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안택수 종인을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옛날 내가 어려울 때 내 아이들이 용기를 잃을까 해서 내 고향 밀양 이야기를 편지로 연재소설처럼 쓴 책「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택수 종인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우리 종인의 청년들을 위하여 그런 글을 써주었으면 하고 말씀했습니다.
부탁이 부탁 아니라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기도 하고 또 나도 젊은 이들을 위하여 입이 근질거리기도 하고 해서 늙은 힘이 되면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를 쓰기는 했는데 어느 방에다 들여밀까 하고 보았더니 늙이들은 감히 기척소리도 못낼 곳을 발견해서 '여기다!' 하고 찾은 곳이 바로 여깁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첫 글을 들여밀겠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에서 더 알고 싶은 것은 댓글로 해서 이야기를 더 벌릴 수도 있겠고 일가분들 중에서 나도 하고 글을 올리셔도 되겠고, 또는 카페지기께서 여긴 너무 복잡해서 안되겠다고 생각하시면 방을 따로 새로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일단 실례를 무릅쓰고 들여밀어보겠습니다.]
의를 지키며 사신 고려유신의 선대 할아버지들
1943년도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이 되자 그동안 정돈되어 있던 태평양전선에서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아쯔섬에서 일본군 수비대 약 3,000명이 미국상륙군의 공격으로 전멸되었습니다. 아쯔섬은 알라스카 서쪽의 아류산열도의 한가운데쯤에 있는 섬으로 태평양전쟁 초에 일본이 차지했던 곳입니다.
아쯔섬의 전멸이 있기 전 그들은 이미 전세가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야마토 전함을 기함(사령관이 타고 있는 함선)으로 한 연합함대는 오스트레일리아 북쪽바다 산호해에서 박살이 났고, 뉴브리튼제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무리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왜놈의 수탈과 탄압이 갈수록 더 심해졌고 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도 또한 심해졌습니다.
이런 시국에 나의 할아버지는 집안의 후대들이 겨레의 긍지와 함께 자신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잊을까 봐 늘 걱정하셨지만 노골적으로 교육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족보를 새로이 편집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스스로 누구의 자손이며 어떤 조상을 가졌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금포와 성만에 있는 일가들에게 비록 왜놈의 등살에 못 이겨 창씨개명으로 왜놈이 다 되어가는 세월이지만 이 족보편집을 통해 우리 후손들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우리 집에는 조상들의 업적과 자손 됨을 계통을 밝혀 기록한 족보(族譜)가 있는데 대개 30년마다 새로운 세대로 태어난 자손들의 이름을 올리고 돌아가신 어른들의 행적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새로 편집했습니다. 마침 그해는 족보를 만들고 나서 30년이 다 된 즈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어려운 세월에 족보를 새로이 편집하기로 하고 보소(譜所)를 우리 집에 두고 할아버지를 유사(有司)로 선출하여, 수단(修單)작업을 될수록 빨리 끝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족보를 만들기로 결의했습니다. 영천(永川) 고을의 도동 일가들도 함께 해야겠지만 전시 중에 내왕이 어려워 그쪽은 별도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나의 작은아버지는 새해(1944년)에 들면 열다섯 살이 되는 소년이었는데 붓글씨의 솜씨가 더욱 늘어 원고를 정서하는 일을 맡을 만 했습니다. 여러 집안에서 수단이 되는대로 할아버지는 편집을 하시고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정서해서 원고를 만들어나갔습니다. 그 두터운 책의 원고는 모두 작은아버지의 붓글씨 솜씨로 작성되었습니다.
쌀알같이 작은 글씨로 한 자 한 자 정자로 고르게 틀림없이 썼던 것이다. 또 그때 나에게는 16대, 15대, 14대, 13대 조가 되는 할아버지들의 산소 비석이 40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글자가 마멸되어 보이지 않아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그 글자도 작은아버지가 써서 돌에 새겼습니다. 그 글씨는 큼직큼직하고 힘차고 당당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족보를 편집하는 겨우내 나와 작은 아버지에게, 전해져 이어오는 우리 집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어지러운 세월 속에서도 그 할아버지들의 후손인 우리들이 간직하고 살아야 할 소중한 것이라는 당부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
우리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고려왕조 개국 초에, 광주 일대에 야심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공으로 태조 왕건(王建)께서 이 공로를 높이 사서 우리의 시조 할아버지에게 내려주신 성씨이고, 대장군(大將軍)의 벼슬을 받은 방(邦)자 걸(傑)자, 방걸을 휘로 하신 안방걸을 시조로 합니다. 그때 그 고을 광주(廣州)를 식읍으로 내려주시어 광주군(廣州君)이라는 봉군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시조할아버지는 당시 평양을 강점하고 있던 거란을 평정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천하에 힘으로 알려주셨고, 태조 왕건께서 이 공으로 평양대장군(平壤大將軍)으로 하고 최고 장군으로서 원수(元帥)의 칭호를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일가는 안방걸평양대장군원수광주군(安邦傑平壤大將軍元帥廣州君)을 시조로 하는 광주안씨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인 고려인은 고려의 신하로서 사간공(思簡公) 성(省)자 할아버지가 조선조 태종이 벼슬을 권할 때, ‘우리는 고려왕조에 칠시중 팔학사(七侍中 八學士)*로 충성한 조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찌 그 의(義)를 저버릴 수 있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처럼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며 대를 이어왔습니다.
*일곱 분의 시중(수상의 지위) 여덟 분의 학사(교육과 학문에서 최고의 지위)
시조를 1세로 하고 그 후 13세까지는 휘자와 관직만 알려지고 있을 뿐 행적, 향년이나 묘 자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 고려 말, 이조 초의 역사 전환기에 고려유신으로 의를 지키다가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이조의 고려사 기록 전에 고려의 역사 기록은 그들의 불리한 기록과 더불어 산질해버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우리 광주안씨 가문과 고려 왕가 사이에 국혼이 잦았다는 것은 이조 때 쓴 「고려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산 것은 14세조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시어사공(侍御史公) 유(綏)자 할아버지는 남해 일대를 소란스럽게 하는 왜란을 평정한 다음 남쪽 고을 함주(咸州;현재 咸安)에 터를 잡고 옮겨 살았습니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선 것은 그 후 5대를 더 내려와서입니다. 왕조교체기에 사셨던 중랑장(中郞將) 국자 주자(國柱) 할아버지는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 기우자(騎牛子) 강자(崗) 할아버지와 함께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서 조선왕조의 탄압을 피하여 초야에 묻혀 살았습니다.
낡은 나라가 망하고 새나라가 들어서자 낡은 나라의 신하들은 맞아죽고 흩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먼 윗대의 산소도 잃어버리고 조상의 가계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안에 처음 살기 시작한 시어사공 할아버지와 그 아래 3대의 산소는 함안 봉산(蓬山) 선영에 있었지만 고려 말의 혼란한 틈에 침노한 왜놈들이 파헤치고 비석까지 없애버렸기 때문에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다만 단을 모아 시제(時祭)를 모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시조 광주군의 산소 또한 개성 근교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광주(廣州)에 있다고도 해서 질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조선 태종 임금 때에 와서 비로소 새 왕조가 안정되었고, 고려 때 인망이 두터웠던 신하들을 찾았는데 이때 국자 주자(國柱) 할아버지와 기우자(騎牛子) 강자(崗) 할아버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특히 기우자 할아버지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려 신하로서 초야에 묻혀 살아가기를 고집하고 의를 지켰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영의정 조석문(曺錫文)은 이 할아버지들의 옛 왕조에 대한 충성을 기려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우중에 사립* 쓰고 소타고 가는 이여, 왕명을 받아가던 금문**에서 본 사람 아닌가.
율리에서 밭 갈아 모를 심고, 수양산 밑에 애써 고사리 캐는구나.
아우형의 장난이 어릴 때 같고, 부자의 곧은 충성은 그대 같음이 드물다네.
내리신 님의 청포(靑袍) 때때로 잡고 우니, 지금도 님의 은혜 어찌 온전히 마르리까.
(雨中蓑笠騎牛客 會向金門侍詔歸
栗里田中鋤晋草 首陽山下採殿薇
弟兄湛樂如君少 父子貞忠似此稀
內賜靑袍時把泣 至今遺澤未全晞
; 事載東國風雅)
* 사립 = 도롱이와 삿갓 ** 금문 = 궁궐 문
그리고 같은 고려 유신인 심재(心齋) 조성렴(趙性濂)은 중랑장 국자 주자(國柱) 할아버지께서 끝까지 고려왕조를 생각하면서 살다가 돌아가시자 다음과 같은 만장(輓章)을 지어 왕조를 따라 죽지 못함을 망국 신하가 죽은 슬픔을 통해 시로 스스로를 한탄하며 읊었습니다.
고목이 바람에 꺾이더니 밤새 가을이 왔네 그려.
쓸쓸한 정경 가득하나 이 슬픔 감히 받아들일 수 없다네.
끝없이 흘러넘치는 눈물이여, 어느 때 멈출 건가.
죽지 못한 외로운 신하, 그 머리를 찬 눈이 뚜드리네.
(喬木風嶊一夜秋 蕭條滿目不堪收
無端涕淚何時已 未死孤臣雪拍頭
; 事載咸州三綱錄)
기우자 할아버지의 아드님 대에 와서 비로소 우리 집안은 조선왕조의 신하가 되었는데, 바로 세종 때였습니다. 형제 두 분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우리 집은 그 둘째 집 으로 동궁시직(東宮侍直)을 지냈으나 상주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시묘(侍墓) 3년 중에,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밀려나게 되자 벼슬길을 영영 버리고 말았습니다.
후에 성종이 그 아들을 현량으로 천거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했고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로 더 높여주었으나 그것도 사양했습니다.
인의공 할아버지 때 함안 동네에 끔직한 살변이 생겨 바로 그날로 밀양 금포로 터전을 옮겨셨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밀양고을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부터 약 600년 전, 조선 성종(成宗) 때의 일입니다.
고려왕조 때 고려에 충성하시던 선조들의 후손이 나라가 바뀌어도 거의 100년 동안이나 고려왕조의 유신임을 잊지 않고 의를 지켜 새 이씨왕조에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조 할아버지의 의를 숭상하는 뜻은 나라의 선비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들은 이 의를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가르쳐왔습니다.
우리 집안이 이씨왕조에 벼슬을 본격적으로 하시기 시작한 때는 태만공(苔巒公) 할아버지 대부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