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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90년대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오빠(?)들의 열풍이 대단합니다.
과거엔 밀리언셀러도 종종 존재했던 음반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수만장 팔리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우리 음반 시장에서
Toy와 김동률은 10만장을 돌파하고 콘서트 연일 매진사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 뒤를 잇는 밴드가 있는데 그게 바로 "넬"입니다.
신보 발매 5일만에 2만5천장이 팔리고, 공연이 전석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학교 동창과 동네 친구들이 모여서 결성한 밴드라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사실 저도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무한궤도와 015B 음악들을 듣고 부르면서,
우리 대학가면 꼭 그룹사운드 결성해서 대학 가요제 나가자라는 지키지 못한 약속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죠. ^^
개인적으로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우리 음반 시장의 Renaissance입니다.
컨텐츠는 더욱 풍부해지고, 접근 경로도 훨씬 다양해졌지만,
불황의 터널을 뚫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MP3라는 Digital 형태의 음원의 유통, 불법 다운로드의 일반화가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Biz Model로 변화하지 못한
그래서 주도권을 가지고 가지 못한 음반 업계 및 기획사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어떤 식으로 고객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Toy와 김동률 열풍은 대중 문화 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 열광하는 세대는 다름이 아닌 20대 중반에서 30대 후반에 걸쳐 있으며,
그들은 왕성한 경제 활동을 하고 상당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베이비 붐 세대의 2세로서 유효인구도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장과정에서 그 전 세대와 달리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요롭게 성장했으며,
문화에 대해 비교적 조기 교육(?)을 받고 대중적으로 향유하고 소비했던 1세대라고 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려면, 인구 통계학적 변수 분석하고 자료 찾아봐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다소 엉성한 부분은 감안해 주시길)
그들의 과거의 향수와 추억을 기반으로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 시장의 잠재성과 파급 효과는 매우 클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직업병이 나오는 부분은 살짝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_-)
최근 라이오 스타라는 "뮤비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접근으로 80년대, 90년대의 배경과 음악을 쓴다든지,
특정 가수의 음악들로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죠.
전자의 예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후자의 예는 "기억의 습작"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음악의 선곡을 통해 새롭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잠시나마 과거에 시나리오 쓰는 공부를 했었더라면, 틈틈이 뭔가 써 볼텐데 하는 생각도 했답니다 -_-
(최근 Queen의 음악으로 뮤지컬을 올린 경우는 봤지만, 아직 우리 가요로 위와 같은 컨셉으로 접근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뮤지션인 김광진 인터뷰 기사를 덧붙입니다.
사실 김광진에 대해서 "더 클래식"과 "마법의 성" 정도로만 아시는 분들도 꽤 있을텐데,
그 이전에 유명한 히트곡들을 작곡한 작곡가였습니다.
일과 음악에 대한 공통점과 앨범 작업에 가족들을 참여시킨 내용이 꽤 인상적입니다.
월요일에 첨부했던 Nell 음악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2곡 첨부합니다.
활기찬 오후 되세요.
P.S. 제가 매일 이것 보내느라 시간 많이 쓰고 일 안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기사는 주로 미리 몇 일전에 선정하고, (대부분이 당일 뉴스가 아닙니다)
생각은 평소에 하고, 다만 근무시간전과 점심시간을 통해 정리하기 때문에 (그 시간도 계속 줄고 있죠)
별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
4집 타이틀곡 '기억을 걷는 시간'으로 활동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천연 외모, 10대의 풋풋한 감성을 지닌 네 젊은이에게 1999년 7월31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넬(Nell)이란 밴드 간판을 내걸고 설익은 전의를 불태운 날. 오롯한 열정이 모든 희생을 집어삼키리라 확신하던 때다. 보컬 김종완의 제안으로 조디 포스터 주연의 1995년 영화 '넬'이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순간이었다.
중학교 동창과 동네 친구들이 모여 넬을 결성한 것은 1998년. 멤버는 김종완(보컬), 이재경(기타), 이정훈(베이스), 정재원(드럼)으로 1980년생 동갑내기다. 처음엔 김종완이 있던 밴드 아일럿(ilot) 멤버로 하나 둘 들어와 돌아보니 10년의 청춘을 통째로 바쳤다.
홍대 클럽가 인디 밴드 시절, 골방 합주실에서 작업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홍대를 오갈 지하철 왕복 승차권만 있으면 보람찬 하루가 보장됐다. 클럽 무대를 대학 캠퍼스로 여기며 수업받듯 착실하게 무대를 밟았다. 좁은 인디 시장이었지만 이름이 알려지고 음악은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탔다.
이후 2002년 초 넬은 서태지컴퍼니의 인디록 레이블 '괴수 인디진'에 영입돼 2003년 6월 발표한 음반 '렛 잇 레인(Let It Rain)'부터 오버그라운드에 진입, 스펀지처럼 대중의 기를 빨아들였다.
2006년 에픽하이의 소속사인 울림엔터테인먼트로 둥지를 옮겼고 1년반 만의 정규 음반인 4집 '세퍼레이션 앵자이어티(Separation Anxiety)'를 내놓았다. '넬스러운' 음악의 테두리를 유지하되 고급스럽고 지적인 변화를 주려 애썼다.
일렉트로닉이 대세인 시장에서 어쿠스틱한 사운드의 건반 혹은 기타 솔로 반주곡은 심란한 마음의 수면을 가지런하게 만든다. 보컬의 음역대를 좁혀 고음과 저음을 크게 넘나들지 않았고 여성스러웠던 음색은 부드러운 중성의 중량감을 품었다.
CD는 도입부 '세퍼레이션 앵자이어티' '문라이트 펀치 로맨스(Moonlight Punch Romance)'와 타이틀곡 '기억을 걷는 시간'을 통해 소박한 건반의 매력을 잔뜩 펼치다가 '멀어지다' '프라미스 미(Promise Me)' '1:03'에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기타 소리를 풀어낸다. 후반부 곡들은 건반과 기타가 어우러졌다. 멤버들이 50곡을 만들어 26곡을 녹음했고 그중 10여 곡을 추렸다.
'세퍼레이션 앵자이어티'라는 제목에서 그려지듯 4집은 대상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집착, 잃었을 때 찾아오는 상실감과 슬픔, 외로움과 불안을 서정성에 녹였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10년간 음악에 질주했던 멤버들의 불안감, 두려움, 상실감의 뿌리는 어디일까.
실용음악과를 중퇴했다는 이정훈은 "음악에 빠지면서 가족의 믿음을 잃었다"며 "부모님이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온 것도 아들이 좋은 대학 들어가서 남부럽지 않게 크길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종완은 "어린 시절 전학이 잦아 한 학교에 1년씩 다녔다"며 "궁극적으로는 모두 떠나겠지만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는 부담이 있다. 그래서 한 여자를 만나도 오래 만난다(웃음). 때론 열정을 잃기도 하는데 중학교 3학년 때 기타를 처음 배웠을 때가 '열정의 절정'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이재경은 "감수성이 무뎌지는 게 두렵다"고 털어놓았고, 유일한 유부남으로 네 살배기 딸의 아빠인 정재원은 "열정을 잃을까봐 두렵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는데 음악과 가정 생활을 병행하는 데서 오는 고충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10년간, 아니 지금 한국에서 넬은 밴드 음악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밴드 음악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더 어려운 건 없어요. 오히려 호황기 시장에서는 판매량의 차이가 극명했지만 지금은 메이저와 언더의 갭이 줄었죠. 요즘은 소외감을 덜 받고 음악하는 것 같아요."(김종완)
멤버들은 "'넬스럽다'는 건 개별 청자가 지닌 느낌"이라며 "멤버들의 개성과 가치가 살아 있으면서도 융화돼 하나의 색깔을 내는 건 분명 밴드의 매력이다. 넬 안에서 무언가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4월4~6일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4집 발매 기념 콘서트를 개최한다.
mimi@yna.co.kr
<영상취재,편집 : 서영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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