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주
성모님께 대한 5대 교리(중)
3.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사람들은 마리아가 어머니 안나에게 잉태될 때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교서를 통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했다:
"마리아는 잉태될 때부터 죽기까지 원죄와 모든 죄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분이었다."
이에 대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인데, 마리아는 예외였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신학은 마리아도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원죄에 물들 수 있었지만,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보고 있다.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인간이었다는 것은 마리아를 위한 영광이 아니라, 역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위한 깨끗한 자리임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초점이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다. 옛날말로 무염시태라고 부른다.
4. 마리아의 승천
중세교회 시기부터 사람들은 ‘성모마리아는 영혼과 육신이 동시에 천국으로 가셨다’고 믿었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마리아가 승천하였다는 믿음이 논쟁되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교리를 선포했다:
"원죄 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지상의 삶을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려지셨다."
마리아께서 천국으로 불려 올리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몽소승천이라는 말을 썼다.
이 교리의 핵심은 마리아가 구원되었다는 것이다.
산채로 하늘로 휙 올라갔다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목표요, 교회의 목표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 곧 마리아에게 이루어진 구원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이고 목표이다.
성모마리아는 '영혼과 육신이 동시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셨다.
우리도 언젠가는 성모님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제2주
성모님께 대한 5대 교리(하)
5. 인류를 위한 중개자
초기교회부터 오랫동안 사람들은 마리아에 대하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주시는 분,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주시는 분으로 믿어왔다.
오랜 논란을 거쳐 이 문제가 논쟁이 되어왔고, 마침내 교회의 공식 믿음으로 선포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마리아를 ‘구원의 중개자’로 선포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이시지만, 마리아는 그 유일한 중개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 모두도 넓은 의미로 이웃에게 구원을 중개하는 중개자들이다.
성모마리아는 ‘구원의 중개자’이시다.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해주는 중개자이시다.
가톨릭교회가 성모마리아를 공경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성모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성모마리아를 통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 초점이다.
따라서 성모마리아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분별한 공경을 삼가야한다. 사적인 신심에 따라 지나치게 과장된 공경을 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올바른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사목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성모마리아를 올바로 공경하도록 참된 신심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왜, 자꾸 신흥종교가 생겨나는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심에 치우쳐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성모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우리도 성모마리아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고단한 인생길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나약한 우리의 본성에 성모님은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성모님의 굳은 신앙과 강한 정신을 본받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야겠다
제 3주 - 인물 열전
김 범우(金範禹) (1751-1787)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 첫 희생자이다. 세례명은 '토마스'로 1751년(영조 27년) 4월 27일(음력) 한성부 명례방(現 서울 명동)에서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3년(영조 39년) 역관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가 되었다.
1784년 이벽의 권면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의 영세를 받아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영세식이었는데, 이존창 · 최창현 · 최인길 · 지홍 등이 함께 받았다. 김범우는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동생 이우(履禹)와 현우(顯禹)까지 입교시켰다.
김범우의 집은 명례방(明禮坊) 장예원(掌隷院) 앞에 있었는데, 양반 이벽의 집에는 하층민이 드나들기 어려워, 중인 출신의 김범우가 수표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여. 1784년부터 그의 집은 명례방공동체가 되었다.
1785년 이승훈과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삼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한 끝에 예수 화상(畵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 추조 적발 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양반들이어서 방면되었지만, 그는 교회 집회 장소를 제공한 집주인에다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어 고문과 형벌을 받고 밀양 단장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가 소장했던 책자를 모두 형조의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금한 최초의 공문서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혹독한 매질의 여독으로 2년 동안 고생하다가 1787년 9월 14일 고문을 받은 상처의 악화로 귀천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인물사전 - 편집
제 4 주 - 이삭 줍는 오솔길
그림 이야기-마하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마하>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1803년에서 1806년 사이에 그린 작품의 모델이다. 같은 포즈, 같은 모델을 <나체>와 <착의>로 그린 점에서 세계 회화사상 유일한 예이기도 하다. 마하는 특정 여성의 이름이 아니라 옷을 잘 차려 입고 예쁘장한 당시의 서민 출신 여성으로 멋과 분방한 생활을 하는 마드리드 여성을 일컬은 말이라고 한다.
<마하>는 서양회화사상 최초의 누드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누드화가 많이 그려졌지만 그것은 신을 그린 것이다. 인간 여성을 그린 누드화는 <옷을 벗은 마하>가 처음이었다. 이 <마하>를 외설적이라는 것은 성경의 인물이나 신화의 여신이 아닌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다. 즉 누드로 있을 수 없는 실존 여성이 누드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외설적이요 관람자들에게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이다.
더구나 스페인의 엄격한 카톨릭 국가에서 나체화를 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앞 선 시대의 디애고 벨라스게스(1599-1660)의 <거울 앞의 비너스>는 누드가 정면이 아니라 등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주제가 <비너스>다.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고야는 1815년 스페인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소는 누드화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화를 그렸고 더구나 체모까지 그렸으니, 종교지도자들은 마하를 외설적이라고 전시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스페인 당국에서는 마하를 압수했다가 1836년 고야가 죽은 후 8년이 지난 해에 돌려주었다.
고야는 1824년 자발적인 추방을 당하여 프랑스 보르도 지역으로 가서 182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 두메 남종국 : 미술에 관한 우리들의 이야기 -
첫댓글 김회장님, 레지오 영적독서 잘 봤습니다. 좋은 자료로 활용되리라 생각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현존을 의식하며...신앙하는 모든 이의 소망이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성취되길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