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치면
전주터미널 앞 허름한 지하 목욕탕의 수면방에서 온갖 종류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눈을 붙히다가 참지 못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보면 하늘은 시커멓게 구름이 끼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순창 가는 첫 버스로 강진으로 가 택시로 들머리인 덕치면 치안센터에서 내리니 기어이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하는데 소설에서 읽었던 6.25 때의 대빨치산 망루가 눈길을 끈다.
손톱만한 감들이 떨어져 있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가다 등산로 안내판을 발견하고 빗물이 철철 흘러가는 계곡가를 올라가며 오른쪽 능선으로 붙는 길을 찾아보지만 울창한 덤불로 차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과수원을 통과하고 잡초들을 헤치며 빗물이 흘러 내려오는 좁아진 황토 길을 따라가다 나무들이 성긴 사면으로 들어가면 어둡고 후텁지근해 땀이 줄줄 흐른다.
나무들을 젖혀가며 가파른 사면을 한동안 올라가 파묘 터를 지나서 힘겹게 능선으로 붙으니 앞이 트이며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산죽 사이로 흐릿한 족적이 나타난다.
▲ 덕치 치안센터
▲ 망루
▲ 계곡
- 천마봉
비를 머금은 산죽들을 헤치며 550봉으로 올라가면 가시덤불들만 빽빽하고 성하의 울창한 잡목들이 앞을 막아서며 베어진 나무들이 곳곳에 버려져 있어 성가시게 한다.
숲을 사면으로 우회해서 어렵게 안부로 내려가니 잠깐 시야가 트이며 비구름에 가려있는 천마봉이 모습을 보이고 이어지는 진녹색 덤불지대가 눈에 들어와 걱정이 된다.
울창한 산죽들을 뚫고 무덤들을 지나 지형도 상 회문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약550m)에서 두릅나무들을 헤치며 남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덤불은 사라지고 흐릿한 족적이 이어진다.
검은 암릉들을 왼쪽으로 길게 우회하며 능선으로 붙어 산죽들로 덮힌 가파른 바위지대를 넘고 넓은 정상에 무덤 한 기와 헬기장이 있는 천마봉(774.8m)으로 올라가니 안개만이 자욱하다.
바위 틈에 있는 삼각점(갈담316/1984재설)을 확인하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다는 정상에 서면 '조평선생사패지'라 쓰인 철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비구름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아쉬워진다.
▲ 비구름에 가린 천마봉
▲ 천마봉 정상
- 회문산
무덤가에서 찬 막걸리를 마시고 산죽 사이로 뚜렷한 산길을 따라 초계변씨묘가 있는 744봉을 넘어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소문때문인지 줄줄이 나타나는 무덤들을 지난다.
휴양림에서 등로가 올라오고 이정판이 서있는 619봉을 넘어 더욱 뚜렸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바삐 따라가면 앞에 회문산의 정상부가 구름모자를 쓰고 듬직한 모습으로 서있다.
고도를 높혀가며 갈림길에 닿아 남쪽으로 꺾어 미끄러운 너덜길을 지나서 빨치산의 주무대였던 회문산(837m)으로 올라가니 '큰지붕'이란 정상판이 서있고, 짙은 안개 속에 산불감시시설이 을씨년스러우며 거센 바람만 불어온다.
갈림길로 돌아와 뚜렷한 산죽길을 따라 안부로 내려서고 뾰족 솟은 장군봉을 바라보며 가파르게 남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작은 폭포처럼 검은 암벽에서 빗물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밧줄이 걸려있는 바위지대를 타고 장군봉(780m)으로 올라가니 몸을 휘청거리게 하는 강풍이 불어오고, 구름이 왔다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잠깐 잠깐씩 회문산과 여분산 쪽으로 몽환적인 광경을 보여주며, 멀리 천황지맥과 성수지맥의 산봉들이 어렴풋이 가늠된다.
▲ 회문산 정상판
▲ 회문산 정상
▲ 장군봉 암벽
▲ 장군봉 정상
▲ 장군봉에서 바라본 회문산
▲ 장군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산줄기
▲ 장군봉에서 바라본 천황지맥과 성수지맥의 산봉들
- 752.6봉
바위 틈에서 바람을 피해 마가목주를 겯들여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뿌리기 시작하는 빗줄기를 맞으며 억새가 울창한 헬기장으로 내려서서 강진의 백련산줄기를 기웃거려 본다.
몸을 바짝 낮춰서 키를 넘는 빽빽한 산죽들을 뚫고 힘겹게 752.6봉으로 올라가면 무성한 산죽 속에 삼각점(갈담456/1984재설)이 숨어있고 맹렬하게 비바람이 몰아친다.
미친 년 머리카락 휘날리 듯 바람에 마구 춤을 추는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내려가서 험한 암릉을 길게 우회하며 성하의 밀림에서 헤메다가 간신히 왼쪽의 능선을 찾아간다.
무덤들이 있는 곳에서 표지기들이 달려있는 오른쪽으로 꺾어 능선을 잘 찾아 내려가니 덤불은 사라지고 뚜렷하고도 완만한 산길이 계속 기분 좋게 이어진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맞으며 오른쪽으로 임도가 지나가는 물넘어재를 건너고 519봉을 올라 왼쪽 사면 길로 편하게 564봉으로 올라가면 안동권씨 묘가 있고 멋진 전망대 바위가 있지만 지금은 무용지물이다.
▲ 헬기장에서의 강진쪽 조망
▲ 물넘어재
- 깃대봉
안부에서 다시 547봉으로 올라 남서쪽으로 방향을 꺾어 노란 망태버섯들이 피어있는 완만한 길 따라 물 고인 참호를 만나서 넓은 임도가 지나가는 사실재로 내려간다.
굵은 가시나무들을 헤치며 능선으로 붙어 구슬땀을 흘리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매봉으로 능선이 길게 갈라지는 헬기장 봉(약550m)을 넘고 이정표가 서있는 신광사재로 내려가니 좌우로 뚜렷한 길이 갈라진다.
잊을만 하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한동안 가파른 산길을 지나 632봉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의 깃대봉 갈림길에 누군가 돌덩어리를 나무에 묶어놓아 표시를 해놓았다.
오른쪽으로 꺾어 뚜렷한 등로를 따라가니 암릉 전망대가 나오는데 앞에 세자봉과 호남정맥의 연릉들이 펼쳐지고 운암제와 쌍치면 일대가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인다.
바위지대들을 넘고 폐묘 터를 지나 산불초소와 삼각점(갈담451/1984복구)이 있는 깃대봉(644.0m)으로 올라가면 역시 조망이 좋으며 운암리쪽으로 등로가 뚜렷하게 나있다.
▲ 망태버섯
▲ 사실재
▲ 사실재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
▲ 사실재에서의 용골산쪽 조망
▲ 신광사재
▲ 깃대봉 오르며 바라본 세자봉
▲ 깃대봉 오르며 바라본 운암제와 쌍치면 일대
▲ 깃대봉 정상
- 세자봉
갈림길로 돌아와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길 따라 봉우리를 넘고 벌써부터 서서이 어두어지기 시작하는 숲을 바삐 지나 가파른 능선을 쉬지않고 올라간다.
여분산과 세자봉이 갈라지는 공터의 686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뚜렷하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길 따라 넓은 헬기장이 있는 여분산(774.3m)으로 올라가니 산불초소가 있고 돌무더기 사이에서 오래된 삼각점(순창421/재설1980)이 반겨준다.
갈림길로 뛰어 내려와 안부에서 평지처럼 이어지는 완만한 숲길을 서둘러 걸어가면 멀리 세자봉이 모습을 보이고 쏴 하고 바람이 불며 나무들을 뒤흔들어 마치 우렁찬 계곡처럼 소리를 낸다.
굴곡 많은 산길에 진땀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넓은 헬기장으로 되어있는 세자봉(700.9m)으로 올라가서 지형도에도 없는 삼각점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아까운 시간만 보낸다.
뚜렷한 산길을 뚝 떨어져 내려가다 왼쪽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버리고 잡목들을 헤치며 능선으로 붙어 암릉을 따라가니 밤재로 이어지는 꾸불꾸불한 도로가 잘 보이고 마지막 종착지인 용추봉 너머로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흐릿하게 펼쳐진다.
▲ 여분산 정상
▲ 여분산 정상판
▲ 세자봉 정상
▲ 666.2봉 오르며 바라본, 밤재로 이어지는 도로
- 용추봉
바위지대들을 지나고 삼각점(순창403/1981재설)이 풀섭에 숨어있는 666.2봉으로 올라가면 능선 쪽으로도 내려가는 족적이 보이지만 일몰이 다가와 확실한 등로로 되돌아온다.
삼각점이 표기된 557.3봉은 어디인지 모르는 채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 소리를 들어가며 이정판들이 서있는 21번 국도상의 밤재로 내려서니 고갯마루는 비에 축축하게 젖어있어 적막하다.
절개지를 피해 오른쪽으로 도로를 내려가다 능선으로 붙어 목장의 철망을 만나고 안부에서 뚜렷한 산길을 타고 용추봉(560m)으로 올라가면 호남정맥과 만나며 오늘의 산행은 끝이 난다.
굵어진 빗줄기를 맞으며 다시 밤재로 내려가 쌍치 택시를 부르고 추위를 달래려 독한 마가목주 한 컵을 마시고 앉아있으니 술기운이 급하게 올라오며 종일 비에 떨었던 몸이 나른해진다.
금방 올라온 택시를 타고 기사 분과 호남정맥 종주하던 이야기를 나누며 정읍역으로 달려가 젖은 옷을 대충 갈아입고 뜨거운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부르튼 몸뚱이를 달랜다.
첫댓글순창, 그 쪽에도 빨치산이 횡행했던 모양입니다. 빨치산이면 전 그저 지리산인줄만 알구..^^ 전 그 날 일요일에 집에 있었는데 비가 무척이나 퍼부어 설마 이 날씨에 산에 가시려나 했더니 어김없이 산에 들어가셨네요. ㅎㅎ 사진을 보니 초반부엔 비가 안내린 모양입니다. 비올 땐 카메라 꺼내기도 불편하고.. 10시간여 동안 비 맞으시면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6.25때 전북도당사령부가 여분산자락에 있다가 나중에 회문산으로 옮겼습니다. 노동학원도 있었다고 하네요. 국군의 토벌을 피해서 한밤에 마을사람들과 함께 임실과 장수의 경계인 오봉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탈출했지요. 위원장인 방준표는 간호병인 애인과 함께 나중에 지리산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이태씨의 남부군을 한번더 읽어야겠습니다. 전쟁중 지리산과 회문산 일대에서 남쪽 군경은 6000여명이, 빨치산은 만여명이상이 죽었고 주민들은 부지기수로 죽었다고 합니다. 민족의 큰 비극이지요...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인간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중심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속으로 들어와 建國이념이 된 것이다." 조갑제 기자가 쓴 글인데 흥미롭습니다.
사실 해방후 남쪽 좌익은 소수의 공산주의자를 빼고는 대개 좌익의 동조자 아니였나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이승만과 친일파를 비롯한 남한의 극우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흔드니 많은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이 좌경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불만층이지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거지요.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나왔네요...^^ 개인적으로 조갑제같은 극우보수세력은 정말 싫습니다.
그당시 어떤 지방에는 경찰서가 세개가 있었다고 그러지요? 본래의 경찰서, 서북청년단과 소방서. 호출장을 막 보내고 불응하면 몽둥이 찜질이 다반사였습니다. 반이승만노선은 빨갱이라는 등식이 공공연히 횡행했으며 때리는 쪽이 애국자였다고 하지요... 한대 맞고 나온 젋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번 당한 사람은 진짜 빨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아 현 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면 좌파. 빨갱이로 몰고가지요. 한심스럽기도 하고 광기가 번득이는 미친 사회입니다.
이번 순창을 다녀와서 이태씨의 "남부군"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20년전에 두번인가 읽었지만 그때는 산을 잘 몰라 현실감이 안들었는데 지금은 빨치산들이 다녔던 산들과 마을들 도로들을 웬만큼 아니 참으로 재미 있네요... 빗속에 후딱 다녀온 회문산이 전북 빨치산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아늑한 곳이었다는 사실도 지금에서야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산행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군장을 차리고 쌀을 짊어메고도 사면을 타고 다니며 한밤에 몇십킬로씩 행군을 했으니... 이념을 위해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맞아 죽은 그당시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작고하신 저희아버님께서 십대의 나이에 총들고 경찰병력으로 장수와 진안..임실근처에서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결국엔...빛바랜 옛사진 한장이 임실 국립묘지에 안장될수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전엔 꿈도 못꾸는 현실이었는데 고..노무현 대통령 시절(2005~6년에 법이 실행되어서 )에 국립묘지가 늘어나고 돌아가시면 안장될수 있게끔 과거사 진상규명이 확실했습니다. 근데 왜? 일제식민지 과거는 청산이 안되는지.. 작금의 정치를 보면 보수노선 가진 분들이 싸그리 욕먹는데요...건전하고 건강한 보수는 꼭 존재해야만 합니다. 달이 있으면 해가 있듯이요...그게없으면 독재사회니까요.
오늘 국회를 보니 건강한 보수는 간데없고 부와 권력에 눈먼자들만 득실거리고 민주주의 의 후퇴가 불을 보듯 뻔하네요.. 무조건 양비론으로 몰아가는 양심없는 진드기 언론들이 선량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으니.. 아직도 그들의 주장이 옳은양 신문펼치고 계신 분들이 아주 많네요...국민의 눈과 귀가 올바를때... 위정자들의 권력과 부는 모래성임을...
식민과거 청산의 실패의 근원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그 뿌리입니다. 항명한 군인이 정권을 잡은게 정당화되니, 통일후에도 경제력없는 독립운동가들은 정치를 할 수 없었던거지요. 영호남의 감정도 정권유지를 위해 박통시절 날조된 언론폐해의 대표적 사례지요....돈없는 노통의 실패(찻잔의 폭풍)도 그 맥락으로 보입니다.
돈없다는것....부인하려고 해도 작금의 현실이라 가슴이 답답합니다. 날치기 미디어법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데.. 예전의 독립투사분들은 좌익으로 몰려 일제 앞잡이 순사놈들에게 고문당하면서 얼마나 피눈물 흘렸을까...그리고 80년대 초에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위험을 감수하며 먼저 걸어가신 그분들의 정신을 되새겨 봅니다. 답답한 마음에 오늘도 이스리 한잔 해야겠습니다.
첫댓글 순창, 그 쪽에도 빨치산이 횡행했던 모양입니다. 빨치산이면 전 그저 지리산인줄만 알구..^^ 전 그 날 일요일에 집에 있었는데 비가 무척이나 퍼부어 설마 이 날씨에 산에 가시려나 했더니 어김없이 산에 들어가셨네요. ㅎㅎ 사진을 보니 초반부엔 비가 안내린 모양입니다. 비올 땐 카메라 꺼내기도 불편하고.. 10시간여 동안 비 맞으시면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6.25때 전북도당사령부가 여분산자락에 있다가 나중에 회문산으로 옮겼습니다. 노동학원도 있었다고 하네요. 국군의 토벌을 피해서 한밤에 마을사람들과 함께 임실과 장수의 경계인 오봉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탈출했지요. 위원장인 방준표는 간호병인 애인과 함께 나중에 지리산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이태씨의 남부군을 한번더 읽어야겠습니다. 전쟁중 지리산과 회문산 일대에서 남쪽 군경은 6000여명이, 빨치산은 만여명이상이 죽었고 주민들은 부지기수로 죽었다고 합니다. 민족의 큰 비극이지요...
아~~ 잘못 알았습니다. 전북도당위원장인 방준표는 장수 백운산에서 국군과 교전하다가 권총알을 다 쓰고 권총을 분해해서 사방으로 버린뒤 수류탄으로 자결을 했다고 합니다.
방준표는 경북 출신의 철도노동자였는데 월북해서 모스크바에 유학을 다녀온 정통엘리트(공산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인간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중심을 기초로 하는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속으로 들어와 建國이념이 된 것이다." 조갑제 기자가 쓴 글인데 흥미롭습니다.
조xx는 "우편향인사" 맞지요???
사실 해방후 남쪽 좌익은 소수의 공산주의자를 빼고는 대개 좌익의 동조자 아니였나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이승만과 친일파를 비롯한 남한의 극우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흔드니 많은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이 좌경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불만층이지 골수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거지요.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나왔네요...^^ 개인적으로 조갑제같은 극우보수세력은 정말 싫습니다.
그당시 어떤 지방에는 경찰서가 세개가 있었다고 그러지요? 본래의 경찰서, 서북청년단과 소방서. 호출장을 막 보내고 불응하면 몽둥이 찜질이 다반사였습니다. 반이승만노선은 빨갱이라는 등식이 공공연히 횡행했으며 때리는 쪽이 애국자였다고 하지요... 한대 맞고 나온 젋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번 당한 사람은 진짜 빨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아 현 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면 좌파. 빨갱이로 몰고가지요. 한심스럽기도 하고 광기가 번득이는 미친 사회입니다.
넘 흥분하지 마삼ㅎㅎㅎ....어짜피 지배자(=승리자/가진자)의 논리에 의한 세상이니...좌우로 롤러코스터만 안타고 "중용"으로 갔으면 합니다... 보수가 갑자기 중도의 탈을 쓰니 그게 우습지요. 가진자가 안(못)가진자들을 좌로 모는게 안타깝슴다. 실작한 노동자도 모두 좌로 몰아대는군요. 어려서부터 무심코 학교에서 배우고 시험보고 선택을 강요당한 흑백(ox)논리가 일케 무섭게 바꾼것 같습니다.
이번 순창을 다녀와서 이태씨의 "남부군"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20년전에 두번인가 읽었지만 그때는 산을 잘 몰라 현실감이 안들었는데 지금은 빨치산들이 다녔던 산들과 마을들 도로들을 웬만큼 아니 참으로 재미 있네요... 빗속에 후딱 다녀온 회문산이 전북 빨치산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아늑한 곳이었다는 사실도 지금에서야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산행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군장을 차리고 쌀을 짊어메고도 사면을 타고 다니며 한밤에 몇십킬로씩 행군을 했으니... 이념을 위해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맞아 죽은 그당시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보시고 나서 저도 좀 빌려주삼^^ 죽음이 닥치면 저희도 그정도는 할 겁니다.
맞아요. 죽기살기로 하면 하루밤사이에 몇십키로도 갈겁니다. 지도책 옆에 펼쳐놓고 단숨에 다 읽었네요.^^
그 당시 겨울에 등산화가 있었나, 오리털이 있었나.. 고무신 신구 지리산을 한겨울에 누빌려면.. 진짜 죽기 살기 아니면..^^
고무신도 없어서 무명천으로 발을 감싸고(감발) 삐삐선으로 풀어지지 않게 매었다고 합니다. 그 삐삐선이 살을 파들어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하지요. 지금 산행은 너무 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작고하신 저희아버님께서 십대의 나이에 총들고 경찰병력으로 장수와 진안..임실근처에서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결국엔...빛바랜 옛사진 한장이 임실 국립묘지에 안장될수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전엔 꿈도 못꾸는 현실이었는데 고..노무현 대통령 시절(2005~6년에 법이 실행되어서 )에 국립묘지가 늘어나고 돌아가시면 안장될수 있게끔 과거사 진상규명이 확실했습니다. 근데 왜? 일제식민지 과거는 청산이 안되는지.. 작금의 정치를 보면 보수노선 가진 분들이 싸그리 욕먹는데요...건전하고 건강한 보수는 꼭 존재해야만 합니다. 달이 있으면 해가 있듯이요...그게없으면 독재사회니까요.
오늘 국회를 보니 건강한 보수는 간데없고 부와 권력에 눈먼자들만 득실거리고 민주주의 의 후퇴가 불을 보듯 뻔하네요.. 무조건 양비론으로 몰아가는 양심없는 진드기 언론들이 선량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으니.. 아직도 그들의 주장이 옳은양 신문펼치고 계신 분들이 아주 많네요...국민의 눈과 귀가 올바를때... 위정자들의 권력과 부는 모래성임을...
분배가 무시된 "빈익빈 부익부"가 조장되어 한쪽으로 몰리면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양분되는 사회분열로 가고...그게 또 다른 좌우대결로, 결국은 다양한 사회가 아닌 찢어진 사회가 되면서 점점 사회병리현상이 심화되다가 결국은???
식민과거 청산의 실패의 근원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그 뿌리입니다. 항명한 군인이 정권을 잡은게 정당화되니, 통일후에도 경제력없는 독립운동가들은 정치를 할 수 없었던거지요. 영호남의 감정도 정권유지를 위해 박통시절 날조된 언론폐해의 대표적 사례지요....돈없는 노통의 실패(찻잔의 폭풍)도 그 맥락으로 보입니다.
돈없다는것....부인하려고 해도 작금의 현실이라 가슴이 답답합니다. 날치기 미디어법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데.. 예전의 독립투사분들은 좌익으로 몰려 일제 앞잡이 순사놈들에게 고문당하면서 얼마나 피눈물 흘렸을까...그리고 80년대 초에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위험을 감수하며 먼저 걸어가신 그분들의 정신을 되새겨 봅니다. 답답한 마음에 오늘도 이스리 한잔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