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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장 - 2019.6.16) 2019.6.23.목- 사도행전 20장(현대어성경) 20:31 잘 살피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함께 보낸 그 3년을 잊지 마십시오. 밤낮으로 여러분을 보살피고 여러분을 위해 흘린 내 많은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돌보심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된 사람들이 상속받는 그 모든 몫을 여러분에게도 줄 것입니다. 33 나는 지금까지 돈을 탐한 일도, 훌륭한 의복을 탐한 일도 없습니다. 34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내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했고 심지어 나와 함께 지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공급해 왔습니다. 35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언제나 여러분에게 본보기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6 바울은 연설을 다 끝내자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37 그들은 작별을 슬퍼하며 모두 한 사람씩 바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38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애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바울을 배가 있는 곳까지 전송하였다. 사도 바울의 평상심平常心을 생각하니 이순신 장군의 부동심不動心이 떠오른다. 한산패전 이후 일본 실권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승산 없는 이순신과의 해전을 중단하라고 엄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2천 여명의 군사로 5만이 넘는 조선군과 싸워서 이긴 일본 천하의 명장 와끼자카 야스와루가 이끄는 최정예 수군이 제대로 싸워 보도 못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의해서 한산도에서 완패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연전연승에 조선 함락을 앞둔 풍신수길의 충격과 분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후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전량 해전에서 궤멸당한 후 위기를 느낀 조정에서는 염치없이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그러나 남은 전선이라곤 배설이 숨겨둔 13척이 전부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조차 수군을 패하고 육전에 임할 것을 명하나 이순신은 수군의 건재와 싸울 의지를 천명하고 전선 13척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도성을 향해 항진하고 있던 구루지마 마치후사 도도 다카도라 등 이끄는 전선 500여척을 화원반도 해남과 진도 사이 물이 울부짖는 울둘목(명량)에서 가로막아선다. 500대13, 그야말로 거인과 아이와의 싸움. 더군다나 조류가 왜선에 유리하여 조선군의 승산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필사즉생 必死卽生 필생즉사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장군의 부동심 하나만으로 고작 13척을 가지고 500척의 대선단을 막아선 형색이 무척 참혹해 보인다. 일거에 조선수군을 박살내기 위해 사정없이 밀어닥치는 구루지마 군선을 막아선 배 한척이 있으니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대장선, 나머지 12척은 그저 싸우는 척 하다가 여차하면 꽁무니를 뺄 요량. 백천간두에 百尺竿頭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왜 선단을 맞아 이순신 장군 최선봉에 태산같이 서서 화포와 총포를 날려 죽기 살기로 막아낸다. 맹자 공손추公孫吜 편 "내가 꼭 어찌 이길 수 있으랴? 능무구이이의 能無懼而已矣 다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필히 태풍의 변방으로 몸을 숨기면 태풍에 잠기고 말 터 고요한 태풍의 눈을 향해 돌격하려는 듯 사정없이 화포를 쏘아댄다. 마치 장판교에서 장팔사모를 비껴 낀채 조조의 100만 대군을 노려보는 장비처럼 대장선의 중심에서 딱 버티고 서 있는 그 한사람의 부동심 不動心에 “지지언 기차언 志至焉 氣次焉 마음이 나타나면 기운이 뒤따른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장수와 병졸들이 죽음과 두려움 속으로 돌격한다. 심지어 여차하면 도망갈 심산이었던 거제 현령 안위와 미조항 첨사 김응암도 부동심 不動心의 치명적인 마법이 걸린 사람들처럼 미친 듯이 귀신처럼 적을 향해 달려드니 13척의 모든 전선과 수군이 죽음으로서 전투에 임한다. 그들 모두는 병사가 아니라 악귀야차요 자살폭탄이 되어 적과 맞서 귀신처럼 싸우게 된다. 물귀신이 돕는 것인가? 스스로 돕는 자, 하늘이 도우시는가? 마침 그 옛날 적벽에서 제갈량이 풍향을 바꿔 화공火攻으로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것처럼 단숨에 조류의 흐름이 바뀌니 일거에 전세가 역전된다. 공포도 두려움도 죽음도 전염되는 것, 조류에 밀리고 화포에 부서지고 한 사람의 부동심에 놀라 왜선끼리 치고 박고 도망치기 급급하다 100여척의 배가 깨지고 무너져 물이 울부짖는 바다 명량 곳곳이 돌연 울부짖는 생지옥이 된다. 장군 스스로 차실천재 此實天宰. 하늘이 돌보셨다 하니 그 위태로운 형세를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으리요. 실로 이 전투는 한 나라의 존망을 내 걸고 하늘과 귀신과 사람이 도와 이겨낸 천신만고 千辛萬苦의 승전이었다. 명량해전 이후 남원 전주를 거쳐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던 왜군의 기가 꺾여 부산 울산 순천 등지에 남하하여 왜성을 쌓고 수성하기에 급급했고 국내외 정세에 열 받은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만 급사하고 만다. 반면에 조선군은 기적적인 승리 앞에 사기가 고양 되고 결사항전하게 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노량해전을 끝으로 칠년 왜란도 종언을 고한다. 그후 일본학자들이 수십만 군대와 천여척의 전선으로 무장하고서도 패전한 이유를 들기를 이 전쟁은 일본과 이순신과의 전쟁이요 그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패전했다고 술회하는 것처럼 죽기를 각오한 사람의 열정과 희망 그리고 부동심이 지켜낸 위대한 승리였다. 만일 이순신 그 한 목숨을 저 바다에 뿌릴 부동심 不動心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이 나라는 어디에 있을지 아찔한 일이다. 일본 역사가 아리모토는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한 바 있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징키스칸도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두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러했듯이.. 이순신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셨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특히 고난苦難과 의義, 부동심 不動心에 관한 말씀을 설파하셨던 맹자 고자 15편 “생역아소욕 의역아소욕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나는 살기를 원하고 또 의롭게 살기를 바란다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 는 맹자의 호연지기 浩然之氣 의 기개 흉중에 바위라도 쪼갤 수 있는 번개같은 부동심不動心을 품고 500척의 왜선단과 싸워 이긴 명량대첩, 전무후무한 이 전투를 우주라도 삼켜버릴 한 사람의 태산 같은 부동심 不動心이 지켜낸 장엄한 승리라 부르리라. 조주가 스승 남전에게 “도 道란 무엇입니까?” 스승 답하시기를 “平常心是道 평상심시도” 평삼심이 바로 길道이다 “산에 내려가서 아랫마을의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 이천년전 바울은 먼저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마치 백척간두의 싸움에서 자기자신을 바쳐 자신과 왜적과 싸워 나라를 구한 후세의 이순신장군처럼 필사즉생 必死卽生 필생즉사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것이고 살고자하면 반드시 죽는다. 낙천지명 고불우 樂天知命 故不憂,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맡기니 근심이 없느니라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비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이 일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말하며 묵묵히백척간두 百尺竿頭의 아픈 세상 속에 이 세상의 구원과 주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 그 분을 가르켜 우리는 열 두 직계 제자 이상의 제자, 예수님의 골수를 받은 제자의 표상, 사도使徒 바울이라 부른다. 2019. 6. 23(일) si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