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도의 자리로- C.S. 루이스
*어느 노련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들었던 고인도 빼놓을 수 없다. "여태 나는 인상적인 기도응답을 많이 보았고, 그중에 기적이다 싶은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응답은 대개 초기에, 즉 회심 전이나 회심 직후에 받는다.
그러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수록 대체로 드물어진다. 반면에 거절의 응답은 더 잦아질 뿐 아니라 더 명백하고 단호해진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이들일수록 그분이 버리신다는 말인가? 사실 그분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섬기신 그리스도는 고통스럽게 죽어 가시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하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가장 적었다. 가장 절실한 순간에 말이다.
여기 신비가 있다. 설령 내게 이 신비를 파헤칠 능력이 있다 해도 아마 용기가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때로 희망이나 가망성이 전혀 없던 우리의 기도가 승낙되어도 성급히 자기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비약해서 결론짓지 않는 게 좋다. 우리가 더 강하다면 그분이 우리를 덜 살살 대하실지도 모른다. 우리가 더 용감하다면 그분이 우리를 격전지로 보내 훨씬 적게 지원하시면서 훨씬 위급한 진지를 방어하게 하실지도 모른다.
*베일이 하나님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닐세. 달라지는 건 우리니까. 수동적이던 우리가 능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네. 그저 수동적으로 알려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 쪽에서도 보여 드리고 말씀드리며 우리 자신을 내드리는 것이지.
이렇게 스스로 인격체의 자격을 취해 하나님을 대하는 일이 그 자체로는 주제넘은 망상에 불과할 수 있다네.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배웠듯이 그건 그렇지 않네. 우리에게 이 자격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지.
베일을 벗고 죄를 자백하고 요청 사항을 "아룀"으로써 우리는 그분 앞에서 인격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네. 반면에 그분은 우리에게로 내려와 인격체가 되시고 말이야.
"되신다"라고 말하면 안 되겠군. 하나님은 되시는 분이 아니니 말일세. 그분은 자신을 인격체로 드러내시거나 자신 안의 인격체인 부분을 드러내신다네. 감히 말하자면 (아마도 책이라면 몇 페이지에 걸쳐 부연 설명과 근거를 제시해야겠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대하실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수준에 어느 정도 맞추어 주시네. 그 사람이 두드리면 하나님 안의 문이 열리지(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네.
이 사실을 반기거나 적어도 직시하는 사람들을 그분 안의 인격체가 만나 주신다네 (물론 그분은 인기제 이상이시네),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당신"이라 부를 때 그분은 "나"로서 말씀하시지(마르틴 부비가 얼마나 탁월하게 표현했는지 모르네.
*그러나 우리가 알려는 것은 완전할 때 기도하는 법이 아니라 지금 이 모습으로 기도하는 법이네. 기도를 "베일 벗기"로 본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 답도 앞서 이미 나왔어. 정작 마음속에는 온통 B에 대한 갈망뿐이면서 하나님께 억지로 A를 열심히 구한다면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 아닌가.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우리 속마음 그대로'이니 말일세.
이는 사람에게도 못할 짓이네. 친한 친구와 대화하면서 마음은 딴 데 가 있다면 친구도 이를 금방 알아차리지 않겠나? 몇 년 전에 자네가 나를 보러 왔을 때 나는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는데,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대하려고 했었네. 그러나 자네가 5분 만에 이를 간파하는 바람에 결국 실토하고 말았지. 이어지는 자네의 말을 듣고는 상황을 감추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우리의 갈망이 회개해야 할 죄뿐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내놓아야 그것이 죄인지도 확실히 알 수 있네. 다만 자네의 문제는 그런 의미의 악한 갈망이 아니었어. 그 자체로는 순수한 갈망이니까 그 중요도가 정당한 수준을 넘어설 때에만 죄가 되더라도 되겠지.
확신하건대,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주제라면 당연히 기도의 주제도 되어야 하네. 그것이 회개든, 간구든, 아니면 양쪽이 조금씩 섞여 있는 경우든지 말일세. 양쪽이 섞인 경우란 아마도 지나친 부분에 대한 회개와 우리가 갈망하는 것에 대한 간구가 섞인 것이겠지.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밀쳐 내다 보면 나머지 기도까지다 망치지 않는가? 우리가 숨김없이 다 내놓으면 하나님이 지나친 부분을 알맞게 조정해 주신다네. 머릿속에서 떨치려 할수록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잡념에 짓눌릴 뿐이야.
"소음은 듣지 않으려 할 때 가장 크게 들린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질서가 바로 잡힌 사고방식은 기도로 구할 복이지 기도하기 위해 꾸며 입는 옷이 아니라네.
그리고 작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큰 시련이 닥쳐올 때도 쓸 만한 습관이나 방책이 없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유치한 것을 구할 줄 모르면 아마 큰 것도 쉽게 구하지 못할 걸세. 너무 고상해서는 안 되네. 때로 우리가 작은 일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보다는 우리의 체면 때문이지.
*신유를 시도하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동기가 진정한 믿음과 사랑인지 아니면 영적 교만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일이니까요. 해당 질병이 완치될지 여부는 당연히 의사가 판단할 문제고요. 지금 나는 기름을 붓거나 안수하는 등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치유를 말하는 겁니다.
명백한 행위 없이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것도 당연히 괜찮으며, 실제로 우리는 성경에 명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의 기도는 효력이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자동 판매기나 소위 마법처럼 자동은 아닙니다. 기도는 요청이니까요. •기도의 효력을 통계 수치로 입중할 수는 없습니다......
관건은 신앙이고 또 하나님의 인격적 반응입니다. 기도가 비인격적이거나 기계적일 때만 입증의 문제로 변합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개인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기도와 연합되어 있으며 전체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일부입니다. (내 경우 싫은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상대를 위한 그분의 기도에 내가 동참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무실이나 교구나 학교나 병원이나 공장이나 가정을 보실 때 다른 모든 사람만 아니라 당신도 보신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고쳐 주려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듯이, 확신컨대 우리에게도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번번이 좌초시킨 치명적 결점이 있다.
신자로서의 삶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은 자신의 치명적 결점을 똑똑히 알 길이 없다. 입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입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까? 모임을 따분하게 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그 모임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까? 싱글 남자나 여자 중에 자신이 고리타분하거나 기질상 질투심이 많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고리타분하거나 걸핏하면 질투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우리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면 분명 나보다 다른 모든 사람이 먼저 알아차릴 것이다.
당신은 친구들에게 왜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말해 주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쩌면 그들은 몇 번이고 시도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당신은 되레 상대가 이상하거나 성질이 못됐거나 무조건 틀렸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도 결국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할 것인가? 사람들이 치명적 결점을 거론해도 본인이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 생각에 첫걸음은 본인이 아는 결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중에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나보다 한참 앞선 사람도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종이에 죄를 쭉 적어 일일이 진지하게 참회해야 한다.
두 가지 위험만 피한다면 알다시피 한낱 말에도 위력이 있다. 하나는 사소한 문제를 신파 조의 죄로 부풀리는 요란한 과장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대충 얼버무리는 위험이다. 여느 누구에 대해 말할 때처럼 반드시 간단명료하게 직설적으로 말해야 한다. "속일 뜻은 없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 "홧김에 그랬다"라고 할 게 아니라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미움 같은 단어를 쓰라는 뜻이다.
이처럼 자신이 아는 결점을 꾸준히 직시하고, 변명 없이 하나님 앞에 가져가 진지하게 용서와 은혜를 구하며, 힘 닿는 한 더 나아지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치명적 결점도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그 결점이 늘 버티고 있는 통에 우리는 배우자를 한껏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더 나은 고용주나 종업원이 되지 못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 대부분이 "통회하다", "비참하다", "견딜 수 없다"와 같은 직설적 표현에 공감하고 그것을 따라할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몹시 침울해졌는가? 기독교는 병적으로 성찰을 부추기는가? 오히려 그 반대가 훨씬 더 병적이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벌충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죄를 생각하는 편이 더 건강하다. 이는 병적인 상태와는 반대일 뿐 아니라 긴 안목으로 보면 별로 침울할 것도 없다. 자신의 죄를 제대로 알고 회개하려는 진지한 시도는 결국 홀가분하게 짐을 더는 과정이다.
물론 낙심이나 두려움으로 시작해 큰 고통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회개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은 죄가 쌓여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을 때의 괴로움보다는 훨씬 덜하다. 치통이 있어 치과에 가야 할 때와 썩은 이를 뽑고 나서 그저 개운한 통증이 점차 가라앉고 있음을 알 때의 차이와도 같다.
*기도하다 보면 우리도 다 메마른 시기를 지나지 않습니까? 그게 꼭 나쁜 증상 같지만은 않습니다. 가끔 나는 우리 기분에 최선이라고 느껴지는 기도가 사실은 최악의 기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춤을 선보이거나 시를 암송할 때처럼 기도할 때도 우리는 겉으로만 거두는 성공에 만족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데 우리가 발언을 독점하는 바람에 기도가 잘못될 때도 있지 않을까요?
조이(C. S. 루이스의 아내 -옮긴이)가 그러는데 몇 년 전 어느 아침에 하나님이 뭔가 말씀하시려 한다는 느낌이 자꾸 들더랍니다. 할 일을 하지 않아 꺼림칙할 때처럼 집요한 부담이었지요. 무슨 일인가 싶어 반나절을 끙끙댔는데 오히려 염려를 그치는 순간 육성처럼 똑똑히 답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에게 줄 게 있으니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즉시 조이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빈손에 주신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있습니다. 양손에 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짐이 늘 죄나 세상 염려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그분을 예배하려는 조급한 시도도 때로는 짐이 되니까요. 내 경우만 하더라도 가장 단골로 기도를 방해하는 잡념은 중대한 내용이 아니라 잠시 후에 하거나 삼가야 할 일과 같은 자잘한 내용이지요.
…
물론 때로는 "기뻐하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삶을 순간 단위로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짐에 굳이 과거와 미래의 짐까지 더하지만 않는다면, 내 생각에 현재 자체는 대개 충분히 감당할 만합니다. "그날로 족하니라"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인지요. 그런데 경건한 사람들도 그분의 말씀에서 눈부시리만치 더 신성한 요소에 경의를 표하느라 지극히 실제적인 상식적 요소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
니까?.
*그분은 사랑이시며 복을 주셔야만 하기에 권한도 절대적이다. 그분이 복을 주시려면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영역을 남겨 두려 한다면 이는 곧 사망의 영역을 두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으로 절대 권한을 행사하신다. 그분께는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경각심을 일깨운 말들이 있다. 토머스 모어는 "만일 하나님을 얼마나 섬길지에 대해 그분과 함께 계약서를 작성한다면, 결국 양측의 서명을 모두 다 당신이 한 셈이다"라고 했다. 윌리엄 로는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거부당하는 이유는 구원에 시간이나 정성을 전혀 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덜 들여서다"라고 무섭고 냉엄한 소리로 말했고, 훗날 야코프 뵈메의 영향으로 사상이 더 풍부해졌을 때는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대신 무엇을 선택했든 결국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했다.
모두 뜨끔한 말이다. 여자, 애국, 마약, 예술, 위스키, 장관직, 돈, 과학 등 정말 무엇을 선택했든 차이가 없단 말인가? 그야 물론이다. 중요한 차이는 없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놓치고 유일한 만족의 근원을 거부한 것이다. 사막에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어느 길을 선택해서 유일한 샘을 놓쳤는지가 중요할까?
*범접할 수조차 없는 주님의 이름을 감히 중얼거리고
페이디아스(BC 5세기경에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편집자)의
온갖 화려한 신상을 꿈꾸면서
뻔히 주님일 수 없는 상징물을 마음에 품을때
제가 누구에게 절하는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모든 기도는 그 자체로 늘 신성 모독이며
허깨비 우상 앞에서 신화의 꿈을 숭배합니다.
모든 사람은 기도할 때 자신에게 속아
스스로 지어낸 요란한 생각을 지껄입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이끌어 우리의 빗나간 화살을
빈들 너머 주님께로 틀어 주셔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마다 우상을 숭배하느라
귀먹어 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부르짖습니다.
주님, 우리의 기도를 그대로 듣지 마시고
어눌한 은유를 주님의 천의무봉으로 통역하소서.
Poems(시집), "모든 기도에 붙이는 각주“
*이 갈구는 즐겁고 유쾌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시 9:2). 수금harp을 켜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려서(시 43:4) 비파yre와 수금을 깨웠다! (시 57:8) 시를 읊고 소고tambourine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르면서' 기쁘게 노래하고 즐거이 소리쳤다(시 81:1-2). 음악만으로 부족해 요란하게 외쳤다는 말이다. 그들은 또 모두 손뼉을 치자며 모든 이방인까지도 끌어들였다(시 47:1). 제금cymbals을 잘 맞추어 치되 요란하게 울리며 춤까지 덩실거렸고(시 150:4-5), 먼 곳의 수많은 섬까지도 이 환희에 동참시켰다(시 97:1; 유대인은 해양 민족이 아니었으므로 섬은 다 믿었다).
이 열기(소란함이라 해도 좋다)를 우리가 되살릴 수 있다거나 되살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선 그중 일부는 죽지 않고 여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기뻐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훨씬 깊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을 유대교인은 몰랐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에 동참하는 세례로 시작되며, 가장 즐거운 절기들도 그 시작과 중심이 상한 몸과 흘린 피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는 유대교에 없던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우리의 기쁨은 이 슬픔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노래가 주선율뿐이라면 우리는 영적 대위법(복수의 독립된 선율로 조화를 이루는 작곡법-옮긴이)을 쓴다. 하지만 그래도 시편의 가장 유쾌한 시들에 빚진 즐거움은 조금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다. 나만 하더라도 시편에 빚진 사람이다.
물론 시편에는 지금의 우리에게 종교로 간주되기 힘든 요소가 존재하는 반면, 종교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질 법한 요소는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에서 접하는 경힘은 온전히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선물보다 더 간절히 구하는 선물은 없으며, 기쁨의 극치에 이르면서도 명백히 사실적이다. 이 옛 시인들의 (이를테면) 얼굴표정에서 나는 그들과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을 더욱 많이 배운다.
*누구나 알다시피 금식은 어쩌다 밥을 굶거나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것과는 다르다. 금식은 의지를 사용해 욕구에 맞선다. 극기라는 보상이 따르지만 자칫 교만해질 위험이 있다. 반면에 본의 아닌 굶주림은 욕구와 의지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킨다. 복종할 계기도 되지만 반항할 위험도 따른다. 다행히 고난의 구속 효과는 주로 반항 의지를 누그러뜨리는 성질에 있다.
본래 고행을 실천하면 의지가 더 강해지지만, 고행이 유익하려면 (치열한) 의지를 단속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준비해야 전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고행은 수단으로만 필요하지 목적으로 삼기에는 가증스럽다. 욕구를 의지로 대체한 뒤 거기서 멈추면, 동물적 자아가 악마적 자아로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욕도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다"라는 말은 진리다.
환난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평소에 합법적 방법으로 힘써 자신의 본능적 악을 삼가고 본능적 선을 추구했어야 한다. 환난은 그런 세상을 전제로 한다.
우리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려면 우리에게 의지가 있어야 하고, 더불어 그 의지가 작용할 대상들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려놓음이란 금욕적 "초탈"이 아니라, 합법적이나 하나님보다 못한 다른 목적들보다 기꺼이 하나님을 앞세우는 자세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도 의지를 품고 겟세마네로 가셨다. 아버지의 뜻에 부합한다면 고난과 죽음을 모면하시려는 강한 의지였다. 물론 그게 아니라면 철저히 순종하실 각오도 되어 있었다.
*다 잘될 수도 있네. 정말이야. 하지만 그동안 자네는 기다려야 하네. 엑스레이 결과와 전문의의 소견이 나올 때까지 말일세. 기다리는 동안에도 삶은 계속된다네. 동면하듯 땅속에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게다가 (자네는 나보다 강하지만 내 경우에는) 불안에 따르는 무서운 부산물이 있네. 생각들이 끊임없이 맴돌 뿐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징조를 찾고 싶은 이교의 유혹까지 느껴지지.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지만, 이런 기도는 그 자체가 다분히 일종의 고뇌이네.
어떤 이들은 불안할 때 죄책감을 느끼며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네. 불안은 죄가 아니라 고통일세. 모든 고통처럼 불안도 생각하기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라네. 그 수난의 첫 단계는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지. 겟세마네에서 아주 이상하고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네.
친히 누누이 말씀하셨듯이 분명히 우리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내다보셨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인간 세상에서 어떤 결과를 부를지 그분은 아셨지.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기 전에 아무래도 그분에게서 그 지식이 거두어진 것이 분명하네. 아무리 아버지의 뜻을 단서로 다셨다 해도, 잔이 옮겨지지 않을 줄을 뻔히 아시면서 그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실 수는 없으니 말일세.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이는 불가능한 일이네.
그렇다면 어찌된 일일까?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시련이라면 그분께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 순간에 희망 고문이 그분을 덮쳤네. 조마조마한 불안이었지. 어쩌면 그분은 극한의 공포를 결국 면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미한 가능성을 보신 것이네. 전례가 있지 않은가. 이삭도 죽음을 면했는데, 그때도 마지막 순간에 구사일생을 한 것이었지. 그러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것일세.... 게다가 틀림없이 그분은 십자가에 처형된 다른 사람들을 보신적이 있었을 것이네…. 우리가 보아 온 대부분의 성화와는 사뭇 다른 처참한 광경이었겠지.
최후의 (그리고 잘못된) 실낱같은 희망, 그로 인한 영혼의 동요, 핏방울 같은 땀 등이 없었다면 그분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네. 완전히 예측 가능한 세상에 산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일 수 없네.
결국 천사가 나타나 그분께 "힘을 더하더라"라고 성경은 말하지. 16세기 영어로는 "컴포팅"comforting으로 옮겨졌는데 그 고어에도 헬라어 원문의 "애니스쿠온"에도 "위안하다"라는 뜻은 없어. "힘을 더하다"가 더 정확한 뜻이네. 천사의 그 행위는 곧 그분께 이 잔을 마셔야만 하며 능히 마실 수 있다는 확신을 되살려 드린 게 아닐까? 위안치고는 달갑지 않은 위안이었던 셈이지.
우리도 다 실제로 고통이 닥치면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복종하려 하지. 그러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보듯이, 그 이전의 불안도 똑같이 하나님의 뜻이며 똑같이 우리네 인간 앞에 놓인 숙명이네. 온전한 인간이신 주님도 이를 겪으셨는데, 종이 주인보다 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스토아학파 같은 극기주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네.
*우리 인간의 고난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공통점이 있음을 그 수난의 매 순간이 똑똑히 보여 주지 않는가? 우선 예수님은 고뇌의 기도를 드리셨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네. 이어 그분은 친구들에게 의지하셨으나 그들은 잠들어 있었지. 우리의 친구나 우리도 걸핏하면 잠들거나 바쁘거나 멀리 있거나 다른 데 정신이 빼앗겨 있지 않은가.
이에 그분은 교회를 바라보셨으나 그분이 세우신 교회가 바로 그분을 단죄했네. 이 또한 전형적이야. 모든 교회와 기관은 얼마 못 가 조만간 그 존재 목적에 역행하는 요소가 생겨나지.
다행히 또 다른 가망성이 보였네. 바로 정부인데 이 경우는 로마 정부였지. 로마 정부는 이 일에 개입하려는 의욕이 유대 교회보다 훨씬 적었지만, 바로 그래서 현지의 광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었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로마는 대체로 정의를 표방했네. 물론 그 정의는 정치적 편의와 국익에 부합할 때에 한해서였으니, 누구라도 복잡한 장기판의 졸이 되기 쉬웠지.
그래도 예수님께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었으니 곧 백성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네. 그 가난하고 순박한 무리에게 그분은 지금까지 복을 주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며 그들을 먹이시고 가르치셨고, 친히 그 동족의 일원으로 사셨으니 말이네. 그러나 그들마저도 하룻밤 사이에 (흔한 일이지 않은가) 살의에 찬 폭도로 변해 그분의 피를 요구했다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께는 하나님밖에 남지 않았지.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께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보다시피 이 모두가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형이자 표본이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 손에 붙잡는 동아줄마다 끊어지고, 앞에 다가서기만 하면 문이 쾅 닫히네. 달아나 봐야 사방에 둘러 쳐진 울타리에 막히는 여우와도 같아.
그분이 결국 모든 데서 버림받으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자신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 하나님께 외면당하시지 않고는 인간이 되실 수 없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인가?
나는 우리가 창조 개념에 함축된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네. 하나님이 창조하시려면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되 그분 자신은 아니어야 하네. 피조물이란 어떤 의미에서 방출되거나 분리된 존재이지. 피조물이 완전에 더 가까워질수록 어느 시점에서 그 분리의 정도도 더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 성인이며, 반역하는 존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과 천사라네. 무생물은 그저 창조주의 품에 잠들어 있지. 평소에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사람일수록 그분의 "숨어 계시는" 면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이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모든 인간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처참히 버림받으신 것일까?
*내 작은 봄이여 일어나라. 충분히 애썼고
자비로우신 그분에 용서도 받았으니
인형처럼 참배한 봄이여, 이제 일어나 가리
친구처럼 희고 눈처럼 차갑게 침대에 들어
조그만 한손으로 옷을 벗고 불을 끄라
신성한 밤 속에 고독한 인간으로 침묵하다.
초원은 빗속에 드러눕고 잔은 깨끗이 비었으며,
옷은 빨아 개있는데 색이 바랬고
때가 묻어서 그 때를 씻어 내느라
거의 누더기처럼 닿고 닮았구나.
너무 빨리 도로 더워지지 말고 차갑게 누워
피로와 용서의 그 습기를 받아들이라.
쓴 물을 다 마시고 오싹한 죽음을 들이쉬라
머잖아 피와 숨결이 다시 용솟음치리니.
Poems(시집), "기도후에는 차갑게 누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