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ST.POPE PIUS X St.Pius the Tenth San Pio X (Giuseppe Sarto) Papa Riese, Treviso, 2 giugno 1835 - Roma, 20 agosto 1914
한 가난한 이탈리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신 요셉 사르토는 신학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베네치아와 만투아의 주교로서 그 명성을 널리 떨치셨습니다. 그리고 후일 비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피선되셨습니다.
그의 좌우명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는 교회 갱신과 변혁의 이정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황선출시 모든 정치적 개입을 배제한 그는 교회 행정과 주교 지명 방법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롭고 보편적인 교회 법전을 편찬하였습니다.
특히 성가와 성무 일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 매일 영성체와 끊임없는 성서 공부를 권고하였고 사제들의 목자적 임무 수행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그들의 학문 수준을 향상 시켰습니다.
인간적 재능과 조직 능력이 풍부하게 첨부된 그의 깊은 종교적 정신은 교회의 전반적 삶의 양상과 선교사업에 집중되었습니다. 모든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부들과 약간의 충돌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14년 8월21일 그의 정신과 신앙을 흠모하던 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슬퍼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His will read: "I was born poor; I lived poor; I wish to die poor." 그는 자신이 소박한 신분의 출신임을 잊지 않고 항상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오늘의 말씀에서) Pio(pius)는 경건한 사람이란 뜻이다.
성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트레비스 교외 리에제에서 태어났다. 구두 수선 및 우체부의 10남매 중 하나로 이름은 쥬세뻬 멜치오르 사르또였다. 1850년에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갔다. 1858년에 사제가 된 그는 향후 17년 동안의 본당 사목자 생활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 수행에서 탁월했다. 1884년에 만투아의 주교가 되었으며, 베니스의 추기경과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레오 13세를 계승하여 1903년 교황이 되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명하였다.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많은 회칙을 반포하면서 진리를 선포하는데 힘썼다. 1910년에는 프랑스 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만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교황직의 목표로 삼아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단순성과 가난과 강인함으로 신자들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발전시키고 그 당시 교회를 휩쓸던 오류들에 대항하여 굳건히 싸우며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데 뛰어났다.
1914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54년에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역대 교황들 중에 두번째로 시성된 교황이다
성 비오 10세는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장하고 첫 영성체 시기를 낮추었으며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서를 읽도록 권장한 성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그의 모토가 말해 주듯이
그는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성서를 읽게 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 개정 작업을 했으며,나아가 성서 공부를 위한 교육 기관을 세우기도 했다.
성서를 비롯하여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준비’와 ’훈련’과 ’규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우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준비해야 하고 두 번째는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규칙적으로 실행해서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지겹도록’ 반복하여 ’습관’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성 비오 10세 교황의 [성무일도에 관한 교황령]에서 (AAS 3[1911], 633-635) 주님께 찬미 노래를 바치는 교회
성서에 수집되어 있는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교회는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심을 기르는 데 시편을 사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편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찬양했다." 더욱이 시편은 옛 법의 관습을 따라 거룩한 전례와 성무일도에서 주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성 바실리오는 시편을 "교회의 소리"라 하고 우리 선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 앞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미가의 메아리"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성 아타나시오의 말에 의하면, 시편은 특히 자신의 주요 직분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무슨 말로 합당하게 찬미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따라서 성아우구스띠노는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시고자 먼저 당신 스스로를 찬양하셨고,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시편은 또 우리 영혼 안에 모든 덕행을 얻고자 하는 열의를 불붙일 힘을 지니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 ’성경은 신구약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한 책’이지만 시편집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의 열매를 담고 있는 정원처럼 찬미가를 부르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열매와 다른 책들의 열매를 모두 보여준다."고 아타나시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시편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거울과도 같아 그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감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정감의 생생한 표현이 된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여, 나는 당신 교회가 부르는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가슴 뭉클하여
당신을 노래하는 찬미가와 찬가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나이다. 이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가 진리가 내 마음을 축축히 적셔 주게 하고 내 신심의 정이 불타오르게 하여 눈물이 쏟아지게 했나이다. 이때 내 마음은 그 찬미 노래로 얼마나 행복에 넘쳤는지 모르나이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엄위와 그분의 전능하심과 표현할 수 없는 정의, 그분의 선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다른 무한한 속성을 그렇게도 숭고하게 전하는 시편의 많은 부분들을 들을 때 감동받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이와 마찬기지로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노래, 소망하는 은총에 대한 겸손하고 신뢰에 찬 기도,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영혼의 외침에 감동받지 않을 이 어디 있겠는가?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처럼, "모든 시편 속에서 노래하시고 애통하시며 희망에 부풀어 즐거워 하시고 고뇌에 차 탄식하시는" 구속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불타오르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가문이나 재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적 학식이 충문하며 경험과 덕행이 겸비한 이라면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뜻이 그렇고, 교황 비오 10세는 그 좋은 한 예이다.
비오 10세는 북 이탈리아의 트레비스 교외 리에세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 및 우편 배달부로 후에 우체국 국장이 된 사르토였다. 비오 10세는 10남매 중 장남으로 그의 이름은 조세페(요셉) 멜키오레 사르토였다. 어려서부터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고자 카스테르프란코에 있는 어떤 중학교에 다녔으나, 이것도 가정 형편으로 인해 어떤 때는 맨발로써 통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부모에세는 아직 교육시켜야 할 자녀가 수명이나 있었으므로,
요셉이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의 장학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마침 그의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는 1850년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의 본당 신부는 이미 연로하고 병약한 분이었으나, 그는 9년간 그의 밑에서 보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리하여 자연히 그의 위대한 능력은 인정되어 살차노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살차노 본당 교우들은 그가 별로 이렇다 할 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하여 신통히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재능 및 그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사랑과 희생과 협조는 곧 지방민의 인심을 사게 되어, 9년 후 그가 트레비소 대신학교에 고문 겸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는 애석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1875년 11월에 트레비소 대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의 성서국장을 지냈다.
그가 대신학교에서 교수로 9년간을 지내고 레오 13세는 그를 1884년에 만토바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교구를 활성화시켰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893년에는 베네치아의 총주교 겸 추기경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이러한 직을 사양하려 했으나, 란포라의 추기경에게 “이미 그러한 직을 사양한 사람이 한 분 있으므로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교황께서는 크게 마음 상할 것” 이라는 주의를 받고 온순히 교황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때부터 대교구중의 하나인 자기 교구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과거에 반목되어 있던 정부와도 타협을 하게되었다. 그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빈민들이었다. 그는 자기 필수품까지 전부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어떤 때는 생활에 곤란을 느낄 때가 많았다.
1903년 레오 13세의 서거로 사르토 추기경도 교황 선거를 하기 위해 로마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는 선거 후 곧 돌아갈 줄 알고 왕복차표를 마련했다. 그러나 돌아갈 차표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압도적 다수표로 새로운 교황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의 이름은 그 전대의 교황 비오의 이름을 따서 그는 비오 10세가 되었다.
4억 인의 세계 신자들을 인솔하여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유물론이며 기타 불신, 부도덕적인 세상에 대처해 나아감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비오 10세의 특기할 만한 사적 중에는 신앙을 견고히 하기 위한 운동과
신자의 영신적 양식이 되는 성체를 자주 또한 정당히 영하기 위한 회칙을 반포한 것이다. 이러한 법칙 변경으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신자들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비오 10세는 전임 교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황좌에 오른 후 발표한 첫 번째 칙서 “E Supremi Apostolatus"(10월 4일)는 추기경단에 한 훈시와 더불어 비오 10세의 사목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배교가 어느 시대보다도 심하게 일어나는 시대임을 강조한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 일도서 개정을 명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모던니즘”과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그의 만년인 1914년 8월 2일에 돌연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전력했으나 결국 허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1924년 8월 20일을 일기로 그는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다. 교황이 서거하자 전세계는 겸손하고 열심한 교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기경단의 요청으로 엄격한 시복 시성 조사를 한 후 그분으로부터 3대의 후계자인 비오 12세에 의해 1951년 6월 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29일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