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라면 이야기하실 거면 만나지 않겠어요.”
임춘애(41)씨는 기자의 첫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라면 이야기도 그렇고, 이번에는 ‘임춘애가 육상계에 복귀한다’고 쓰시려고 그러는 거지요. 그래요.
얼마전부터 학교전문코치로 활동은 하고 있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내놓을 일이 없어요.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하던 칼국수 집도 임대 계약이 만료돼 접을까 생각하고 있고, 이번 주에는 이사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정신이 없어요”라며 기자가 알고 싶었던 그의 근황을 모두 자백(?)했다.
그래도 20여년 전 ‘소녀 임춘애’만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는 거듭된 요청에 그는 “제가 이제는 스타도 아니고요, 고등학교 1학년인 큰 딸아이가 엄마의 옛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많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들도 이제는 아는 것 같고요”라며 망설였다.
그렇다면 ‘20여년 만에 코치로 육상계에 복귀한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그가 최근 전문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경기 성남시 분당의 불곡 초등학교에서 15일 이른 아침에 만날 수 있었다.
임춘애 코치(이제 육상 코치로 활동하니까 ‘임 코치’라고 부르겠다고 했다)는 예전에 비해 살이 좀 붙은 모습이지만 호리호리한 체격과 날카로운 턱선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안경을 낀 것이 조금은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도 대한민국 보통 아줌마가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육상계에 복귀했느냐’는 인사말에 그는 “무슨 거창하게 육상계 복귀라는 말을 하세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간 은퇴 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어요. 우습겠지만 제 소원이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잖아요. 아시다시피 결혼 후 한때 보험설계사도 해 봤고, 외제 자동차 판매도 했고, 또 피트니스센터 강사도 했어요. 다른 종목과 달리 육상 선수들은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는 자리가 좁아요. 더욱이 여자 선수들은 더 그렇죠. 지난해 7월 성남시에서 어린이들의 기초 체력 증진과 꿈나무 발굴을 위해 각 학교에 파견하는 전문코치제를 실시한다는 얘기를 듣고 신청했는데, 아직은 유명세가 남아 있는지 선발됐어요. 육상발전에 기여한다는 생각과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는 얘기에 다른 어떤 일보다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죠.”
그래서 그에게 ‘발전이 더딘 정도가 아닌 정체돼버린 한국육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솔직이 제일 힘든 운동이에요. 예전에 태릉훈련원에 있을 때 양궁선수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물론 양궁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육상)하고는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됐어요. 훈련량은 물론이고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천지차이였죠. 올림픽 금메달 종목이었으니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큰 딸도 엄마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잘 달려요.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제일 빠른 선수였죠. 그런데 힘들어서인지 육상 선수가 되지는 않겠다고 하더군요. 거기에다 인기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아이들의 특기를 살려내고 지원해야 할 부모들이 육상을 시키려 하지를 않아요. 모든 운동이 힘들지만 너무 힘들고 표시가 안 나는 운동이라서 그렇죠. 그러니 저변이 없는데 발전이 될 수 있겠어요.”
이쯤에서 “지금은 스포츠에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는 지적도 있다”면서 24년 전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의 ‘3관왕 임춘애’의 얘기를 꺼내봤다. 그러자 그는 “약속 위반이에요”라며 기자를 째려본다. ‘라면 소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고 생각했는 모양이다.
“헝그리 정신이 좋다, 싫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문제는 목표를 성취한 선수가 조금만 성적이 나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배가 불러서 그런다’거나 ‘운동은 배고픈 얘들이 하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죠. 저도 그래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거든요.”
결국은 ‘라면 소녀’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몇해 전에도 해명을 했는데…. 라면 이야기는 제가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저를 발굴하고 길러주신 김번일 코치 선생님이 하신 인터뷰에서 열악한 학교 육상부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선수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 조금 환경이 좋은 학교는 우유도 지원된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임춘애가 17년간 라면만 먹고 뛰었다’‘우유 먹는 아이들이 부러웠어요’라고 쓰는 바람에 이후 제가 ‘라면 소녀’로 불리고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죠. 당시 체력보강을 위해서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는데 라면만 먹고 어떻게 뛰겠어요.”
그래서 그 후 그는 88서울올림픽무대에서 예선 탈락하자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대학 3학년때 은퇴를 선언하자 ‘그러면 그렇지 배가 불렀는데 무슨 운동을 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씁쓸해 한다.
당시 임춘애는 86아시안게임 금메달 포상금으로 모두 1억5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대한육상연맹이 그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일시불로 지급하지 않고 은퇴하기 전까지는 매달 70만원씩을 지급했다고 한다. 임 코치는 1년후 포상금 가운데 7000만원을 일시에 받아 어머니 집을 마련했고, 은퇴 후 받은 나머지 포상금은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정말 당시로서는 큰 돈을 받고 나니 운동을 더 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솔직히 제 몸은 86아시안게임을 뛰고 나서 완전히 망가졌어요. 다 성장하지도 않은 몸을 혹사시킨 거죠. 당시 메달 획득이 국가적 사업이었잖아요. 그래서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말 죽을 것 같이 훈련했어요. 코치 선생님도 ‘죽어도 금메달을 따내야 한다’며 독려했고, 저도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따랐어요. 그때 사실은 몸에 이상이 왔던 거예요. 특히 골반에 이상을 느꼈는데 88올림픽을 앞두고 진단을 받았더니 실금이 갔더라고요. 은퇴 후에 한 언니의 소개로 접골원에 갔는데 ‘대퇴골두’라는 것이 아직 자라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해 이상이 생겼다는 거예요. 몸이 그 정도였는데 김 선생님도 ‘정신이 빠졌다’고 다그칠 때는 정말 억울하고 섭섭했어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한 거죠.”
그는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 육상 중장거리인 800m, 1500m, 3000m에서 금메달을 따내 88서울올림픽에서는 성화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는 등 국민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올림픽무대에서는 결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당시 관계자들과 국민들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무대가 얼마나 다르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시아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올림픽에서도 메달 정도는 가능하겠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시 저의 기록은 물론 아시아권에서 실질적으로 정상인 중국 선수들의 기록도 올림픽무대에서는 예선 탈락할 정도였어요. 사실 86아시안게임에서 제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운도 많이 따라줬어요. 당시 저의 주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3000m의 경우 중국선수들에게 10초 정도 뒤져 있었는데, 저는 최고의 상태에서 베스트가 나온 것이고 중국선수들은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이죠. 800m의 경우도 저보다 2초 앞서 1위로 골인한 인도 선수가 레인을 너무 빨리 벗어났다는 규정에 걸려 제가 1위가 된 거죠.”
다시 얘기를 ‘육상전문코치’로 돌렸다. ‘부상으로 현역을 은퇴한 뒤 곧바로 지도자 수업을 받거나 교직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학부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일본에 가서 육상 관련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지금의 애 아빠를 만나게 됐어요. 기자님도 잘 아실 거예요. 축구선수 이상용이요. 프로축구 유공에서 곧잘 한 선수였죠. 그렇죠.”
요즈음 시에서 운영하는 ‘전문코치’의 대우는 어떤지 궁금했다. 그는 전문코치의 월급을 묻자 “부끄럽기도 하고 같이 활동하고 있는 코치 선생님들의 사기 차원에서 절대 밝힐 수 없다”며 “남자 코치들의 경우는 전문코치 월급으로는 가정 생활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 보니 가장 페어해야 할 스포츠에서 부당 경쟁 등 부정 경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라고 스포츠 지도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게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쇼트트랙에서의 ‘짬짜미(담합)’에 대해 물었다.
“지도자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이해가 돼요. 예전에 육상 같은 경우에는 릴레이(계주)경기에서 그런 경우가 간혹 있었어요. 지도자 입장에서 가르치는 선수 모두에게 골고루 승리를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거든요. 선수가 우승을 해 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천지차이예요. 자신감에서 큰 차이가 나거든요. 그런 면에서 지도자가 ‘약’으로 쓰기도 하는 거죠. 그러나 그것도 스포츠 근본을 흐트리는 행위여서는 안되죠.”
그래도 그는 체육연금을 받는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연금 점수 10점이 매겨지는데 금메달 3개로 30점을 인정받아 매달 30만원을 받아오다가 최근에 올라 45만원씩을 수령한다고 한다. 육상 선수들 가운데는 체육연금을 받는 선수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마라톤의 황영조는 일시금으로 받았고, 역시 ‘국민 마라토너’이봉주와 왕년에 ‘아시아의 마녀’로 불렸던 투포환의 백옥자씨, 그리고 임 코치가 전부다. 20년 전에 트랙을 떠났던 임춘애는 그동안 ‘인생의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임 코치는 “이제 육상전문코치로 활동하면서 정말 소질 있고, 스스로 운동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꿈나무들을 발굴해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인생 후반부의 목표를 제시하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