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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선제 공격
-침략 전쟁에 대한 수비戰 아니라 은인자중의 준비 끝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세계최강국을 선제공격하여 한반도를
확보한 위대한 전쟁이었다.
한민족 최고의 전쟁은 신라의 對唐決戰
민족사 5대
결전
韓民族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침략을 받으면 決死抗戰하는 전통이 있다. 이런 기질 덕분에 세계최강의 나라, 최고의 문화 옆에서도 민족적
自我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韓民族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다섯 번의 決死抗戰을 치른 기록이 있다.
*612~645년: 고구려의 對隋, 對唐 항전. 612년 영양왕 때의 살수대첩, 645년 보장왕 시절의 안시성 싸움으로
대표된다. 세계 최강국인 수와 당을 상대로 혈전을 벌여 한반도가 중국화되는 것을 막았다. 을지문덕과 양만춘 등이
영웅이다.
*670~676년: 신라의 對唐결전. 당이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마저 속국화하려 하자 최전성기에 있던
세계최강국의 정예군을 상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전쟁을 벌여 이김으로써 한반도를 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250년간 지속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열었다. 韓民族과 韓國語가 이 決戰으로 만들어졌다. 金庾信과 文武王이 지도자였다.
*1231~1270년: 고려의 對夢抗戰. 세계최강 기마군단을 보유한 몽골군은 아홉 차례나 침략하였으나 武臣정권이 이끌던 고려
지도부는 강화도로 들어가 결사항전, 40년을 버티었다. 몽골군을 상대로 가장 오래 저항한 기록을 남겼다. 몽골도 이런 투지를 높이 사 항복 후의
고려 왕조를 우대하였다. 고려 武臣 정권, 僧兵, 삼별초 등이 영웅이다.
*1592~1598년: 세계최강의 육군인 일본군을
상대로 한 국제전쟁에서 宣祖의 조선은 水軍과 義兵이 버티는 사이 明의 도움을 받아 이겼다. 李舜臣, 柳成龍, 義兵 등이 영웅이고, 선조의 전쟁
지도도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1950~1953년: 세계최강의 육군국인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을
받은 한국은 軍官民이 李承晩을 중심으로 뭉쳐 저항하였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파병되어 침략 의도를 분쇄,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았다. 한국전을 계기로 대만이 살고, 일본이 경제부흥, 서독은 재무장, NATO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한국은 戰後 경제발전과 민주화에도
성공, 자유의 방파제 겸 자유진영의 모델 하우스 역할을 하였다. 미국은 군사비를 세 배로 늘리고 병력을 倍增시켜 본격적인 對蘇 군비경쟁을 시작,
40년 뒤 공산진영이 무너지게 하였다. 한국전에서 韓美軍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버틴 덕분에 세계 수십억 인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니
韓國戰은 세계가 이긴 전쟁이다. 李承晩, 국군, 트루먼, 맥아더, 릿지웨이 등이 영웅이다.
영악하고 슬기로운
대전략
다섯 차레의 결사抗戰은 모두 當代 최강의 군사강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고 그 영향도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프로
군대끼리 싸우는 유럽 식 전쟁이 아니라 軍官民이 한덩어리가 된 총력전이었다. 戰線이 한반도로 설정되어 우리는 익숙한 地形과 잛은 보급선을 이용,
반대 조건의 침략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韓民族은 국력에 맞는 수비형 전략을 채택하였다. 해외원정 식의 만용을 부렸다면 한민족은 멸망하였을
것이다.
다섯 차례의 전쟁 중 결과가 가장 좋은 것은 신라의 對唐결전과 대한민국의 한국전 승리이다. 韓民族뿐 아니라 東아시아 및 세계
전체의 평화, 자유, 번영에 기여한 승리였다. 그런 점에서 7세기 말의 신라 사람들과 20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세계사적 영웅들이다. 가장
위대한 세대이다. 계급투쟁론에 물든 상당수 국사학자들과 일부 교사, 일부 정치인, 일부 언론인은 민족사의 2대 쾌거인 신라의 對唐결전과
삼국통일, 대한민국의 韓國戰 승리와 戰後 근대화를 폄하, 북한정권을 감싼다. 그런 역사파괴의 결정판이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이다. 민족의 자랑을
민족의 수치로 만드는 이 자들이 바로 역적이다.
다섯 번의 결전 중 국가의지로써 스스로 전쟁을 결심하고 준비를 거친 뒤 결정적 시기를
노린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전쟁은 신라가 唐을 친 對唐결전이 유일하다. 신라 지도부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도 참아가면서 이 전쟁을
준비하였다. 羅唐 동맹을 유지하기 위하여 갖은 고통을 분담하였고, 당이 백제를 점령한 뒤 이 땅을 신라에 넘겨주지 않고 직할지로 관리는가 하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엔 신라를 당의 속국으로 대우하는 것도 견디어내어야 했다.
당과 결전하기 위한 외교적 포석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과도 화해, 배후를 안정시키고,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였다. 정보에도 밝았다. 지금 티벳 지역의 토번이 당을 공격하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당을 선제공격 하였다. 신라의 전쟁 목표는 당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제한전의 목표에
충실하였으므로 국력을 넘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兩面전쟁을 강요당한 唐은 패권에 도전하는 토번 정벌전에 집중하고 독립만
추구하는 신라에 대하여는 공존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악하면서도 슬기로운 신라의 대전략이었다. 신라의 對唐결전이 한민족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전쟁이었다면 병자호란은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불러들인 점에서 최악이다. 전쟁을 결심하였던 신라와 전쟁을 불러들인 조선은 극단적 대비로서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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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정치로 극복한 신라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
隱忍自重(은인자중)이란 말은 칼을
가슴에 품고(忍)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력을 기르고, 신중한 처신으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단어를 보면
연상되는 인물과 나라가 있다. 쿠데타를 준비해가던 朴正熙의 모습, 그리고 삼국통일을 준비해가던 新羅의 모습이 그것이다.
삼국중에서
가장 약체였고 침략을 가장 많이 당한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사기의 통계를 분석한 역사학자 孫晉泰에 따르면(한국민족사개론. 을유문화사) 신라는
倭로부터 27회, 백제로부터 40회, 고구려로부터 17회, 말갈로부터 7회, 낙랑으로부터 4회, 가야로부터 3회 총98회의 침공을
받았다. 신라가 먼저 공격한 경우는 20회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신라였다. 특히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세력으로부터 국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했다. 고구려가 漢族과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韓民族의 미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하여 死鬪를 벌이고 있던 그 시기에 신라는
倭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 韓民族의 존속과 활동 공간으로서 한반도를 확보한 데는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이 있었다.
신라가 98회의
침공을 받은 데 비해 20회의 선제공격밖에 가하지 않은 것은, 이길 전투만 골라서 함으로써 불필요한 國力소모를 줄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은인자중하면서 국력을 키운 다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약체로 출발한 신라의 逆轉勝이고 허세를 배격한 실력주의의
성공이었다. 가장 약했던 신라가 은인자중하면서 실력을 기르더니, 가장 적은 회수의 전투로써 가야, 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제압해간 과정은
감동의 드라마이다.
삼국사기 列傳에 등장하는 신라인 56명중 20여명이 殉國한 사람이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다해야 하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孝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忠孝를 함께
하는 인간의 도리이다.'
신라 56왕중 암살 등의 이유로 王位를 찬탈당한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하다. 이는 신라의 王權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新羅本紀에는 정치관련 기사가 전체의 48.3%나 된다. 백제는 29.8%, 고구려는 36.4%이다. 이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정치행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는 의미이다. 新羅史 연구의 권위자 申瀅植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신라는 정치기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어 王權의 강화나 제도의 정비 등 정치적 발전에 큰 진전을 본 나라였으며, 전쟁에서 가장
적은 출혈을 보았으므로 비교적 정치적 안정과 문화의 개발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배층이 정치를 잘해서 내부단합과 이에 기초한 생산력과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던 덕분이다. 신라는 또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나라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좋은 지리적 조건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逆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내부 단합력이 원동력이었다.
660년,
唐의 장수 蘇定方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귀국하여 당 고종에게 보고한다. 고종은 왜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蘇定方은 이렇게
설명하였다(삼국사기에서 인용).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겨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내부단합을 이루는 것이다.
상하관계에 질서와 의리와 인정을 심어 외부의 충격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대가 달라져도 변함이 없는 정치의 본질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과 반목을 부채질 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로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1300년 전 신라를 배워야 할
것이다.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나라
申炯植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 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냈고, 신라는 倭와 싸워 한반도의 남쪽을 지켰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의 잦은 시련은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발전과 王權강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전쟁을 민족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삼국통일이 요행수로 되었다고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남북통일의 전략을 다른 곳에서 배울
필요가 없다. 신라의 三國통일이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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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자중 끝에 선제공격
唐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신라가 얻은 것
서기 611년 백제 武王은 사신을 隨(수)나라로 파송하여
煬帝(양제)를 만나 隨가 고구려를 칠 때 협조하고싶다고 자청했다. 煬帝는 기뻐하면서 부하를 무왕에게 보내 협의하도록 했다. 그 이듬해 수 양제는
遼河를 건너 고구려를 치게 되었다. 무왕은 국경의 경비를 엄하게 하고 말로써는 隨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양다리를 걸치고 기동하지 않았다. 隨는
이 전쟁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했다. 수가 망하고 唐이 일어났다. 隨의 지배층이 가졌던 백제에 대한 불신감은 그대로 唐의 지배층에 인계되었다.
7세기 백제와 신라는 피를 피로 씻는 공방전을 벌인다. 백제와 신라는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패권국가 唐과 동맹하려는 경쟁을
벌인다.
백제 무왕 28년(서기 627년)에 왕은 조카 福信을 入唐시켜 唐의 도움을 청했다. 당 태종은 이 자리에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한다. 이즈음부터 唐은 신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기 643년 唐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에 맞추어
신라는 5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의 水口城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하는 사이 백제가 신라의 서쪽으로 쳐들어와서 신라는 일곱 개 城을
빼앗겼다. 唐도 고구려에 패퇴했다. 신라는 唐과의 우호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했던 것이다. 唐의 지도부는 신라의 이 義理를 고맙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서기 648년 선덕여왕의 명령을 받은 金春秋는 入唐하여 당태종과 함께 羅唐동맹을 맺는다. 신라가 당과
힘을 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에는 평양 以南 땅을 신라가 갖기로 약조한 것이다. 이 동맹관계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라 지도부가 손해를 감수하고 唐과의 약속을 지킨 代價이기도 했다. 국제관계에서도 의리와 신용은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미 동맹 관계도 羅唐 동맹과 비슷하다. 羅唐 동맹이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듯이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에서도
한미 동맹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신라처럼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이 어려울 때 배신한다든지 미국을
敵처럼 대하지나 않는지 되돌아볼 때이다. 만약 미국으로부터 우리가 배신자처럼 찍힌다면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용을 잃었던 백제처럼
결정적인 시기에서 결정적인 외면을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 보는 우리의 작은 손해는 통일기에 큰 득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開戰의 타이밍
신라는 당의 힘으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언젠가는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당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숙적 일본과 화해하여 배후를 안정시키고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포용하였다. 唐 내부
정세도 주시하면서 선제 공격의 타이밍을 계산하였다. 역사 저술가 鄭淳台 씨가 정리한 開戰의 경과는 이렇다(조갑제닷컴 연재 '문무대왕이 가다'에서
발췌).
<668년 고구려의 패망 후 唐(당)은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는
물론 그때까지의 동맹국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함에 따라 新羅의 문무대왕은 對唐(대당)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그것이 670년 4월에
전개된 압록강 북방의 요새 鳳凰城(봉황성) 공격이었다. 이때 공격군의 지휘관은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신라군·고구려 부흥군 각각 1만 명이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670년 4월4일 봉황성에서 이근행 휘하의 말갈군에 승리한 직후 唐軍 주력이 반격을 개시하려 하자 바로 압록강을 건너 南下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문무대왕은 669년 9월의 唐-吐藩(토번: 티베트) 전쟁 발발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던 것 같다. 당시 唐의 수도 長安(장안)에는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이 당의 벼슬을 받고 常駐(상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김흠순)과 중국어에 능통한 파진찬 金良圖(김양도)가 謝罪使(사죄사)란 명목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사죄사는 신라의 백제 故土
잠식에 대해 唐고종이 분노하자,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지만, 唐고종은 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가두는 폭거를 자행했다.
그렇다면 唐고종이 외교사절까지 투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은 누락되었지만, 김흠순과 김양도는 당연히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둘러싸고
전개된 唐-토번 전쟁 추이를 주시하며 唐軍의 이동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그 상징적 인물이 義相(의상) 스님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長安 남쪽 불교의
성지였던 終南山(종남산)의 至相寺(지상사)에서 華嚴學(화엄학)을 공부하던 義相(의상) 스님이 갑자기 귀국해 문무대왕을 만났던 것이다. 義相은
唐의 감옥에 갇힌 김흠순·김양도 등과 접촉해 서역을 향한 唐軍의 병력 이동상황을 청취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상 스님은
中國華嚴宗(중국화엄종)의 제3祖(조)에 오르는 전후의 시기에 개인적 출세를 포기하고, 급거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安東都護府의
최고사령관(都護)이었던 薛仁貴(설인귀)는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靑海(청해)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3000리나 되는 머나먼 행군거리였다. 靑海湖(청해호)는 바다가 아니라 지금의 靑海省의 省都(성도)인 西寧(서녕·씨닝)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Main trunk‧ 主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섬서성(장안)→감숙성 또는 청해성을 西進해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 중심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東로마제국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靑海는 실크로드의 '허리'
부분으로서 이곳이 막히면 唐으로선 東西무역의 이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唐고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를 부랴부랴 靑海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은 설인귀가 唐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린 제1급 장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唐軍은 670년 8월 大非川(대비천: 靑海湖 남쪽)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최고지휘관인 설인귀만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던 참패였다.
그 결과 서역, 즉 지금의 신강위구르自治區에 있던 唐의
安西4鎭이 모두 토번군에게 떨어졌다. 신강위구르自治區라면 우리나라 광역시의 西區나 東區의 규모가 아니라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광활한
사막(南部)과 초원(北部)지대이다. 필자는 2003년 신강의 南部지역을 답사했는데, 여객기·전세버스·기차를 번갈아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
오아시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만 13일간이나 걸렸다.
문무왕 10년(670) 5월, 唐고종은 左監門(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말갈의 장수 李槿行(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4만 병력을 또다시 한반도로 투입했다. 6월 고간과 이근행의 唐軍은, 일시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이때까지 임진강 이북 지역의 전투는 고구려부흥군이 담당하고, 신라군은 백제 故土 점령작전에 집중했다. 6월, 文武大王은
당군에게 쫓기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에다 집단 이주시키고, 8월에는 보장왕의 庶子인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公州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和議(화의)를 제의했다.
和戰(화전) 양면책의 구사는 문무대왕의 常用수법이었다. 이 해 7월, 신라는 백제 故土의 82개 城을 점령함으로써 지금의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민들을 대거 신라 內地(내지)로 이주시켰다. 백제 유민에 대한 徙民(사민)정책은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들을 선동해 對신라戰에
동원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671년 7월, 문무대왕은 서역戰線에서 한반도로 막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설인귀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이를 반박한 천하명문 '答설인귀書'를 보냈다. 唐고종은 670년 8월의 大非川 전투의 패장인 설인귀를 유배하려 했다가 功(공)을
세워 명예회복을 하라며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것이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10월, 신라의 水軍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唐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70여 척을 노획했다. 이로써 당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예성강 전투의 패전으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당 지상군은 이후 약 1년간 南下할 수 없었다.
文武大王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문무대왕은 당군의 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전개하던 사이에 백제
故土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고, 長槍幢(장창당) 등 對기병부대를 창설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10월, 웅진성에 파견되어 있던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신라의 공세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어 672년 2월, 신라군은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해 웅진도독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에 당도 결전을 벌일 의도를 노골화했다. 672년 7월에 東州道행군총관 고간이 漢人(한인) 기병 1만
명, 李槿行이 말갈·거란병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再진입했다. 이때 고간-이근행 軍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쳐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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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과 영혼으로 쓴 민족사
최고의 名文
答薛仁貴書
韓民族이 고대국가를 세운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에 대하여 事大정책을
썼지만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독자적인 文明을 이룬 것은, 중국에 동화하여 사라진 수많은 민족과 비교할 때 주목할 만한 일이다. 韓中 관계에서
한민족이 지금처럼 당당하였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國力이 커졌고 韓美동맹이 건재한 덕분이다. 중국의 거대한 발전이 동북아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런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실리적이고, 슬기롭고, 비장한 외교 정책과 국민의 단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韓民族의 중국에
대한 태도의 기본 노선을 결정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통일과정에서 신라는 실리적이고, 자주적이며, 슬기로운 對唐외교를 펼쳤다. 당시의
신라 지도부가 가졌던 고민의 일단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名文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唐將(당장) 薛仁貴(설인귀)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强首(강수)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써진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덕분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다. 이 글은
檄文(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사활)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평화냐 전쟁이냐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羅唐(나당)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大軍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羅唐은 공동의 敵(적)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敵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鷄林(계림)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金庾信(김유신)·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자존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를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나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인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만약 평화를
선택했더라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決戰(결전)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死生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答薛仁貴書'인 것이다.
일본에서 親신라 정권 탄생 지원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대당)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유민)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下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영향력 下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系(계) 도래인들을 움직여 壬申(임신)의 亂(난) 때 일본의
天武天皇(천무천황) 세력을 지원, 親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天武天皇 이후 약 30년간 日本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天武가 반포한 大寶律令(대보율령)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古代(고대)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城(성)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천명)을 어기고, 天時(천시)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둔전)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薛仁貴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약속을 어긴 것은 唐'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답서)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선)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덕분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한병, 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賊臣(척신) 福信(복신)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부성)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적성)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호구)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勝勢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血肉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칙지)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유덕민)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노상)에서 눈을 만나 人馬(인마)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도호) 劉仁願(유인원)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 衣食(의식)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피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혈육)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군관민)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수모를 참고 견딘
이유는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唐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會盟(회맹)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倭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 명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白村江(백촌강,지금의 금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孫仁師(손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白沙(백사)에 정박하고 백제의 精騎兵(정기병)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陣(진)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北을 치자 任存城(임존성)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兩軍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城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杜大夫(두대부)가
말하기를, '勅旨(칙지)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麟德(인덕) 원년(664)에 (唐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은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웅령)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지금 公州市의 就利山)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唐은 망해 버린 백제를 唐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敗者(패자)와 勝者(승자)를 같이 취급하는 唐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이겨야 했던 전쟁
<蕃漢(번한)의 모든 군사가
蛇水(사수)에 총집합하니 南建(남건,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城中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唐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갖고 있던 비열성을 唐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唐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 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 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결국 唐은 676년 서해의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 해군에 패배,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지금의 만주
지역으로 철수시킴으로써 평양~원산 선 이남의 지배권을 신라에 넘겼다. 그 뒤 고려, 조선의 북방정책으로 두만강~압록강까지 한민족의 생존공간이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