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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8 - 카페왕조 루이 7세의 2차 십자군과 필리프 2세의 3차 십자군 전쟁!
게르만족 카롤링거왕조가 다스리던 프랑스에서 987년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니 카페 왕조로, 본가는 1328년에 단절되었으나 분가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가 1848년
까지 이어지는데 로베르 2세 - 앙리 1세 - 필리프 1세를 거쳐 카페왕조 5번째 왕이 루이 6세입니다.
루이 6세는 1108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지방분권적인 봉건 귀족들, 특히 잉글랜드 왕을 겸하는
노르망디 공작과 지속적으로 맞서는 한편 왕권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도시 및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의 치세가 끝날 때쯤 왕령지의 확장과 함께 왕권의 영향력이
왕국 전체에 걸쳐 확대되기 시작하니 확장왕(le Gros) 또는 전투왕(le Batailleur) 이라고 불립니다.
1092년 필리프 1세는 앙주의 풀크 4세가 살아있는데도 그의 부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결혼하기
위해 왕비 베르트와 이혼해 궁정 밖에 유폐시키자, 어린 루이 6세도 생드니 수도원에서 자라게
되었지만 루이 6세의 거처가 왕실 수도원인 생드니 수도원이었다는 점은 세자 지위가 확고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뿐만 아니라 필리프 1세는 새롭게 획득한 백생(Vexin) 백작령을 하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 미루어 새로운 왕비 베르트라드 와 세자 루이 6세 사이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루이 6세를 어쩔수 없이 궁정 밖에서 생활하도록 한 것으로 사가들은 판단하는데.....
루이 6세는 생드니 수도원에서 같은 또래의 수도사 쉬제를 만났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으니 이후 쉬제는 루이 6세가 즉위한후 그의 정치적·종교적 조언자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필리프 1세가 재혼 문제로 파문당하자 루이 6세는 1097년 부터 부왕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는데
호시탐탐 왕령지를 침탈하려는 지방분권적 세력들을 막아야 했으니, 강력한 세력인 잉글랜드왕
윌리엄 2세와 치열한 경쟁관계로 1098년 기사 서임식을 받은 루이 6세는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많은 지방 영주들의 도전을 제압해 나갔으니 1101년 부터는 루이 6세가 실질적인 통치를 합니다.
1108년 7월 29일 필리프 1세가 사망후 루이 6세는 서둘러 장례식을 끝낸 후 오를레앙으로
가서 8월 3일 축성식을 거행했는데.... 축성식은 통상 프랑스 동북에 위치한 랭스 대주교
가 거행했으나 왕국 서부 지역인 믈룅에서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루이 6세는 동쪽 끝에
위치한 랭스 보다는 가까이 남쪽에 위치한 오를레앙으로 가서 축성식을 거행한 것 입니다.
사실 루이 6세는 의붓 어머니 베르트라드 왕비의 아들인 망트 백작 필리프가 랭스로 가는
길목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으니....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최대한 신속히 축성식
을 거행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가까운 오를레앙에서 축성식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랭스 대주교 라울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이미 루이 6세는 상스(Sens) 대주교 댕베르에
의해 오를레앙의 생트크루아 성당에서 축성을 받고난 이후였는데.... 다행히 다른 제후
들이나 영주들이 그의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루이 6세는 이전 카페 왕들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나갔으니 전 왕국에 걸쳐 이른바
‘통치’ 라는 것을 행했는데, 전투와 무력투쟁을 통해 봉건 제후와 귀족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민들을 실질적인 국왕의 신민으로 만들어 나갔으니.... ‘통치’
를 통해 봉건주의적 권력 파편화를 극복하고 왕국을 통합해 카페 왕권의 초석을 놓게 됩니다.
그는 당시 활기차게 전개되던 각 도시의 코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이들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보장하고 봉건 영주들이 도시들을 약탈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했으니.... 즉 도시의 왕권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왕권의 도시에 대한 자치권 부여가
이루어지면서 향후 프랑스 왕국에서 지속될 왕권과 도시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자율권과 자치권은 수도원과 종교 조직에도 부여되었으며 이를통해 루이 6세는 종교적인 명분을
획득했고 비적 집단으로 변해버린 몰락 귀족들의 약탈행위들을 척결해 나가면서 왕국 내 평화
와 질서를 확립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니, 카페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국 전체에
걸쳐 왕의 권위를 확장해 나갔는데 그의 별칭‘확장왕(le Gros)’은 왕권의 확장에서 유래합니다.
물론 그의 정책이 순탄하게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왕권 강화 정책에 저항하는
수많은 봉건귀족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으니.... 그의 또 다른 별명인‘전투왕
(le Batailleur)’ 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무력 충돌
상황과 전투에서 루이 6세는 많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많은 패배를 겪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왕 헨리 1세는 프랑스땅 노르망디 공작을 겸한지라 자신이 프랑스왕의 종신으로 프랑스
의 분열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헨리 1세
의 사위로서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고 1124년에는 랭스까지 쳐들어오니....
이는 프랑스에 대한 외부세력의 침입으로 간주되었고 루이 6세를 중심으로 베르망두아,
부르고뉴, 플랑드르, 아키텐, 앙주, 샹파뉴, 블루아 제후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프랑스 대제후들은 프랑스왕의 권력 강화도 원치 않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세력 확장은 더더욱 원치
않았으니 루이 6세는 생드니에 보관된 ‘붉은 왕기’ 를 내세우면서 연합군의 수장을 자처했는데....
사분오열을 기대했던 하인리히 5세는 연합군을 보고 동프랑키아로 후퇴했으니 이후로도 잉글랜드
와 신성로마제국의 긴장관계는 계속되었고 이를 이용해 프랑스 제후들을 하나로 모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124년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은 90년후에 벌어질 부빈 전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1127년 플랑드르 백작 샤를 1세가 사망하고 여러 귀족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자 조정자
또는 중재자의 입장으로 플랑드르 백작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
하는 능력을 발휘했으니 루이 6세의 권위는 높아졌고 봉건제후들 보다 우위를 점할수 있었습니다.
루이 6세는 사부아백작 욍베르 2세 딸 아델라이드와 1115년 결혼해 8명 자식을 두었으니 장남 필리프는
13세가 되던 해인 1129년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받았지만 1131년 요절했고, 세자와 공동왕의 직위는
왕 보다는 성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던 차남 루이에게 떨어지니 형을 대신하여 1131년 10월 25일
루이 6세와 공동왕으로 랭스에서 축성을 받았는데 1137년에는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잉글랜드왕 스티븐과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어 그의 아들 유스타슈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두고
루이 6세에게 봉건신서를 했으며, 프랑스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던 남부 지방에서도
낭보가 찾아들었으니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가 사망하면서 공작령을 딸 알리에노르
에게 상속하도록 하면서..... 프랑스왕 루이 6세를 딸의 후견으로 지명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아들 루이 7세와 알리에노르의 결혼을 의미하며 이렇게 되면 남부 프랑스
지역의 막대한 제후령이 프랑스 왕권에 속하게 될 수 있었으니.... 같은 해 7월 25일
보르도에서 루이 7세는 알리에노르와 결혼했는데 하지만 그 사이 8월 1일
확장왕 루이 6세는 갑자기 사망하였고 세자 루이 7세가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합니다.
루이 7세는 형이 있었으니 수도원에 들어갈 예정이라 정치·군사적 활동과 관련해 미숙할
수 밖에 없었는데.... 미성년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의미도 있지만‘미숙함’을 의미
하기도 하는데 부왕의 절친이었던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가 루이 7세 곁에 충실한
조언자로 남아 있었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책들을 저질렀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루이 7세는 1137년 왕위에 오른후 부왕 정책을 이어받아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들에게 유리한
정책들을 펼치면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지만, 그의 치세에는 앙주가등 봉건귀족 가문들
과의 투쟁과 잉글랜드와 분쟁으로 점철 되었으며 또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루이 6세 당시에 왕권의 기틀이 잡혔다고는 하나 여전히 프랑스 왕국은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화와 권력 파편화가 심한 곳이었으니 따라서 루이 7세는 쉬제의 조언을
받들며 부친의 정책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야 했는데.... 난폭한 기사와 귀족
들에 맞선 도시 부르주아들 및 성직자들의 자치권 확립에는 매우 우호적 이었습니다.
그외 농민들의 여건 개선과 농촌에서 생산력 증대에도 큰 관심을 보였으니 개간사업을 장려
하고 농노들의 해방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 1140년대 초 루이 7세는
왕권과 배치되는 경우에는 교황과의 분쟁도 서슴지 않았으며 파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내 성직자 서임에 대한 루이 7세의 개입은 결국 교황과의 화해로 잘 매듭지어졌으니
화해의 표시로 루이 7세는 교황이 제안하고 시토수도회 성 베르나르가 선전하는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해야만 했는데... 1146년 ~ 1148년 동안 참가한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성패를 떠나 그에게 크나큰 타격이었으니 왕실 재정이 고갈되고 왕권은 다시 위축됩니다.
1096년에서 1099년까지 원정을 펼친 제 1차 십자군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지금의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4개의 십자군 제후국들, 즉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크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 중 에데사 백작령이
1144년 모술 태수 장기에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다시 탈취하려고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됩니다.
1146년 루이 7세는 왕비 알리에노르와 함께 아직 십자군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봉건 제후들
을 이끌고 육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으니..... 도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드
3세가 이끄는 십자군과 합류하였는데 루이 7세 프랑스군은 이들과 잘 어울릴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서유럽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동로마 비잔틴제국 황제와
그 측근들은 십자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그들이
교황에게 군대를 요청한 이유는 자신들을 위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1차 십자군은 아예 눌러 앉아 점령지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148년 3월 루이 7세 십자군은 알리에노르의 숙부 레몽 드 푸아티에가 통치하고 있는 안티오크 공작령
에 도착했는데, 이슬람 알레포의 성장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레몽 푸아티에는 루이 7세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루이 7세는 예루살렘 전진을 고집했는데 남부 프랑스 출신의 레몽은 화려하고
언변 좋으며 과장이 심한 사람이라, 성직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금욕적인 루이 7세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남부 프랑스 출신인 알리에노르는 곧 숙부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면서 루이 7세에게
숙부를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레몽과 알리에노르가 보여준 자유분방한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태도는 북부 프랑스의 경건하고 엄숙한 성직자들에게는 양자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도록
만들었고... 루이 7세에게는 안티오크 방어 보다는 성지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게 중요했습니다.
1148년 늦은 봄에 콘라드 3세와 루이 7세의 십자군이 전열을 정비했지만 장기가 점령한 동북 내륙의
에데사 수복 보다는 이들은 후계자인 누르 앗딘과의 전투만을 학수고대 했는데.... 그러면서
예루살렘 왕국과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가 곧 누르 앗딘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 억측
하고는 어처구니없게도 유럽에 명성이 자자한 오래된 유명 도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예루살렘왕국등 현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유혈낭자한 전투와 승리, 그리고
얻어질 명예와 전리품, 무용담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하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거대한
도시 하나를 점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루이 7세와 콘라드 3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다마스크스 점령 실패와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본국으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십자군은 루이 7세에게 커다란 재앙이었으니 원정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원정을 갔다는 자체가 루이 7세 통치에 치명타를 가했으니.... 먼저 장기간의 원정으로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났고, 이는 루이 7세의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하였으며 봉건제후 및
귀족들에 대한 장악력이 손상되었는데 대처할 수 있는 재정을 당장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원정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경건하고 엄숙한 북부 사람
루이 7세와 자유분방한 남부 사람 알리에노르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으니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와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7세
는 결국 1152년 알리에노르와 이혼했는데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이혼이 아니었습니다.
알리에노르는 아키텐 여공작으로 서남부 지역의 막대한 그것도 와인산지라 부유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지니고 있었으니.... 즉 이혼은 이 영토들이 다시 왕권의 범위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더 안 좋은 점은 이후 알리에노르가 이 영토들을 가지고 프랑스 왕권의 가장
큰 경쟁자인 앙주 백작으로 이후 잉글랜드왕이 되는 연하남 헨리 2세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알리에노르가 재혼한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조 플랜태저닛(Plantagenet) 가문이었으니
1144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를 점령했는데 이 때 그의 부인은 바로
잉글랜드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였으니 마틸다는 본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으나 1125년 그가 사망한 뒤에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1129년에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를 점령할 당시 잉글랜드왕은 헨리 1세의 조카인 스티븐이었고 마틸다는 바로
남편 조프루아 5세와 함께 헨리 1세의 딸인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공세를 펼치고 있던 중
이었는데.... 끊임없는 전투 끝에 1153년 스티븐과 마틸다는 스티븐의 현 왕위를 인정하되 그 후계자
를 마틸다와 조프루아의 아들인 앙주 백작 앙리(Henri, 헨리 2세) 로 삼는다는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1153년 스티븐의 아들 유스타스 4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협상은 쉽게 이루어졌는데 앙주 백작
앙리(헨리 2세)는 그 1년 전인 1152년 알리에노르와 결혼했으며 그리고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한 후 앙리는 잉글랜드왕 헨리 2세가 되었으며 알리에노르는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습니다.
둘의 결혼과 헨리 2세의 잉글랜드왕 즉위는 루이 7세에게 커다란 위협이었으니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이라는 프랑스 왕국의 대제후령 3개가 통합되어 잉글랜드왕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루이 6세 때부터 부단히 확장해 왔다고는 하지만 카페 왕조의
왕령지는 왕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잉글랜드 왕의 영지에 비하면 극히 보잘것 없었습니다.
따라서 루이 7세는 거대한 헨리 2세에 직접 맞설 수 없었고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헨리 2세
가문의 분열 조장을 끊임없이 꾀했지만.... 혈기왕성한 헨리 2세는 1159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 까지
장악하는 등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이에 대해 루이 7세는 무력하게 관망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루이 7세는 1154년 스페인 카스티야왕 알폰소 7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나 콩스탕스
는 딸 둘만을 출산하고 1160년 고향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에서 돌아오던
중에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루이 7세는 샹파뉴 백작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티보
4세의 딸 아델과 결혼했고 1165년 드디어 왕위를 이을 아들 필리프(필리프 2세)를 얻었습니다.
큰 영지를 갖고 결혼했던 알리에노르와 불화가 싹터 1152년 이혼하고 왕비는 앙주백작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헨리 2세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왕국 서부 지역 와인의 산지인 아키텐등 절반이
잉글랜드 왕의 통치 지역이 되었고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기세에 눌려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1180년에 사망한 것인데 다행히 세 번째 왕비에게서 아들 필리프 2세를 얻은게 천운 입니다.
1170년대에 이르러 헨리 2세의 궁정에서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헨리, 리차드, 제프리) 사이
의 갈등이 심각해졌는데.... 루이 7세는 저 영국왕의 아들들의 반란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영국왕 헨리 2세의 왕권 약화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그의 노력이 당장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으니 아들들에 의한 헨리 2세의 몰락은 그의 아들 필리프 2세 때에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1179년 11월 1일 루이 7세는 장남 필리프 2세를 위해 축성식을 거행하고 이듬해인 1180년
9월 18일 사망했는데.... 이미 공동왕으로 필리프 2세가 왕권을 장악한 상태였던 만큼
그의 공식적인 왕위 즉위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졌고 필리프 2세와 함께 카페
왕조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되니 필리프 2세는 재임시 급격한 왕권 강화를 이루게 됩니다.
여러 단기적인 실책에도 불구하고 루이 6세와 루이 7세의 두 왕들은 왕권 강화가 단순히 봉건
제후들에 대한 승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들에 대한
지원과 이들과의 긴밀한 관계 구축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최초로 제시했으니, 또한
‘신성한 왕권’ 과 ‘풍요를 보장하는 왕권’ 이라는 두 상징 권력을 카페 왕들에게 부여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루이 7세 아들로 지방 제후들을 견제하는 한편 가장 큰 봉신인 잉글랜드왕 헨리 2세 가문
의 내분을 이용해 왕령지를 확장시켰으며... 제3차 십자군에 출전했으나 곧 되돌아와 잉글랜드 왕에게
속했던 영지들을 정복해 나갔으니, 13세기 초에 이르러 서남부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 전지역을 장악
하고 제후와 귀족들에 대해 왕권의 압도적 우위를 확립해 신성한 왕권의 이데올로기가 시작되어 갑니다.
필리프 2세는 지방분권적인 봉건주의적 프랑스를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공동체로 뒤바꾼
왕이니.... 그의 시대에 프랑스 왕권은 잉글랜드왕을 비롯해 남부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왕국 내 모든 제후들을 압도하는 위치를 점했으니, 별칭인 ‘존엄왕’ 은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일대기를 남긴 수도사 리고르가 당대에 붙인 별칭입니다.
별칭은 영토를 팽창시켰다는 라틴어 동사 ‘아우게레 ’와도 연관이 되며 태어난 달이 아우구스트의 이름을
딴 8월이었다는 점에서도 연관되니 지식인들이 볼 때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등장한 아우구스투스
와 다를 바 없었는데.... 루이 7세는 알리에노르, 콩스탕스 두 왕비로 부터 딸만 태어난 상황에서 3번째
결혼한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딸 아델은 그가 45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아들 필리프 2세를 출산합니다.
1179년 11월 1일 루이 7세는 14세가 된 필리프 2세를 위해 축성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80년 9월
에 죽자 공동왕으로 필리프 2세가 왕권을 장악한 상태였던 만큼 왕위 즉위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졌으며... 15세밖에 안된 필리프 2세가 타고난 정치적 감각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끌어 모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왕권의 지위를 높이는 능력을 발휘했다는 점 입니다.
그는 모후 아델의 가문인 샹파뉴 백작 가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가까이 하면서 1180년 필리프 1세의 조카이자 에노 백작 보두앵 5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
했는데.... 이 결혼은 아르투아 영지를 필리프 2세에게 가져다주었으며 다른 한편 루이 7세 당시
에 잉글랜드왕 헨리 2세와 맺은 평화조약은 샹파뉴와 플랑드르 모두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181년 부터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는 북부 지역 귀족들과 연대해 사돈
인 필리프 2세에게 도발하기 시작했으니.... 1185년까지 필리프 2세는 이들을 견제하면서
왕령지를 조금씩 늘려 나갔는데 북부 프랑스 지역이 어느정도 안정되자 필리프 2세는
이제 잉글랜드 플랜태저닛 가문의 내분을 이용해서 헨리 2세의 세력을 분열시키기 시작합니다.
1189년 헨리 2세는 아들 리처드 1세가 주도하는 반란 중에 죽고 같은해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는데... 리처드 1세는 헨리 2세에 대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필리프 2세의
지원을 받는 처지였으나, 이제 잉글랜드 왕으로서 필리프 2세와 경쟁자의 입장이 되었으니
이때 서로 경쟁과 갈등보다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니 바로 제3차 십자군이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은 1187년 이슬람 세계의 강자 아이유브 왕조 술탄 살라흐 앗딘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가 새 십자군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는데....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에는 필리프 2세는 물론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전했는데
모두 지방분권적인 세력들을 제압하고 왕권과 황제권을 수립한 12세기말의 쟁쟁한 군주들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대군은 2차 십자군 독일 황제 콘라드 3세와 마찬가지로
육로를 택했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베즐레에서 만나 제3차 십자군 출정식
을 가졌는데... 하필 시골의 외진 마을을 택한 이유는 베즐레 수도원 Vézelay Abbey 이
있으니 팔리프 2세의 아버지 루이 7세 처럼 바로 "막달라 마리아" 에게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영국왕 리처드 1세는 제노바에서 스페인을 돌아온 영국함대에 올랐고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노련한
제노바 함대의 배를 이용했는데... 출발 날자도 필리프가 빨랐기 때문에 도중에 시칠리아 메시나
에서 합류해 해로를 통해 동로마제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제3차
십자군은 유럽의 쟁쟁한 군주들이 모두 출정한 십자군이었으나 그만큼 문제도 더 많이 발생합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메시나에서 합류하긴 했지만 서로 경쟁하며 불화의 싹을 키워나갔으며
반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들과 멀리 떨어져 용맹무쌍하게 이슬람군을 격파하며 성지로
향해 진격했지만.... 1190년 터키 남부에 살렙강을 도하하던 중 황망하게 익사하고 말았으니
10만에 이르렀던 십자군은 해산해 돌아가버리고 그 아들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레반트로 갑니다.
10만에 달하는 십자군이 해산된 이유는 전쟁을 수행하자면 가장 큰게 "돈" 인데 황제가 죽었으니
전쟁 비용을 댈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라..... 여느 보통 왕국 같으면 장남이 옆에 있었으니
아버지를 이어 황제에 오르면 아주 간단하지만, 신성 로마제국(독일)은 주요 7명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제도인지라 선거에서 누가 황제로 뽑힐지 알수 없었기 때문에 해산된 것입니다.
1191년 여름에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성지에 도착했는데 서로 갈등은 물론 이 지역의 무더운
날씨로 인해 큰 괴로움을 겪었으니.... 서남아시아의 무더운 날씨에 북유럽에서 착용하던 갑옷을
입고 행군하던 이들은 탈모와 습진으로 고생했고, 필리프 2세는 한쪽 시력을 잃었으니 아크레
함락후 필리프 2세는 프랑스 걱정도 있으니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교황의 허락을 받고 귀국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리프 2세 귀국을 재촉한 사건은 함께 3차 십자군에 출정했던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의 사망이니 그는 후계자를 두지 못한지라.... 필리프 2세는 귀족들의 주군으로
백작위 계승문제에 개입하고 영향권을 확대할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니, 1192년
장인 에노 백작 보두앵 5세가 백작령을 계승하도록 해서 왕권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사실 보두앵 5세의 딸이자 필리프 2세의 왕비였던 이자벨은 이미 1190년에 사망했고 이에 필리프
2세는 서둘러 재혼을 추진해 1193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 잉게보르그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이 결혼으로 필리프 2세는 덴마크와 동맹을 이뤄 잉글랜드를 북쪽에서 압박
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허약한 아들 루이 8세 이외에도 더 많은 왕자들이 태어나길 바랐습니다.
또 발데마르 1세 왕가는 모계쪽으로 정복왕 노르망디공작 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빼앗긴 하랄드
2세의 후손으로 이어졌는데.... 하지만 결혼 다음날 필리프 2세는 잉게보르그를 수도원에 가두고 이혼
절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왕비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채 만 7년
이나 유폐되어 있었고 그 사이 필리프 2세는 1196년 바바리아 귀족 출신 아녜스 드 메라니와 결혼합니다.
필리프 2세의 이혼과 결혼은 당시 교황의 영적 권위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던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재를 받기 시작했으니.... 결국 덴마크 공주 잉게보르그(앵주베르주) 와의 이혼은 거부되었고,
필리프 2세가 그녀를 여전히 왕비로 복귀시키지 않자 교황은 1200년 그에게 파문 처분을 내렸습니다.
공식적으로 필리프 2세는 교회에서 금지하고 있던 일부다처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1201년 아녜스는 딸과 아들 한명씩을 남긴채 셋째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사망했고.... 이후로도
필리프 2세는 앵주베르주와의 이혼을 추진했으나 교회는 계속 이를 거부했고 결국 필리프 2세
는 1212년 앵주베르주를 필리프 2세의 아내는 아니지만 프랑스의 여왕으로는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필리프 2세가 이혼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1190년대는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닛 가문과 영토싸움을 전개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1192년 살라흐 앗딘과의 협상으로 원정을 끝낸 리처드 1세는 배로 귀국하던중
풍랑을 만나 아퀼레이아에 상륙했는데 아크레성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
인 비엔나에서 생포되어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었다가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6세에게 억류 됩니다.
이 틈을 타서 그의 동생 존(John, 1166년 ~ 1216년)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1193년 필리프 2세에게
봉건신서를 시행하고 그의 지원을 대가로 많은 영지를 양도했는데... 반면에 모후 알리에노르는
영국 전역에서 돈을 거두어 1194년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 리처드 1세가 풀려나게 되었으니, 귀국
하자마자 동생 존이 프랑스에 넘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필리프 2세와 치열한 영토 전쟁을 전개합니다.
하지만 1199년 3월 리처드 1세는 전쟁 도중 석궁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동생 존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제는 영국왕으로서 필리프 2세에 대항해 전쟁을 벌여야만 했으니... 필리프 2세는 플랜태저닛
왕가에 대해 정치적 주도권을 쥐면서 토대를 차근차근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내부에서
귀족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던 존 1세는 무능력까지 더해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연패를 당합니다.
리처드 1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존 1세는 잉글랜드 내부에서 평판이 매우
안좋았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견고해 보였던 플랜태저닛 영지 휘하의 귀족들은 점점
존 1세로 부터 이탈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1212년 까지 필리프 1세는 헨리 2세가
장악했던 플랜태저닛 영지인 아키텐, 끼엔느, 가스꼬뉴를 하나, 둘씩 차지해 나갔습니다.
이후 필리프 2세의 프랑스 군대는 급기야 플랜태저닛의 고토인 노르망디와 앙주마저 장악하니
영국은 북부에 항구 칼레만 유지할수 있었으며.... 추락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와 전쟁하기 위한 특별 세금을 거두기 위해 귀족들을 소집했다가..... 오히려 귀족들에게
굴복한 존 1세는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대헌장에 서명해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