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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기 박사 논문을 조엘 비키 견해로 수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로빈슨 크로소 2014.01.01. 12:03
···(난독증이 있으신 바로미 님 글은 종종 그렇듯이 평가할 가치가 없어서 본문은 생략합니다. 이른바 “순중론”과 {개혁주의 마을}을 왜곡하고 있는 바로미 님 댓글 몇 개만을 가지고 비평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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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로소 《정야베스 님, 일반적인 교제야 상관이 없지요. 학적인 문제로 갈린 것인데요······. 그런데 학적 논리보다는 감정적으로 대하는 경우에는 같이 동조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 학적인 문제로 {양무리 마을}과 {개혁주의 마을}이 갈렸다. 참 편한 해석입니다. ‘연중론을 반대하는 형제들을 진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감정’으로 대응을 한 분이 손성은 목사님이신데, “학적인 문제” 운운하시는지······. 학적인 문제였으면, 왜 공교회 검증을 받지 못하겠다 하셨는지······.
{개혁주의 마을}은 연중론을 반대하는 카페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마을}은 연중론을 반대해서 만든 카페는 아닙니다. 즉, ‘연중론은 내 심장, {양무리 마을}의 심장이니 연중론을 반대하는 회원들은 강등과 강퇴를 하기 전에 딴 살림 차려라.’는 협박,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홀리조이 손성은 목사님 협박 때문에 ‘정들었던 {양무리 마을}을 떠나야만 한다.’는 눈물과 함께 생긴 카페입니다.
지난해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연중론을 반대한 이른바 “순중론자”들은 손성은 목사님에게 ‘연중론이 바른 중생론이면 공교회의 검증을 받은 뒤에 가르치셔도 늦지 않으니 공교회 검증부터 받아 보셨으면 합니다.’는 권면을 드렸습니다. 물론, 이 권면에 대한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손성은 목사님 대답은 ‘한국 교회에 공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식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교회 교사가 신학교 교수님들입니다. 그분들이 검증하는 것이 결국 공교회 검증을 받는 것입니다.”는 그레이스 님 권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 교회 연중론 좌장, ㅡ“유태화는 백석대학교 유태화 교수 아닌가요? 백석대가 개혁주의였나???” 같은 말, 교만하고도 인격모독의 말로 신학교 교수님들을 우습게 여기셨던ㅡ 한국 교회 연중론 좌장 윤영상 목사님 대답은 “공교회 교사가 공교회에 제명당하는 상황은 어찌 설명하시려고요?”였습니다.
로빈슨 크로소 《그리고 그들은 연중론자들끼리도 각자 견해가 약간씩 틀리다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똑같다면 그야말로 더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연중론을 지지하는 분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입니까? 틀은 같다는 것입니다.
연중론자: 좁은 중생과 회심 사이 죄의식과 깊은 깨달음이란 시간적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이 순간적일 수 있고, 점진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틀 안에서 각자 갖고 있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순중론: 순종론자들 큰 틀은 ‘중생 시 회심’입니다. 중생과 회심 사이에 죄각성이나 깊은 깨달음이 자리를 잡지 않고, 이 과정은 중생 이전이나 회심 이후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점입니다.
...(중략)...
그런데 순중론의 경우는 좁은 중생이 회심과 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중생 시 회심’입니다. 그럼 회심 앞에 있는 죄인식과 깊은 깨달음이란 과정을 어떻게 해석하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순중론을 주장하는 형제들은 좁은 중생 이전에 준비은혜 영역에 이 죄인식과 깊은 깨달음을 넣습니다. 그래야지만 중생 시 회심이란 논리가 적용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틀 자체가 아예 틀립니다.》
→→→ 이른바 “순중론자”들이 “연중론자들끼리도 각자 견해가 약간씩 틀리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좌충우돌에 따른 돌려막기 식으로 서로 우왕좌왕 많이 틀리다.’고 했습니다.
“순중론은 중생과 회심 사이에 죄 각성이나 깊은 깨달음이 자리를 잡지 않고,”라는 윤영상 목사님 주장은 옳은 주장입니까? 아니면, “사이”라는 임신 기간에 세뇌된 윤영상 목사님만의 해석입니까?
“이 과정은 회심 이후에 자리를 잡습니다.”??? 회심의 요소가 뭔지도 모르는 참 자기 맘대로 해석입니다. 이른바 “순종론자”들이 회심의 요소인 참된 죄의 각성과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회심 이후로 잡은 적이 있었습니까? 수구 보수 정치인들 왜곡은 우매한 수구 보수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의도적 버릇이라지만, 뻔히 들통 날 왜곡을 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 마음을 여시면, 즉 중생(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게)하게 하시면 예정된 자는 복음을 청종하게 됩니다. 마음을 여시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절대 대권의 사역입니다. 복음을 청종하는 것은 인간의 반응, 예정된 자 반응입니다. 물론, 이 반응을 일으키시는 분 역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 사도행전 16장 14절: 두아디라 성의 자주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듣고 있었는데, 주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말하는 것들을 잘 듣게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것들을 청종하게 하셨다.)
예정된 자 마음을 여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복음을 붙들게 하십니다.
‘복음을 청종하게 됐다.’는 것은 ‘이른바 복음에게 “콩깍지”가 씌워 복음을 거부하지 않게 됐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사랑스럽게 여기게 됐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말씀을 빌리자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듯이 중생과 회심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20세기 개혁신학자들께서 “존 머레이 목사님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하시는, 존 머레이 목사님 용어를 빌리자면 ‘주님을 사랑하는 “확정 성화”와 함께 “점진 성화”가 시작됐다.’는 뜻입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과정을 중생 → 돌이킴(회심) → 칭의 → 성화 → 성도의 견인과 같이 일련의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시며 “중생: 전등불 스위치를 누른다. 회심: 전등불이 들어온다.” 하신 후크마 목사님 말씀을 빌리자면 “중생과 회심은 동시적이다. 중생과 함께 회심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이 시작됐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께 복음을 듣기 이전에 ‘베드로 사도께서 전하시는 복음과 다른 복음이 아닌 똑같은 복음’을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는 복음, 붙들 수 없는 복음, 사랑할 수 없는 복음이었지만[행 10:36,37], 베드로 사도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마음을 여셔서 고넬료로 하여금 복음을 붙들게 하셨던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정된 자 마음을 여시자마자 예정된 자 마음으로 들려오는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을 붙들게 하십니다. 복음을 청종하게 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정된 자가 청종하게 되는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이른바 “복음적 회개”로서 참된 죄의 각성’을 일으키는 복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참된 죄의 각성은 회심과 분리돼 있습니까? 아니면, 회심의 요소입니까?
로빈슨 크로소 《연중론: 좁은 중생과 회심 사이에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이 순간적일 수 있고 점진적일 수 있다.)
》
→→→한국 교회 연중론 수뇌부 목사님들은 ‘연중론은 순중을 인정하는데, 연중론을 인정하지 않는 순중론, 연중은 인정하지 않고 순중만 말하는 순중론은 이단적으로 여긴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 논리는 가당키나 한 논리입니까?
연중론은 “중생과 회심은 순간적이다.”는 주장도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연중론 수뇌부 목사님들은 ‘연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이른바 “순중론자”들을 이단시할 것이 아니라, ‘연중’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연중론이 인정하는 ‘순간 중생’에 관한 학문도 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중을 잘 이해 못하시는 정야베스 님이 순중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잘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중생’은 ‘연속 중생’의 복음 전도가 가져오는 덤이라서 순간 중생을 정야베스 님으로 하여금 이해토록 애쓰지 못하십니까? 저에게 “연중론자들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려면 정야베스 님을 위해서도 애쓰셔야지요.
‘순간 중생을 할 예정된 자들 경우, 그들에게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중생은 복음 전도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는 궤변, “순간 중생이면 사계 님이 복음 전도를 위해 할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사계 님의 회심을 위해 사계 님이 할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ㅎㅎ.” 같은 궤변 그만 늘어놓으시고 말입니다.
회심의 과정은 성화의 과정이 다양하듯 다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회심의 과정’이란 뜻은 ‘일반(보편) 부르심에서 특별(유효한) 부르심까지’를 뜻합니다. 삭개오, 에티오피아 내시, 사울(바울 사도), 고넬료, 루디아, 디모데, 아볼로 같은 경우 중생하기 전에 복음을 접촉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복음을 접촉한 인물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모두 점진 회심을 한 경우로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아테네에 사는 이방인들 같은 경우 복음을 접촉한 인물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전하신 복음을 듣고 회심한 그들[행 17:34] 경우, 그들 회심은 급격한 회심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범사에 종교심이 많았던 그들[행 17:22]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심기신 종교심으로 구도자 길을 걸어왔던 경우로 이 역시 점진 회심입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에 대한 윤영상 목사님 댓글까지 비평하고 싶습니다만, 이후 윤영상 목사님 댓글에 대한 비평은 생략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1.01 21:42
첫댓글 그나저나, 풀핏님이 청호랑이님입니까?
예. 맞습니다. 누구이신지요?
그 까페에 풀핏=사계님이라고 써 있는 꼬리말이 있고, 청호랑이님을 사계님 아니냐는 이유로 강퇴시킨 것 같기에 청호랑이님이 사계님 맞는지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청호랑이님이 안들어오셨으면 연중론 논쟁이 있었던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근데 사계님 제목이 너무 쎈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서로 가진 않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바로 잡아야 하지만... 잘걸렸다는 식으로 잡진 않으면 좋겠어요.
예. 제목에서나 글에 지나칠 정도로 쎈 단어가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선다고 바로 잡히겠습니까? 저는 답은 나왔다고 봅니다. 물론, 항상 가졌던 생각입니다만 그 답은 ‘내가 나선다고 바로 잡히는 게 아니다.’는 것입니다.
잘 걸렸다는 식으로 잡는 것은 아닙니다. ‘충격들 좀 받으시라.’는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쎈 단어들을 썼는데, 그런다고 그분들께서 충격을 받으시는 것 같지는 않고, 다음부터는 장승업 님 권면대로 쎈 단어들을 쓰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권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목 약간 부드럽게 고쳤습니다.
@풀핏 서로 싸우는것이 되진 않았으면 해서요. 사계님 감사합니다. 저는 연중론 자체가 이해가 안되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빠져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