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성수(東庵性洙, 1904~1969)】 "법신 성취했으니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동암성수
법신 성취했으니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평생 불일증휘(佛日增輝)와 독립운동을 염원하며 도제양성과 포교에 힘썼던 동암성수(東庵性洙, 1904~1969)스님. 서울 녹야원에 있는 비문에는 “마음에 걸림이 없이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했던 스님”이라고 동암스님을 기록하고 있다. 동암스님의 수행일화를 상좌 해안(海眼, 서울 도봉사 회주)스님의 증언과 비문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법신 성취했으니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용성스님 시봉하며 ‘독립운동’참여
흔적 남기지 않고 수행 정진 몰두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 ‘순종효황후(일명 윤비)’는 망국의 설움을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이겨냈다. 특히 가까운 인연을 유지했던 용성(龍城, 1864~1940)스님에게 불법을 배우고 마음을 다스렸다. 용성스님이 원적에 든 후에는 제자인 동암.동헌스님의 도움을 받아 신행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 성북구 정릉 사가(私家)에 머물던 순종효황후는 동암스님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해 차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부인과 대화하는 일이 없던 순종효황후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같은 인연으로 동암스님은 구황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황후를 모시는 상궁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불법을 전했다. 때문에 ‘상궁대장’이란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사진> 동암스님의 입적을 보도한 불교신문 기사.
○…“너의 스승인 동암스님은 큰 어른이시다. 여섯 명의 큰스님에게 인가를 받은 분이니, 용성스님 제자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조계종 종정을 세 차례나 역임한 고암(古庵,1899~1988)스님이 동암스님 상좌인 해안스님에게 했던 말이다. 해안스님은 “어려서 들었던 이야기”라면서 “여섯 분의 스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여쭙지 못해 아쉽다”고 회고했다. 고암스님은 동암스님과 사제(師弟) 관계이다. 동암스님은 동산.고암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다.
○…동암스님은 용성스님을 시봉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용성스님의 지시를 받아 은밀하게 독립 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은사에게 받은 독립자금을 갖고 만주 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비밀요원을 만나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동암스님이 이 같은 일을 맡은 배경에는 용성스님의 각별한 신임과 함께 출가 이전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력이 작용했다. 또한 유도 유단자였던 동암스님이 일경에 발각되는 등 ‘만약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처음 인연이 된 것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묘향산 보현사로 몸을 피하면서 시작됐다. 생전에 동암스님은 “일본군에 쫓기다가 묘향산 보현사까지 왔고, 이어 산내 암자인 상원암에 몸을 숨겼다”고 회고한바 있다. 이때 스님은 말을 타고 묘향산으로 은신했다고 한다. 동암스님은 생전에 “내가 말은 잘 탔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원암에 은거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만난 동암스님은 남양주 봉선사에서 출가사문이 됐다. 고향인 묘향산에 머물면 일경의 눈에 띌 수밖에 없던 것이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상원암 가까운 곳에 단군굴이 있어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동암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묘향산 보현사 전경.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것이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동암스님은 용성스님 문도들과 함께 봉영회(奉迎會)를 결성해 회장을 맡았다. 이때 스님은 서울 대각사에서 임시정부 봉영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백범 선생을 비롯해 이범석.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이는 은사 용성스님을 비롯해 동암스님과 문도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정화불사에 적극 참여했던 동암스님은 정화불사후에 원허스님 뒤를 이어 양양 낙산사 주지를 맡았다. 스님은 4년간 소임을 보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예불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몸이 불편해 법당까지 오지 못하는 상황에도 도량석에 맞춰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 불을 켜놓고 참선 정진을 했다. 단 하루도 어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동암스님은 선객(禪客)이었다. 정화불사 이전에는 꾸준히 선방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했다. 후학들에게도 “참선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암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전강(田岡)스님과 교류가 많았다고 한다.
○…동암스님은 흔적을 남기거나 남 앞에 명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붓글씨를 잘 썼지만 남에게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괴팍(?)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수행 정진했다. 초대 중앙종회의원을 제외하고는 종회 소임을 맡지 않았다. 통합종단 이전 재정 상태가 열악했던 시절에 잠시 재무부장을 맡아 어려운 살림을 돌본 적이 있다. “신도들이 잘 따르고, 공심(公心)이 있다”는 까닭에서다.
○…동암스님은 혜(慧)가 밝은 분이었다. 양양 낙산사 주지로 있을 무렵 제자가 찾아와 “스님 서울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자를 바라보는 스님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때 스님은 다른 제자에게 “그 아이, 이번에 가면 절 집안에 안 온다”고 했다. 결국 그 제자는 환속했다. 평소에 말씀이 적었지만 중생들이 살아가는 이치에는 누구보다 밝았던 스님이다.
○…동암스님은 상좌인 초안(超安1938~1998)스님에게 한 가지 원력을 당부했다. 한국전쟁 당시 총상을 입은 제자에게 “오봉산 석굴암은 아주 좋은 나한기도 도량인데 병란(兵亂) 중에 소실됐으니 네가 복원하도록 하라”고 했다. 은사 동암스님의 뜻을 받든 초안스님은 1954년 4월부터 45년간 난관을 뚫고 중창불사를 원만히 회향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도봉사에서 봉행된 동암스님 39주기 추모재에 참석한 도문스님(원로의원)은 “큰스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특히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선산 도리사 주지로 있던 스님은 서울에 볼일이 있어 상경을 했다. 당시 녹야원에 머물던 스님은 사과를 깎아 먹은 후 산책을 다녀온 후 원적에 들었다. 입적할 때 광철.도안 두 제자가 지켜보았다고 한다.
■ 임종게 ■
다음은 동암스님의 임종게이다.
心遠意馬志牛繁 (심원의마지우번)
貫頭單成肯娑界 (관두단성긍사계)
繼承古德成法身 (계승고덕성법신)
如是始終歸依寶 (여시시종귀의보)
전 백양사 강주 법광스님의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원숭이와 말처럼 어지러이 마음자리(心牛) 흔들어도 /
하나로 꿰뚫어 사바세계에 통했노라 /
고덕을 계승해 법신을 성취했으니 /
시종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 행장 ■
남양주 봉선사 출가
임시정부 봉영회장
1904년 7월26일 평안북도 희천 원흥리에서 부친 박봉오(朴鳳梧) 선생과 모친 최경오(崔慶吾)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승수(承洙), 본관은 밀양이다. 법명은 성수(性洙)이고, 법호는 동암(東庵)이다.
소년 시절 총명했으며 보통과정의 신교육을 받았다. 이때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에 가담했다 묘향산 보현사에 은신한 것이 불가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15세(1921년)에 남양주 봉선사에서 인담(印潭)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듬해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龍城)스님에게 건당하고 법호를 받았다. 고성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으며, 금강산 장안사 율사(律師) 진허(震虛)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진> 서울 성북구 녹야원에 있는 동암스님 비.
1925년부터 10년간 중국 상해와 북간도, 일본 등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4년 봉선사에서 대덕법계를 품수 받은 스님은 1945년 해방 무렵까지 강화 보문사 주지 소임을 보았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봉영회(奉迎會)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후 스님은 효봉(曉峰).동산(東山).청담(靑潭)스님과 함께 정화불사에 적극 참여했다. 총무원 재무부장도 지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각사 주지를 지냈다. 이후 스님은 보은 법주사.김천 직지사.서울 봉은사.양양 낙산사.영주 부석사.선산 도리사 주지를 역임했다. 스님은 도리사 주지로 재임하던 중 1969년 11월2일(음력 9월23일) 서울 녹야원에서 입적했다.
제자 도안(道安)스님과 광철(光徹)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게를 남기고 정좌한 채 원적에 들었다. 세수 66세, 법납 48세. 스님의 비는 서울 녹야원에 모셔져 있다. 상좌로 도안.대인.초안.적조.광철.석운.용택.석천.해안.도천.법안.천관.봉묵스님을 두었다. <윤회전생> <지옥과 극락> <아미타경역(譯)>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