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쓸모가 있을까?”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고 〈유주얼 서스펙트〉(1995)와 〈엑스맨〉(2000)의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작전명 발키리〉(2008)는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히틀러 부대의 예비군 참모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이 폭탄을 터뜨려 히틀러를 암살하면, 예비군 동원령인 ‘발키리’를 작동시켜 새 지도부가 군부를 장악한다는 계획이었지요. 작전 실패 후 7천여 명이 체포되고 이중 5천 명이 자살을 강요받거나 사형당한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독일 첩보요원 신분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투옥 끝에 교수형을 당한 것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가 처음부터 과격한 저항운동가였던 건 아닙니다. 나치의 눈치를 보느라 유대인이었던 매부의 부친 장례식 기도도 거절할 만큼 평범하고 소심했답니다. 1943년 베를린-테겔 군 교도소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히틀러 집권 후 지난 10여 년 간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의 거대한 가장무도회가 모든 윤리적 개념을 연타하여 뒤죽박죽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딛고 설 땅이 없다”구요(《옥중서신》, 복있는사람 역간). 소명을 위해 복종하고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가 악한 일에 도용될 수 있음을 알지 못했고, 소명이나 사명보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몰랐던 지난날을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독일교회’를 위한 사명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제국교회를 양산했고, 대다수의 양심이 이를 묵인한 것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조국 근대화와 반공, 성장주의와 선교지상주의라는 사명 하에 독재와 자본의 광범위한 악에 침묵하고 동조한 한국교회의 적폐가 수년째 부끄럽게 도드라지는 나날 중에 본회퍼의 질문을 아프게 곱씹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쓸모가 있을까요?”
마침 고 박종철 님의 30주기 추모식과 박근혜 정권의 심판을 갈망한 정원스님의 영결식이 행해지던 한 편에 대형 십자가와 목사 가운, 성가대복과 태극기로 장식한 무리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다지요. “외롭게 청와대에서 눈물 흘리는 우리 대통령 박근혜 머리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2017년 1월 14일 서울, 광화문 광장의 풍경입니다. 이것을 감히 “악의 거대한 가장 무도회”라고 따라 부른다면, 본회퍼 목사님이 역정을 내실까요?
도망하지 않은 자의 ‘자유’
에릭 틸 감독의 2000년 영화 〈본회퍼〉는 막연하게 옳지 않다고 믿었던 것의 실체에 직면한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꿔 자유와 선에 투신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1939년 뉴욕에 초대되어 갔던 디트리히 본회퍼(울리히 터커)는 투옥을 염려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광기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조국 독일로 돌아옵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잃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지요. 본회퍼의 일생을 다루면서 영화는 이처럼 그가 도망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돌아온 본회퍼는 반 나치즘 설교를 하고 인종차별법인 뉘른베르크 법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설교와 강의, 일체의 저술 활동을 금지당한 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곧 징집될 형편이었지요. 이때 독일 첩보국에서 일하던 매형 한스 폰 도나니가 히틀러 암살 작전에 가담할 것을 제안합니다. 징집을 피하면서 신분을 보장받고 저항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본회퍼가 이를 곧바로 수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암살은 곧 살인이었고 이것은 그의 신앙 양심과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덜 악한’ 일을 위해 본회퍼는 스스로 ‘신앙의 모험’이라고 불렀던 길을 택합니다.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악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자 본회퍼 윤리학이었어요. 유대인의 망명을 도우면서 그가 주로 했던 활동은 독일이 곧 나치가 아니며, 독일 내에도 반나치 세력이 존재하므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는 것만이 히틀러를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아님을 연합군과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영화는 그에게 주어진 세 번의 탈출 기회를 더 보여줍니다. 체포 직전 도망하라는 부모의 권유와 약혼녀 마리아와 간수가 돕던 탈옥 기회, 독일 검찰관 뢰더가 히틀러의 해외 협상에 협조하면 가족과 동료와 약혼녀까지 모두 구해주겠다고 했던 마지막 제안까지 그는 모두 거절하지요.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자유를 갈망했고 약혼녀와 소박하게 사랑하며 살고 싶었지만 본회퍼는 고난을 회피하는 것이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두려움에 떠는 다른 죄수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간수들과 신뢰를 쌓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훈련과 행동, 고난과 죽음이라는 정거장을 거쳐야만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시를 썼습니다. 본회퍼에게 죽음은 “자유에 이르는 길 위에서 최고의 향연”이었으며, 그 자유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는 교수대에 오르는 본회퍼의 발과 그를 찾아 나섰다가 돌아가던 길에 돌연 뒤를 돌아보는 약혼녀 마리아의 얼굴로 끝을 맺습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성공을 보지 못한 혁명과 차마 축제가 되지 못한 자유가 두 사람의 벗은 발과 창백한 얼굴에 고이 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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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항의 책임
‘우리 대통령님’을 축복했다는 어떤 분 때문이랄까요. 〈본회퍼〉에서 인상 깊게 들여다볼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살 폭탄테러를 준비하던 동료가 본회퍼에게 물었어요. “주께서 용서해주실까요?” “저를 위해 축복해주시겠어요?” 살인도 모자라, 자살이라니요. 잘 모르겠다던 본회퍼는 축복기도 대신 이렇게 답합니다. “친구를 위해 죽는 죽음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지요.”(요15:13)
영화 〈미션〉(1986)에는 또 이런 대화가 있었어요.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러 나가는 로드리고(로버트 드 니로)가 비폭력주의자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축복을 부탁합니다. “아니오. 만약 그대가 옳다면 축복은 필요 없을 것이오. 만약 틀렸다면 나의 축복이 소용이 없고 말입니다.” 가브리엘은 결국 축복을 거절하지만 로드리고에게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건넴으로써 무언의 지지를 표합니다.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이, 축복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신앙 양심에 따른 복종과 저항을 말하는 이 영화들로부터 배웁니다. 하물며 광장의 축복이라면, 격렬한 저항에 뒤따르는 것 못지않은 ‘역사적’ 책임이 반드시 따라붙겠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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