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사의 직무 목사는 근원적으로 섬기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본질은 섬기는 일이며, 이것을 봉사라고 한다. 봉사는 신약에 34회 사용되어 섬기는 것(고후8:4, 11:8, 롬12:7, 15:31, 히1:14, 계2:19), 봉사(행21:19, 엡4:12), 직분(고후3:7, 8, 9, 4:1, 딤전1:12), 직무(눅1:17, 24, 고후9:12, 13, 딤후4:5)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노예로서 섬기는 것이나, 품삯을 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나, 공적인 봉사를 행하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개인적 섬김의 뉘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섬기는 직무이다. 마치 먼지 같은 죄인 가운데를 통과하는 직무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하면서 봉사의 본을 보이셨다(요13:14). 마찬가지로 목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대가도 없이 봉사 그 자체에 보람을 느끼며 수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2) 예배의 직무 예배와 관계되는 단어로 신약에는 '라트레이아'와 '레이투르기아'가 대표적이다. 라트레이아는 신약에 꼭 다섯 번 사용되었는데 섬기는 예(요16:2, 히9:6), 섬기는 예법(히9:1), 예배(롬9:4, 12:1)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동사는 신약에서 21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종교적 의미로 예배를 함축하고 있다. 어원은 '보상, 삯, 봉급'을 의미하는 명사 '라트론'에서 왔으며 '보상을 위해 일하다, 혹은 섬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라트론'의 '라트'는 '기뻐하다'라는 뜻이다. 레이투르기아는 신약에 6회 사용하여 직무(눅1:23), 봉사(고후9:12, 빌2:17), 섬기는 것(빌2:30, 히9:21), 직분(히8:6)으로 번역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눅1:23)나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고후9:12, 빌2:30)과 같은 공공적인 봉사를 나타낸다. 목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명을 위하여 백성 중에서 공적으로 봉사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흙탕물 속 같은 곳에서도 기쁘게 일하고 있는 사역을 뜻한다. 즉 대중을 이끌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은 하나님도 섬기고 사람도 섬기는 사역인데 그 사역은 공적이고 또한 고통 속에서 감당하는 것이지만 기쁨 중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무엇보다도 목회사역은 사적인 직무가 아닌 공적인 직무임을 알아야 한다(눅1:2, 행5:42, 6:4, 13:14-41, 20:24, 롬10:14-15, 고전1:21, 9:14, 23, 25, 15:1-2, 갈1:7-8, 엡4:11, 딤전5:17, 딤후4:7-8). 3) 수종의 직무 신약성경에는 '휴페펠레테오'(수종하다)라는 단어가 세 번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행13:36)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20:34)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행24:23) 원래 '휴포'(아래, 밑에서) + '엘레테스'(노젖는 사람)의 합성어로 배 밑창에서 노를 젖는 하급 노잡이를 의미했다. 즉 노 젖는 층이 여러 개 있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군용 갤리선(Galley)의 아래층에서 노 젖는 자들을 '휴펠레테스'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는 비상한 군사 술어로 사령관(선장)이요 왕이신 예수의 명령을 받고 드러나지 않는데서 사력을 다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령한 방주요, 주님은 선장이요, 목사는 그 안에서 노를 젖는 자라고 하겠다. 4) 중보의 직무 제사장은 히브리어로 코헨인데 구약에 741회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은 제단과 그 외의 의식적 행사를 주관하는 공인된 사역자로 희생적, 제의적, 중개적인 직임을 수행한다. 무엇보다도 제사장은 하나님께로 드려지고 받쳐진 하나님의 헌제적(獻祭的) 존재이다. 잘 받쳐짐이 될 때 제사장의 제사장 된 의미와 제사장 된 목적을 느끼게 된다. 신약에 언급된 제사장은 ①전도(복음전파)사역을 감당하는 신령한 제사장(롬15:16)으로 ②신령한 제사인 예배사역을 감당하는 신령한 제사장(벧전2:5)으로 ③영적 주권의 축복(다스림)사역을 감당하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5-16)고 했다. 목회의 본질은 섬김(봉사), 하나님을 향한 예배사역의 공직, 노를 젖는 수종, 복음의 제사장이 됨에 있고 이 모든 성격은 희생적인 섬김이다. 4. 목회의 제(諸-모든)요소 1) 목회의 주체 목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목회의 주체가 되신다. 하나님이 자기 양들을 먹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1:4)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그의 자녀들은 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없는 자기 백성, 아버지가 없는 그의 자녀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제한 목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목회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신자의 신자됨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성자 예수님의 구속과 보혜사 성령님의 부르심으로 인침받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죄 중에 빠져버린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께서 값을 대신하여 지불하셨고 성령께서는 이를 예수에게로 초청하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목사는 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봉사자이다. 2) 목회의 내용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무엇을 먹일 것인가? 즉 목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마디로 목자는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한다. 이는 목회의 내용이 '복음'임을 알려주고 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것은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마1:21). 예수그리스도 자신은 그 생명의 말씀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말씀, 즉 말씀하신 말씀(Spoken Word)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 의해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지금도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딤후3:16, 히3:7, 벧후1:21)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이요(엡6:17),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4:12)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중생케 하고(약1:8, 벧전1:23), 살리고(시119:50, 93), 밝히고(시119:130), 영혼을 소생케 하고(시19:7), 지혜롭게 하고(시19:7), 깨끗하게 하고(요17:17, 엡5:26), 믿음을 낳게 하고(요20:31), 소망을 낳게 한다(시119:49, 롬15:4), 그리고 확신에 거하게 하고(행20:32), 정결케 하고(요15:3), 마음을 뜨겁게 하고(눅24:32), 영생을 얻게 한다(요5:39).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 가서는 안 된다(고전4:6). 기록된 말씀을 넘어 가는 것은 독초를 먹는 것과 같다. 3) 목회의 전달방법 목자가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그 꼴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목회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전달방식도 중요하다. (1)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은 목회의 전달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며, 최선의 방법이다. 성경을 읽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17:19)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31:11-1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ant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8:3)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을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느니라"(사34:16) "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롐36:6)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행13:15)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지침서요, 안내자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며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밖에 없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3) 날마다 상고하게 해야 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 (4) 깨닫도록 잘 해석하여 가르쳐야 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친히 성경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가르치실 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5) 믿게 해야한다.(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케 하는 인간의 최소한의 책임이며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복음에 우리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그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6)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해야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 (7) 하나님의 시민으로 지키어 살게 해야한다.(계1:3, 엡4:22-3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민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8) 새 생활을 열매로 하는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해야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목사 자신이 계시의 영으로 충만한 기도 속에서 확신과 뜨거움에 불타고 있어야 한다. 성경신학, 교의신학, 역사신학 등 풍부한 기초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4) 목회의 대상 목회의 대상은 인간이다. 즉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목회의 대상이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완전한 인간(原人)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한 피조물임을 말한다.(창1:26-28, 2:7) 그것은 전인(全人)으로서의 피조물이다(영+육). 창세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지음 받았고(창1:26),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행위의 결과였다(창1:26, 2:7, 18).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1:26), 영생할 수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창2:7, 16-17).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 세계의 최 절정이며 영광이다. (2)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인간은 죄로 인하여 완전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부패했다. 이것은 전혀 의(義)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결과 심령에 비참이 왔으며(창3:7-8), 육체적 비참이 찾아와 땀흘림(창3:17-19)과 사망(창3:19)과 영생의 상실을 당했고(창3:22-24), 심지어 땅이 저주를 받는(창3:18) 물질의 세계까지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3)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인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디리노니"(빌3: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궁극적으로 선택되고, 소명되고, 중생되고, 회개와 신앙을 힘입고, 의인의 확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양자), 양육을 받고(성화), 보존(견인)을 입으며, 완전한 영화의 삶을 목표하고 움직이는 새사람이다. a. 구속의 경륜가운데 있는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b.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단순한 수(數)에 불과하다. 그 존재위치가 무시되고 있다. 즉 다수라는 대중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묻고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인간은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개인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각각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 한 존재는 천하 보다 귀하다(마16:26, 18:5, 6, 10, 12, 14, 막8:36-37, 눅15:4, 8, 10, 22-24). 그리스도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귀중하게 여기셨고, 예레미야는 개인적인 보살핌을 주장했다(렘31:33-34). 하나님은 각각 개인적으로 만나시고 상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도 개인적이다. 각 개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c. 유기체적인 인간임을 알아야한다. 각각 독립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이면서 인간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은 상호간의 유기적이기보다는 분열과 파멸로 향하는 불안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은 인간은 교회라는 유기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독립된 인격을 지닌 인간이 독처함이 선하지 못하다 하시면서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연합체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창2:17, 25, 마19:4-8, 엡5:22-23).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므로(마18:20) 교회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d.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e.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목회는 목자인 하나님과 그의 양인 하나님의 백성간의 문제이다. 이처럼 목양의 대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 경륜 속에 들어 있는 한 독립적인 인격체인 동시에 유기체적인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 5) 목회의 동기와 목적 (1) 목회의 동기와 목적은 곧 구령운동 때문이다.(요10장, 21:15-17) 구령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21:15), "... 내 양을 치라"(요21:16), "... 내 양을 먹이라"(요21:17)고 하셨다. 구령운동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숭고한 목적이 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요, 구속사역의 목적이다. 이것은 영혼의 치료, 곧 영혼의 돌봄이다. 그리고 이것은 목양의 동기인 동시에 목적이다(마9:35, 막3:13-19, 눅10: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인 구령운동은 새 창조운동이요, 근본적인 새사람운동이다.(고후5:17)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엡4:11-13)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구원운동의 공로를 성취시킴에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함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나서는 목양을 생각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롬11:33-36)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성취가 목회사역의 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야 했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셔야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성취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 5. 목회의 목적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바울은 영감을 통하여 본서(디모데전서)를 기록한 목적을 여기서 밝히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알려주고 있다. 즉 디모데에게 올바른 목회지침을 주기 위함이다. 에베소서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바른 교회관을 심어주고 있다. 1) 바른 교회관(믿음 - 신앙관) (1) 교회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목회자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 되지 못하면 그곳은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사교장이이나 공회당이나 강의실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이방종교의 우상과 대조시킨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무리 곧 백성들을 의미한다. (3)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교회와 동격으로 교회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다.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고 떠받드는 기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 되는 진리,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정통교리의 수호와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실상 '진리의 기둥과 터'란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그 '진리의 기둥과 터'에 대한 설명은 딤전3:16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진리란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보좌우편에 앉으심이다. 이 진리가 하나님의 집의 기초요, 그 집을 받드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4) 교회는 '피로 값 주고 사신 집'이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이다.(행20:28)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터가 되고 기둥이 되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다. 2) 바른 교훈(교리 - 구원론) (1)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가? '바른'이란 목회서신에 나타난 독특한 표현이다. '바른'이란 '건전한 것'을 말한다. 즉 '거짓이 없는', '진실한'것을 말한다. 목회서신에서는 바른 교훈(딤전1:10, 딤후4:3, 딛1:9, 2:1), 바른 말(딤전6:3, 딤후1:13) 및 바른 믿음(딛1:13, 2:2)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이란 ①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구원의 소식, 곧 복음을 의미하고 ②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과 다른 교훈에 대하여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딤전1:1-11) 첫째, 그 교훈이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가운데로 인도하는가? 믿음을 더하는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신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그 교훈이 변론만을 일삼는가? 아니면, 우리를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 일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의 교훈을 단순히 지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변론의 방법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인간의 구원문제와 삶의 변화를 동기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그 교훈이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교훈이 개인이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고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도록 한다면 일단 그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우리를 이탈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경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4-17) a. 성경은 각 개인을 상대로 말씀하고 있다.(딤후3:14-15) 성경은 모든 이 세상의 인류 중에 나 하나를 상대하며 찾아온다. 이처럼 나 하나를 상대하고 독립적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이 각 개인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범죄의 타락도 각 개인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각각 개인적인 것이다. b. 성경은 우리의 현주소이다.(딤후3:14) 이미 배운 성경진리를 떠나지 말고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리고 확신가운데 거하도록 명하고 계신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베웠다(딤후1:5). 또한 바울에게서도 배웠다.(딤후3:10-11) 성경은 배움의 현주소요 확신의 근거지이다. 성경은 인생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곳이다. 성경을 떠난 인생은 방랑자요, 탕자인 것이다. c.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딤후3:15)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의 결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지혜가 바로 성경이다.(요10:21)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핵심)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요5:39) d.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3:16)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그 확실하고 명백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친히 영감을 통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책은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다"(사34:16)라고 했으며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들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고 하셨다. e. 성경은 교훈과 선행의 표준이 된다.(딤후3:16-17) 이 세상에는 인간교육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만큼 인간교육을 위한 위대한 책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가 샘솟는 보고이다. 먼저 우리 자신을 교육시켜 그리스도인으로 완성시키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교훈을 실천케 하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은 경건함 가운데 성장할 것이며 가장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3)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이란 '당파'(행5:17), '파'(행15:5, 26:5, 28:22) 또는 '이단'(행24:5, 14)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단자(이단에 속한 사람)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한번 나타나고 있다(딛3:10). 본래의 뜻은 '스스로 선택한 것' 혹은 '견해'의 뜻을 지녔으나 점차 당파나 학파 혹은 종파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본래 '이단'이란 단지 사람이 속하려고 택한 '당파'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점차 나쁜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약속과 전통에 대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파적인 사람이란 정당한 이유 없이 분파를 일으켜 교란시키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단'이란 학술용어로는 '다른 이견'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른 의견' 즉 '정통'의 반대어인 것이다. 결국 이단이란 본래 당파, 학파, 종파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정통'의 반대를 가리키는 의미로 바뀌었다. 목회서신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단'은 '그노시스'주의이다. (4) 신조의 가치성 바울서신에 의하면 신앙이란 인격적인 것으로서 사랑과 신뢰와 순종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신앙은 신조에 대한 신앙으로 변하였다. 즉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목회서신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단의 책동 때문에 신조의 확립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①어떤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나서 악령들의 교리에 미혹되었다.(딤전4:1) ②선한 일군은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 받지 않으면 안 된다.(딤전4:6) ③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딤후3:8) ④디도는 신앙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꾸짖었다.(딛1:13) ⑤디모데는 부탁 받은 선한 것을 지킬 것을 권고 받고 있었다.(딤후1:14)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제도는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도적 신앙의 기초를 제공해 줄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교회의 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고 교회제도는 사도권의 계승에 적용되었다. 3) 바른 신앙생활(윤리 - 행위론) (1) 믿음과 행함의 관계 목회서신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여러 곳에 진술되어 있고 또한 암시되어 있다. 즉 선택(딤후2:10),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딤전1:14, 딤후1:9, 딛3:5), 그리스도의 신성(딛2:13), 그리스도의 인성(딤전2:5) 등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성행은 필수적이었다(딤전2:10, 6:12, 18, 딤후2:22, 3:17, 딛1:16, 2:7, 14, 3:1, 8, 14). 그 뿐만 아니라 선한 행위는 신자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로 간주되었다(딛2:11-14, 3:4-8). 이처럼 거듭 강조된 선한 행위는 신자에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건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목회서신은 '믿음의 열매' 즉 '선한 행위'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윤리적이며 실천적인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딛2:14) 말씀(믿음)과 실천이 조화되는 삶이야말로 온전한 성도의 삶인 것이다.(약2:14,17) 그 행위는 하나님께 돌리는 실제적 영광이다. 루터주의(Luther)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하였으나, 개혁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위에 행함을 강조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회중, 개인, 가정, 사회와의 관계 바울은 그레데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회중,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성결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특히 그레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해 회중,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의 완전한 성화의 필요성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강조되어야만 했었다. 회중생활에서는 자격이 잘 갖춰진 장로들이 각 성에 세워져야 했다.(딛1:5-9) 왜냐하면 그레데에는 엄히 꾸짖어야할 질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딛1:10-16) 개인과 가정생활에서는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했다. 남녀노소 모두 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가정적으로도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거룩함과 복종과 근신함에 있어 온전해야 했다(딛2:1-8, 딤전3:1-5). 심지어 종들도 상전들에게 순종과 충성으로 일관해야 했다(딛2:9-10, 딤전6:1-2).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든 사람에게 세속적인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구주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딛2:11-14).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한 시민으로서 사회법규에 순종하고(롬13:1-7, 딤전2:2, 딛3:1), 비기독교세계에 대해서도 온유와 관용으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벧전2:22, 딤전3:7, 딛3:2). (3) 비행자에 대한 권징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관한 어리석은 논쟁이나 족보이야기 등의 허탄한 주장을 일삼는 무리들과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취해야할 일차적인 태도는 먼저 그들을 훈계하는 것이다. 영적인 오류에 빠진 자들도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두 번 훈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훈계를 듣지 않거든 관계를 끊고 멀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딘3:10, 요이1:10). 그것은 마18:15-17에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교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단자나 비행자에 대한 처신은 한 두 번 훈계, 즉 경고 내지는 충고하고 그 다음에는 절대로 기회를 주지말고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딤후2:23, 벧후2장). 왜냐하면 그들이 존속하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4) 바른 목양(행정 - 관리론)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밝은 윤리적 생활을 위하여 교회는 어떻게 그들을 관리할 것인가? 에 있다. (1) 공중예배에 대한 지침 a. 공중예배의 기도 교회를 영적으로 번창하려면 공중예배가 크게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예배가 순조롭게 그리고 고요하고 아무런 방해 없이 진행될 수 있으려면 교회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두움 속에서 비추이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공중예배를 위해 모이는 경우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소위 위정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한다(딤전2:1-2). 우리는 여기서 공예배시에 나타나는 목회기도를 볼 수 있다. b. 공예배시의 남자와 여자의 바른 태도(딤전2:8-15) 교회에서 공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기도를 할 때, 어떤 모양으로 기도하고 어떤 차림을 하며, 그리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남자는 노여움과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자복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여자는 겸손하고 정숙하도록 모든 면에서 사치스럽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복장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몸가짐과 단장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예배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일정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2:11-12)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14:34-35) 이처럼 여자는 아담한 모습으로 공예배에 참여할 것과 예배시 남자의 가르침에 일절 순종함으로 배우는 질서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녀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함이었다. (2) 바른 지도자 a.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는 직업인이 아니라 사명자이다. 목회자는 인간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며, 진리를 해석하는 고귀하고 거룩한 직분을 가진 자로서, 교회의 제일선에서 사역하는 지도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종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올라가는 길을 걷는 사람이므로 도중에 멈추거나 뒤로 돌아 설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자질이 있다. ① 영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일생동안 영적인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이다. 감격적인 속죄의 경험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하며,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의식에 충만한 자라야 한다. ② 목회자는 지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인생을 배우는 자이며, 가르치는 자이며, 그 책임을 다하려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자세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적인 자질을 위하여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③ 영과 육의 건강한 자질이 있어야 한다. 신체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도 함께 지녀야 한다. 목회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없다. 과로와 어려운 일에도 견딜만한 체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건강한 체력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이나 적당한 휴식 등을 통하여 강건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b. 존경할 만한 감독(장로) 초대교회 내에서의 감독은 교회의 생활과 사업을 감찰하는 직능과 더불어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보살펴 주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리고 연로하고 경험이 있는 교회 지도자를 가리키는 장로와 동일한 직책으로 사용되었다(행14:23, 20:17, 벧전5:1-2).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감독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감독을 열거하고 있는데 ①훌륭한 인격과 덕성을 지녀야 한다(딤전3:2-3, 딛1:6-7). ②가정생활에 모범적이어야 한다(딤전3:4-5, 딛1:6) ③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이 있어야 한다(딤전3:7) ④물질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처신이 따라야 한다(딤전3:3). ⑤영적인 면에서도 장성한 자가 되어 남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딤전3:6). c. 양심적인 집사 집사의 본래의미는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수행원', '종', '일군' 등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집사 외에 다른 직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청지기(눅12:42, 16:1, 딛1:7, 벧전4:10), 하인(요2:5,9), 섬기는 자(고전16:15), 일군(롬16:1, 엡3:7)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기능으로 표현되는 집사는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직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단정해야 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한다(딤전3:8). 더 나아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비밀을 가지며 시험에 합격하야 책망할 것이 없고 경건한 가정생활을 하여야만 양심적인 집사가 될 수 있다(딤전3:9-12). 그리고 여자들도 품행이 단정하고 참소 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3:11). (3) 상담 자로서의 자질 목회상담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을 목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할머니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젊은 남자들의 경우는? 젊은 여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부자들의 경우에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회상담과 교정(矯正)을 필요로 하는 여러 종류의 교인들에 관하여는 연령과 성별에 따라 다루어야 한다(딤전5:1-16). 노인들을 권면할 때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할머니들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해야하며, 젊은이를 대할 때는 형제에게 하듯이,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는 일체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대해야 한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교만하지 않도록 하고, 재물의 소유주가 하나님임을 알도록 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게 하고 나누어주도록 권면해야 한다(딤전6:17-18). (4) 구제를 위한 일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사업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선적으로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구제의 책임이 있다. 이는 도덕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실제적으로도 필요하다. 교회는 분주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에 구제의 모든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딤전5:16).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부양할 수 없을 때는 교회가 도와야 한다. 만일 모든 자들이 자기 몫을 감당해 준다면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훨씬 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짐들은 서로 나눠져야만 하기 때문이다(갈6:2). 결국 교회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그 짐 때문에 교회가 가라앉게 해서는 안된다. Ⅲ. 지도자를 발견하는 원리 1. 인간의 야심 인간의 야심이란 고상한 정신이 피해야 하는 고약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야심을 가진 사람에게 직책을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45:5상)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단지 지위만을 추구하는 자들과 협잡꾼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나 고난을 감수해야 하면서 끝까지 감당해야하는 심각한 임무를 전혀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지도자에 대한 명예와 특권만을 생각하고 무가치한 야심이 작용하여 '자기추구'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비 영적인 사람들이 이 직분을 갈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충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단순히 야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야심' 곧 '자기를 위한 대사'를 계획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본래 야심(ambition)이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선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인정받으며, 인기를 얻고, 자신의 동료들 중에서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들이 야심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보통 야심가들은 돈이나 권세가 가져다주는 힘을 즐기고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속적인 야심을 호되게 꾸짖고 계신다. 참된 지도자는 결코 자신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를 선전해서는 안된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 예수님은 이기적인 야심의 가면을 벗기시고 진정한 야망의 참된 성격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시며 그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채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막10:37)라고 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은 구하면서 고난의 면류관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되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의 일시적인 진보를 획득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이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참된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무모하고 무지한 자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의 대답이었다. 이 세상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 "내 좌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였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10:38-40)는 말씀 속에서 그들의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자'만이 예수님의 좌 우편에 서게될 것이다. 2. 지도자의 발견 하나님과 인간은 기독교사역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끊임없이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유형의 사람을 계속하여 찾고 계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닌 한 사람을, 집단이 아닌 한 개인을 찾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삼상13:14)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렘4:25)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22:30). 하나님은 일군을 불러 세우실 때 그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용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모세, 기드온, 다윗, 마틴 루터(Martin Lether), 존 웨슬리(John Wesley),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등 많은 지도자들이 모두 결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자연적 또는 육신적)인 지도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고 매력적인 지도자라 할지라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영적, 도덕적으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오도록 본을 보여주어야 하며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주님의 생애를 본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것처럼 영적 지도자 역시 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3. 참된 지도자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도자의 교체 때문에 많은 갈등과 상처를 입고 있다. 그것은 곧 권위적인 지도력에 익숙한 교인과 민주적인 성향의 지도자와의 갈등과 교인간의 상호대립으로 인하여 분열이 조장되고 있다. 과거에는 권위적인 지도력에 따라 발생되지 않던 것들이 민주적인 지도력에 의하여 상호간 이해와 협력을 위한 의사소통의 훈련이 전혀 전무한 상태에서 상호간의 이견은 해결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불신과 대립으로 인하여 지도력의 공백이 발생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참된 지도자를 발견하고 상호간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력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20:28) 한국의 신학교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학교들의 교육 상황도 유사하리라 본다. 다름이 아니라 신학생을 교육하는 모범적인 모델 역시 당대에 성공한 목회자일 것이다. 모두다 대형교회를 목표로 훈련받게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사역을 시작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20~30%만이 성공한 목회자의 모델에 유사한 결과를 얻게 되거나 대형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다수 목회자는 200명 미만의 중 소형교회를 사역하게 될텐데 그동안의 교육과 훈련과정은 대형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자신의 사역에 대한 회의와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한 상처들을 입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의 성공이 과연 대형화된 교회를 사역하는 것일까? 그것만이 하나님의 뜻이요 부흥하지 못하고 200명 전후의 교인을 양육하는 목회자는 실패하거나 능력 없는 종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인가? 성경 어디에서도 참된 지도자의 평가가 목회사역의 크기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 교회, 사업, 가정이 그 규모가 크고 작든 간에 그것이 우선될 수 없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위임하신 능력과 자원을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님은 특이한 재능을 지닌 자에게 특별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은 분명히 많이 받는 자에게는 많이 찾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오직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재능과 자원에 대해서만 말씀하심으로써 보다 중요한 것은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재능과 은사와 인격을 각 개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한 가지 유형의 지도력은 불가능한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양들을 주께로 인도했다. 여호수아 역시 모세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다 섬기는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와 인격으로 봉사했던 지도자였다. Ⅳ. 지도자의 동기와 다양한 지도자 상 1. 지도자의 동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2:5,7) 대부분의 목회자는 교회와 교인들을 자기의 힘으로, 또는 자기의 지혜로 이끌어가려는 모습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이끄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임재와 권능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목회사역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분명히 준비된 지도자는 섬김의 지도자이다. 이제 섬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①어떻게 섬기는 지도자가 될 것인가? ②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③누가 우리를 가르치며 그 방법을 보여주실 것인가? ④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섬김의 지도자 상을 찾고자한다. 1) 예수님의 지도력 예수님은 인간의 형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셨지만, 그 점을 내세워 특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간의 구원하시고자 자기를 비어 무명자가 되기까지 낮아지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종이 되신 것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분처럼 되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그분께 의탁해야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다(고전15:32). 우리는 스스로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내주 하심과 인도, 그리고 간섭하심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 순복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하여 그분이 행하시도록 해야만 한다. 2) 광야 경험을 통한 지도력 배양(培養) 이스라엘백성을 훈련시켰던 광야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광야경험'이라 부를만한 어떤 쓴 경험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신다. 모세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려했을 때 히브리노예를 때리던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출2:14)고 따져 물었다. 모세는 그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과 결혼하여 이드로의 큰 목자로서의 삶을 보내게 된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영화롭게 자랐으나, 이제 광야의 한 구석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모세의 광야경험은 새로운 과업을 부과 받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백성을 이끌겠다하거나,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종이 된 것이다. 모세만이 '광야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을 광야에서 보내셨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길 때 수개월동안 광야에 숨어있어야 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광야 경험'을 했다. 이처럼 '광야 경험'은 그들의 인격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단련시키셨다. 3) 섬기는 지도력 섬기는 지도자라는 개념은 대부분이 말하는 훌륭한 지도자에 대한 책이나 강사의 강연을 통해 제시된 지도력과는 다르다. (1)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자는 현실세계와 모순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25-26)라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지도자는 우리의 논리적 사고와 역설(逆說)을 이루고 있다. 표면상으로 납득되지 논리이다. 사람들의 종이나 노예가 된다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악의와 경쟁, 권력의 남용으로 만연된 '이 현실세계'에서 먹혀들 수 있는 지도자 상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역설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구절에서 가능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2) 섬김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닌 예수님의 길이다. 정직한 지도자일수록 그 자신이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며 어떻게 가야할지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나는 나를 이끌고 내가 즐기는 것에 내 몸을 맡긴다 즉 성취할 어떤 것이나 나를 이롭게 하는 어떤 것을 향하여 가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길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러한 것이 그분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길은 다르다.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같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막8:34). 우리는 섬김을 받기 보다 섬겨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뜻과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4) 신실한 지도력 (1) 사울 왕의 행적을 통하여 '신실한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왜'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 진리에 대하여 그의 행적을 통하여 그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즉 섬김의 지도자로서 백성을 이끌지 않았으며 그는 자기의 원하는 대로 백성을 다스렷다. 그는 '자기의 일'을 '자기 방식'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심성은 아각과 아말렉 족속을 물리쳤을 때(삼상15장), '좋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하여 숨김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어 그에게 물으셨다. "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이런 선언을 그에게 내렸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5:26).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자는 신실한 지도자라 할 수 없다. (2) 사무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에서 신실한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찾을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새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당도한다. 그는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의 외모에 반하여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아님을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그 분의 마음에 합한 자를 지도자로 쓰신다. 경건한 사무엘 조차도 사울과 엘리압의 외모에 좋은 인상을 받고 그에게 마음이 쏠렸던 것을 볼 수 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품은 동기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넘어 그 마음중심을 보고 계신다.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왜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외적 행위와 행동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마음이 바르다면 그 행동도 역시 바를 것이다. 인간의 동기는 그 마음 중심에서 시작된다. 자기 욕심에 의하여 출발되는 동기는 이기적이다. 곧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의 마음에 있는 동기를 말씀하고 계신다. "속에서 곧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막7:21-22)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다스리게 될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갈 능력을 허락하신다. 그분의 동기가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동기는 언제나 사랑이시다. 섬김의 지도자의 동기 역시 십자가의 사랑에서 출발되어야한다. 5) 지도력의 핵심인 사랑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목적이나 욕망을 성취시킬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분의 능력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덕목이다. 그리고 사랑은 섬김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지도력의 원천이다.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지도자의 태도와 행동에서 사랑의 열매들이 맺히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삶을 살게될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예수의 제자임을 인정받게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시다. 섬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사랑하신 대로, 복종하신 대로, 섬기신 대로 해야한다. (1) 섬김(사랑)의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성령의 권능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17)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과 능력이 동시에 언급되었고 이것이 우리 마음에 동시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1:8)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권능은 성령이 임하신 자만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성령이 임하신 자만이 사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역시 계속하여 인간의 욕심을 따라 썩어질 것을 계획하고 행동할 것이다. (2) 사랑의 지도력은 성령의 내주와 다스리심으로만 가능하다. 성령께서 내주 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실 때, 성령의 열매들은 우리 생활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 자체를 위하여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능력을 주신 까닭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나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곧 능력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주신 것이지 그 능력을 행하는 자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3) 사랑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과 우리가 이끄는 모든 사람의 삶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학대하거나 혹사시키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일회용'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호사스러운 종이 잔이나 프라스틱 접시들을 마구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물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버린다. 자동차도 3~4년 정도 타고 다른 차로 바꾸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안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인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친구이나 연인관계에서도 필요할 때 만나고, 필요 없으면 쉽게 버린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교회를 폐기하고 저 교회로 가버린다. 단지 인간의 기호나 입맛을 위하여 사는 인생들이다. 이 시대는 일회용품을 쓰고 버리듯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 사랑의 지도력은 사람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환경이나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원하시는 일(하나님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해야한다. 사랑과 진실한 의사소통은 인간을 세울 수 있으나 인스턴트식품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는 인간 중심적인 기호나 입맛을 찾아 떠도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전락시키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지도력은 인간을 파괴할 것이며,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릴 것이며, 인간을 혹사시키며, 사람을 세우기보다는 인간을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소비하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공급하기보다는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빼앗는 자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