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소리
김소운
진해 군항-인구 밀도로는 부산의 십 분의 일이 못될-은 물이 흔하고 모기 많기로 유명한 벚꽃 명승지.
이 진해에서 나는 어려서 몇 해를 자랐다. 여기서 처음 소학교를 다니고. 여기서 첫사랑을 알고-.
내 알뜰이는 골무를 깁고 냉이를 캐는 시골 처녀였다. 집안끼리 공인한 사랑이 건마는 손목 한 번
숫제 쥐어 보지 못하고 연이는 딴 데로 시집을 갔다.
마을 부인네들의 산놀이에 30리 거리를 두고도 우리 집 마루에서 나는 연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시력의 한계를 지난 또 하나의 눈-. 그토록 젊은 순정을 기울였던 연이를 내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한
원인은 내게 있지 않고 연이가 저지른 작은 과실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동경 거리에서 연이의 오빠인 I를 만났다. 그 입으로 연이가 도요하시에 산다는 것.
그 남편이란 사람이 첩을 둘씩이나 거느린 위인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상은 물을 용기도 뱃심도 없었거니와 내가 상상하는 연이의 생활이란 그리 행복된 것이 아니었다.
애처롭고 측은한 생각- 그보다도 아쉽고 그리운 못난 마음에 나는 그 후 도요하시를 지날 때마다
찻간에서 내려서 플랫폼을 한번 거닐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 들었다.
어쩌다가 잠든 사이에 도요하시를 지나는 수가 있으면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송구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방되던 그 해까지 내 이 슬프도록 쑥스러운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몇 해 만에 진해에 들러 연이 오빠 댁에서 저녁 대접을 받게 되었다. 2층에 바둑판을 놓고 연이 오빠와 나는 마주 앉았다.
그 부인은 내 옆에서 과일을 벗긴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또닥또닥 하는 도마 소리, 해방이 되어 연이도 친정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아마 오빠댁 이웃에
살기도 쉬우리라……. 저 도마 소리가 혹시나……?
그때 남편이 측간에 간 새 그 부인의 입으로 연이가 스물여섯 되던 해 일본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무슨 병이던가요?"
"병이라니요, 한이 죽였지요. 아까운 사람이……."
그러면서 휘 하고 한숨을 쉬는 그 올케 앞에서 나는 몰래 무엇을 훔치다 들킨 놈처럼 당황했다.
"스무 해가 지나도록 죽은 것을 모르고 센티멘털을 지독하던 이 싱겁고도 얼빠진 바보 녀석아…….'
나는 주릿대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도요하시의 텅 빈 플랫폼 그-, 밤중의 플랫폼이 파노라마처럼
나를 비웃으며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한국의 명수필』을유문화사, 2006)
김소운/ 1907. 1. 5 부산 영동~ 1981. 시인·수필가·번역문학가.오랫동안 일본에 살면서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본명은 교중(敎重). 호는 소운(巢雲). 필명은 삼오당(三誤堂). 옥성(玉成)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이세[開城] 중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그만두었다.
1923년 〈지상낙원〉의 동인으로 일본 시단에서 활동했다. 1929년 귀국하여 〈눈〉·〈호심 湖心〉등 생활과 현실에 관한 관념시를 발표했다. 193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3월 귀국, 주간지 〈청려 靑驪〉를 펴냈으나 발매금지당했다. 1934년 조선 아동 교육회를 설립하고, 〈아동 세계〉를 펴냈다. 1952년 베네치아 국제 예술가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하던 중, 도쿄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 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코리안 라이브러리〉를 펴냈다. 1965년 14년 만에 귀국했다. 일본인의 지나친 우월감과 우리나라 민족문화에 대한 그른 평가에 대해 격분하여 한국의 민요와 동요·현대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변역 시집으로 〈조선민 요선〉(1933)·〈조선 동요선〉(1933)·〈젖빛 구름〉(1940)·〈조선 시집〉(1943) 등이 있다. 1976년에 3년여 동안 번역한 〈현대 한국문학선집〉을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출판했다. 수필집으로 〈목근 통신 木槿通信〉(1951)·〈마이동풍첩 馬耳東風帖〉(1952)·〈김소운 수필 전집〉(1978) 등이 있다. 특히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모멸과 학대에 대한 민족적 항의를 내용으로 한 수필 〈목근 통신〉은 국내의 〈대한일보〉에 연재된 뒤,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개로 일본의 〈중앙공론 中央公論〉에 실려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7년 한국 번역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