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바늘귀로 들어 갈수 있는가?.....하나님의 의도(12)
마 19 : 16- 30
우리는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성전제사 같은 율법을 지킨 행위는 우리하고는 다르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을 대충알고 있으면 넓은 길 엉뚱한 길로 가게 되고 그 길의 끝은 낭떠러지가 되기 쉽습니다.
마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민족적인 전통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완악하고 강팍하다는 것은 성격이 거칠고 냉정하고 인색하다는 뜻이 아니고 살이 쪄서 비둔하여 움직이기 힘들고 다른 무엇도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자기 지식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진리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 현재의 자기 지식과 행동을 자랑하고 고집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선민의식으로 무장된 자기들의 확고한 신념이 예수라는 청년의 혹세무민(?)하는 기적과 이적에 잘못 감동되어 자기들의 신념이 무너져버릴까 두려워서 ....율법지킴의 확고한 신념이 무너져 버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까봐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눈을 떠서 진리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여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들의 신념과 행동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의식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날까지 그들의 선민의식으로 비롯된 자긍심은 지구촌에서 그 누구로 부터도 훼손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과 절차 그리고 행동양식은 참으로 대단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지켜야 할 600개가 넘는 율법의 조항들을 잘 지켜내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번영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열심에 대하여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그 길 이외의 어떤 일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갖은 고생으로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된 사람들의 경우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입니다) 그리고 그런 특징적인 행동들을 고수하여 자식들이나 남에게도 같은 행동양식을 강요합니다. 사람의 특질이 각기 다름에도 자기와 똑 같은 행동양식을 따르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핍박이 대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고집이 세고 자기 삶의 철학이 분명하여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자기와 다른 행동양식 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선적인 기제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공한 것이고 불경한 것이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진 그 신념이 무너져야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길에 들어 설수 있음에도 그들은 막연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런 바리세인들과는 상관이 없고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율법지킴으로는 좀 꺼림직 하여 영생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부자 청년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한 유대인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등의......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내가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그렇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그러나 청년이 자기 소유가 많으므로 ....근심하여 떠나갔습니다. (마19:16-30)
물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이웃 사랑은 참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도덕적으로 살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 교회마다 감동적인 예화를 곁들여 물질적인 봉사와 헌신을 강조합니다.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헌신해야 하는가....내가 가진 것 중에 얼마를 이웃을 위해 써야하는가....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많은 것을 주면 많은 것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돌아올 보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에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먼저 청년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라는 질문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자기가 무엇을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결과인 영생은 값없이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생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이 청년은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지금 부자청년은 십계명의 말씀을 자기가 지키고 규정대로 행동해야 할 율법지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체를 손상시키는 일로만..... 간음하지 말라는 여자를 탐하지 말라 로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여러 행동강령을 국어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십계명의 모든 말씀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마 도덕책에 다 나오는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을 성경에서도 같은 뜻으로 반복하여 말하였겠습니까. 성경이 말한 십계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되어야 할 성도들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다음카페 “열린사이 사랑방”에서 “신우회 소식” 방에 등제된 십계명 시리즈에 각 항목마다 상세하게 강해하였습니다, 부디 참조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내가 받아들이기 곤란하거나 어려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적으로 외면하거나 적당히 자기가 편한 데로 이해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그 이면에는 자기의 신념과 통속적인 자기 확신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부자청년 이야기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 주려니 자기 삶의 기반이 무너질 것 같고 그렇다고 가난한자를 외면하자니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내용이 정말로 그러한 뜻인가는 생각해보지 못합니다. 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이분법적인 행동양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부자청년을 보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 쓰인 “부자”라는 단어를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부자로 번역된 “풀루시오스”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먼저 물질적인 부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형용사로 쓰일 경우는 대부분 형이상학적 소유의 풍부함을 말합니다. 섹스피어 소설의 참 맛을 알려면 번역본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가 쓴 원본의 단어를 깊이 연구하여야 함과 같이 성경도 상당한 부분에서 그 원본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완전히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청년은 물질적으로 부자이기도 하고 계명을 지킨 것이 많은 부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들을 잘 지켰으니 얼마나 자신 만만 하겠습니까...도덕적인 행위의 풍성함이 있고 그렇게 율법을 다 지켜 내엇다는 자부심이 풍성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만한 일들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자기 자랑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 했다는 자신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해서 공로를 많이 쌓은 공로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로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할 때 ....가난에도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난과 절대적인 가난이지요. ...영생을 얻을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말합니다.
지금 이 부자청년은 자기의 행위로 쌓은 공로는 많지만 절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공로를 가난한 자에게 양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누어 줄 진리도 깨우친 것이 없습니다. 부자청년은 오로지 자기가 쌓은 공로와 재물에만 관심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물질적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오늘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행위로 인한 공로와 믿음을 대조시키는 예화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독자가 인본주의 입장으로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면 신본주의 입장의 신앙을 가지느냐를 스스로 판별하여 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지요. 성경은 그것을 죄의 근원이라고 하고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자기중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되려고는 하지않고 멋진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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