성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스승-혹은 군자-이 다른 이들을 도에로 이끄는 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고매한
사람에 의해서이다. 힘을 가진 것은 바로 그 도이다. 그 힘은 (인위적인) 노력이
없는 것이요, 보이지 않고, 신묘한 것이다. 명백하게 <법가>의 영향으로 나중에
삽입된 문장으로 보여지는 오직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모두에서, 덕성,
인간다움, 예식, 그리고 그와 연관된 행위 지침인 <양보>의 사용과는 명백하게
대조를 이루는 제재 조치나 형벌의 사용이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이라는 것이
<논어>의 특징이다. <논어>는 문제를 간명하게 제시한다. 즉 우리는 예와 <양보>를
써서 통치할 수 있거나 그렇게 할 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스스로 기만하여 보았자 소용이 없으며 <벌>, 즉 제재 조치들과 포상(이라는 강제적
수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것들은 폭압적인 방식으로든 혹은
상급을 주어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실로
인간적인 '즉 도덕적인' 방식이 아니기에, 진실로 인간적인 삶을
확립시키지 못한다. (서양적 세게관에 따른) 도덕적인 죄책감 혹은 죄가 되는
근거로서의 도덕적책임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도덕적 응징으로서의
벌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공자는 제재 조치들의 사용에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어떠한 잠재적 가능성도 볼 수 없었다.
이런 (공자의 입장과) 반대되는 즉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공리주의> 편향적인
관점이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고 상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들의
관점을 거부함으로써 공자는 그 자신의 관점을 매우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의 견해는 당시 매우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의
견해는 당시 매우 강력한 경쟁 세력으로 커나갔던 법가의 견해와는 명백하게
대조된다. 법가는 전형적으로 채찍이나 사탕 이외의 것에 대한 호소는 감상적인 자기
기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도덕적인 접근이란 속임수이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스스로 얽어 묶이게 되는 덫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개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발톱과 이빨 때문이다. 호랑이가
자신의 발톱과 이빨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개가 사용하게 된다면, 호랑이는 개에게
제압 당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그의 신하들을 형과 덕 '즉
<칭찬과 포상>의 <이득>'으로 통제한다.
법가의 이러한 생각은 공자의 가르침과는 선명하게 대조된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규정들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고 형벌로 질서를 잡는다면 백성들은
수치심없이 법망을 빠져 나갈 것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힘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예로 질서를 잡는다면 백성들은 수치심을 가질 뿐 아니라 바르게 될 것이다.
(이런 중국적인 관념에서) 하여간, 벌이 어떤 역활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범죄 발생)억제라는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역할이지, 결코 도덕적인
응징의 역할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고 하겠다. 좀더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도덕적 응징으로서의 벌이라는 관념은 <논어>나 법가의 사유 그 어느 쪽에서도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의 그 말(벌)에서 도덕적인 의미를 읽어 내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논어>에서는 죄책감과 회개를 어떤 개인의
못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대응으로 보는 관념이 전혀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제
좀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관점에 따른다면) 사람이란 실제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 자신의 과거 행위를 후회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가던 길을
바꾸고 이제부터라도 도를 따라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죄책감이라고 하는
<내심의> 얼룩(오점의 관념)이 부재한다. 우리의 이런 주장을 밑바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을 <논어> 원문에서 (당장 곧바로) 읽어 내기보다는 차라리
<논어> 원문을 보다 잘 독해하기 위하여, 이런 우리의 주장에 대한 예외적 사례로
보이는 것들을 통례적으로 우리는 좀더 상세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논어>의 어떤 구절들은 <수치심>을, 또 다른 구절들은 내심의 결함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구절은 내심의 자기-견책을 요구하는 갓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도덕적 책임 그리고 죄책감과 연관된 관념들에
대해서 적어도 거의 명백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수치심에 대한 언급은 위에서 이미 인용된 적이 있다. 즉 형벌 '곧
위협'로 다스리면 수치심이 사라지고, 덕으로 다스리면 수치심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덕은 미덕의 힘, 또는 인하고 예를 따르는 사람의 덕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도에 내재하는 힘 혹은 미덕이다. 그것은 물리적, 강제적 힘과는
대조 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인용된 이 구절은 수치심을 공자가
하나의 도덕적인 대응으로 생각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치라는 말이 과연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 해당하는 것인지 어떤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치는 확실히 공자가 언급한 말들 중에는 가장 죄책감의 관념에
가까운 말이다. 따라서 그 말을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치의 관념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 그것은 물질적인
이득을-예를 들면 좋은 옷, 좋은 음식, 부유함-그 자체에 대한 관심 혹은 그것들의
소유를 다루면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도에서 어긋난 방법으로 얻었거나
공적인 일의 수행과 관련해서 그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언사나, 용모, 아첨, 교만, 위선이 지나친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끝으로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치는 여러 곳에서 오명과 짝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개인적 이해 관계 때문에) 자기의 공적인 역할을 오명으로 끝내는 사적 행위에 대한
유비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중국과 서양간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이런 치에 관한 원문들은 우리 (서양인)들로 하여금 공자의 <수치심>을
서양의 <죄책감>과 같은 것으로 보기 쉽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지어 본다면 그런 관점의 차이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비록 치가 틀림없이 도덕적 개념이며 어떤 도덕적 조건 또는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감당하는 도덕적 관게란 개개인이 바로 예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공적인) 지위와 역할에 대해 가지는 도덕적 관계이다. 치는 따라서
<내면적>이라기 보다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말은 했으나 못지키는
말의 문제요, 부도덕하게 취득한 재물의 문제이며, 용모와 행동을 지나치게 꾸미는
위선의 문제이다. 이런 치는, (서양의) 죄책감처럼, 결코 내면적인 상태, 내심의
타락에 대한 혐오, 자기 비하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관련 되어 의미를 갖는)
공적인 지위나 호평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천박하거나 혹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즉 자기 내심으로부터 나오는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도덕적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겉모습>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공자의 수치심 개념은 순전한 도덕적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존재의 내적 핵심, 즉 <자아>를 향해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의례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사회적 처신, 즉 예를 중심으로한 도덕성으로 향해
있다. 도덕 질서를 어기는 것은 따라서, 서양의 죄책감의 경우 못지 않게, 공자의
수치심에서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파괴로 간주된다. 개인적인 반응, 도덕적 가치가
혼입된 느낌의 색조가 또한 두 경우 모두에서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느낌을 해석하고 취급하면서 취하는 방향은 두 가지 경우 서로 다르다. 진실로,
죄책감을 갖게 되는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어떤 비도덕적 행위나
배신의 경우라 할지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궁극적으로 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다. 수치심은 '체면'의 문제이며, 당혹함의
문제이고 사회적 지위의 문제이다. 수치심은 말한다. <네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바꾸어라. 너는 더럽혀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영혼의 병듦>에 대해서,
그것의 <상처>에 대해서, <수렁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신에 의해
건져져 씻겨지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병들어 기형적으로 된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자를 대충 읽었다 하더라도 <논어>에서는 그런 이미지 혹은
그에 유사한 어떤 분위기조차도 낯설다는 점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논어>에는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 그것들은 언뜻 보면 곧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숙고된 타락과 유사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한 구절은
재여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공자가 주는 이미지는 오르페우스, 히브리 혹은
기독교의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재여는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이며, 흙손질할 수 없는 마른 똥무더기 담이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왕성한 질병,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울부짖게 만드는 상처는 단순한
무기력,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소극성과 내재적 무감각으로 대체되어 있다. 재여는
기껏해야 도덕적인 인간 존재가 될 능력을 상실한 정도이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이미지에서는 타락한 죄의식이 갖는 강도나 역동성은 바로
그의 도덕적 관심과 절박한 개종 (기독교에의 귀의)이 갖는 활력소의 크기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관한 <논어>의 두번째 언급은 내심의 병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그 자신의 내심을 살펴 보아서 아무런 병든 곳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연히
어떤 근심도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병>의
이미지를 그렇게 사용한 유일한 경우이다. 나는 <병>에 대한 이 고립된 인용을
이때만을 위한 임시 방편적이고 정교화되지 않은 비유, 즉 다른 많은 경우와는 달리
공자 자신의 별반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비유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비유는
확실히 중심적인 교의에 대한 선언 또는 은유가 아니다. 따라서 (공자 철학에서)
그것의 정확한 논점은 불분명하다. 비록 그 이미지가 우리 (서양인)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또는 우리의 용법에서는 그렇게도 풍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런 것을 별로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직 검토해야할 또 다른 두 개의 구절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명백하게 <내심을
향한> 방향성과 <자기 견책>을 요구한다. 공자는 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가치없는 다른 사람들(불현자)을 바라보고 있을때, 우리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볼
것을 말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서 자신의 내심에 책임을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탄식한다. 내면의 삶에 대하여 우리 (서양인)들이
배경적으로 갖고 있는 풍부한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이런 구절들을 바로 자아의 내면
세계, 죄책감, 혹은 레그가 암시하고 있는, 양심과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공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간단하고 명백한 증거물로 보게끔 된다.
그러나 12:4(3)에서의 <내심의 병>을 포함해서 <논어> 전체에서 그러한 <내심을
살펴봄>에 대한 언급이 오직 세 군데에서만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공자가 양심이나 죄책감을 언급하였다고 가정하는데에 더욱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양심 혹은 죄책감이 어쨌든 명료하게 인식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도덕 생확에 핵심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 공자가 어떤 <내적인> 삶을
염두에 두었고 또 그것을 강조하였다면, <논어>의 전체 500여 절 더욱이 그 중 세
번만 그런 것에 대해 언급했단 말인가? 그리고 또한 어째서 그 세 구절마저 그리
모호하고 또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되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는 공자가 다른 관념들,
즉 도, 인, 덕, 예와 같은 관념들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어>가 전체적으로 모든
세세한 면에서 주로 도덕을 가르치는 담화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담화는,
다른 무엇도다 먼저 양심, 죄책감 그리고 내심의 삶에 관한 주제를 정교하게 다루게
마련이다.
사실 <내심을 살핀다>라는 이미지를 사용한, 맨 끝의 두 구절에서의 공자의 말은
그가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완전히 합치되는, 전혀 또 다른 맥락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 <이인> 4:17에서 공자의 말씀은 가치 있는 사람들처럼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의
시대처럼, 정치적인 내부 투쟁, 사회적인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소송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결점을 꼬집어 내어 폭로하며 그렇게
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속을> 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을
소송하라>고 가르친다. 앞의 말씀은 매우 모호하고 잘 다듬어져 서술되지 않았다.
뒤의 말씀은 극도로 혼란한 공자의 시대라고 하는 그 특정한 그 시대에-공적인
고발이나 송사가 매우 명백하게 논의되던 상황이라는-매우 일상적인 맥락에서
언급되었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공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 속의 가시를 보지 말고 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공자가 <공야장> 5:26에서 한
말씀은 또한 예수의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유사하다. 그러나 고발, 재판, 판결에
관한 말은 구약과 신약 성서 모두에 두루 나오는 데 반해서 <논어>에서는 전체를
통틀어 여기에서 단지 한 번 도덕적 은유로서 나타난다. 우리 서양인 모두는 또한 이
은유가 도덕적인 삶에 너무나 잘 들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단지
한번 그것을 사용하고 곧이어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한번 우리는, 공자의
양심이 체게적으로 우리 (서양)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리잡혔으며 그 비유에서는 오직
임시 방편적이고 (특정 사실과 관련해서) 시사적인 언급만을 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믿는다.
공자에게서 이 <자기-송사>는 임시적인 은유에 불과하며, 그의 주요한 방향성과
양립할 수 없고, 오직 어떤 특정한 상황속에서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들이 있다. <논어>전반에 흐흐는 정신이
소송 '형벌, 규제 등등'에 대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자는 드러내
놓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송>이라는 말은 도덕적 태도라기보다는 소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
표준적이라는 점, 소송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도덕적인
뉘앙스로는 여기에서 유일하게 쓰였다는 점 등등은 감정이 듬뿍 실린 아래와 같은
영탄조의 문장을 반어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요즘 사람들은 끊임 없이 서로 사소한 문제로 다툼을 벌이며 다른 사람이 실재로
한 잘못은 물론 상상해 낸 잘못까지도 고발한다. <상대를 고발하는 데 그렇게 신속한
반면에 자기의 잘못을 바라보고 그 자신을 송사할 수 있는 사람은 어찌 그리 찾아 볼
수 없는지!>
지금까지 우리는 <논어> 원문을 해석하면서, 공자가 그 자신 실제로 선택, 책임,
도덕적 응보로서의 벌, 죄책감,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보았다.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도라는 이미지의
중심에서 선택의 관념이 명백하고 풍부하게 발전할 기회가 내제되어 있지ㅁ 그
기회는 (공자에게서는) 눈에 띨 만큼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도덕적인 병듦,
자기-송사, 내적 성찰에 대한 고립된 언급들은 있지만-그 각자는 책임, 죄책감
그리고 회개에 대해 관심 있는 이에 의해 그렇게도 풍부하고 적절하게 쓰일 잠재적인
가능성은 있지만-이 중에 어떤 것도 공자에 의해서 발전되거나 혹은 어쨌든 조금더
(깊게) 천착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고립된 채로, 임시적인 은유들로 남아 있다. 그
은유들은 아마도 지금은 잊혀진 그들의 원래 맥락에서는 반어적인 혹은 시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끝으로 수치심에 대해서는 좀더 자주 그리고
체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외적인 소유, 행동 혹은 지위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오염되고 부패한 자아에 대한 내면의 고발이라기보다는
외부 세계와 관련된 자신의 지위와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도덕 감정이다. <논어>
원문의 맥락에서 보이는 선택-책임-죄책감이라고 하는 개념 체계의 결여는, 그가
그처럼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통찰력이 넘치는 철학자였음을 고려한다면,
문제의 개념들과 그것들에 연관된 이미지들이 공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거부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단순하게 그의 사고 속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이 그 타당함을 입증하였다.
(<논어>에서) 공자 사상의 주된 틀을 형성하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과
이미지는 우리 (서양인)에게 상이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조화로운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실재의 선택항들 중에서 선택하여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에게 고유한
내적이고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궁극적으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신에
인간은 <원자재>로 태어났다. 그는 교육에 의해 개명되어야 하며 그래서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도는-그것의 고귀성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고매성을 통해-그 사람을 틀림없이
사로잡을 것이다. 이런 사유의 결과는 사회 혹은 물리적인 환경에 대립하여 그것을
압도하는 인간의 힘을 증강시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 하나인 참된 도를 빗나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그 지점으로 향하는 그
사람의 <목표> 혹은 방향성을 예리하게 인식시키고 꾸준하게 이끌어 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는 개명한 인간 존재인 것이다. 그 도를 걸어간다는 것은 그 도에 담겨
있는 거대한 정신적 존엄성과 힘을 그 사람 속에서 체현한다는 것이다. 도에서 벗어
나가는 사람보다는 도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그리고 억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존엄성과 성취의 삶을, 그리고 서로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허용하는 상호
존중에 기초하는 타인과의 사회적 조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공자에 있어 주된 도덕적 문제는, 어떤 사람 자신의 자유 의지에 선택한
행위에 대해 그 사람의 책임 소재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도에 대하여
적절한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그 도를 열심히 배울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도덕 질서'예'를 따르지 못하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비록 결과가 사악한 것이 될지라도 자유롭고 책임이
따르는 선택에 대한 자기-유죄 판결이 아니라, 단순한 결점, 힘의 부족, 요컨대
자기의 <(인격) 형성>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재교육인 것이다. 이런 점에
관해서도 서양인들은 부지런한 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개인적 책임이라는 문제로
역설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하게 <논어>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문제는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좀 도식적인 방식으로 요약을 한다면, 공자에게서 도덕적인 문제들은
다음의 네가지 형태들 중의 하나로 귀착된다. (1)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무엇이
도이고 무엇이 그럽지 않은가를 인식하고 또 적절하게 구별할 수 있을 난큼 충분히
잘 교육받지 못했다. (2)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도를 따라가는
데 필수적인 노련함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3)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요구되는
노력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힘의 문제로
이해된다' (4)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는 어떤 행동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는 있으나 그 도에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쉽게
잘못을 범하거나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예의 외적인 형식을 체계적으로
오용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공자의 철학적 견해는 인가능ㄹ 비극적 존재, 내적인 위기와 죄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는 면에는 아무런 기초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마련하는,
사회 지향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게다가 우리가 여기에서 언급한 논의들을 공자의
인간관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이 맥락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좀더 토론할
것이다-에 놓고 본다면, 내적인 인간과 내적인 갈등이라는 (서양인들에 익숙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인간 개념에는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공자가 이상화한) 인간의 존엄성은, 신묘함과 세련미가 있는 그런 삶, 그 안에서의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맥락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성스러움과도 조화될
수 있는 그러한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실천적, 지적 그리고 영적인 것들이 동등하게
외경되며, 하나의 행위-즉 예의 행위-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그러한 삶의
모습들의 절정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