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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에 대한 구부러진 잣대
(1) 강해설교와 제자훈련만 하는 교회를 모델 교회라고 부르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런 말은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필립 얀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 즉 처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떠남으로써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 일이 계속되도록 계획했다는 말이다. ... 그런데 그 시점에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떠나시는 게 우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들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22:19)을 나눠 먹었다. 그 안에 담긴 엄청난 뜻은 전해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순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 다시 아들을 통해 그들에게 위임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라고 예수님은 기도했다. ... 승천한 이후 예수님은 언제나 이 땅에서 자신이 살았던 삶을 계속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의 몸을 찾는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교회란 사실 성육신의 연장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주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할 몸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육신의 연장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예배드리고, 세례 주고, 성찬식 거행하고, 성가대 시키고, 성경공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해야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하셨을 일,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성경만 가르치시지 않았고 삼중사역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저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교회가 자신처럼 사역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지상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마가복음 16:15-18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런 사역들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고 그보다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후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단락은 다음과 같은 빌립의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4:8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요청을 받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1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의 비결입니다. 그 직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리고 그 후에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3-20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러분, 이제 비결을 아시겠습니까? 비결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비슷한 또 다른 명령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다시 한번 입증됩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의 각 부분들입니다. 마치 최고의 사도요, 선지자요, 복음 전하는 자요, 목사요, 교사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겉옷을 다섯으로 찢어서 목회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처럼(엡4:11), 예수님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셨습니다(고전 12장). 그 이유는 온 성도들이 각자 은사대로 사역함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작동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 일을 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현재 교회들이 이런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대다수 교회들이 종교적이 되어 강해설교나 제자훈련만 하면서 은사사역을 터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건전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은사사역을 하는 교회들을 극단적인 신비주의니 이단이니 하며 매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요! 이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대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마귀가 기뻐하는 짓입니다.
(2) 아직 젖도 떼지 못한 한국 교회, 과연 언제 교회 구실을 제대로 할까요?
목회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영적인 젖 즉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를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목회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신학대학의 교수들조차 영적인 젖인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에 대한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은 불가능한 것고 아니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이 중 '회개'와 '신앙'은 1대지에서 다뤘고 '부활'과 '심판'에 대한 것은 2대지에서 다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례들'과 '안수'만 다루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세례 하나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세례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안에는 물세례뿐 아니라 성령세례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물세례를 받아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전도한 후 개종자들이 생기자마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세례는 기독교의 기본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사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세례를 간절히 사모해야 하고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하게 제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놀랍게도 "안수"가 영적인 젖인 그리스도의 초보 중 하나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새신자에게 가르쳐야 할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 6가지를 꼽는다면 그중 하나로 '안수'를 꼽겠습니까? 아마 어떤 목사도 기독교의 기본진리로 안수를 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안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안수의 가장 일반적인 용도는 임직자에게 손을 얹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러나 안수식 때 손은 얹는 것은 안수의 한 가지 용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안수의 또 다른 용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안수는 축복하며 기도하는 데 사용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48장).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그리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합니다.
2) 안수는 영의 이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명기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 "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도자 양육의 효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영의 이전에 달려 있다고 본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 보면 영의 이전에 관한 실례로 가득하다. ... 안수는 영의 이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영의 이전은 일반적인 성령충만과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어지는 특별한 기름부음이 전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 같은 것입니다.
3) 안수는 성령세례를 받게 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많은 이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처럼 안수는 성령세례를 받게 하는 데 요긴하게 쓰입니다.
4) 안수는 성령의 은사가 부어지는 통로입니다.
디모데전서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고전12:11). 그런데 안수하며 기도해줄 때 은사를 부어지실 때가 많습니다.
5) 안수는 성령의 은사를 활성화시킵니다.
디모데후서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안수는 성령의 은사를 활성화시켜서 다시 타오르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안수는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6) 안수는 특히 치유를 위해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안수의 가장 흔한 용도는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아픈 자들의 치유를 위해 안수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치유가 안 될 때 안수하면 치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안수하고 기도해주면 성도들이 더 많이 기대하고, 그래서 더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사도행전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예수님은 친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병든 사람에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담대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만, 전통적인 교회가 있고 성령운동하는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교회 바꾸어 말해서 비성경적인 교회가 있고, 성경대로 은사사역을 하는 성경적인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성령운동 하지 않는 교회는 비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정말로 성경적이라면 성령운동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포함하는 "셀례들"과 "안수"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기본교리의 3분의 1이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모든 교회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가 성령운동 하지 않는 것은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운동을 하고 안 하고는 담임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계획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