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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
9월 4일
이 강의는 문자의 발명 이후에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기록한 역사에 대한 연구이다. 역사는 사건의 역사와 사건 기록의 역사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강의는 사건 기록의 역사 즉, 역사 서술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역사 서술을 통해 우리는 당대를 살아간 역사가의 현실 인식과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을 작품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시대의 역사 서술은 당대의 정신적 유물로써 시대 경향과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자는 B.C 3500년에 수메르인들에 의해서 나타난 설형 문자가 그 최초인데 문자의 발명은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 이전에는 자신에 대한 기록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문자의 발명으로 자신의 지식을 축적하여 다음대에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러한 문자를 이용한 역사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B.C 7 8∼5 세기 사이의 일이었다. 문자의 기원은 원시인들의 동굴 벽화등에서 볼 수 있는 그림 문자인데 이것은 하나의 문자라는 형식으로 체계화되지 못 하였다. 최초로 나타난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는 표의문자로써 신전의 기도문, 주술 등을 기록할 의도로 사용되어 문자는 일부 소수 신관들의 독점물이 되었고, 이집트의 상형 문자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표의 문자로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표현에 한계를 느낌에 따라 더욱 다양하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가능한 표음 문자로 발전하게 된다.
최초에 3000자이던 수메르인들의 표의 문자는 600개의 표음 문자로 줄어지고 이것은 다시 페니키아인들을 거치며 30개로 그리고, 27개로 줄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인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리스인들은 Alam語에서 모음을 빌려와 B.C 7세기경에 자음 17개, 모음 7개의 현재의 형태에 가까운 문자 체계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문자는 이탈리아 반도로 전해져 에트루리아인들의 문자를 낳았고 B.C 1세기에는 라틴어가 완성된다. 초기에 문자를 적기 위해 사용되던 Papirus는 습기에 약한 단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양피지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자 기록을 오랫 동안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제본이 가능함에 따라 책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세에 접어들어서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라틴어는 없어지고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의 언어들이 나타났으나, 문자 기록은 수도사들의 종교 기록 필사에 주로 사용되어 여전히 성직자들의 독점물이 되었다. 12세기에 대학이 나타나면서 문자의 세속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는데 이처럼 문자가 대중화 된데에는 책 수요의 증가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에 의한 세속 서적들의 필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필사자들의 길드가 나타나기도 했다.
중세를 걸쳐 필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작업 도중에 오역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러한 오역의 발생이 종교 개혁의 한 원인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1440년에 구텐베르그가 금속 활자를 발명함에 따라 책의 정확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서적 수요의 급격한 증가로 대중화된 지식의 전달 수단으로써 비싼 양피지를 대신하여 종이가 기록의 수단으로 나타난다. 종이의 유럽 세계등장은 사라센인들과 중국과의 싸움에서 종이 제작 기술자가 포로로 잡히게 되고 이 사라센인들을 거쳐 종이 제작 기술이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
문자 발명 이전 시대에 살았던 인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신화라는 형식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이 Mythos는 Logos에 대응하는 말이고 오늘날까지 인간의 무의식 내부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에 대해서 Vico는 '신화란 우주와 인간 존재에 대해 인간이 그 궁금점을 풀기 위해 나름대로 만든 대답'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Müller는 '자연 재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고 Freiser는 신화는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이라 하였다.
문자 이전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신화가 역사화되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먼저, 신화는 인간의 의식과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원시적이었던 시대의 사고 방식 즉, 그 시기의 사고 방식이 담겨 있으므로 역사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신화가 역사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않지만 모든 존재의 시작인 점과 같은 것으로 보고 문자 기록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 한도내에서 우주와 세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담은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현대인과 원시인의 차이는 인간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 환경의 차이로서 그 차이로 인간성의 우월을 가리지는 못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그들에게 생활 과학이자 지도 원리이며 지식의 총체로 존재했으며 영웅적인 인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문자로 기록하지 못하여 쉽게 잊혀질수 있는 단점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리고,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들은 현대적으로 볼 때는 황당무계 하지만 그 당시에 살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투사시킴으로써 그 시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처럼 장구한 시간에 걸쳐 구전된 신화는 B.C 5세기경에 그리그인들에 의해서 문자화되어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결코 역사 서술의 역사에서 신화에 대한 고려를 배제할 수는 없다.
9월 11일
*그리이스의 역사 서술
B.C 5세기경 그리이스에서 Herodotus와 Thucydides에 의해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 서술이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이전에도 Homeros Hesiodos에 의해서 역사 기록이 보인다. 먼저, 호메로스는 B.C 9-8 세기 사이의 사람으로 소아시아의 Smirna 출신의 맹인 이었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Iliad}와 {Odyssey}는 동일인의 작품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리이스 문자가 나타나기 이전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호머가 받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작품의 배경인 트로이가 1870년에 슐리이만에 의해 발굴되어 그 실재성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면서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먼저, '일리어드'는 그리이스와 트로이간의 전쟁에 대한 노래인데 트로이의 목마, 미녀 헬렌, 영웅 아킬레스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리고, '오딧세이'는 트로이 전쟁 이후 고향으로 귀환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이 주요 내용인데 아가멤논의 비극 등에 대한 내용도 실려있어 이후 그리이스 연극에서 반복적인 주제로 사용되었다.
호머의 작품들은 인간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영웅 중심의 이야기로서 역사라기 보다는 신화의 영역에 포함되나 이들 작품 속에는 미케네 궁정의 화려한 생활, 전쟁의 준비와 전투등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는 점도 무시 할 수 없다. 그리고, 작품 속에 나타나는 영웅들의 모습에도 당대에 살았던 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역사로서의 가치도 있다.
다음으로 헤시오도스는 B.C 700년경 소아시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부친의 사망이후 가난한 목동으로 여러 지역을 방랑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서술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Works and Days}와 {Theogia(신통기)}가 있는데 '신통기'에서는 그리이스 신들의 계보를 정리했으며 '노동과 나날들'에서는 '금-은-동-철의 시대'로 이어지는 최초의 시대 구분이 나타난다. 호머가 무비판적인 기록자였음에 비해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사고를 동원하여 약간의 비판의식을 가미한 진보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신들의 명칭을 자연물의 명칭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당대에 살던 인간들의 행위를 단축시켜 기록한 것으로 보여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신들의 계보 정리를 통해 우주 창조의 신비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의 출생지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오리엔트적인 신적인 존재를 신앙하는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 하였다.
그는 또한 역사를 퇴보로 파악하여 최초의 시대에 가까울수록 아름다운 세상이었으며 현재에 가까울수록 비관적인 세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그의 시대 군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최초의 시대는 '황금의 시대'라고 하고 이 시기에는 죄악이나 계절도 없었고 진리와 정의가 실현되어 법률도 불필요했으며 농사 지을 필요도 없이 언제나 젖과 꿀이 넘쳐흘러 인간은 우환이나 병도 없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성경에서 본다면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되기 이전의 시기이며 현대의 역사학에서 구분하는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황금의 시대 다음에는 '은의 시대'가 오는데 이 시기가 오면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사서 세상에 계절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인간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겨울에 대비하여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마련해야 했으며 동굴에서 거주하는등 주거 환경의 변화도 오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인간이 지혜를 가지는 시기로서 물질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이에 대한 욕망으로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고 하였고 이외에도 사랑, 소유욕, 고독 등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기라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농경이 시작되는 신석기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은의 시대 다음에는 '동의 시대'가 오는데 이때에 이르면 인간은 더욱 포악해지고사회는 전시대에 비해 더욱 참혹해진다.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데 무기로서의 청동기의 사용은 석기의 사용과는 다른 전쟁의 개념을 낳게 된다. 마지막의 시대가 '철의 시대'인데 이 시대는 헤시오도스가 살고 있던 시대이며 인류 최후의 시대라 하였다. 이때에는 죄악이 홍수처럼 넘치고 인간은 서로 살륙하며 반목하는 시기로서 이전에는 공동으로 경작하던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지고 물질은 지상의 것뿐만아니라 땅 속의 것까지 차지하기 위해 광물질의 채광이 시작되어 인간을 더욱 사악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회에는 불신감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하여 그의 주도하에 사회, 경제가 발달하고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이 발달한다고하였는데 이것은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그의 시대 구분은 역사를 단순한 옛 이야기로 파악하지 않고 옛 이야기를 통한 과정으로 역사를 파악하여 그를 최초의 역사철학자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기록 이후에 B.C 5세기가 되면 본격적인 역사 서술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의 그리이스에서는 소아시아의 Milletos를 중심으로 서양 철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자연철학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Sophist들이 또한 활동하던 시기였다. 먼저, 자연철학파 즉, 밀레토스학파는자연계의 본질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 신화의 단계를 벗어나 철학의 단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현상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나름대로 자연의 본질에 대해 공기, 물, 불 등의 답을 제시하였다. 소피스트들은 플라톤에 의해 궤변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사람들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당시 그리이스의 민주정이 꽃 피던 시기에 맞추어 돈과 명예를 위해 상대를 설득시키는 언변 등의 현실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돈을 받은 사람들로 이들은상대적인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의 역사가로써 자연 철학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헤로도투스는 당시 페르시아의 치하이던 소아시아의 Halicarinasos에서 B.C 484년에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으로 초반에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다. 헤로도투스가 태어난 시기는 B.C 490년의 1차, 482년의 2차 그리고, 480년의 3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로서 당시, 이 도시에는 참주정이 존재했는데 헤로도투스는 이것을 타도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여 Samos섬에 귀양을 당했고 나이 40세때 아테네로 가서 동으로는 흑애 연안에 그리고,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장차 페르시아 전쟁사에 대해서 저술할 9권의 {Istoriai}를 위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History'란 용어는 바로 헤로도투스의 저술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그는 자연 철학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인종들과 접하면서 인종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아테네에 체류하면서 그는 페리클레스,소포클레스등과 교류하며 이테네의 민주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비판, 회의적인 밀레토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지역의 종교, 역사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가급적 객관적인 서술과 선입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해 장기간 여행하면서 자신이 직접 견문한 것을 자신의 이성에 의한 판단을 거쳐 기록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 한 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비판의식의 실례는 이집트인들이 헤라클레스를 신에게 재물로 바치려 할 때 헤라클레스가 그 이집트인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일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당시 이집트인들의 생각을 볼 때 그럴 리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작품에는 신화와 신의 이야기가 많다는 점과 역사 운행을 인간을 초월해서 신에게 맡기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는데 이러한 단점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점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맹목적으로 신중심의 신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인간 세계에 일어난 위대하고 경탄할 사건들에(이 경우는 페르시아 전쟁) 대해서 그 원인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기록을 남기면서 일방적인 그리이스의 편을 들지 않는 합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전쟁에 대해 기록하면서 다양한 지역의 모습을 서술해 문화사적인 요소를 지니기도 했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이 전쟁은 그리이스의 민주정과 페르시아의 전제정이라는 두 문화가 충돌한 것으로 보면서 그리이스가 승리한 원인은 체제의 우월성이라고 하였다.
그의 기록에 이르면 이제는 어느 정도 신화적인 요소를 탈피하는데 역사가가 주체가 되어 탐구,비판하여 조사와 탐구가 그에게는 역사학과 동일한 것으로 지칭되며 또한, 자신이 견문하지 못한 자료에 대해서는 경험한 제 3자와 대화를 통해 얻어내는 실증적인 자료를 사용하였다. 헤로도투스는 다소 신화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집한 일들을 기록하면서도 역사의 동인이 무엇인지는 찾아내지 못 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의 역사는 완전한 인간의 역사는 아닌 '설화적인 역사'이며 순화적인 역사 사상을 지니고 있으나, 오늘날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헤로도투스의 설화적인 역사에 비해 '비판적, 과학적 역사'를 추구한 인물이 투키디데스이다. 그는 아테네의 명문가 출신으로 Milteades가 그의 외삼촌이며 Kimon의 외사촌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정치에 참여하였고 군사령관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을 동경하였고 스스로도 민주주의자로 자처하였다.
그도 역시 {Istoriai}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의 그 저서가 9권인데 비해 3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을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는 이 전쟁을 아테네의 민주정과 스파르타의 귀족 전제정과의 대결로 보고 페리클레스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민중의 인기에 영합함에 따라 스스로 타락하여 선동정치가(Demagogos), 군인정치가(Strategos)등이 등장한 것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테네가 전쟁에 패한 원인에 대해서도 스파르타의 우수성이 아니라 아테네의 타락을 그 원인으로 들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동,서방간에 최초의 격돌로써 동방에 대해 서방이 승리한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이스 자체내의 충돌로써 기존 그리이스 세계의 강자인 스파르타에 대해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가 Delos 동맹을 주도하면서 200여개의 다른 폴리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강자로 부상함에 따라 이 두 세력이 충돌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소피스트들의 사상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아테네의 타락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면서 전통적인 사고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역사 서술에 대해 역사적인 사명감에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의 자신의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서술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나그는 비판적인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써 역사가의 의무는 사이비 사실을 제거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화, 전설 등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서술을 하였으며 자료를 취사, 선택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실에 대해 자신이 합리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보다 과학적인 역사 서술의 태도로서 그는 역사에 있어서 '우연'의 문제를 다룰 때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그것을 역사의 결정적인 요소로 보지 않고 역사의 최종적인 책임자는 인간이라고 보는 인문주의적인 역사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사 진행에 있어서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여 인간성은 동일하므로 많은 사건은 반복된다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교훈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는 또한, '심리사가의 아버지'라 불리우는데 헤로도투스는 자신이 정확하게 모르는 사건의 원인을 신에서 찾았던데 반해 투키디데스는 사건의 모든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고 역사의 동인으로 생각한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스의 이러한 연구는 Hipocrates의 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의학에서 질병을 치료할 때 증상을 관찰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하는 방식을 역사학에 도입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테네의 민주정이 타락한 원인을 인간의 심리가 변한 것으로 보고 변덕스런 대중 심리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평화시에 국가와 시민 개개인은 명랑한 심리 상태를 유지한다고 하고 내란이나 전쟁시에는 심리 상태가 위축된다고 하였다. 또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심리를 변화시켜 문제가 발생한다고도 하였으며 자연적 환경에 차이에 따른 인간 심리의 차이점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아테네는 해안 지역으므로 사람들은 정열적이고 해양적이며 지취적이고 변화에 민감하다고 하였고 스파르타는 내륙지역이어서 사람들은 비정열적이고 변화에 둔감하다고 하였다.
인간의 심리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잠재적인 공통성이 있다는데 입각하여 인간의 심리가 변하지 않는한 역사상의 사건은 미래에 재발하고 설사 그 사건이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순환적 사관을 주장하면서 미래에 대한 예상을 가능케 하고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역사 연구를 하였다. 그의 이러한 점은 발전적인 면으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서술을 가능케한 방법론적인 원천인 의학에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처럼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역사상의 사실들은 인간 정신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질병의 증상들처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가 지적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와 함께 투키디데스는 시간적, 공간적인 한계점도 지니는데 자신의 당대사만을 서술하고 이전에 축적된 사료들을 탐구할 기회를 가지지 못 했다는 시간적인 한계가 지적되고 자신이 체험하고 견문한 부분은 진위 확인이 가능하나 그 외의 견문하지 못 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공간적 확대의 한계점이 지적된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에 이르면 역사학은 완성되는데 호머가 사료를 채집했다면 헤시오도스는 그 사료들을 체계화 했고 헤로도투스는 그 사료들을 조사하고 탐구했으며 투키디데스에 와서는 실용적, 교훈적, 비판적인 역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9월 15일
그리스의 여사 서술은 신 중심의 종래 서술에서 탈피하여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이루어진데에 큰 의의가 있으며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는 직접 견문한 바를 객관적 비당파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시기 이후 그리스는 B.C 334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동방 원정때부터 B.C 30년에 이집트가 망할 때까지 Hellenism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종래 폴리스 체제에서 변화하여 세계적인 문화가 이루어지는데 폴리스 정신이 쇠퇴하고 Cosmopolitanism(세계시민주의)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행복과 안식을 추구하게 된다. 마케도니아의 동방 원정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용병 혹은 상인으로 원정에 참사함에 따라 그리스 문화의 전파가 이루어지고 동,서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엄밀히는 상층의 그리스 문화에 하층의 오리엔트 문화가 종속적으로 결합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Zenon이 대표적인 인물인 Stoa학파가 있다. 이들은 인간이 개인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서는 모든 격정의 감정을 제어하고 물질에 대한 괸심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것은 이성을 통해서 가능하므로 이성의 법을 자연의 법과 동일시 하였으며 이 이성으로만 자유와 평 등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역사서술에서 공간적인 지역성이 확대되고 당대사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스토아 사상에 기반하여 민족적인 편견이나 우월감에서 탈피하여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가 자신들의 이야기 즉,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데 비해 다른 민족의 이야기도 서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 교육을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한 서술이 나타났으며 보다 방대한 세계사적인 자료 수집으로 좀더 보편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해졌다.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Xenophon과 Isocrates가 있는데 먼저, 크세노폰(B.c 434∼355)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에게 고용되어 페르시아의 각 지역을 여행하고 {Anabasis}, {Memorabilia}, {Hellenca} 등의 저술을 남겼다. {Anabasis}에서는 그리스인의 퇴각과 페르시아의 쇠퇴를 예상했으며 {Memorabilia}에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켰고 {Hellenica}는 후기 그리스 역사의 중요 사료로 남아있다. 다음으로 이소크라테스는 정치평론이고 폴리스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그리스내에서 대폴리스 주의와 소폴리스주의가 대립할 때 종전의 폴리스 체제를 옹호하고 소폴리스주의를 주장한 Demostenes에 대항해 종전의 폴리스 체제를 부정하는 대폴리스주의를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가 살길은 마케도니아와 협력하는 것이라 하면서 인간에게 교훈적이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역사 서술을 하였dm며 그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은 B.C 338년에 저술된 {Upon the Peace}가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역사 수준은 그 이전에 비해 많이 저하되는데 이것은 역사가 웅변 등에 사용되면서 수사학적 역사서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쇠퇴하는 역사학을 부흥 시킨 사람이 폴리비우스(Polibius)인데 그는 Arcaia의 Megalopolice에서 출생하여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로마 장군인 파울루스의 포로가 되고 16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B.C 166년에 저술한 것이 {Historiae} 이다. 로마에서 포로로써 체류하던 그는 훌륭한 인격을 지녔으며 당시 로마의 실력자인 파울루스의 호의를 입어 파울루스의 아들 스키피오(少,Skipio)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로마 제국내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3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하여 카르타고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 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로바 제국의 광대함을 목격하였고 그리스인들의 퇴폐적인 기질과 로마인들의 강건한 기질을 비교할 수 있게 되어 그의 역사 서술의 기본 방향이 이것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의 저술 {Histiriae}는 제 2,3차 포에니 전쟁과 제 2,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대해서 서술한 것인데 특히, 그는 B.C 260∼168년까지라는 짧은 기간동안 로마가 발전한 원인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저술은 로마의 세계 재패라는 사실에 경탄해서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운명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서술하여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로마가 세계를 재패한 원인을 로마의 정치 조직에서 찾았는데 국가의 성립 요소는 국왕과 귀족 그리고, 국민이라고 하고 이들 중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이것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으로 나누어지고 이 정치체제들이 부패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참주정, 과두정, 중우정이라 하였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 체제가 그리스처럼 타락하지 않은 것은 군주정-귀족정-민주정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면서 이것이 융합되어 시계 재패가 가능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세계 재패의 다른 원인으로는 로마 국민의 우월성을 들었는데 로마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고 자연적이라고 하면서 그 자신은 그리스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의 훈련과 단결 그리고, 강건한 군사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역사 서술은 역사가는 당대의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 할 수는 없다는 면에서 당시 몰락해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흥기하는 상황에 대한 그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스토아 사상의 영향하에 서술하여 시계사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이해 서술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술에는 비판적, 역사 철학적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사료만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를 주체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폴리비우스의 역사 서술 의도는 먼저, 사료와 문서의 정리라는 목적이 있는데 이것에서 근대 역사학의 개념이 탄생한다. 그리고, 역사학에 지리학을 도입하여 문서 정리에서 더 나아가 역사상의 현장을 검증하여 문서 기록과 실제를 검토해야 하고 자라족 조건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준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실용적이고 교훈적인 역사를 추구하여 역사에서 얻은 지식을 실생활에 활용하려 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역사는 우리를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위험에 빠지더라도 바른 판단을 하게 해 준다."는 그의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개별적인 사실 전부를 하나의 상으로 인식하고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서술했는데 최후의 그리스의 역사가로 공화정초의 로마사를 서술하였다.
Livius(리비우스,B.C 59∼ A.D 17)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는 시기의 역사를 서술했는데 옥타비아누스의 지원하에서 방대한 {로마사(전 124권)}를 저술하였다. 그의 저술은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게르만을 정복하고 옥타비아누스의 후계자인 Tiberus와 Durusus의 시대까지가 서술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그 1/4인 35권 뿐이다. 그의 사관은 로마 민족에 대해 예찬하는 민족 사관으로 로마가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운명적이라고 하고 가본적으로는 공화정에 향수를 느꼈기 때문에 정치 체제가 제정으로 바뀐 것은 제국화 되면서 시민 계급이 감소하고 외국으로부터 노예, 용병, 전리품등이 수입되면서 강건하던 공화정 시기의 로마인의 의식을 잃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역사서술에서 보이는 단점으로는 사료에 대한 무비판적인 태도를 먼저 들 수 있고 다음으로는 종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열정에서 로마사를 저술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인의 애국심, 용기, 강건함 등을 보이기 위해 신화와 전설적인 요소도 무비판적으로 서술했고 그의 {로마사}는 역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저술하였다.
하지만, 그의 서술에는 발전적인 측면도 보이기는 하는데 로마사의 기원을 파악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역사서술의 시간적인 확대가 이루어진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신화나 전설도 인간의 행위를 나타내는 척도라는 점에서 역사 서술의 대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로마의 역사가로는 Tacitus(A.D 55∼115)가 있는데 그는 22세에 브리타니아의 총독인 아그리콜라의 사위가 되었고 Besfania 황제때에는 원로원의 의원이 되었으며 장군으로 해외 원정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실패로 은퇴한 후에 저술 활동에 몰두했는데 그의 작품 중 먼저, {Germania}는 게르만인들의 가족 관계, 풍속 등을 민속학적으로 서술하였고 로마 제정의 몰락 원인으로 초기의 강건했던 로마인들이 타락한 것으로 들고 단순, 강건한 게르만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로마인들이 각성하게 했다. 다음으로 {Historiae}는 네로 황제의 사망 시기에서 도미타니우스의 사망 시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공화정 초기 로마인의 강건함을 이상으로 하고 황제와 귀족들의 부정과 타락을 매도하였다. 이 저술의 목적은 교훈적인 것으로 후세 정치가의 교감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도덕적인 역사 서술로서 다소 단편적인 사건들을 자신의 도덕적 기본에 의거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들은 역사를 교훈적, 도덕적 목적과 같은 현실 실용적으로 이용함에 따라 비역사학자란 비판을 받고 있으며 그는 모든 정치가 영웅이나 황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통치자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고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여 과거는 오늘의 귀감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