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에 침입한 이민족들
(4) 대외 관계의 변천
[1]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1) 고려 전기 외교의 기본 방향 - 북진 정책 + 친송 정책 & 국제 정세에 따른 신축성.
*친송정책이란? 중국의 송(宋)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
2) 중국의 정세: 북부에는 거란족(요 나라를 세움)이 강성하여 세력 확장
태조의 정책: 중국이 거란과 싸우는 틈을 타 북진을 추진, 거란에 대해 강경.
광종의 정책: 송과 제휴하여 거란족의 요를 견제
3) 압록강 중류 지역: 발해 유민들이 정안국을 세우고 송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하려 함.
거란은 먼저 정안국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느낌.
[2] 거란의 침입과 격퇴
1)거란의 고려 침략 배경: 원래 공격 목표는 송이었으나, 배후 견제 세력을 없애기 위해 정안국과 고려의 항복을 먼저 받으려 함
2)1차 침입: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침입 -> 서희의 담판으로 해결
?거란의 요구-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는 것. & 송과 단교하고 거란과 통교할 것
?서희의 주장-고려는 원래 고구려 계승국이므로 영토반환은 불가. 거란과 통교 제의는 일단 수락(말로만 수락한 것*^^* -> 그러니까 또 쳐들어오지.)
?결론-송과 단교하고 거란과 통교하는 대가로 압록강 동쪽 "강동6주"의 관할권을 얻음
☞이 회담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란이 뒤에 송 나라를 신경 쓰느라고 고려와의 싸움을 빨리 끝내고자 함. 그래서 선선히 강동 6주를 내어줬던 것. (서희가 말만 잘해서 된 일이 아님 -_-;)
3)2차 침입:
?이유-고려가 송과의 단교, 거란과의 통교 약속을 지키지 않음
?침입의 명분-"강조의 정변" (고려의 권신인 강조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폐위한 사건)
?경과-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양규의 활약으로 일단 '강화'회담 진행 (거란의 장기전으로 돌입했을 경우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염려함) 1010년.
?결과-고려 현종의 친조(고려 국왕이 직접 요의 조회에 참가하는 것 =이걸 두 글자로 '입조'한다고 하지)를 조건으로 그냥 돌아감.
4)3차 침입: 이유-고려가 또 약속을 안 지킴.
경과-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 귀주에서 강감찬의 활약으로 물러감(1019년, 귀주대첩)
5)3차 침입 이후-> 결국 오랜 전쟁에 지쳐서 그냥 거란과 국교를 맺음 -> 동북 아시아에 송, 요, 고려 3국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오랜만에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옴.
▷ 거란의 침입 결과 ☆
① 나성 축조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쌓음)
② 7대 실록 편찬
③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 축조(압록강에서 도련포까지 --125p 지도 꼭 볼 것!) ->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
④ 초조대장경(가장 먼저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 만듦.
[3]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12C)
*여진족의 옛 이름? 말갈족 ^^, 나중 이름? 만주족
▷발해 멸망 후 요동 지역의 정세: 여진족들이 반독립적 상태로 남아 고려와 거란을 상국(上國:더 높은 나라)으로 섬김. --> 그러다가, 완예부 출신의 추장 아구타가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국가(요)를 세우고, 고려와충돌하기 시작 -> 고려가 (뜻밖에도) 패배함.
▷별무반 창설: ․목적- 기병(말을 탄 군대)인 요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
․누가 주장했나? 윤관
․구성-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걸어 다니는 군대), 항마군(승병:승려들로 구성된 병사)
․별무반이 뭘 했나? 예종때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음.
▷동북 9성은 어떻게 되었나? 수비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 거란은 아직도 위협적으로 남아 있고, 여진족이 다시는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고 애원해 왔기 때문에 그냥 1년만에 다시 돌려줌. (윤관은 매우 애통해 했지)
▷이후 여진족은 어떻게 되었나?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국호를 금이라 하고, 거란족의 요를 멸한 다음,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함 -> 고려에게 금에 대한 사대관계(금을 상국으로 섬기라는 이야기)를 요구해 옴.
▷고려의 반응은? 당시는 12살 어린애였던 인종이 왕으로 있고, 그 외조부인 이자겸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자겸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대외적인 전쟁은 피하려고 했으므로 금에 대한 사대관계를 수락함.
[4] 몽고와의 접촉 (13C)
▷시기: 최씨 무신정권 시기
▷당시 요동과 만주 지역의 정세: 금이 쇠약해지고 거란이 다시 일어나 반란을 일으킴, 게다가 칭기즈칸이 몽고를 통일하고 금을 공격하여 어수선한 상태.
▷고려와 몽고가 첫 번째 대면하게된 사건: 몽고군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 김취려 장군에게 패하여 물러감, 그 뒤 다시 또 거란이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은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포위하는 데 성공, 이때 북쪽에서 거란을 추격해온 몽고 군대와 두만강 유역의 동진국 군대, 그리고 고려군이 함께 연합하여 강동성에 있던 거란족을 몰아냄.
[5] 몽고와의 전쟁
▷원인: 몽고가 거란족을 토벌한 뒤 고려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함. 그 후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여진족에게 피살당함 -> 몽고는 이를 고려의 짓으로 보고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침입(1231년)
▷경과: 몽고는 의주를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였으나 박서의 강력한 대항으로 다른 길로 돌아서 개경을 포위 -> 결국 몽고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강화(화해)를 맺음
--> 그 후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많은 고려의 재물과 미녀를 요구)하고, 고려의 내정에 간섭 -> 당시 집권자 최우(최충헌의 아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적극적으로 대항함. -> 몽고 장군 살리타의 재침-> 처인성에서 김윤후에 의해 사살됨.
☞ 왜 하필 강화도(섬)로 옮겼을까? 몽고군은 바다에서 하는 싸움(해전)에 약하기 때문.
☞ 강화도로 옮겨간 지배층은 열심히 싸웠을까? 그렇지 않았다. 자기들은 안전한 곳에 피해서 여전히 사치를 일삼고, 농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걷었다. 반면, 한반도에 남아있던 농민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몽고군과 목숨을 걸고 항전하였다.
☞ 오랜 전쟁으로 불에 타버린 문화재는? 7대실록, 초조 대장경,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
▷결과: 결국 최씨정권의 마지막인 최의가 피살되고, 왕(원종)은 몽고와 화의하고 개경으로 돌아옴(1270년, 수도로 돌아온 것을 두 글자로 '환도'라고 한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가 항쟁을 한 이유? 삼별초는 본래 최씨 무신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던 군대이므로, 최의의 피살과 함께 소멸될 운명이었다. 따라서 삼별초는 왕을 따라 환도하지 않고 강화도에 남아 계속 몽고와 싸우기로 했다.
․항쟁 과정: 지휘자 배중손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을 계속 하다가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패하여 죽고,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김통정의 지휘하에 항쟁을 계속.
-> 제주도가 함락되자 전후 4년간 계속되던 삼별초의 항쟁은 실패함.
-> 몽고는 제주도가 문제라고 생각하여 따로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말을 키우는 곳)으로 만듦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자주적인 항쟁이었다는 평가와, 무신정권의 하수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쟁을 했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 고려시대 이민족의 침략 정리표
11C
거란
12C
여진
13C
몽고
14C
홍건적과 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