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발자취] <23>김상진 할복- '오둘둘' 사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학생총회 연설도중 할복 자살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 …이것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고, 이것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1975년 4월 11일 오전 10시. 수원 서울대 농과대학 본관 백양나무 앞에는 3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4월 2일(제1차)과 4일(제2차) 농과대학에서 일어난 반(反)유신 데모로 구속된 학생회 간부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제3차 비상총학생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金相眞ㆍ24ㆍ축산과 68학번)은 대학노트에 적어온 ‘양심선언문’을 꺼냈다. “나의 행동에 대해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실상부하게…”라고 말하면서 하얀 티셔츠 속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날 맨 앞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이병호(李柄浩ㆍ농교육과 75학번ㆍ현 농림부 장관책보좌관)씨의 기억.
“칼날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옆에 함께 앉아 있던 누군가가 ‘너 뭐하는 거냐’고 외치며 튀어 나갔다. 동시에 상진 형은 오른손에 움켜쥔 칼로 왼쪽 하복부를 찌른 뒤 위로 비스듬히 그어 올렸다. 몇몇 학생이 그를 감싸 안았다. 그는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의 주변에서 시작된 애국가가 잔디밭으로 퍼져나갔다. 칼로 찌른 부위가 시퍼렇게 부어 올랐다. 동료들이 그를 들고 교문으로 달렸다. 나는 떨어진 그의 신발을 주워 들고 뒤따랐다.”
수원 서울대 농대 복학생 김상진
병원 옮겨졌으나 다음날 숨져
보도통제 불구 곳곳서 추도시위
서울대 '오둘둘 장례시위' 이어져
이씨는 김상진이 한 때 회장을 맡았던 서클 ‘한얼’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비상총회에 김상진은 구속된 동지들의 석방을 위한 ‘축산학과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참석했다.
김상진이 떠난 자리에는 밤새 스스로 작성한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이 흩어져 있었다. 김상진이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동료들은 그의 유언장이 돼 버린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낭독했다.
택시에서 이미 혼수상태에 빠졌던 김상진은 농과대학 지정병원에 도착했다가 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1차 수술은 성공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시간 학생들은 농대 대형강의실(205호실)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고, 학교측은 심야회의를 소집해 ‘김상진 제적’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결사 단식 농성’을 결의했다. 그러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12일 새벽 2시 30분쯤부터 2차 수술에 들어갔다. 그 동안 수원 시내 AB형 피가 동이 났다. 다음날 아침 2차 수술이 실패로 드러났다. 아침 8시 20분쯤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되는 앰블란스 안에서 김상진은 숨을 거두었다.
도립병원 사망진단서에는 ‘상처는 깊이 7㎝ 길이 4㎝, 장간막 파열로 출혈이 심했다’고 돼 있다. 이날 오후 1시 라디오 뉴스에서 그의 사망을 전했고 이후 모든 보도는 통제됐다.
이날 오후 서울 신일고교 학생들이 세종로 지하도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김상진의 죽음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15일 전남 광주제일고교에서 ‘김상진 열사 추도식’이 열려 고교생들이 대거 무기정학을 받았다.
이어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그의 죽음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1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ㆍ19 희생자와 김상진을 추모하는 미사가 열렸다. 대학과 재야, 종교계는 연일 추도식을 벌였고, ‘유신 헌법 철폐’ 시위로 이어졌다.
신민당은 당보 ‘민주전선(75년 4월 15일자)’에 김상진의 ‘양심선언문’을 실어 배포했다. 4월 30일 월남 패망으로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는 가운데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됐다.
서울대는 ‘장례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4일 공과대학 중심으로 장례식을 계획했으나 당국의 물리력에 밀려 실패했다. 곧바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긴급조치 9호 발표 다음날 서울대에는 ‘관제(官製) 안보궐기대회’가 열렸고 그 다음날 관악캠퍼스는 문을 열었다. 5월 22일 도서관 앞 광장에는 긴급조치 9호 이후 첫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학생들은 이를 ‘오둘둘 사건’이라 불렀다.
사건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유영표(柳英彪ㆍ인류학과 68학번ㆍ현 매경 바이어스가이드 푀옛씬?설명.
“농대 쪽에서 김상진의 육성 테이프와 유인물 등이 전달돼 왔다. 위수령(71년)으로 강제 입영 후 복학한 동지들과 문학회, 가면극연구회(탈춤반), 야학문제연구회 등의 서클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장례 시위를 계획했다. 프락치들의 접근이 어렵고 경찰도 신경을 덜 쓰고있는 우리 복학생 그룹이 세부 계획을 맡았다. 개강 1주일 후인 22일로 잡았다. 4교시가 끝날 무렵 우리는 강의실 뒤편에서 아크로폴리스(도서관 앞 마당)으로 모이자는 쪽지들을 앞으로 전달했다. 일부 동지들은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화재 비상벨을 눌렀다. 12시 10분부터 몰려든 학생들은 의외로 많았다.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 말이냐’는 플래카드가 펼치고 ‘반독재 선언문’을 낭독했다. 2,000명 가까이로 불어난 학생들은 1시간이 넘도록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다. 학내에는 사복 경찰들이 항상 들어와 있었으나 기습적인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오후 2시쯤에야 기동경찰대가 학내로 진입했다.”
‘오둘둘 사건’으로 1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제적되고 20여명이 전국에 지명수배 됐다. 당시 한심석(韓沁錫) 서울대 총장은 3년 임기의 총장직에 연임됐으나 바로 해임됐다.
치안본부장과 남부경찰서장 등 서울대 담당 경찰 지휘 라인도 모두 직위해제 됐다. 이듬해 12월 서울 법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의 시위가 이어질 때까지 캠퍼스는 꽁꽁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