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문학적 배경과 구조
마가복음은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다양한 그룹들과 예수의 갈등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과 차례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예수 안에 드러난 복음의 본질을 밝히려 하고 있다. 예수는 단순히 유대교의 다양한 그룹들과 논쟁을 벌이고 갈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드러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행보와 가르침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이러한 갈등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이루어진 사건 중의 하나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막 11:1 이하) 후 이튿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11:12-14), 성전을 정화한다(11:15-19).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12:20-25),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성전정화를 한 예수의 권위에 대해 논쟁한다(11:27-12:12). 황제에게 바치는 논쟁(12:13-17), 부활논쟁(12:18-27)에 이은 논쟁이 가장 큰 계명에 관한 토론이다. 뒤따르는 기사는 서기관들의 그리스도론과 외식에 대한 비판이다. 본문은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에 이어지며 서기관과 논쟁적인 상황이 아닌 상호 일치점을 찾고 있다는 것이 여타의 논쟁들과는 다른 의의를 가진다.
본문과 공관복음서의 평행구들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마태복음
율법사의 시험 질문
예수의 답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가복음
서기관의 질문
예수의 답변
서기관의 지지발언
예수의 칭찬
누가복음
율법사의 질문
예수의 반문
율법사의 대답
율법사의 이웃에 관한 반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의 평행 본문들은 몇 가지 상이점을 보인다. 우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경우 질문자가 서기관이 아닌 율법학자이다. 누가복음은 대답하는 사람이 예수가 아닌 율법학자이고 예수는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질문의 내용 또한 마가복음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인 반면 누가복음의 경우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마태복음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로 되어있다.
종결부 역시 마가복음이 예수가 서기관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는 반면, 마태복음은 이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누가복음은 바리새인이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예수의 응답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문 주석
1) 서기관의 질문(12:28)
예수와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하는 도중에 서기관들이 끼어든다. 서기관들은 마가복음 9장 14절에 귀신들린 아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등장한다. 그런데 가장 큰 계명에 관한 토론에서는 사두개인과 달리 서기관은 예수와 적대적인 관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서기관들이 토론에 끼어든 이유에 대해 “예수가 대답 잘하는 것” 때문이라고 간결하게 언급함으로써(28a) 오히려 서기관이 예수에 대해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끝난 후, 서기관이 예수의 답변에 지지발언을 하는 부분(32)과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34)라는 예수의 칭찬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가 당시의 율법해석을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예수는 결코 유대교를 무조건 거부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함”(마 5:17)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는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 대해 무작정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대교의 다양한 흐름 중에서 율법 전승의 해석에 대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 사랑(12:30)
사랑의 계명은 흔히 기독교만의 전유물로 여겨질 때가 많다. 특히 요한복음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남긴 ‘새로운 계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구약과 유대교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이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계명의 유대적인 배경 안에서 말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인데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삶의 본거지이며 내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목숨은 느낌이나 감정 혹은 욕구를 의미한다. 뜻은 오성과 지성을 가리킨다. 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간의 내적인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다하여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경배를 의미한다. 사람은 그를 창조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전인격으로 사랑해야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신이나 대상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것은 운명적으로 유일신교만이 존재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계명이지만, 이방신에 대한 예배가 성행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계명일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들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경우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3) 이웃 사랑(12:31)
이웃 사랑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과 직결된다. 유대교 내에서 이것을 더욱 일상화된 언어로 표현해낸 사람이 랍비 힐렐이다. 랍비 힐렐은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아라”라고 이웃 사랑을 한층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는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7:12)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람이 대하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 랍비 아키바는 이웃 사랑이 “율법 전체를 포괄하는 원칙”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계명은 십계명을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웃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인간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계명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대상으로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있을 뿐 실상 모든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에 관한 인간의 태도도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는 구약의 율법을 요약한 십계명을 두 가지 관계가 아니라 세 가지 관계로 풀이한다. 즉 1~3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태도로, 5~7계명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 8~10 계명은 물질(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성경이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기를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타 존재를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구약의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본뜻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타 존재를 위한 삶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타 존재를 자기를 위한 이용물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가 타 존재를 위해 보냄 받았다는 것을 자각할 것을 요청한다. 삶의 방식에서 중심을 이동하는 것이 계명의 본뜻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타자를 섬길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즉 계명의 진의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중심을 이동하여 타자 중심으로 전환되는 것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이다(롬 13:10).
4) 서기관의 지지발언(12:32-33)
본문에서 서기관과 예수는 공히 유대교의 율법전승과 연속성을 보이는 반면 예루살렘 제의와는 불연속적인 입장을 취한다. 제의비판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에 근거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제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제의자체보다는 삶의 원리와 방식을 문제 삼고 비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제의를 잘 하는 것보다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호세아 6장 6절, 이사야 1장 10-17절, 예레미야 7장 1-15절, 아모스 4장 4-5절, 미가 6장 6-8절, 시편 40편 6절, 시편 51편 16절 등을 살펴보면 제의에 대한 서기관과 예수의 입장이 예언자 전통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교와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예수와 초대교회가 제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서기관의 경우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기관의 입장은 유대교 내의 한 흐름이기도 하다. 사해의 쿰란 문서에는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들과 기타 제물들의 기름보다 낫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성전제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예수와 초대교회만의 입장이 아니라 구약전승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한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구약과 율법의 정수가 타자를 위한 존재에로 자기를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예수와 서기관과의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본문 뒤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론의 차이와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함으로써 그들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의 본질에 대해 서기관들과 일치하고 있지만 그들이 삶의 태도까지 바꾸지 못한 점을 꼬집어 비판한다.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그것을 앎과 그것을 삶에 실현하는 문제는 구분된다는 점, 그리고 앎과 삶의 괴리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의 가장 큰 계명
하나님 사랑은 신명기 6장 4절에서, 이웃 사랑은 레위기 19장 18절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의 계명들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것은 예수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유대교의 전승 속에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주전 2세기의 문서인「희년서」에는 “너희는 그(하나님)를 두려워하고 숭배하며, 형제를 자비와 공의로 사랑하도록 하라!”하고 권면하고 있다.「열두 족장의 유언서」중 단의 유언서에는 “너희의 온 생명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전승이라 할지라도 유대교와 예수 및 초대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 차이는 이웃 사랑에 대한 견해에서 더 두드러지게 된다. 유대교는 이웃을 대체로 유대인으로 한정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유대교의 이웃 개념은 유대인으로 한정된다. 적어도 유대교로 개종한 유대인까지를 포함한 것이지 아직 보편적인 인간애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와 초대교회는 사랑의 대상을 점점 확대하여 보편적인 사랑으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각 복음서들에 반영되어 있다.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공관복음서 본문에서도 이러한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유대교의 전승과 거의 같은 문장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경우는 이웃의 개념을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한정하지 않고 낯선 사람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그래서 가장 큰 계명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첨부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랑은 낯선 대상에게까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웃 사랑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산상수훈 중 마 5장 38-48절에서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의 완전을 본받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본받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결 론
사랑의 계명은 구약의 오랜 역사와 함께 전승되고 발전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구약적인 해석에 집중한 유대교의 율법학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사상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예수는 이 전승들을 수용하여 가장 중요한 계명의 핵심을 가지고 논쟁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전승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이웃 사랑이 유대교와 달리 민족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이웃 사랑을 넘어 낯선 사람,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사랑의 대상의 측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사랑의 보편성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의 대상에 대한 보편성뿐만 아니라 사랑의 질적인 문제도 완성하였다. 사랑에 관한 서기관과의 대화에서 제사보다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사랑이 제의보다 질적으로 우선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는 길임을 강조함으로써 사랑이 타자에 대한 지배가 아니며 타자를 섬김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십자가의 길이 타자가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타자를 위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성서연구 중 수사학적인 연구방법이 있다. 수사학적인 연구 결과로 마가복음은 위기상황에 처한 공동체의 생존모티브가 들어있음이 밝혀졌다. 주후 66-70년의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는 황폐화 되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적대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대전쟁 직후 초대 그리스도교회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회당에서 출교되었다. 이런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생존의 모티브를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마가복음의 본문은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포되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그리고 율법의 근거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선포한다. 이는 예수와 그 제자들이 신앙의 중심에 사랑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마가공동체는 누구를 적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모두를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공동체임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공동체 스스로에 대해 완전한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가공동체는 로마나 유대교나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공동체를 위한 존재가 아닌 다른 공동체와 대상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가복음서가 보여주는 생존의 모티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