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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문헌으로 고찰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연극
2006년 서울에서는 일부 연극인들이 ‘서울평양연극제’ 창설을 위해 수차례의 토론회를 열렸다. 그 중 ‘제3차 연속토론회’로 되어 있는 ‘2006 한민족연극 100년 토론회’의 취지문을 보면 “민족분단 이후 남북 연극예술의 발전상을 비롯하여 중국과 만주, 연변 및 러시아의 연해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꽃 피워낸 ‘조선연극’의 맥은 한민족의 혈연적 공동체 사상과 역사적 문화적인 동질성을 지키고 발전시킨 빛나는 업적이며, 21세기를 향한 한국연극의 세계화를 위한 소중한 열매이자 비옥한 밑거름으로써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취지문을 쓴 이가 ‘조선연극’을 어떤 의미로 썼는지 짐작은 간다. 하지만 ‘조선연극’이라는 용어를 위와 같이 써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조선연극’은 현대사로 보면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극’, 과거사로 보면 ‘한반도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사의 ‘한반도의 연극’은 ‘한국연극’과 ‘조선연극’으로 구분된다. 필자는 이 두 연극이 하나 됨을 위해 열린다는 ‘서울평양연극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북한 연극의 실체를 안다면, 작품 중심의 연극 교류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문헌으로 고찰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연극》을 통해 북한 연극의 실체를 알아보기로 한다.
북한에서 1956년에 발간된《연극이란 무엇인가》의 4장(章)이 “조선의 연극에 대하여”이다. 이 장은 “1, 조선에서의 현대극의 발단(가, 현대극 수입 이전의 조선 연극. 나, 현대극의 수입. 다. 『신파』와 『신극』). 2, 조선에서의 로동 운동의 장성과 프로레타리아 연극 운동. 3, 八․一五 해방과 진정한 인민적 연극의 발전(가, 八․一五 해방 후 연극 부흥의 왕성한 기세. 나, 낡은 잔재와의 투쟁과 쏘베트 연극의 선진적 경험의 섭취. 다, 인민적 레파토리 창작을 위한 투쟁. 라, 남반부 연극의 타락. 마, 조국 해방 전쟁과 연극. 바, 인민경제 복구 건설과 연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고송이 집필한 《연극이란 무엇인가》의 ‘ 四, 조선의 연극에 대하여’는 “조선에서는 희랍극 이래 구라파에서 二천五백년간이나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연극은 현대극 수입 이전에 존재하지 못하였다.”고 전제하고, ‘현대극의 수입’은 ‘로일전쟁’(1904~5년)을 시점으로 “한일 합병 (一九一O년)을 수행하는 직전의 굴욕적 시기에 진행되였다. 문헌에 의하면 리 인직이 광무 년간 (一八九七 ― 一九O七년)에 창건된 원각사(圓覺社)극장에서 一九O九년에 『설중매』, 『은세계』라는 연극을 상연하였다고 한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신파』(新派)란 무엇인가? 이는 일본에서 일본의 오랜 구극 형식인 『가부기』(歌舞技)에 구라파에서 들어 온 현대극적 내용을 가미한 다시 말하면 『가부기』적 연극 체계에 현대 생활에서 취제한 내용을 담은 『트기』(혼혈아)다.”라고 하고, 『신극』과 ‘프로레타리아 연극’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제4장의 ‘2, 조선에서의 로동 운동의 장성과 프로레타리아 연극 운동’을 발췌한 것이다.
“一九二五년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자 이에 따라 근로자들의 반 합법적 대중조직체의 하나로서 동년 八월 二四일에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 동맹(카프)이 창건되였다. 一九二六년에 채택한 카프의 강령에 『우리는 무산 계급 운동에 있어서 맑스주의의 력사적 필연성을 인정하고 무산 계급 예술 운동에 의하여 봉건적 자본주의 관념을 철저적으로 배격하고 전제적 정치에 항쟁하여 계급 의식을 인식시킬 것』이라고 지적되여 있다. 종전의 『신경향파』문학이 자연주의 기타 부르쥬아적 문학 제 류파를 반대하여 사실주의 문학을 지향하였으며 조선 인민의 생활과 의식에 형성된 현실적 불만에 대한 불평, 반항, 폭동 등을 반영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자연 생장적 문학 운동이였다. 조선 공산당의 조직은 문예 운동에 있어서 맑스―레닌주의 사상에 의거하여야 함과, 문예 운동에 목적 의식성을 부여하고 진정한 사실주의적 창작 방법을 확립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카프가 창건되였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의 조선 연극계는 『신파』와 『신극』의 잡동산이들이 서로 란립 교체하면서 당시 일본에 충일된 말초 신경 자극적인 소위 에로, 그로, 넌센스 연극들이 극장 무대를 채우는 극도한 타락과 비속화를 연출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당시에 상연된 상연물의 몇개 제목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눈물』, 『류랑의 남녀』, 『라이쓰 카레 통역생』, 『코스모스 호텔』, 『너는 미치였지만』, 『처녀 구락부』등등). 이와 같이 타락된 연극의 탁류 속에서 장성하는 로동 계급의 정치 경제적 지향을 반영하는 참다운 연극을 창조하려는 진보적 연극인들의 활동은 카프의 영향과 그 지도 아래 도처에서 일어났다.(…). 一九三二년에 카프의 직접적 지도 아래 극단『신 건설』이 창건되였으며 리 상춘, 박 태양, 강 호, 송 영, 라 웅, 신 고송, 권 환들이 조직 지도 사업에 관계하였다. 극단 『신 건설』의 창건과 아울러 조선 프로레타리아 연극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리론적으로 확립하며 국내 국외의 연극 운동의 경험 등을 소개 교환하기 위하여 잡지 『연극 운동』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의 창간호에 게재된 론문 『조선 프로레타리아 연극 운동의 당면 임무에 대하여』(신 고송)는 그 표제에서 당시의 진보적 연극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잡지는 일제 검열 기관의 야수적 탄압과 계속적인 발행 금지를 당하고 경제적 곤난을 겪으면서 一九三四년 카프에 대한 총검거가 있을 때까지 발간되여 조선 연극 운동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극단 『신 건설』은 一九三三년 전체 카프 성원들의 참가와 서울의 진보적 학생들의 지지하에 조선 연극 력사에서 최초인 대 규모의 전쟁 반대 연극 『서부 전선 조용하다』를 각색 상연하였다. 이 연극의 상연을 전후하여 카프에 대한 근로 인민 대중과 학생층의 광범한 동정과 관심이 증대되며 그의 력량이 장성하여감을 두려워한 일제 경찰은 一九三四에 한 진보적 학생이 『신 건설』에 관련한 『불온』문건을 소지하고 있다는 구실로 소위『신 건설 사건』을 날조하여 가지고 전체 카프 맹원과 그의 동정자들을 전주 감옥에 투옥하였다. 이것이 일제 경찰이 조선의 진정한 애국적 진보적 예술 운동에 대한 『결산적』탄압이였다. 이 『사건』에 검거된 작가 예술인들이 일제의 『재판』을 받고 있는 기간에 반역자이며 간첩이였던 림 화는 일제 앞에 굴복하고 카프 해산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후 八․一五해방까지의 一O년 동안 조선 연극 운동의 일체 진보적 싹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륙 침략 전쟁을 감행함과 아울러 조선 연극 운동은 전반적으로 암흑기에 들어가게 되었다.”(…).《연극이란 무엇인가》에는 김일성의 창작 이야기나 ‘항일혁명연극’에 관한 글이 단 한 줄도 없다. ‘김일성’이란 고유명사는 해방 후 “인민적 레파토리 창작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경애하는 김일성 원수의 항일 무장 투쟁에서 취재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는 글 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김일성’이라는 활자는 ‘마, 조국 해방 전쟁과 연극. 바, 인민 경제 복구 건설과 연극’에도 완전히 빠져있다. 이 책은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으로 있던 1956년에 국립출판사에서 출판한 연극이론서이다. 저자 신고송은 북한연극을 대표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약력을 찾기가 어렵다. 남한에서 발간된 《북한인명사전》(대한매일신보사, 2000. 11. 15)에는 “(직)월북작가(作詞) : 생존여부 불명.(…).”으로 되어 있다.
《연극이란 무엇인가》보다 일주일 전인 1956년 10월 31일에 발간된 《조선 연극사 개요》에는 “三, 현대 연극의 장성. ㄱ, 항일 빨찌산들의 연극. ㄴ, 카프 연극 운동의 앙양.(…)”(차례)이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 한효는 ‘항일혁명연극’이 아닌 ‘항일 빨찌산들의 연극’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 때의 그런 노래와 춤과 연극들은 거의 모두를 김 일성 원수께서 친히 창작하시였음을 물론이요 이를 가르치시고 (연출) 연극을 놀게 한 것(무대감독)까지 모두 다 하시였습니다.”라고 적었다. 《조선 연극사 개요》의 저자 한효은 이 책의 출판과 함께 숙청된다. 《전진하는 조선문학》은 “ 一九五六년 八월 전원 회의를 계기로 전 당적 전 인민적으로 진행된 반종파 투쟁을 통하여 최 창익, 박 창옥을 두목으로 하는 반당 반혁명 종파 도당을 사상 정치적으로 철저히 격파하였다. 문학 분야에서도 이 자들과 결탁되였던 우연 분자 홍 순철, 한 효 등을 대렬에서 축출하고 그 사상 정치적 통일 단결을 더욱 강화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조선 연극사 개요》의 ‘ㄱ, 항일 빨찌산들의 연극’을 발췌한 것이다.
“一九五三년에 김 일성 원수 항일 빨찌산 전적지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던 극작가 송영은 그의 기행 오체르크에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삽입하고 있다. 『그 때의 그런 노래와 춤과 연극들은 거의 모두를 김 일성 원수께서 친히 창작하시였음은 물론이요 이를 가르치시고 (연출)연극을 놀게 한 것 (무대감독)까지 모두 다 하시였습니다. 그 때 내가 본 연극들만 해도 퍽 여러 가지였습니다. 모두가 짤막짤막한 희극들이였는데 미신 타파, 남녀 평등, 혁명 사상 고취 등등의 교양성을 가진 것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소년회에서도 가끔「열 세집」이란 가극을 하였습니다. 조선 一三도를 각각 한 쪼각씩 가지고 나와서 「단결하세! 딘결하세!」하는 노래들을 부르면서 그것들을 한데 모아 맞추어 놓는 재미나는 연극이였습니다.』(「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에서)(…).
송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 일성 부대가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노래와 연극은 따라 다녔다. 부락에서 휴식할 때에나 부대 안 군중 오락 시간에는 물론이요 그보다도 가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고지 우에서도 「하모니카」소리와 합창 소리는 총소리와 같이 언제나 항상 높이 울렸던 것이다. 장백「대덕수 전투」때에도 이 하모니카 소리 때문에 적은 당황하여 갈팡 질팡하다가 몰살을 당하였다. 七도구 령상 쌍산자 전투 때에도 대원들은 온 종일 노래하며 싸우고, 싸우면서 노래를 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一三七페지). 연극은 벌써 전투에서 적을 때려 눕히는 강력한 무기로 되였었다. 여기에 진보적 연극의 가장 높은 자태가 있으며 가장 소중한 모범이 있었다.(…).
一九三六년에 김 일성 부대가 만강(漫江)에 체류하고 있을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송 영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곳에서 일주일 동안 묵고 있는 동안 매일밤 이 동리 소학교 강당 안에서 연예 대회가 열리였다. 관중들은 정말 열광적이였다. 걸상을 받쳐 놓고 널판지를 깔면 이것이 무대다. 담요와 홑이불을 늘이면 곧 이것은 배경과 앞 막(幕)이다. 람프 불을 세 개 달았다. 개막 전에는 간단한 개회사가 있었고 다음으로 김 일성 원수의 특별 강연이 있었다. 그 말씀은 간단하였으나 의미 심장하여서 군중들은 격동되고 고무되였다.』(동상 一三六페지) 여기서는 연극 공연 그 자체가 빨찌산들과 인민들과의 튼튼한 련계 속에서 조직되며 연극의 내용은 항상 인민들을 격동시켰다. 빨찌산들에 의하여 해방되고 또한 연극 공연이 진행된 마을들에서 청년들이 수십명씩 빨찌산에 참가할 것을 탄원하여 나서군 한 일이 결코 우연한 일일 수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은 다만 우리를 감격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감격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는 일들이다. 만강의 인민들은 오늘도 그 때 구경하고 감격했던 연극의 줄거리를 잊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단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 몇 개의 줄거리를 역시 송 영의 기행 오체르크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혈해」(血海)는 三막으로 된 극으로 추측되는데 이것이 「만강」인민들을 그렇게도 격동시킨 연극들 중 하나이다.(…).
「혈해」와 더불어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 중에 「경축 대회」(二막)가 있다. 이 연극은 희극인데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一막은 왜병들의 병영 속인데 왜놈 장교놈들은 큰 술잔치를 벌이고 질탕거리고 있다. 챠뿌린 수염에 은테 안경을 쓰고 가죽 주머니 속에 든 「일본도」를 찼다. 이 놈들은 유격대를 토벌하여 큰 승리를 했다고 해서 소위 「경축 대회」를 벌인 것이다. 놈들이 한 놈씩 일어나서 제가 이번 싸움에 그중 잘 싸웠다는 자랑들을 한다. 유격대라는 것은 허잘 것이 없는 것이라느니 한번만 더 토벌하면 아주 근절을 시킬 것이며 그렇다면 만주제국의 「혹」으로 되여 있는 유격대는 일소될 것이라느니, 그렇다면 천황폐하께서는 번쩍번쩍하는 「금치 훈장」을 주실 것이라고 아주 호기등등이 된다. 이 장면은 아주 우습게 풍자적으로 연출한다. 이럴 때 총성 일방―유격대원들은 성낸 물결 같이 몰려 들어와서 이 놈들을 몽땅 소탕하고 만다. 二막은 산 속 유격대의 진영이다. 밀림 속, 우등불을 피워 놓은 사부(사단 사령부)의 천막 앞이다. 一막에서 일군 장교들을 소탕하고 개선한 유격대원들을 축하하는 정말 경축 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령관의 축하 연설이 있은 뒤 경축 오락 대회가 열린다.(…).
「성황당」(城隍堂)이라는 단막짜리 연극도 또한 많이 상연되였다. 미신 타파를 주제로 한 희극이다. 『가난한 나무꾼 하나가 산에 올라 갔으나 배가 고파서 나무조차 못 할 지경이다. 그럴 때 촌 부인 하나가 제물(제사드릴 음식)을 잔뜩 이고 올라 오더니 성황당 앞에다 벌여 놓고는 무어라고 축원을 하면서 자꾸 절을 한다. 나무꾼은 가만히 성황당 나무 뒤에 숨어 서서 제물을 자꾸 집어 먹는다. 음식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본 촌 부인은 정말 귀신이 령험하여서 먹어 준 줄 알고 펄펄 뛰며 좋아한다. 군중들은 배를 움켜쥐고 웃는다. 그러나 웃고난 뒤에는 “이 세상에는 귀신이란 것이 없는데 없는 귀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절실하게 느낀다……』(동상 一四四페지) 이 밖에도 또 많은 희곡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알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 세 개의 드라마는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가! 이 드라마들로써 우리의 영광스러운 빨찌산 대원들이 고무되였고 혁명에 궐기한 근로 인민이 교양되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들이빨찌산들과 인민들의 련계를 강화하는 데 얼마나 많이 기여하였는가! (…)
항일 빨찌산들의 연극―그것은 우리 진보적 연극 운동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그것은 그 밖의 모든 진보적 연극이 지향하며 그것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그 높이에 도달하였으며, 그의 진실한 모범으로써 모든 진보적 연극을 고무하였다. 카프 산하의 모든 극단들과 개별적 연극인들의 투쟁은 이 연극과 결부되고 있었으며 그의 모범으로써 고무되고 있었다. 그의 모범이 카프의 연극 운동의 앞길을 항상 밝혔으며 가장 곤난하고 암담하던 시기에 있어서조차 그 운동에 희망과 미래를 계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항일 빨찌산들의 연극―그것은 우리 연극사의 진실한 자랑이다. 그것으로 해서 우리 연극사는 더욱 빛난다.”1984년에 발간된 《백과전서(6)》는 ‘연극’(316~317쪽)을 설명하면서, 앞의 ‘카프 연극’을 완전히 배제하고 김일성과 ‘항일혁명연극’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그리고 김일성의 교시,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는 작가도 없었고 작곡가도 없었지만 연극도 하고 노래도 짓고 잡지나 소책자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모여앉아 서로 의논해가지고 각본도 만들고 노래도 지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연극을 보고 군중은 좋다고 하였으며 거기에서 감동된 많은 청년들이 유격대에 막 들어왔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어떻든 우리의 연극이 사람들의 심장을 틀어잡은것만은 사실입니다.》(《김일성저작집》17권, 109페지)”를 인용했다.
2001년에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7)》에서는 [현대연극]을 ‘항일혁명연극’과 ‘항일혁명투쟁시기 국내의 민족연극’으로 구분했다. 여기서는 ‘카프 연극’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항일혁명투쟁시기 국내의 민족연극’에 대해 “항일혁명투쟁시기 국내의 민족연극인들은 일제의 탄압과 세계관의 제한성으로 하여 연극활동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자주시대와 민족해방투쟁현실이 요구하는 반일투쟁주제와 일제타도사상, 항일혁명투사의 전형을 창조하지는 못하였으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진심으로 높이 우러러 흠모하면서 광복된 조국땅에 진정한 조선연극이 개화할 앞날을 바라면서 모진 시련을 이겨냈다.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흠모하는 마음의 공통성으로 하여 항일혁명투쟁시기 국내의 애국적인 연극인들이 벌린 연극운동은 항일혁명연극을 주류로 하는 이 시기 조선연극의 도도한 흐름에 하나로 합쳐 져 민족연극의 명맥을 지켜 나가는데 기여 할수 있었다.”로 끝을 맺었다. 이어지는 [광복후 연극]은 “조선연극은 주체34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된 때로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령도밑에 항일혁명연극의 혁명전통을 계승하여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는 민주주의민족건설에 이바지하는 민주주의민족연극건설의 한길로 발전하게 되였다”로 시작된다. 이것이 북한이 말하는 ‘조선연극’이다. 앞에서 살펴본 《연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八․一五 해방과 연극 부흥의 왕성한 기세’라는 항목에서 “(…). 조선 연극인들을 구출한 것은 위대한 쏘베트 군대가 가져다 준 영광스러운 八․一五 해방이다. 八․一五 해방은 조선 연극을 일제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여 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 연극이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에 립각하여 진정한 인민적 연극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八․一五 해방 후 공화국 연극 사업에 있어서 사상성을 위한 투쟁은 연극 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과업들에 일관되여 있었다. 이처럼 사상성을 위한 투쟁이 하루도 쉬지 않고 강력하게 그리고 꾸준히 지속되었기 때문에 공화국 연극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 올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 책에는 김일성과 항일혁명연극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2001년의《조선대백과사전(27)》은 [광복후 연극]에서 “조국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국내각지와 해외에 흩어 졌던 연극인들이 집결되여 평양은 광복된 새 조선의 연극창조의 중심지로 되였다. 이 시기 연극예술창조에서 이룩된 가장 큰 성과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상을 모신 연극을 창조한것이였다.”라고 했다. 2001년에 발간된《조선대백과사전(18)》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극’ 첫 머리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일찌기 항일혁명투쟁시기에 혁명연극의 빛나는 전통을 이룩하시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그 영광스러운 뿌리에서 활짝 꽃 피여 나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연극은 전면적인 개화기를 맞이하였다.”고 하고 바로 ‘연극의 혁명전통 - 항일혁명연극’을 써 내려갔다.
《조선대백과사전(18)》에 기술된 ‘연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예술’의 일부이다. 이 글은 북한이 2001년에 북한연극, 즉 ‘조선연극’을 시기별로 나눠 기술한 것이다. 이 글에는 ‘새 민주조선건설시기․조선해방전쟁시기․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기초건설시기․사회주의전면적건설시기․사회주의완전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시기․사회주의완전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전환을 가져 오기 위한 시기’로 구분되어 있다. 해방 후의 ‘조선연극’은 《조선대백과사전(18)》의 요약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새 민주조선건설시기] 김일성은 “항일혁명연극의 빛나는 전통”에 기초하여 “광복후 연극예술이 혁명과 건설의 힘 있는 무기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다하도록 혁명발전의 매 시기, 매 단계마다 독창적인 방침과 방도들을” 내놓고 “현명하게” 이끌어 “찬란한 개화발전을 이룩하게” 하였다. 김일성이 밝혀 준 “새 민주조선건설시기 연극을 포함한 문학예술부문의 과업은 일제사상잔재를 뿌리 뽑고 새로운 민주주의적민족문학예술을 발전시켜 인민대중을 애국주의와 민주주의정신으로 교양하는데 힘 있게 이바지하는것이였다.”
김일성은 “무엇보다 먼저 연극예술인대렬을 튼튼히 꾸리도록” 하였다. “북조선예술총련맹 산하조직인 연극동맹이 결성되고 신진예술인들을 교양하기 위한 국립극장부속 연극연구소가 설치되였으며 중앙의 각 연극단들과 도립극장을 통하여 신진예술인들을 양성하는 체계가 나오게 되였다. 오랜 예술인들이 교양 개조되고 신진예술인들이 자라나게 됨으로써 이 시기 연극예술인대렬은 커다란 조직적력량으로 자라났다.”
김일성은 “다음으로 극장들과 구락부를 많이 내오도록 할데 대한 조치들을 취해”주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고르롭게 극장과 구락부들이 건설되였으며 인민들에게 편리하게 그 시설들이 갖추어 졌고 전문극단과 이동예술대들이 조직되였다. 그리하여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국립극장과 각 도립예술극장이 나왔다.” 김일성은 “또한 연극예술을 군중적지반우에서 발전시키며 광범한 인민대중속에 보급하도록” 함으로써 “전국의 각지에 연극소조들이 수많이 조직되여 활발히 운영되였으며 이 과정에 우수한 작품들이 수많이 창작공연되였다. 그리고 순회공연과 연극축전, 연극공연을 통하여 연극작품들이 광범한 인민들속에 널리 보급되였으며 창조경험들이 일반화되였다. 이 시기 연극창작분야앞에 나선 과업은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을 위한 투쟁에 적극 동원하는데 이바지할수 있는 사상예술성이 높은 연극작품들을 많이 창작공연하는것이였다. 이로부터 혁명전통주제와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이 기본주제로 되었다.”
이 시기에 “연극창조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김일성의 “숭고한 영상을 처음으로 무대에 정중히 모신 연극 《뢰성》, 《백두산》이 창작공연된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절세의 애국자”이며 “민족적영웅”이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인 김일성의 “위대한 풍모를 감명 깊게 형상”하였다. “연극창조에서 이룩된 성과는 또한 새 조국건설과 민주개혁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 선 주인공을 형상한 현실주제의 작품들이 활발히 창작공연된것이다. 그러한 작품들로 《성장》, 《복사꽃 필 때》, 《바우》, 《땅》, 《원동력》, 《자매》 등이 있다. 이밖에 조선인민경비대원들의 투쟁모습을 보여 준 《은파산》을 비롯한 인민무력의 불패성을 형상한 작품들, 《하의도》, 《어머니》를 비롯한 남조선인민들의 반미구국투쟁을 형상한 작품들, 《심청전》, 《리순신장군》, 《춘향전》 등 력사물주제의 작품들이 나왔다.” 김일성은 “연극 《심청전》과 《리순신장군》을” 보고 “민족고전작품의 각색과 력사주제의 연극작품을 우리식의 사회주의적사실주의창작방법에 기초하여 창작하는데서 나서는 강령적지침을 밝혀”주었다. “이 시기에 연극무대에서는 또한 다양한 주제의 희극, 연극소품들이 활발히 창작 공연되여 근로자들을 새조국건설에로 고무추동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참고로 ‘새 민주주의건설시기’의 ‘조선연극’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1949년 1월 25일에 발간된《朝鮮中央年鑑》(-1949年版-)의 ‘연극’에 대한 글을 살펴본다. 이 연감은 “2. 演劇 ; 日帝의 奴隸文化政策의 毒牙아래 억매어 있었던 朝鮮演劇藝術은 偉大한 쏘련軍隊의 援助와 人民政權이 樹立된 北朝鮮에 있어서 眞實한 開花를 보게되었던것이다. 實로 北朝鮮에 있어서의 演劇藝術運動은 그 創作的水準과 藝術的力量에 있어서 解放3年동안에 巨大한 飛을 보여주었다. 北朝鮮 演劇運動은 初期에 있어서 一般 文化藝術運動과 한가지로 自然發生的으로 各地에 이러난 自立的劇團들에 依하여 出發되었다. 이러한 劇團들의 數는 實로 헤아릴수 없이 많이 있었으나 演劇藝術의 水準은 이에 並行되지 못하였다.(…). 演劇은 一般的으로 높은水準에 이르지 못하였음에 不拘하고 興行的이며 世紀末的인 日帝의 害毒과 無思想性을 克服하고 民主建設을 爲한 强力한 武器로서 祖國과 人民에 服務하는 演劇으로 出發되었다. 北朝鮮演劇界는 其間 옳은 人民的 演劇을 樹立하기爲한 許多한 鬪爭過程을 거쳐 오늘 祖國과 人民이 要請하는 高尙한 思想的 藝術的 水準에 올으게되었으며 많은 藝術作品을 創造하게 되었다. 現在 北朝鮮에는 9個의 專門劇團과 9個의 移動演藝隊 그리고 職場 農村 學校에 組織되어있는 數千의 演劇同好會가 活動하고있다.(…). 以上列擧한것이 解放後 北朝鮮에 있어서 異彩를 發할만한 重要上演物들인데 특히 이中에서도 市立藝術劇場에서 上演한 //李舜臣將軍//과 國立藝術劇場의 //白頭山// //그女子의 길// //黑人브레트中尉// 等의 作品이 劇藝術分野의 貴重한 收穫으로되어있다. 이 作品들은 北朝鮮演劇이 民族的形式과 民主主義的 內容을 創造 樹立하는 意味에서 高尙한 리어리즘의 形象을 多面的으로 開拓한것이다.(…). 解放以後 1947年末까지의 北朝鮮各劇團과 移動演藝隊의 公演回數 및 觀客數는 다음과같다.”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도표를 풀어쓰면 “1946년도 ; 공연회수 4,636. 관객수 2,833,643. 1947년도 ; 공연회수 3,487. 관객수 3,083,613”이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김일성은 “우리 혁명의 기본요구와 영웅적 우리 인민의 사상미학적요구를 깊이 통찰”한데 기초하여 “이 시기 연극예술앞에 나선 임무와 그 실현방도를 밝혀”주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연극예술을 포함한 문학예술부문앞에 나선 임무는 영웅적 우리 인민의 숭고한 애국심과 견결한 투지와 종국적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뚜렷이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혁명적문학예술작품들로 하여금 인민들을 전쟁의 최후승리에로 힘있게 고무하는 강력한 사상적무기로 되게 하는것이였다.” 김일성은 “연극예술앞에 나선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도록”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모든 극단활동과 극장사업을 전시체계로 개편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밑에 연극예술인들은 소편대공연을 기본으로 하는 전시공연체계를 세우고 전선과 후방을 순회하면서 인민군대와 인민들을 영웅적위훈에로 고무”하였다. 김일성은 “또한 연극인대렬을 튼튼히 꾸리도록”했다. “그리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어려운 환경에서 연극예술인들은 안팎의 원쑤들과의 치렬한 투쟁을 통하여 당성을 더욱 단련하고 대렬의 통일단결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이 나날에 우수한 연극작품을 창작공연 할수 있는 력량으로 강화되였다.” 김일성은 “연극예술의 사상예술성을 영웅적인민의 사상미학적요구에 맞게 높이기 위하여서는 인민들의 생활에 깊이 침투하여야 하며 형식주의와 자연주의적수법을 없애는것이 특히 중요하다는것을 밝혀”주었다.
“일찌기 새 조국건설시기”에 김일성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와 함께 극장”에 나와 김일성의 “의도대로 연극을 발전시킬 결심”을 굳힌 김정일은 “전화의 나날 불후의 고전적명작 풍자극 《패전장군의 말로》를 창작”했다. “조선전쟁에서 당한 미제침략자들의 수치스러운 참패와 비참한 말로에 대한 생동한 형상을 통하여”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를 받는 조선인민군대는 그 어떤 원쑤와 맞서 싸워도 백전백승한다는 사상을 힘 있게 보여 준 고전적명작은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북돋아 주고 그들을 침략자 미제를 격멸하기 위한 싸움에 떨쳐 나서도록 고무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와 크나큰 사랑속에 연극예술인들은 현실을 깊이 연구하는 과업을 전투적이고 기동적인 소편대순회공연활동과 결부하여 수행하였으며 형식주의와 자연주의수법을 반대하는 완강한 투쟁을 통하여 인민군대와 인민들의 사상정신세계를 생동하고 진실하게 반영하며 미제의 만행을 정확하게 묘사하는데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설된 모란봉지하극장과 유리한 지형지물을 리용하여 만든 화선구락부들 그리고 신해방지구에서의 새로운 극장의 창설은 우리 연극예술의 끊임 없는 발전을 확고히 담보해 주었다. 이 시기 연극분야에서 거둔 중요한 성과는 전쟁의 각이한 단계의 구체적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창작된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인민군용사들의 무한한 충실성과 고상한 애국주의정신을 감명 깊게 형상한연극 《명령은 하나밖에 받지 않았다》를 비롯하여 《그가 사랑하는 노래》, 《돌격로》, 《고지의 별들》, 《정찰병》 등과 후방인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탄광사람들》, 력사주제의 《강화도》, 《연안성》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여 싸우는 인민군대와 인민들을 전쟁승리에로 크게 고무추동하였다. 이 시기에 촌극, 재담을 비롯한 연극소품들도 많이 창조공연되였다. 연극작품들은 소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인민군대와 인민들의 고상한 정신세계와 전쟁의 종국적승리에 대한 굳은 신념을 반영하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끝 없는 충실성을 주도적성격으로 뚜렷이 묘사하였다.”
참고로 ‘새 민주주의건설시기’의 ‘조선연극’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1956년 에 발간된《연극이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조국 해방 전쟁과 연극’에 대한 글을 살펴본다. 이 책은 “(…)이 시기에 상연된 연극은 주로 『전쟁도박단』,『수원회담』,『백일몽』등의 단막극이다. 영용한 인민 군대가 수도 서울과 많은 지역들을 해방하기 시작하자 국립 극장, 평양 시립 극장, 청년 예술 극장, 농민 극단, 인민군 예술 극장, 내무성 예술 극장들이 해방된 서울과 기타 신 해방 지구 인민들을 방문하여 八․一五해방 후 공화국 정부와 조선 로동당의 시책아래 고도로 발전된 인민 연극의 성과를 시위하였으며 전선의 장병들을 위문하였다. 이 시기에 『백두산』, 『리 순신 장군』, 『그 녀자의 길』, 『흑인 브렛트 중위』, 『제二 전선의 배후』, 『땅』등등 많은 연극들이 상연되였다.(…)
(…). 전쟁기간에는 주로 이동 활동에 적응한 단막 연극이 많이 상연되였다. 인민군대의 영용성을 묘사한 단막극들로는 『사냥꾼 조』, 『고지의 별』, 『소대 앞으로』, 『그들이 부르는 노래』, 『푸른 신호』, 『돌격조』, 『명령은 하나 밖에 받지 않았다』, 『정각 五시 三O분』등 다수가 있다. 적의 일시적 강점 시기에 있어서 후방 인민들의 투쟁 모습과 증산 투쟁을 묘사한 단막극들로서 『정찰병과 어머니』, 『쌍나무 고개』, 『가을 전선』, 『저수지』, 『겨울의 하룻밤』, 『꽃 나무』, 『아버지의 자기 비판』, 『아름다운 사랑』, 『내 집으로 돌아오다』, 『산으로 가는 길』들이 나왔다. 전쟁 기간중 중앙과 지방에는 지하 극장이 건설되고 전선에서는 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락부들이 설치되여 단막 연극 뿐 아니라 대 공연 형식의 장막연극도 상연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자 각 극장들은 장막 연극도 많이 창작하였다. 장막 연극들 중에는 인민 군대의 영용성을 묘사한 『一二一一 고지』, 『우리 나라의 청년들』, 『바다가 보인다』등과 후방 인민들의 투쟁을 묘사한 『탄광 사람들』, 『청천강반』, 『양짓말 소년들』 등이 있으며 력사극으로 『연안성』, 번역극으로, 『전선』,『전투 속에서의 성장』등이 있다. 조선 인민 군대와 의로운 중국 인민 지원군 부대의 협동 작전 그리고 조중 인민간의 친선은 많은 작품들에서 취급되여 있는바『전우』, 『대낮에 꿈꾸는 사람들』, 『탄광 사람들』들에서 볼 수 있다.”라고 기술했다.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기초건설시기]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전후에 우리 당과 정부앞에 제기되는 정치, 경제, 문화적과업들을 성과 있게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전쟁에서 파괴된 문화선전기관들을 복구정비하며 그 사업을 개선하여야 합니다.》(《김일성전집》16권, 43페지)”. 김일성이 밝힌 “이 시기 연극예술을 포함한 문학예술의 중요과업은 문학예술기관들을 복구정비하고 온갖 부르죠아반동문예사상을 반대배격하며 주체가 확고히 선 사회주의적사실주의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근로자들의 공산주의교양과 사회주의애국주의교양에 적극 이바지하는것이였다.”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밑에 연극분야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철저히 세우며 파괴된 극장, 구락부를 복구확장, 신설하며 그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였다. 연극예술인들속에서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으로 무장하며 창조사업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힘 있게 벌어 져 우리의 연극예술은 사회주의적연극예술로 활짝 꽃 피게 되었다.”
“또한 혹심하게 파괴되였던 전국의 모든 극장들이 짧은 기간에 복구확장되거나 신설되였다.주체47년에 국립연극극장을 모체로 하여 국립제1연극극장과 국립제2연극극장이 나왔으며 인형극창조집단이 강화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중앙극장, 시립극장, 구락부 등의 체계로 극장망이 분포되였으며 전문극단과 연극소조의 공연활동을 정상화 할수 있었다.” 김일성은 “연극일군들의 대렬을 확대하고 그들의 사상예술적수준을 끊임 없이 높이며 연극인 대렬의 사상의지적통일과 단결을 강화하도록”하였다. “주체42년에 국립극장과 국립예술극장에 부속예술학교가 설치되였으며 주체44년에 이 학교들을 통합하여 종합예술학교를 내왔다. 주체45년부터는 종합예술학교에서 배우과, 무대미술과, 조명과를 분리하여 연극학교를 설치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주체48년에 연극영화대학을 창립하였다. 이와 함께 국립극장부속 배우양성소사업이 강화되였다. 또한 연극예술인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낡은 부르죠아미학관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투쟁이 전개되였으며 현실생활에 깊이 침투하는 사업과 기량을 높이기 위한 실기훈련 등이 강화되였다.”
“군중문화사업을 강화발전시킬데 대한” 김일성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전국도처에 연극소조들이 광범히 조직되였으며 전문예술인들이 연극소조에 파견되여 정상적인 지도를 함으로써 군중연극이 개화발전하게 되였다.” 김일성의 “교시와 당의 조치가 빛나게 실현된 결과 공산주의교양에 이바지하는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연극작품들이 창작공연되였다. 이 시기 우리 연극이 받아 안은 크나큰 영광은 연극혁명의 준비가 시작된것이다.” 김정일은 “불후의고전적명작들인 《보천보의 홰불》(1954년), 《우리 분단에서 있은 일》(1955년), 풍자극 《〈북진〉처방》(1956년)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도록 학생예술소조의 연극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전문예술단체에서 창작한 《조국산천에 안개 개인다》, 《유격대의 아들》, 《리수복영웅》을 지도해”주어 “연극예술을 주체시대의 요구에 맞게 높은 사상예술적경지에서 창조하는데서 나서는 리론실철적문제들을” 밝혔다.
“그리하여 우리 연극은 항일혁명연극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대를 이어 계승하는 뜻 깊은 년대기를 맞이하게 되였으며 낡은 틀을 마스고 자주시대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구현한 우리 식의 새 연극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한 투쟁에서 위대한 령도의 계승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연극부문에서 달성한 가장 큰 성과는” 김일성의 “위대한 풍모를 감명 깊게 형상한 《조국산천에 안개 개인다》가 창작된것이다. 연극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중에서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여 “조국광복의 위업을 이룩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풍모와 수령님의 품속에서 평범한 인간들이 주체형의 공산주의혁명투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감명 깊게 형상하였다. 성과는 다음으로 항일혁명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영웅적투쟁과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한 《불사조》, 《공산주의자》, 《동지들》,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 등이 창작된것이다.”
“이 작품들은 담고 있는 생활내용이 다르고 각기 고유한 예술적특성을 가지면서도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끝 없는 충실성과 불굴의 혁명정신,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혁명적락관주의,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혁명적동지애 등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정신도덕적특질을 깊이 있게 그려냄으로써 근로자들의 생활과 투쟁의 교과서로 되였다. 이와 함께 우리 나라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반영한 다양한 주제의 우수한 작품들도 왕성하게 창작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 농촌에서의 사회주의적협동화과정을 반영한 《새길》, 《우리 마을》, 인간개조에 관한 문제를 반영한 《그립던 곳에서》, 《열두삼천리벌》, 《위대한 힘》, 사회주의전취물을 파괴하려는 반혁명분자들을 적발폭로하고 놈들의 멸망의 불가피성을 확인한 《인민의 이름으로》, 조국해방전쟁주제의 《어랑천》, 《우리를 기다리라》, 조국통일주제의 《분계선마을에서》,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인형극도 빨리 발전하였다. 주체46년에 꾸려진 평양시립극장 인형극단은 단막극 《밭곡식의 왕》, 《혹 뗀 이야기》, 《우쭐한 토끼》, 장막극 《흥보와 놀보》 등을 훌륭히 창조공연하였다. 또한 현대적주제를 대담하게 개척하였을뿐아니라 무대적형상측면에서도 성과를 달성한 장막극 《달나라를 찾아서》를 내놓아 이 시기 인형극 발전의 성과를 풍부히 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 연극은 다양한 주제와 형태에 걸쳐 개화발전하였으며 높은 사상예술적성과로써 근로자들의 사상문화교양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사회주의전면적건설시기] 김일성은 “혁명발전의 새로운 요구에 맞게 연극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업과 그 실현을 위한 방도들을 명확히 밝혀”주고 “현명하게” 이끌었다. “이 시기 연극예술을 포함한 문학예술의 중요과업은 온갖 반동적인 사상독소를 반대배격하고 로동계급적선이 똑똑히 선 혁명적문학예술작품들을 많이 창작함으로써 근로자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온 사회를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는데 적극 이바지하는것이였다.” 김일성은 “우선 연극예술부문에 대한 지도체계를 개편하도록”하였다. “그리하여 문예총 산하조직으로서 연극인동맹이 나왔으며 극단들의 기구체계도 천리마현실과 연극예술 발전의 요구에 맞게 더욱 합리적으로 개편되였다. 평양학생소년궁전 극장과 사회안전성극장이 새로 건설되고 함흥시, 개성시 등에도 현대적시설을 갖춘 새극장들이 세워졌다.”
김일성은 “또한 연극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사업체계와 사업방법을 새롭게 세우며 연극예술인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는 사업을 강화하도록”하였다. “연극예술인들의 예술창조활동방법을 새로운 사업체계의 요구에 맞게 부단히 개선하였으며 그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우고 사회정치활동과 현실침투를 강화함으로써 혁명화, 로동계급화를 다그쳐 나갔다. 연극예술인들은 현실침투와 순회공연을 통하여 예술창조의 생활적밑천을 마련하는 동시에 혁명화, 로동계급화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를 인민경제 각 분야에 구현할데 대한 당의 방침이 빛나게 관철됨으로써 극장관리운영과 창조사업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또한 연극창조에서 민족적 특성을 진실하게 구현하며 민족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문제, 부르죠아반동사상을 반대하는 사상투쟁을 힘 있게 벌릴데 대한 문제 등이 빛나게 해결되였다. 또한 연극에서 우리 당의 군중로선이 철저히 관철됨으로써 연극소조들에서 집체창작기풍이 확립되고 연극소조원들이 생산에서 리탈되지 않고 공연활동을 벌리게 되었다.”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밑에 이 시기 연극예술은 전면적개화기에 들어 섰다. 이 시기 연극예술에서 달성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김일성의 “위대한 풍모와 혁명일가분들을 형상한 작품들을 창작하여 근로자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에 성과적으로 이바지한것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초기혁명활동시기, 항일무장투쟁시기 그리고 조국해방전쟁시기의 혁명활동을 폭넓게 반영하는데 주되는 힘을 넣었다. 그 대표적작품으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의 “위대한 풍모를 빛나게 형상한 연극《승리의 기치 따라》가 근로자들의 커다란 감동속에 성과적으로 창작공연되였다. 이 시기에 또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의 불굴의 혁명투쟁과 숭고한 혁명정신, 고상한 혁명가적풍모를 진실하게 보여 준 연극 《푸른 소나무》,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이시며 열렬한 혁명투사이신 강반석녀사의 혁명투쟁과 혁명적풍모를 반영한 연극 《위대한 어머니》가 창작되였다. 이 시기 연극예술에서는” 김일성의 “고전적로작 《혁명적문학예술을 창작할데 대하여》에서 밝혀주신 혁명적작품을 창작할데 대한 교시를 받들고 항일혁명투쟁을 주제로 한 우수한 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하여 근로자들에 대한 혁명전통교양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 연극 《해바라기》와 《태양의 딸》, 《해발》등이 있다.”
일제시대 김일성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던 주체형의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형상을 창조한 작품들은 어떤 역경속에서도 추호의 동요없이 위대한 수령님께 일편단심 충성 다하는 고결한 혁명정신,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공산주의 미래에 대한 열렬한 사랑, 원쑤에 대한 끝 없는 증오심, 뜨거운 혁명적동지애 등을 깊이 있게 형상하였다. 이 시기에 또한” 김일성의 “고전적로작 《천리마시대에 맞는 문학예술을 창조하자》를 받들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현실을 반영한 연극 《붉은 선동원》, 《아침노을》, 《새살림》, 《꽃은 계속 핀다》 등을 창작하였다. 이밖에도 계급교양주제의 《대하는 흐른다》, 《어느 한 농장에서》, 《인민을 위한 숨은 투쟁》, 조국해방전쟁주제의 《습격》, 《전사들》, 《영웅 조군실》, 《1211고지》, 《첫땅크병》, 남반부인민들의 반미투쟁을 반영한 《그날을 두고》, 력사주제의 《서희장군》, 시극 《보통강의 서사시》, 경희극 《산울림》 등 천리마시대 우리 인민의 사상미학적요구에 맞는 다양한 주제와 양상의 작품들이 수많이 창작되여 찬란히 개화발전하는 연극예술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다.”
[사회주의완전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시기]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 시기 연극예술이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는 력사적위업수행에 힘 있게 이바지하는 혁명적연극예술의 참다운 본보기로 더욱 활짝 꽃 펴나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였다. 김일성이 제시한 “이 시기 연극예술을 포함한 문학예술부문의 중요한 과업은 참다운 혁명적문학예술의 본보기를 창조하며 혁명적인 작품들을 더 많이 창작함으로써 근로자들을 주체의 혁명적세계관으로 무장시키며 온 사회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는데 적극 이바지하는것이였다.” 김정일은 “이 시기 연극예술이 자기앞에 나선 과업을 원만히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연극무대에 올림으로써 《성황당》식 연극의 본보기를 창조하고 연극혁명을 빛나게 실현하도록”하였다.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불후의 고전적명작〈성황당〉을 재현하여 무대에 올려 놓음으로써 지난 날의 연극과 전혀 다른 우리 식의 새로운 연극을 가지게 되였으며 력사적으로 내려 오던 종래의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연극의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였습니다.》(《김정일선집》9권, 166~167페지). 연극예술은 무대예술가운데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 형식과 형상방법이 고질적인 낡은 틀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연극예술은 새 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에 맞게 발전할수 없었다. 그러므로 연극혁명을 하여 주체시대에 맞는 새로운 혁명연극을 창조하는것은 우리 시대 연극예술의 운명과 관련되는 근본문제로 나서게 되였다. 연극혁명의 기본요구는 연극예술의 내용과 형식, 창조체계와 방법의 모든 령역에서 우리 시대와 인민대중의 지향과 정서에 맞으며 현실을 립체적으로 보여 주는 새로운 주체형의 혁명연극을 창조하는것이였다.”
“연극혁명의 력사적과업”은 김정일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주체67년에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재현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빛나게 수행되였다. 연극은 종교와 미신으로부터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해방할데 대한 심각한 사회정치적문제를 종자로 하여 이것을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풀어 나감으로써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연극은 주로 부정인물만 등장시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부정인물에 대한 풍자적웃음으로 일관시키던 종래의 풍자극과는 달리 긍정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극적인 요소도 있게 하고 풍자적웃음과 함께 눈물도 있게 하는 새로운 양상의 풍자극으로 완성되였다. 혁명연극 《성황당》은 작품의 사상적내용과 예술적형상에서, 극형식과 형상방법에 있어서 종래의 모든 연극들과 구별되는 우리 시대 연극혁명의 새로운 리정표로 되는 기념비적작품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불멸의 업적을 년대기적인 서사시적화폭으로 재현한 작품들도 왕성하게 창작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 《혁명의 새 아침》, 《위대한 전환》이 있다. 이와 함께 《행복》, 《불바람》, 《비단섬》, 《5호대지》,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 《적구 수리개》, 《푸른 숲의 갈매기》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수많이 창조공연되였다.”
[사회주의완전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전환을 가져 오기 위한 시기] 김정일은 “이 시기 연극예술이 사회주의의 완전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영웅적투쟁에 더욱더 적극 이바지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었다.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연극혁명과정에 이룩된 주체적 연극리론을 옹호고수하고 창작실천에 철저히 구현하여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우리의 연극예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것입니다.》(《김정일선집》9권, 154페지). 이 시기 연극예술의 중요한 과업은 연극혁명과정에 이룩된 주체적연극리론을 옹호고수하고 창작실천에 철저히 구현하여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연극예술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가는것이였다.” 김정일은 “무엇보다 먼저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성황당》식연극으로 재현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 있게 밀고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인 《혈분만국회》, 《딸에게서 온 편지》, 《3인1당》, 《경축대회》가 독특한 양상을 가진 《성황당》식연극으로 훌륭히 재현되였다. 그리하여 《성황당》식연극혁명의 혁신적성과를 확대발전시키는데서 거대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5대혁명연극이 빛나게 완성됨으로써 우리 연극예술은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그 주체적면모를 더욱 완벽하게 갖추게 되였다.” 김정일은 “이 시기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성황당》식연극으로 재현하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조직지도”하는 “과정에 이룩하신 혁신적성과들을 집대성”하여 “주체77년 4월 20일 고전적로작 《연극예술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고전적로작이 발표됨으로써 우리 시대 연극예술건설과 창조에 관한 사상리론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한 불멸의 총서가 마련되고 연극예술전반에 주체의 인간학의 높은 경지에 올라 설수 있는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였다. 이 시기 연극예술은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성황당》식 연극으로 재현하는것과 함께 장막극, 중막극들인 《청춘대학》, 《동백꽃》, 《불 타는 항구》, 경희극들인 《산울림》(《성황당》식연극으로 개작), 《청춘의 행복》, 《하나로 잇닿은 마음》, 《큰 잔치》, 단막극들인 《우리 새 세대》, 《어버이품》, 《어머니의 목소리》, 《사랑의 품》, 《우리는 한마음》, 사이극들인 《신통한 생각》, 《앞선 사람》, 《군민은 한마음》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완전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 나선 근로자들의 고상한 정신도덕적풍모와 투쟁모습을 생동하게 형상한 수많은 성과작들을 무대에 올렸다.”
김정일의 “현명한 령도밑에 연극예술은 1980년대의 성과를 공고히 하면서 1990년대에도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와서 《승리의 기치따라》를 《성황당》식연극으로 재현하여 무대에 올리였으며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 농업문제의 빛나는 해결을 위해 기울이신 불면불휴의 령도와 숭고한 풍모를 반영한 혁명연극 《소원》을 훌륭히 창조하였다. 혁명연극 《소원》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직후에 창조된 작품으로서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롭고 인자하신 모습과 경애하는 수령님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는것을 자기 삶의 전부로 여기고 그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행동으로 옮길줄 아는 처녀주인공의 참다운 충성심을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근로자들속에서 커다란 감명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다양한 미학적요구에 맞게 현실주제작품들도 그 어느때보다도 왕성하게 창작되였다. 특히 《고난의 행군》과 강행군시기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서 높이 발휘된 당과 수령에 대한 끝 없는 충실성과 수령결사옹위정신, 우리 당의 붉은기정신과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 혁명적군인정신과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당정책에 대한 결사관철의 투쟁기풍, 우리 인민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를 형상한 수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단만극들인 《어머니의 마음》, 《달 뜨는 강변에서》, 《첫 자리》, 《수풍의 숨결》, 중막극들인 《녀교수》, 《시대가 묻는다》, 장막극 《오늘을 추억하리》, 《추운 날》, 경희극 《동해의 소금꽃》, 《귀한 손님》, 《깨여 진 궁합》, 재담 《내 나라, 내 조국의 모습》, 《병사들이 지나간 뒤》, 《한가정》, 촌극 《온 나라가 축복한다》, 《염소소동》, 구연극 《고향의 샘물》, 사이극 《제발로 걷자》 등이 있다. 이 시기에 또한 영화예술인들이 출연하는 경희극들인 《대흥사람들》, 《축하합니다》, 《끝장을 보자》, 《편지》, 《동지》, 《축복》, 《약속》 등이 창작되여 연극무대를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특히 경희극 《편지》, 《동지》, 《축복》, 《약속》은 현 시기 당정책관철에서 일군들이 지녀야 할 풍모와 자세, 오늘 인민군군인들속에서 높이 발양되는 혁명적군인정신과 뜨거운 혁명적동지애를 훌륭히 형상한것으로 하여 이 시기의 특출한 성과작의 하나로 되고 있다. 이 시기 이룩된 다른 하나의 성과는 시대의 요구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웃음극들을 창작공연한 것이다. 연극부문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새로 세워진 웃음극단에 토대하여 우리 근로자들의 보람찬 투쟁속에서 벌어 지는 밝고 명랑한 생활들을 《사랑합시다》, 《부모들을 잘 공대합시다》, 《국수》 등의 독연, 구연, 만담, 사이극 형태로 형상함으로써 근로자들의 사업과 생활에 랑만을 더해 주는 친근한 길동무, 생활의 거울로서의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 시기 인형극분야에서도 새로운 성과가 이룩되였다. 새로 꾸려진 인형극단에서는 《울리지 않는 종》, 《셋째의 착한 마음》, 《돌 먹은 꿀꿀이》, 《토끼의 발도장》, 《은동이》, 《곰이 받은 선물》등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우리 식의 작품들이 성과적으로 창조공연되였다. 작품들은 어린이들의 동심에 맞게 내용은 물론 미술과 무대적기교, 인형조종 등 모든 점에서 우리 나라 인형극의 대표작들로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전국연극축전, 조선인민군군무자예술소조경연, 전국화술소품축전, 전국로동자예술소조축전, 전국농업근로자예술축전 등 다양한 축전과정을 통하여 극예술의 발전과 그 담당자들의 예술적기량이 한 계단 높아 졌다. 이렇듯 이 시기에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옮긴 《성황당》식연극과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수많이 창조공연함으로써 연극예술은 근로자들을 수령결사옹위정신과 붉은기정신,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과 혁명적군인정신으로 교양하고 그들을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에 힘 있게 떨쳐 나서게 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끝으로 21세기 ‘조선연극’을 알아보기 위해, 2001년 10월 10일에 발간된《조선중앙년감》에 수록된 연극 관련 글을 살펴본다. 이 연감은 “극예술부문에서도 성과를 달성하였다.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 창작가, 예술인들은 경희극 《웃으며 가자》를 시대의 명작으로 훌륭히 창작형상하여 90여회에 걸쳐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경애하는 장군님께 무한히 충직했던 인민배우 유원준의 마지막 영화창조의 나날들을 감명깊게 보여 준 경희극 《영생의 품》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희극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독연과 재담, 만담을 비롯한 특색있는 희극작품들을 새로 창작완성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근로자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고 랑만에 넘쳐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도록 하는데 적극 기여 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위 연감에 기술된 글에는 국립연극단에 관한 것은 없고, 경희극과 국립희극단의 ‘독연과 재담, 만담을 비롯한 특색있는 희극작품’이 ‘극예술부문’의 ‘성과’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조선연극’을 잘 나타내 준다. 2006년에는 ‘국립연극단’ 이야기가 꽤나 많이 나왔다. 그것은 2006년 5월 23일이 ‘창립 60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립연극단’ 60년사(史)를 거론한 《조선예술》등을 보면, ‘《성황당》식 혁명연극’, ‘혁명연극’이라는 김일성 부자 우상화를 위한 연극 외에 ‘촌극, 재담’에 관한 이야기가 고작이다. ‘조선중앙TV’가 전하는 뉴스도 “국립연극단 연극인들이 창립 60주년을 맞아 최근 국립연극극장에서 화술소품공연을 가졌다”는 이야기 뿐이다.
1996년에 발간된《조선대백과사전(3)》은 국립연극단을 “1946년 5월 23일에 조직된 중앙예술공작단을 전신으로 하여 창립되였으며 1947년 1월 9일에 국립극장으로, 전후시기에는 국립연극극장으로, 1972년부터 국립연극단으로 고쳐 부르게 되였다. 이 극단의 사명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혁명적가정을 형상한 작품들을 비롯하여 사상예술성이 높은 혁명적작품들을 창작공연함으로써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에 힘있게 이바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2006년의 창립기념공연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아리랑》’보다는 못해도 ‘《피바다》식혁명가극’ 정도는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화술소품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연극’은 서울의 연극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연극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접한 북한의 글들을 정독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연극’의 실체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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