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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링크 글 댓글란에서 로마서 5장 18절~19절을 두고 ‘닉네임’ 님과 ‘이지끼을(에스겔)’ 님 토론이 있었군요. ‘“한 의로운 행위”가 그리스도 십자가 순종만을 뜻하는가? 아니면, 십자가 순종을 포함한 그리스도 전全 생애에 걸친 순종을 뜻하는가?’라는 토론이었군요. ㅡ{자유게시판}은 정회원 이상 보기로 설정돼 있어서 손님들은 이 글을 읽으실 수 없습니다. 손님들도 읽을 수 있도록 운영진이 이 게시판으로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ㅡ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첫째 아담(사람)은 ‘영생에 이르기까지’ 전全 생애에 걸쳐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언약을 지키는 순종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한가지로 유한한 인성을 입고 율법 아래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마지막 아담(사람) 역시 ‘영생에 이르기까지’ 전全 생애에 걸쳐 행위(생명)언약을 지키는 순종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순전한 원시 의義를 가지고 태어난 첫째 아담의 생애, 아담의 모든 생애는 “한 범죄” 때문에 불순종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언약을 어긴 그 한순간, “한” 행위는 아담 모든 생애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순간, 모든 생애를 불순종의 생애로 만들어 버린 순간(약 2:10)이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그런데 {개역개정 (한글판) 성경} 히브리서 5장 7절에 적힌 “경건”을 {개역 (한글판) 성경}은 “경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경건’은 ‘경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으로 번역하든지 “경외”로 번역하든지, 히브리서 5장 7절 의미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외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전全 생애 걸친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제거한 ‘새관점파’와 ‘페더럴비전파’를 대항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데이비드 반드루넨 교수님께서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을 증거하는 본문으로 삼으신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하반절’1)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
사무엘 선지자께서는 위 구절에서 ‘“순종(듣는 것)”이 없는 제사는 헛된 제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함에도 “어린양 1 년 흠 하나 없는 순종의 생애’를 건너뛴 이단”인 서철원파, 십자가보혈파들은 주야장천 “십자가 제사”만 외칩니다. 그것도 구약과 신약을 분리한 세대주의 누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르침으로서 “예수는 율법을 예사로 범했다.”는 서철원 목사님 가르침을 받들어 구약 정결례를 내세워 혈우병 여인(마 9:20)과 회당장 딸내미 주검(마 9:25)을 들이댄 주검보 님 행위2)에서 보는 대로, 어떻게 해서든지 마지막 아담을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고자 하며 오직 “십자가 보혈”만을 외칩니다. 참고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이 말씀은 ‘김재성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목차>에 “≪맺는 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로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학자이신 ‘에드워드 J 영’, ‘에드워드 J 영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경건敬虔 및 주해적註解的 강해講解} 윤영탁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0)’, 이 책은 제가 광주신학교 대학부 신학과 시절(1981년~1982년)에 ‘에드워드 J 영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김수민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1)’와 함께 읽은 책입니다. ㅡ완독은 아니었습니다.ㅡ 그런데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에서 에드워드 J 영 목사님께서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을 증거하는 본문으로 삼으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1절’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내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내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이창모 목사 경거망동 쓰레기 글을 비평한 제 글’을 읽으신 라마드 목사님께서 전화로 이 구절을 읊어 음미하셨는데, 마지막 아담 영혼이 수고한 순간은 십자가 고난의 순간만을 뜻할까요?
“자기 지식”…. “자기 지식”…. “자기 지식”…. 순종을 낳는 경외로써 배운 지식….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잠 1:7 상)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사 1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가운데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46~47)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그분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외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히 5:7)
그분은 아드님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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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이 워터스 외 11 명 {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에 답하다.} 가이 워터스 & 게리 존스 공동 편집, 권오성 역 (파주: 솔라피데출판사, 2012)’에서 173쪽~200쪽 ‘데이비드 반드루넨 [6.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 최근 비판에 비춰 그리스도 능동적 순종에 대한 변호]’를 참고하십시오.
2)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1OV/316
3)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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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철원파들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는 것은 ‘주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사변, 이단 사상임’을 모른 채 주야장천 “십자가 보혈”만을 외치는데, 알미니안 ‘보편 속죄’ 맹점은 ‘주님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아래에 옮기는 글은 {네이버} 카페 {평신도, 이단대책협의회}ㅡ카페지기: ‘알미우스주의 웨슬리’안 이인규 권사님ㅡ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사유를 위한 기도’는 만인을 위한 기도인가?
사계四季 (2019.04.25. 21:56)
카페지기님께서 제 글 [‘제한속죄’인가, ‘보편속죄’인가?]를 두고 반론 글을 주셨습니다. 들여쓰기 없이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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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사계 님이 올린 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글을 올립니다. 다음은 사계 님이 올린 [‘제한속죄’인가, ‘보편속죄’인가?]에서 옮깁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사해 주시옵소서.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옵나이다.”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면 이 기도에서 “저 사람들”은 십자가 주변에서 주님을 죽이는 데 동조하고 주님을 비웃으며 쾌락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뜻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 가운데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들을 뜻할까요? 모든 사람을 뜻한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오류를 저지르셨을까요? 이 땅 위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뜻만을 구하는 기도만 드린 분이십니다. 즉, 단 한 번도 아버지 뜻을 거스르는 기도를 드린 분이 아니십니다.
사계 님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들(they)”은 예수를 믿었던 제자들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만을 뜻한다고 보시는지요? 즉,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 사람들”의 대상은 제자들을 포함한 일부 극소수 유대인들만 포함하신다고 해석하십니까? 저는 당시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고 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으며,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명한 성경주석들은 거의 대부분 누가복음 본문에 대해서, 그 일차 대상이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직접 권위 있는 주석들을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에 생명의 주인 예수를 죽인 자들을 대상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죄 사함을 받는다.”(행 3:12~19) 말합니다.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교조주의자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제한속죄(장로교)와 만인속죄(감리교)에 대한 교리를 비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뒤에서 설명할 것이지만, 결론으로 제 견해를 말하자면, 입장 차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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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사람들을 사해 주시옵소서.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옵나이다.”, 주님께서 하신 ‘사유를 위한 기도’에서 성경 전체를 보는 사고를 하지 않고 “저 사람들”을 십자가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주의 해석을 하면, ‘창세 전 성 삼위 하나님 원하심으로서 그리스도 안 예정’과 “내게 주신 양들을 위해 피를 흘린다.” 하신 주님 말씀에 어긋나는 해석으로, 창세 전 성 삼위 하나님 원하심을 저 버리는, 주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을 하신 분은 고故 김홍전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자신의 신학을 반대하시는 존 웨슬리 목사님을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정이철 목사가 {바른 믿음}과 {페북}에서 존 웨슬리 목사님을 두고 이단 정죄를 했을 때 저는 이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므로 카페지기님께서 말씀하신 “입장 차”, 웨슬리주의자이신 카페지기님과 칼빈주의자인 제 “입장 차”로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체를 보는 사고로서 계시 의존 사색
고교 1학년 2학기 때 이해되지 않는 게 ‘예정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교 2학년, 주일학교 고등부 임원이 돼 고등부 예배 대표기도 시간에 드렸던 기도 내용 하나가 “사랑의 하나님, 지옥으로 가게 예정된 사람들을 한 없는 사랑으로 구해 주시옵소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헛되고 헛된 기도, 아주 그릇된 기도’라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 성경해석 원칙입니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 <제9절>입니다.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의문이 생긴 때ㅡ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ㅡ에는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
제가 [‘제한속죄’인가, ‘보편속죄’인가?]에서 “전체를 보는 사고”를 이야기했습니다. ‘나무(단편)만 보고 숲(전체)은 보지 못하는 사고’는 문자주의 폐해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보는 사고를 위해 흠 하나 없는 어린 양이신 주님,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장으로 갑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그가 곤욕을 당해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음이여 (사 53:7 상)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셨느니라. (사 53:12 하)
‘주님께서는 입을 열지 않으셨음으로, 주님을 욕보이며 희롱해 주님을 괴롭게 하는 범죄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하신 “기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하신 기도다.’는 사고는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사고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23장 34절 상반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이 ‘사유를 위한 기도’는 십자가 주변에 모인 모든 자들을 위한 기도일까요? 성 삼위 성자 하나님 ‘사유를 위한 기도’를 들으시는 성 삼위 성부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만 할까요? 아니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할까요? “성경 해석은 성경으로”,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는 개혁 교회 고백대로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신 베드로 전서 2장 23절’로 갑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부탁하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부탁하시는 사랑의 주님···. 그 공의의 심판을 말씀하신 주님 비유로 갑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고난을 앞두고 하신 말씀인 마태복음 25장 31절~34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시니라.
주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는 제거한 채 사랑만 내세워 “십자가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염소가 아닌 양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사 53:6)는, 무지몽매한 백성들ㅡ오순절 성령 강림 때 베드로 사도 복음전도로 회개한 주님의 양들ㅡ을 선동한 자들, 염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마 26:57)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해 “그가 남은 구원했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도다.” 하더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6:41~44)
우리가 “사랑의 사도”로 부르는 요한 사도께서는 요한일서 5장 16절 하반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되는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해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즉, 사유를 얻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32절에 적힌 성령 훼방 죄입니다. 물론,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양들을 선동한 자들 속에 성령을 훼방한 독사의 자식이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 어불성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니라. (마 12:2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이와 같이 사랑의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사유를 위한 기도’는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고백대로 베드로 전서 2장 23절에 적힌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 비춰 해석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계시 의존 사색이 ‘이단들처럼 나무만 보는 확증편향으로 숲은 못 보는 나머지 이단정죄를 일삼는 정이철 목사 같은 사람’을 낳지 않는 길입니다. ‘스승 서철원 교수님 신학을 오류 없는 영역,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기는 교조주의자 정이철 목사 같은 사람들’을 낳지 않는 길입니다.
첫댓글 닉네임님 글 기독론으로 옮겼었는데 이 글에서 링크를 누르니 삭제되었다고 나오네요. 다시 링크거셔야겠어요.
예.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사계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죄를 용서해 주시라는 기도를 하셨는데
예수님의 그 기도가 만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저는 만인을 위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위의 글에서 소개하신 grace님의 글에 동의합니다.
성경에서 "용서하라"는 말은 이해가 필요한 말입니다.
사계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사계님께 죄를 지었을 때
사계님께서 용서하시면 모든 것이 매듭지어진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만인을 위한 기도라고 생각하시면 그 까닭을 서술하시면 됩니다. 또한 "용서하라."는 말을 놓고 이지끼을 님 이해를 적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쓸 데 없는 질문 사양합니다.
@四季 朴埰同
1)
쓸 떼 없는 질문이라고요?
제가 질문을 드린 이유는
“용서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죄를 용서해 주시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무조건 용서하려 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가 우리에게 사과(회개)하기 전에는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하고 화목(Reconciliation)케 되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2)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셨는데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용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한 자들만 용서를 받습니다.
회개한 자들만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롬 5: 10절)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 받을 기회는 모두에게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Free Gift 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롬 5:18절)
@四季 朴埰同
3)
“용서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없이
“죄를 용서해 주시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제한속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한정된 숫자의 사람들을 용서하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수에 드는 사람은 이미 용서(죄사함)를 받은 것입니다.
회개없이 죄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사과(회개)하는 사람들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만 용서하십니다.
@四季 朴埰同
4)
그리고 롬 5:19절에 대해서도 말씀드립니다.
능동순종을 주장하기 위해
롬 5:19절 예수님의 순종을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친 순종”으로 해석하는 것은
제가보기에 불경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인 아담의 한 범죄로 망쳐 놓은 것을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한 행동(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회복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아담의 한 범죄로 망쳐 놓은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 생애에 결쳐서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셔서 회복시키셨다고 해석한다면
제가 보기에, 피조물인 아담의 능력이,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능력보다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해석을 불경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이지끼을 “같은 낱말을 썼더라도 함축하는 의미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신 닉네임 댓글을 아직 이해 못 해 ‘십자가 순종만으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피조물인 아담의 능력이 창조주이신 예수님 능력보다 더 커 보인다.’는 사고는 못 하시는군요. 또한 ‘성경 한 구절에 같은 단어가 두 번 쓰였더라도 함축하는 의미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모르는 알미니안파나 새관점파나 서철원파가 로마서 5장 19절을 내세워 ‘의의 전가 문제에서 어린양 1 년 생애를 삭제하는 불경, 그리스도 구속 사역을 반쪽짜리로 만들어 그리스도 영광을 강탈하는 날강도짓거리 불경’을 저질렀는데, 이지끼을 님이 주검보 님과 함께 이 불경과 함께하시더라도, 제가 이지끼을 님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불경에서 이지끼을 님을 꺼낼 수는 없겠지요.
{뉴스앤조이}에서 ‘이 땅 위 예수님 신성을 부정한 이단 박창진’을 대항해 저와 함께 끝까지 싸우신 이지끼을 님이 성례론 문제에서나 이 문제에서나 왜 이 지경이 되셨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이지끼을 롬 5:18절에 대한 이지끼을 님의 해석은 여전히 이지끼을 님의 주장과 어긋납니다. 이지끼을 님은 문법에 딱 들어맞는 해석을 주장하시며, 같은 낱말은 같은 뜻으로 쓰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과연 이지끼을 님 위의 해석이 이 원리에 충실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지끼을 님의 주장에 따르면, 한 의로운 행위가 낳은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을 '가능성'일 뿐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범죄도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을 '가능성'만 가져왔을 뿐이지, 실제로 정죄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게 됩니다.
@이지끼을 이런 해석은 문맥상 오류일 뿐 아니라(바울은 앞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낱말의 뜻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 오류(이것은 이지끼을 님이 여태껏 내세운 주장입니다)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본문은 정죄에 "이르렀다",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생명에 이를 "가능성"이 생겼다, 생명에 이를 "기회"가 생겼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저의 주장, “같은 낱말을 썼더라도 함축하는 의미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셨다면, 이런 모순은 피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지끼을 그리고 이지끼을 님 주장은, 위 덧글만 보고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보편 속죄론 비스무리한 것 같은데, 하나만 여쭤 보겠습니다. 회개는 free gift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회개가 free gift라면, '모든' 사람에게 free gift가 임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편 구원론이 됩니다.
만일 회개가 free gift가 아니라면, 회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되고,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는 깨집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알미니안의 보편 속죄론을 반대했습니다.
@닉네임
닉네임님께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지끼을 님의 주장에 따르면, 한 의로운 행위가 낳은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을 '가능성'일 뿐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범죄도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을 '가능성'만 가져왔을 뿐이지, 실제로 정죄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게 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NIV 성경입니다.
“Consequently, just as the result of one trespass was condemnation for all men,
so also the result of one act of righteousness was justification that brings life for all men.”
한 범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에게 정죄가 임한 것 처럼
한 의로운 행동의 결과로 생명을 주는 의롭다하심 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님이 보는 성경과 제가 보는 성경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가요? 좀 이해가 되시는지요?
@닉네임
제가 위에서 Free Gift 라고 한 것은
롬 5:15, 16, 그리고 17절에 있는 “은사”와 선물”이란 단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특히 17절에서는 the gift of righteousness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위의 댓글로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 받을 기회는 모두에게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Free Gift 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롬 5:18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님은 Free Gift 가 모든 이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가요?
Free Gift는 하나님의 “의” 인데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님이 회개가 Free Gift 냐고 물으시고
“만일 회개가 free gift라면, '모든' 사람에게 free gift가 임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편 구원론이 됩니다.”라고 하셨는데
너무 나가시네요.
@닉네임
복음은 free 이지요? 그런데도 안 받는 사람이 많은데
회개가 free gift 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제가 위에서 "용서받을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용서받을 기회가 임하였다는 말이 모두가 다 용서 받는다는 말입니까?
@이지끼을 제가 왜 "회개"가 free gift냐 아니냐를 물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신 듯한데, 이지끼을 님이 '용서받을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러면 이 회개의 근원은 무엇이냐'를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냐,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냐'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 회개가 우리에게서 나온다고 한다면, 구원은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달리게 됩니다. 이 회개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free gift라면, 회개한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용서를 받으므로, "모든 사람"을 액면 그대로 "모든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만인 구원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닉네임 조금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만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도구(손)인 믿음까지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과 그 믿음의 결과로 오는 칭의와 영생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지끼을 님은 이 둘을 분리하려 하고 계십니다. 만일 믿음이 선물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나오는 행위라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는 깨지게 됩니다. 만일 믿음이 선물이라면, 칭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인 믿음조차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칭의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또 다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닉네임
그런 말씀이셨군요
제가 급하게 말씀드렸나 봅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바울께서 롬 5:18절에서 all 그리고 all이라고 쓰신 것을
님도 아시듯이 그냥 all의 의미로 봅니다.
이것을 all 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19절에서 many 그리고 many 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 하십니다.
그러면 18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19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
곧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18절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닉네임
님이 “같은 낱말을 썼더라도 함축하는 의미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비교되는 같은 낱말도 함축하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님의 의도는 all 과 all 이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19절의 one 과 one의 의미도 다르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한 (one) 불순종과 비교되는 예수님의 한 (one)순종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생애의 순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님의 주장을 잘 못 이해하고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그래서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율법을 순종하시고 의를 획득하셔서
이 “의”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맞습니까?
@닉네임 그렇다면 그 순종이 예수님의 전 생애의 순종이라는 것을 쉽게 증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 순종은 한글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하심”이라고 되어 있지만
NIV에서는 the obedience of the one man이라 해서, 순종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도 정관사가 있습니다.
the obedience라는 말은 “그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롬5:19절의 “그 순종”이라는 말은 19절 앞에서 언급된 어떤 순종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5:19절 앞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의 순종”을 의미하는 말씀을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반면에 저는 5:19절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종”을 의미하는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이지끼을 바울이 얘기하는 "한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종'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순종은, 예수님 전 생애 순종의 절정을 이루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고난의 일생이었고, 그 절정을 이룬 것이 십자가 고난입니다. 또 예수님은 일생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절정 역시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 수종과 수동 순종의 절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 이후로 개혁 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입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 글을 읽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 글을 읽든,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들 글을 일든, 북미의 에드워즈나 하지나 워필드의 글을 읽든, 한국의 박윤선, 박형룡, 김홍전 목사님의 글을 읽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의 글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https://tabletalkmagazine.com/article/2019/04/twofold-obedience-christ/
@닉네임
"바울이 얘기하는 "한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종'이 맞습니다." 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으로 만족합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전 생애에 걸쳐서 순종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롬 5:19절에 대한 토론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능동순종의 전가에 대해서 배웠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큰 관심은 없었기에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가끔씩 칭의 논쟁을 지켜 봤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한 분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능동순종으로 획득하신 '의'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이라 아직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닉네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로 의롭다함을 받아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가요?
혹시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닉네임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요.
@닉네임
제가 같은 질문을 사계님께도 드린 것을 이해해 주십시요
같은 것을 주장하더라도 닉네임님과 사계님께서,
제가 위에 질문드린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므로 같은 질문을 두 분께 드렸던 것입니다.
바쁘시겠지만 생각해 보시고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지끼을 아, 답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제게는 어려운 문제라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는 중입니다. 혹시나 생각이 정리되면 답을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사계님의 주장과 다른 해석은 정이철 목사가 그렇듯이 비성경적 이단이라 보십니까?
이런 쓸데 없는 질문 마시고, 제 해석에서 그릇된 것을 지적하시기를 바랍니다.
@四季 朴埰同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레위기 16:17,21,34]
17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모두은혜감사
34 이는 너희가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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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만세전에 택한 자들만을 위해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대속하셨다는 것은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편협하고 모든 인간을 향하여 공의롭지 못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죠.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은혜를 모든 인간에게 주셨으나 아무도 믿고 영접하지 못하기에 특별 은혜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모두은혜감사 사계님의 주장도 물론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제는 토론거리가 아니라 봅니다.
정이철 목사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며 쓸데없는 논쟁거리들만 만들어 시끄럽게 하는데 님도 논쟁을 좋아하고 즐기는 그런 경향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자기 기준으로 남의 허물만 보지 않고 좋은 점만 보고 배우는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두은혜감사 이런 댓글 쓰신 감사 님이야 말로 논쟁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이요? 하나님 이름을 망령스럽게 부르지 마십시오.
좋은 점만 보고 배우는 시각이요? 제 허물 아닌 허물을 말해 감사 님은 성인군자가 된 위 댓글 자체가 그동안 제가 수차례 지적했던 주검보 님 내로남불, 이중인격을 뜻하는 댓글임을 모르시겠지요.
@四季 朴埰同 늘 위선속에 살고 있는 제 자신 잘 압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님은 남들 비판에 많이 치우쳐 있답니다.
주검보님 등등 남들 계속 들먹이지 마시고 님의 주장과 견해만 말하면 좋지요
@모두은혜감사 똑같은 소리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남들”이라 하셨는데, 님에게 남인 저를 더 이상 들먹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저 들먹이지 말고 겸손 님 주장과 견해만 말해 성인군자 자세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논쟁, 토론은 “정이철 학동”을 자처하신 주검보 님이 요구하신 토론으로, 저는 이에 응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 “남들” 속 한 분인 이지끼을 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四季 朴埰同 이 글은 주검보님과의 토론이 아니지요.
뻔히 이런 반응이 올 줄 예상했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봤네요.
수고하세요
@모두은혜감사 이런 반응 예상하셨으면, 그냥 입 다무세요. 제 시간 소비하는 일이니까요.
@四季 朴埰同 그니까 수고하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