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사지(南澗寺址)
남간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元和年間(806∼820)에 남간사의 일념(一念)스님이
여기에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내력을 실은 향적예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신문왕대(681∼692)와 효소왕대(692∼702) 때의 고승(高僧)인
혜통(惠通)스님이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 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남간사는 9세기 초,
남산 서쪽 기슭에 위치했었으나, 그 창건년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다.
이 일대에 탑재와 당간지주가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남간사지로
추정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의 동네 이름이 남간 마을로 전해져 오는 것은 남간사라는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듯 하다.
평지에 위치한 남간 마을은 해목령(蟹目嶺)을 배경으로 천은사지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민가와 밭에 초석과 장대석, 팔각대석, 목탑의 심초석으로
알려진 석재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3호 남간사지 석정(石井) 및 보물 제909호인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석재의 대부분은 탑동의 민가 건축에 사용되었으며 논밭의
경작에 의해 지형이 변해 지금은 가람 배치의 흔적을 알 수 없다. 즉 이종식 가옥에는
안상문 대석(眼象文臺石)과 초석 및 석주(石柱), 그리고 이 주위의 밭에도 초석과
확(가마) 등이 흩어져 있다. 손차익 가옥에는 우물과 우물 뚜껑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파된 팔각 대석이 있으며, 갑석(甲石)으로 추정되는 탑재, 김현원 가옥에는 장대석
등과 확 4기, 손지익 가옥에도 신방석과 면석(面石), 확 등이 흩어져 있다. 이외에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다양한 문양의 기와들과 현장에 남아있는 목탑의 심초석과
당간지주 및 우물(石井) 등을 통해서 남간사는 9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추정된다.
많은 초석과 장대석 등이 논과 밭에 흩어져 있기도 하나 대부분은 손차익,
김현원 가옥을 중심으로 한 민가의 주춧돌 등 건축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절의 배치나
건물 등의 규모는 살필 수 없으나 이 동네 가운데 위치한 탑재를 기준으로 이 일대를
법당터로 추정하고 있다. 우선 민가에 산재한 건물지 석재를 살펴보면 초석과 장대석
외, 계단석 등과 또한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 편들도 많다.
남간사지(南澗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909호
높이 365cm 양지주 중심거리 110cm
원형 간구 지름 20cm 십자형 간구 깊이 7cm
밑부분 너비 62.7cm 두께 38.2cm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불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깃발을 올리는
게양대(揭揚台)의 받침돌로서, 경주시 탑동 남간사지 남쪽 논 한 가운데 있는 이
화강암제 당간지주는 현재 높이가 365cm로서, 양지주(兩支柱)의 중심거리가 약 110cm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 지금은 일주(一柱)가 약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정확한 양지주
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없다. 지름 20cm 내외의 원형 간구(竿溝)는 상하 2개로
관통되었으며 최상단에도 십자형(十字形) 간구를 7cm 깊이로 파놓아 지금까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었다.
밑 부분의 너비는 62.7cm이고 두께는 38.2cm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있으며 아래쪽 50cm가량은 본래 땅 밑에 묻혀 있던 부분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다. 조성 당시에는 양 지주 사이에 당간을 세웠던 간대(竿臺)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던 간구(竿溝) 및 간공(竿孔)
그리고 외측면 모서리의 모죽임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지만, 십자형 간구라던가 관통된 2개의 간공 등이 매우 특이하다.
통일신라시대의 남간사지 당간지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이 뒤편 저수지가 '강당못'으로
불리어지고 있고 못 속에 석탑의 석재들이 잠겨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 저수지와
당간지주 사이에 탑지 및 금당지가 조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현존하는
남간사지와는 또 다른 사지가 이 당간지주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남산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8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 자료출처 ☞ 남산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