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버리고 마음고치면 참지혜 생겨 중생고통 절절히 느껴야 성불할 수 있어
겨울이 깊은 산골짜기에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있다. 바람에 몸을 섞은 깊은 침묵이 가슴에 쌓였던 통곡을 쏟아낼 것 같다. 텅빈 바람을 가슴에 품은 듯한 16- 17세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절 입구에 있는 부도 옆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그 소년의 눈은 삶에 대한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몇번이나 망설이던 그 소년이 드디어 가까이 바라다 보이는 절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소년의 별명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집안과 인연을 맺은 후 그 집안은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3세되던 어느날 장남의 조실을 슬퍼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3년 후 또 어머니가 그 뒤를 이었다. 6년이나 상을 치른 그 소년에 가슴에 어느덧 허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범부 성인 종이 한 장 차이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어느 선사의 임종게를 보게됐다. “칠십년 꿈과 같은 바다에 놀다가/ 오늘 이 몸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원래 본성에 걸림이 없으니/ 어찌 깨달음과 나고 죽음이 따로 있겠는가” 삶의 허무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그 소년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전남 영광 불갑사에 깊은 침묵으로 머물고 있는 원로의원 지종스님은 이렇게 불법을 만났다. ‘젊은 날의 허무’는 어디에 갔는가. “무(無). 그놈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을 틈도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어. 어쩌면 밑바닥까지 도달한 그 허무가 한눈팔지 않고 수행의 길을 걸어오게 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지. 슬픔도 힘이 되듯 허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큰 힘이 됐단 말이지”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간극을 두고 있다. 번뇌를 밑천 삼아 자신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큰 원력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인인 것이다. “수행자로서 가장 큰 고비? 없었어. 내가 가는귀가 먹어서 말이지. 지금 어떠냐구.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좋아. 그리고 사람의 살갗과 영혼을 파고드는 그 모멸찬 허무도 좋아.” 소리가 끊겨버린 겨울의 긴 침묵은 지혜를 만드는 성역이다. 그 지혜의 성역속에서 삼라만상은 조용히 익어간다. “겨울이란 놈 좀 들여다봐. 모든 것을 침묵하게 만들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재촉하지 않아. 문자를 떠나고 마음을 고치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아는 것도 버리고 마음을 고치라고 하고 있지. 참 지혜는 그속에서 싹트는 것이야. 겨울침묵은 중생들에게 그런 지혜를 가르치고 있지. 참 좋아 좋아. 자네도 한번 겨울을 가만히 들여다봐. 신심을 가지고 잘 들여다보면 보일게야.” 지혜를 만들어가는 침묵의 공간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멍” 눈 내린 뒤 사원숲은 해맑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툇마루에 앉아 ‘진돌이’를 불러낸 것이다. ‘날씨가 좋은 모양이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스님이 털모자를 썼다. “햇살이 사람을 부르면 나가봐야지. 그래야 좋아하지 않겠어. 진돌이란 놈이 벌써 알고 먼저 나왔잖아.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내가 갓 출가해 정혜사 선방에 계신 만공스님 회상에서 한철을 났지. 스님은 참 환희심이 나는 도인이었지. 그 어른은 항상 도체(道體)가 늠름하셨지. 그리고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든 납자들의 귀감이 되었지. 곁에 있으면 알 수 없는 환희심이 저절로 돋아나. 그땐 몰랐지. 이제 그 도리를 알겠어. 날씨가 좋으니 환희심이 저절로 나네. 안 그런가. 자연이 참 도인이야”
자연은 참 도인
수덕사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한철을 보낸 지종스님은 발길을 전라도 나주 다보사로 돌린다. 걸망을 하나 들쳐메고 긴 만행 끝에 ‘도인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한다는 다보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인곡스님이 조실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상아래에는 고암스님, 우화스님등 선방대중들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인곡스님이 결제법어를 했다. 법상에 올라간 인곡스님은 대중만 쳐다볼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주장자가 3번 올라가더니 “중노릇 잘 할려면 자기 머리를 하루에 3번씩만 만져보소 대중들이여” 말을 마친 스님은 바람처럼 법상을 내려왔다. “머리를 만져보며 도대체 저 말씀이 뭔 말씀인가 생각했지. 이제 알겠어 그 도리를. 부모형제 버리고 견성성불 일체중생교화를 목적으로 출가한 수행자는 그 본분사에 충실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야. 부처님도 그러셨잖아. 내 몸 하나 희생해서 남에게 이롭게 하셨지.” 그 후 지종스님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견성성불 하기위해서는 남을 도울 줄 알아야해. 그리고 중생의 고통도 절절히 느낄 줄 알아야해. 진실한 고통과 번뇌만이 왜 견성성불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거든.”
수행자는 무소유가 근본
주지를 살면서도 단 한번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대중들과 함께 늘 농사를 지었다. 논이나 밭이 있는 사찰은 대중들과 직접 농사를 지었다. 논이나 밭이 없는 사찰에서는 인근 마을에 나가 모도 심어주고 보리도 베어 주고 타작도 해 주었다. 중생의 육신을 걸머지고 성인의 정신을 소유하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이었다. 밤에는 수마를 조복 받으며 용맹정진을 했다. “공부란 두타행이지 행복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수마를 조복받고 내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큰 고통이 따라야해. 낮에도 밤에도 실참을 해야 해. 출가수행자가 쉬는 것이 어디있어. 오직 정진 뿐이지.” 세속의 모든 가치를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의 본분사는 바로 무소유(無所有)에 있다. 쓸모있는 세상의 모든 가치로부터 쓸모없는 출가자의 모든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때 무소유는 이뤄진다. ‘이 놈의 늙은 육신만 아니면 진작 만행을 떠났을 터인데. 이제 맘대로 안돼.’ 진돌이가 앞서고 스님이 뒷선다. 계곡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고 바람은 바람을 따라 흐른다. 따사로운 햇살을 어깨에 받으며 진돌이와 함께 스님은 겨울 침묵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옷 한벌과 한 개 발우에 / 선문을 자유로이 들고 나네/ 저 모든산의 눈을 다 밟은 뒤/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웠네”
영광 불갑사=글 李相均기자 gyun20@buddhism.or.kr 사진 金亨周기자 cooljoo@buddhism.or.kr
스님의 옛 이야기
옛 스님네들은 하심을 일상생활로 삼았다고
|
|
<지종스님과 "진돌이"> |
|
사진설명: 지종스님이 불갑사에서 진돗개 "진돌이"와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옛날에 절집에는 사미계를 마친 다동(茶童)이 있었지. 다동은 손님이 오면 차를 달여 오지 않겠어. 화로에 불을 일군 후 각 스님앞에서 일배의 예를 올린후 차 한잔을 따른단 말이지. 3번을 마칠때까지 따르지. 그만 먹고 싶으면 찻잔을 엎으면 돼. 더 마시고 싶으면 찻잔을 흔들고. 그러면 다동이 차를 좀더 줘. 다동의 다도도 수행의 한 방편이었지. 차를 따르며 큰 스님들의 덕화를 몸소 체험하면 나중에 수행에 큰 도움이 되곤 했지. 눈 내리는 겨울이 되면 왠지 차동이 따라주는 차가 먹고 싶어져. 옛날 스님네들은 말이지, 하심(下心)을 평소공부로 삼았지 않겠어. 내 몸을 희생해 대중들의 공부를 외호했으니 말이지. 다보사서 공부할 때 말이지, 고암 큰스님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아릿해오지. 당시 다보사는 선원대중이 많았지. 다보사는 고추모종하나 꽂을 데 없는 빈털털이 절이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도들의 재를 지내는 염불을 해야 했어. 선원장이었던 고암스님이 그 역할을 했지. 고암스님은 자비보살이었지. 낮에는 직접 요령을 흔들고 염불도하고 대중들의 살림살이를 보충했지. 그리고 밤에는 잠잘 시간에 참선을 했어. 방선시간에도 신도들이 오지 않은 시간에도 틈만 나면 참선을 하셨지. 참 대단한 자비보살이었지. 고암스님은 말이지. 큰 도인스님들하고 선방에서 공부할때는 말이지. 무슨 절의 주지를 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알았지. 공부하지 못한다고 말이지. 지금 나를 돌아보면 참 부끄러워. 내 새해 첫 바람이 무언지 아나. 같이 사는 주지가 말이지. 한달이면 나에게 꼭 50만원 보시금을 줘. 그런데 내가 주지에게 말했지. 이제 20만원만 주지. 남들이 다 올리는데 나는 좀 줄여야지. 이제 그만 가봐.
불교신문
|
첫댓글 물질이 풍요할수록 정진하기 어려운 스님들. 더러는 불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