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사랑,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람은 누구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다. 사랑은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도 만들고, 가장 깊은 아픔을 주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이 오랫동안 회자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의 사랑 못지않게 역사 속 실제 인물 가운데 가장 애절한 사랑을 꼽으라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말한다. 지금도 프랑스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잠든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은 세계에서 찾아온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는 성지가 되었다.
아벨라르는 중세 최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의 강의는 수천 명의 학생이 몰려들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논리학과 신학을 새롭게 정립한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였으며, 파리 대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엘로이즈 역시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으로 불렸다. 그녀는 숙부 퓔베르의 보호 아래 성장하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철학을 토론하던 두 사람의 마음은 어느새 사랑으로 물들었다. 아벨라르는 훗날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철학 이야기보다 사랑 이야기가 더 많았고, 학문을 설명하기보다 입맞춤이 더 잦았다. 우리의 눈은 책의 글자를 읽기보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또 있을까?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로이즈는 아들을 낳았고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러나 질녀를 친딸처럼 아끼던 숙부 퓔베르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아벨라르를 습격했고 결국 거세하는 끔찍한 복수를 감행했다.
한순간에 두 사람의 삶은 무너졌다. 당시 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을 강하게 요구하던 시대였다. 출세를 위해서도 결혼은 걸림돌이었다. 엘로이즈는 결혼하지 말자고 주장할 만큼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수녀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12년이 지난 뒤 아벨라르는 자신의 고난을 기록한 『내 고통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을 읽은 엘로이즈는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은 다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 편지들은 오늘날까지도 인류 최고의 사랑의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엘로이즈는 편지에서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황후가 되는 것보다 당신의 정부 곧 창부가 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도, 명예도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아벨라르였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미사를 드리는 순간에도 나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녀의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도, 기도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반면 아벨라르는 과거의 사랑을 죄로 규정했다. 자신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엘로이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사랑을 부정하려는 말이 아니라, 엘로이즈가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부부가 되지 못했다. 생애 동안 단 한 번 잠시 마주쳤을 뿐이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보다 20여 년을 더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사람은 한 무덤에 함께 묻혔다. 무덤의 비문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의 영혼을 하나로 묶었던 사랑이, 헤어져 있던 동안에는 가장 아름다운 편지로 이어졌고, 이제는 이 무덤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아름다운 사랑의 묘비명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단지 비극적인 연애담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남은 생애를 신앙 안에서 살아갔다. 사랑은 육체의 열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의 사랑으로 성숙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독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라고 가르쳤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살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의 삶은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울 수 있는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
사랑이란 감정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아야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얻게 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함께 믿음을 붙들었다. 함께 늙지는 못했지만, 신앙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중세의 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죽음조차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갈 때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시작된 사랑만이 시간과 죽음을 넘어 영원히 빛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