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타는 중국의 후한 및 삼국시대(서기 2~3세기)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의술을 세상에 펼친 전설적인 명의이다. 그는 요양방법을 잘 알고, 불로장생에 정통했다. 이미 그의 나이가 100세에 가까웠을 때에도 용모는 한창의 장년 같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생각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화타가 병을 치료한 사례를 여러 가지 기록해두고 있다. 광릉 태수였던 진등(陳登)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고 밥을 못 먹는 병을 앓았다. 화타가 진단한 결과 진등의 위장에는 기생충이 있음을 알았다. 곧 탕약을 2승 만들어, 반씩 먹이고 기생충을 토해내게 했다. 화타는 진등에게 충고했다. “이것은 비린내가 나는 음식물을 날 것으로 먹고 생긴 일입니다.” 이를 보면 화타는 이미 기생충을 갖고 있는 날 음식을 먹으면 기생충 감염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번은 무장(武將) 한 사람이 자신의 아내가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화타를 불렀다.
“부인은 유산을 했는데 죽은 아이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화타의 진단에 무장은 의아해 하며 아이가 이미 나왔다고 말했다.
“제 진맥에 의하면 태아가 아직 모체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장은 화타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화타는 급한 대로 진료를 마무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점차 부인의 병세는 호전되었지만 100여일 후 다시 병이 악화되어 무장은 하는 수 없이 화타를 다시 청했다.
화타는 먼저 나온 죽은 아기가 피를 많이 흘려 나중에 나와야 할 아이 역시 나오지 못하고 모체에 남은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약물을 주고 침을 놓으니 과연 사산아가 나왔다.
초능력으로 몸 속 들여다보다
당시 화타가 있던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일대는 위, 오, 촉 삼국이 다투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에서 생활하는 양민들은 끊임없는 전란 속에서 전염병, 외상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외상 환자의 경우 조악한 치료 과정에서 극심한 통증으로 신음해야 했다. 그런데 화타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마취작용이 있는 약물들로 처방을 마련해 이를 마비산(麻沸散)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외과수술에 사용했다.
어느 날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진찰하니 환자의 비장이 염증으로 괴사된 것을 발견했다. 화타는 환자에게 마비산을 술에 타서 마시게 하니 환자는 곧 마취가 되었고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배를 가르고 환부를 절제하고 남은 부위를 봉합한 후 새살이 돋게 하는 고약을 붙이고 조리약을 복용시키니 환자는 한 달 만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마취제가 서양의학에서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사용된 것에 비추어 본다면 화타의 마비산은 이미 160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화타는 의원이기 이전에 덕(德)을 중시하며 자신을 닦던 수양인이었다. 진정한 수련인에게는 본래 초상적인 공능(功能 초능력)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는 현대의 첨단 의료설비보다도 정밀하게 인체 내부의 병소를 정확히 투시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인체를 연구하는 방식이 현대의 과학보다도 그 수준이 월등히 높은, 다른 차원의 과학적 접근방식이었다.
조조의 뇌종양 투시한 화타
그가 조조의 뇌종양을 투시했던 일화는 안타까운 그의 최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나라의 조조에겐 늘 두통이 있었는데 주위의 의사의 치료를 받아도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화타의 평판을 들은 조조는 그에게 치료를 구했다. 화타가 침으로 치료하자 즉석에서 두통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화타는 두통의 원인이 뇌 안의 뇌종양 때문임을 이미 투시했기 때문에 조조에게 뇌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조조는 매우 의심이 많은데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외과수술이었기에 수술을 구실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화타는 앞일을 예감하고 자신의 의술을 정리한 청낭서라는 한 권의 책을 옥졸에게 전해 세상에 남기고자 했지만 조조의 처벌을 두려워한 옥졸 혹은 그 아내가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어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조조가 그를 다시 찾았으나 화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결국 조조는 뇌종양으로 죽고 말았
다.
화타의 죽음은 그의 저작의 망실과 더불어 동양 의학의 역사상 큰 손실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낭서 외에도 화타의 저작으로 관형찰성삼부맥경(觀形察聲三部脈經), 침중구자경(枕中灸刺經), 화타방(華它方), 오금육기결(五禽六氣訣) 등의 책들이 당시 전해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대(漢代) 이후 그의 의서는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