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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1. 컴퓨터와 인간의 궁합
컴퓨터를 향해서 "야! 이 똑똑한 바보야"라고 호령할 수 있는 사람은 완고한 노인만이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보다 오히려 컴맹 쪽이 더 정상이다. 원래 인간은 아날로그적이고 컴퓨터는 디지털적으로 그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PC는 인간이 쓰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고 모양도 정을 붙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미국 인지과학회 회장이었던 D A 노먼이 한 소리이다.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적 진화'를 해왔다면 컴퓨터는 실험실이나 공장의 환경에서 '기계적 진화'를 수행해 왔다. 전기 스위치를 넣자 필라델피아 도시 전체의 가로등이 껌벅거렸다는 애니악의 그 집채만 한 컴퓨터가 단추만 한 건전지 하나로 움직이는 모바일 컴퓨터로 진화했다. 그런데도 자판만은 옛날 그대로라는 비웃음을 사게 된 것도 그 진화의 배경이 다른 데서 오는 비극이다. 컴퓨터와 인간을 연결시키는 인터페이스(자판)는 어느 한쪽의 진화만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A'자를 제일 작고 약한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야만 하는 바보짓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비극을 노먼은 "인간이 디지털 세계에 갇혀 있는 아날로그적 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연 속에서 진화해온 인간은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고 끈질기다. 그런데 컴퓨터는 인간에게 엄격하고 딱딱하고 비관용적인 것을 요구하는 기계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전연 다른 인간과 컴퓨터는 상보적인 인터랙션 전략을 통해서만 공존이 가능하다. 교육헌장의 표현대로 우리는 '기술 중심의 제품에서 인간 중심의 제품'을 만드는 인류중흥의 빛나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노먼이 말하는 차세대의 '보이지 않는 컴퓨터'란 디지털의 컴퓨터와 아날로그의 인간이 서로 만나 디지로그의 유전자를 지닌 새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어떤 컴퓨터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저서 속에서 제시한 인지과학의 퀴즈문제를 풀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문제는 대홍수 시대의 모세는 동물을 몇 쌍씩 방주에 넣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 퀴즈의 어려움은 한 쌍이든 두 쌍이든 어떤 숫자를 대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노아'를 '모세'라고 한 질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웬만한 사람들은 속는다. 방주에 넣은 동물의 짝수에만 신경을 쓰다가 노아를 모세라고 한 잘못에 대해선 눈치를 채지 못한다.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달라서 큰 차이가 아니면 대충 넘어가도록 되어 있다. 모세도 노아도 모두가 구약시대의 인물이고 글자 수도 두 자로 돼 있어 비슷하다. 만약 모세가 아니라 '클린턴'이라고 했다면 금세 잘못을 알아챘을 것이다. 노아를 모세라고 잘못 말하는 것도 인간의 특성이요, 그렇게 잘못 말해도 그냥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넉넉하고 관대한 인간의 인지력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다. 놀랍지 않은가. 만약 우리의 뇌와 그 인지 시스템이 1이나 0 하나만 틀려도 절대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디지털 언어로 되어 있었더라면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을 절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밥도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육안이 현미경의 시스템과 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한 균이 있어도 즐겁게 시원한 냉면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2. '칵테일 파티 효과'를 아십니까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은 틀린 말일까. 기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바람도 아닌데 어떻게 문을 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통해온 말이다. 단지 '들어오다'와 '문을 닫다'의 두 언표(言表) 가운데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문을 닫으라는 말이 앞에 나온 것뿐이다. 인지 과학자들이 말하는'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칵테일 파티장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칵테일돼 뒤얽혀 있다. 그런 잡음 속에서도 용케 사람들은 각자가 불편 없이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말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본 부인이 있었다면 잡음 속에 섞여 있는 대화 내용을 금세 엿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질투심이 불러일으킨 초능력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듣고자 하는 소리를 식별해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귀는 잡음을 수동적으로 균질하게 기록하는 녹음기와는 다르다. 현상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중시해온 '지향성'의 문제다. 인간의 지향성이 컴퓨터 관련 과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면서 '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어째서 100년 전의 키보드를 그대로 두드려야 하는가 하는 불평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컴퓨터에는 필요한 소리만 걸러내는 인간 같은 '칵테일 효과'의 지향성이 없다. 그래서 잡음이 없는 환경에서만 음성인식 기술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잡음과 함께 살아온 인간이다. 조용한 산사에 가도 풍경소리가 울리지 않는가. 원래 1, 0으로 된 디지털 신호는 아날로그의 잡음을 제거하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해 온 것인데 아니로니컬하게도 막상 자연공간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향성 마이크란 것을 개발했지만 인간의 칵테일 효과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컴퓨터를 기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애매성, 비조직성, 주의산만, 감정적, 그리고 비논리적이다. 그런데 기계는 반대로 정확성, 조직적, 주의의 고정성, 그리고 감정에 흐르지 않고 논리적이다. 한마디로 기계는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그 평가는 물구나무 서기다. 기계는 우직하고 반복적인데 비해 인간은 창조적이다. 기계는 융통성이 없고 변화에 둔감하고 또 상상력이라는 것이 전연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황에 따라 금세 적응하고 임기응변을 할 줄 안다. 무엇보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꿈꾼다"는 스필버그의 말대로 인간은 꿈꿀 줄 안다. 이렇게 노먼이 제시한 기계와 인간의 두 가치 패러다임을 놓고 볼 때 컴퓨터와 인간의 동거는 엔지니어의 남편과 시인의 아내가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엔지니어는 기계의 이치는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읽을 줄 모르고 시인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기계에 대해서는 낯설다. 또 위에서 비교한 인간 대 기계의 서로 다른 관점을 살펴보면 서구문명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기계중심적 관점에 서 있고 아시아 문명권에 살아온 한국인들은 보다 인간 중심적 관점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IT는 산업시대의 기계기술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디지털 기술이 진화되려면 아날로그의 수혈을 받아야 한다. 정보시대의 디지털 혁명은 컴퓨터를 닮은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컴퓨터가 모르는 '칵테일 파티 효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진화한다. 아날로그적 시인이 만든 디지털 문화, 그것이 미래의 우리 블루 오션이기도 하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3. 배달부의 초인종은 클릭 소리보다 크다 배달부의 초인종은 클릭 소리보다 크다. 집 안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던 청년이 채팅으로 사랑하게 된 여성에게 꽃다발을 보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미를 보낸 지 100일째 되던 날 그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그녀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 있었다. "꽃을 보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매일 장미를 배달해준 꽃집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그냥 웃고 말 유머가 아니다. 그 인터넷 청년의 충격은 네그로폰테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단순한 비트와 아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뜻밖의 청첩장을 받기 전까지 그는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가 컴퓨터의 클릭 소리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초인종이라는 말, 배달부라는 촌스러운 구식 말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초인종(招人鐘)이라는 말이 벨이니 클릭이니 하는 낯선 외래어보다 정감 있게 들리는 것은 옛날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초인종은 한자 뜻대로 읽으면 사람(人)을 부르는(招) 종(鐘)이라는 뜻이다. 방 속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던 그 젊은이는 모든 정보통신의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초-인-종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젊은이들을 우리는 인터넷 중독자, 일본 사람들은 '오타쿠', 중국인이라면 '인특망광(因特網狂)', 그리고 영어권 사용자들이라면 워크홀릭을 본떠 '웹홀릭(webholic)'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레이엄 벨이 통신 사상 처음으로 조수와 전화 시험통화를 했을 때 그 첫마디 소리는 "웟슨군. 이리 오게(Mr. Watson, come here, I want you)"라는 부름의 메시지였다. 그렇다. 분명 사람을 부르는 욕망의 일성(一聲)에서 전화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전화 용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만남의 약속이다. 그 욕망의 거미줄이 컴퓨터와 연결되고, 그 줄이 동(銅)에서 광섬유로, 통신위성의 보이지 않는 공기의 전파로 진화해 간 것-그것이 바로 오늘의 인터넷이며, 월드 와이드 웹(www-세계에 널리 쳐진 거미줄)이다. 중국식 표현으로 하자면 계산기가 전뇌(電腦)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셈이다. 그러한 인터넷 공간의 기계적 진화권(進化圈)에 비해 오프라인의 생물적 진화권에서는 여전히 빨간 자전거를 탄 우체부 아저씨의 환상이 남아 있다. 한 손에 장대처럼 높이 우동 그릇을 쌓아 올린 중국집 배달부의 모습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옆에서 아이들이 전화를 거는 것을 지켜보라. 아이들은 한참 수다를 떨고 난 다음 전화를 끊으면서 하는 말이 있다. "자세한 건 거기에서 만나 이야기하자!"라고. 대체 전화로 실컷 말하고 만나서 다시 자세히 말하자는 것은 무엇인가. 자그마치 120년 전 전화가 발명됐을 때 벨이 "웟슨군, 이리로 오게"라고 했던 것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정보 감각이다. 현실 공간이 아니면 도저히 소통될 수 없는 생물적인 정보 욕망이 세대를 건너뛰어 지속된다. 처음 전화가 가설됐을 때 서울에 유학 간 아들에게 보내려고 전화줄에 시루떡 봇짐을 달아맸다는 우리 할머니들을 무식하다거나 망령이 났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을 하고 있는 당신네의 손자들도 다만 의식하지 않을 뿐 생물적인 원초적 정보 욕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터넷 거미줄의 허공에 걸려 있는 당신의 손자들이 아무 때고 자유로이 땅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디지로그 장대나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4. 소금장수가 만드는 미래형 '컴팩시티' 인터넷의 선조가 한국이라고 하면 아무리 국수주의라고 해도 웃을 것이다. 그러나 농담이 아니다. 어느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한국의 유통구조는 유럽처럼 수요자가 상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수요자를 찾아가는" 형이다. "등짐.봇짐 장수가 소금이며 새우젓이며 메밀묵이며 박물들을 지고 이고 메고 이 마을 저 마을 가가호호"를 찾아다닌다. 주문도 받고 배달도 해준다. 거의 100년 전 폴 발레리는 "물.가스.전류가 집집으로 배송되는 것처럼 앞으로는 아주 작은 신호 같은 조작만으로 동화상이나 소리를 전달받아 그것을 마음대로 붙이고 떼고 지울 수가 있게 될 것"이라고 오늘의 인터넷 사회를 예견했다. 시인의 그 예리한 통찰력은 인터넷의 본질이 수요자가 상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수요자를 찾는 배달문화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기에 정보시대의 기둥 인텔이 내세운 기업모토 역시 "인텔은 배달한다(Intel Delivers)"였다. 한국의 시루떡 돌리기(2회)에서 인터넷의 정보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면 소금장수형 상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집안에서 쇼핑도 하고 비즈니스도 하는 디지토피어가 온다"고 목청을 높였던 미래학자들이 줄줄이 망신을 당하게 된 이유도 그 점에 있다. 광케이블의 빛의 속도를 타고 정보를 운반하는 인터넷이 설마하니 여우에게 홀려가며 외딴 산길을 찾아다니는 소금장수가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주문은 디지털로 하고 물건은 아날로그 경로로 배달되는 것이 인터넷 홈쇼핑의 본얼굴이다. '아마존 닷컴' 기업이 100년 적자에 시달리는 것도 의자 주문은 초 단위로 받고 그것을 싸는 데는 시(時) 단위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반은 19세기보다도 못한 주(週) 단위다. 바로 앞 가게에서 사오면 되는 물건을 천리 길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첨단 정보화시대의 진귀한 유통구조다. 이것이 여우에 홀린 소금장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택배, 퀵서비스, 심부름센터의 오토바이, 밴, 화물트럭들이 메토카르페의 법칙에 따라 길을 가로막는 고지라로 변한다. 이러한 인터넷의 부담과 위기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주문은 디지털로 하고, 물건은 아날로그로 근처 편의점에서 찾아가는 디지로그식 쇼핑 방식이다. 이 비즈니스 모델 덕분에 경쟁 업종 간에 윈-윈 전략이 생겨나고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이 하나가 되는 코피티션(copetition)이라는 경영학 신술어가 탄생한다. 그리고 미래학자들의 예상과 달리 분산되었던 교외 생활자들이 도심지로 U턴하는 컴팩시티의 21세기형 주거 생활양식이 태어나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상실한 거리감을 되찾자는 게다. 시간과 돈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녔던 유목적 삶은 다시 산골 두메의 정주형 감각으로 전향된다. 아이들의 교육에서 주부들 쇼핑 가족의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까지 올인원으로 한 정주 공간에 붙어 있는 컴팩시티, -옛날의 촌락 공동체처럼 생활의 활력이 살아나고 지속가능한 삶의 공간이 된다. 21세기 네오 노마드의 유목적 삶을 예언했던 자크 아탈리를 울리는 대목이다. 먼 미래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런던의 밀레니엄 돔을 설계했던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72)가 여의도에 70층짜리 쌍둥이 빌딩 파크 윈을 설계하면서 이런 꿈을 담는다. "사무용 빌딩과 호텔과 쇼핑몰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일은 물론이고 다양한 여가활동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복합용도개발'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집적도시(compact city)형이므로 교통량을 유발하지 않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장수의 배달문화가 만든 디지로그 문화 공간이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5. 한국의 인터넷 문화 '@골뱅이와 번개' 주소 적는 법 하나에도 동서가 다르다. 우리는 나라에서부터 시작해 시→구→동의 순서로 자기 집 번지를 쓴 다음 마지막에 자기의 이름을 쓴다. 그러나 제임즈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인상 깊게 묘사하였듯이 유럽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맨 먼저 쓰고 나라에서 끝난다. 인터넷 전자메일이 생기면서 주소를 적는 이러한 차이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골뱅이(@)만만 달면 지구의 시민이 되어 누구와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골뱅이가 국제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르다. 원래 @은 구텐베르크의 활자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호이지만 e-메일 표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34년 전(1972년) 미국 BBN 회사의 레이 텀린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발신자의 위치표시를 나타낸 약호(略號)로 앳 사인 (at sign) 혹은 앳 심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은 '달팽이'라고 부르고, 독일 사람들은 '원숭이 꼬리'라고 한다. 동유럽의 폴란드나 루마니아에서는 꼬리란 말이 없어지고 그냥 '작은 원숭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는 '원숭이 꼬리'가 '고양이 꼬리'로 바뀌고, 러시아에서는 원숭이와 앙숙인 '개(소바카)'로 둔갑한다. 아시아는 아시아대로 다르다. 중국 사람들은 점잖게 쥐(鼠)에다 노(老)자를 붙여 '라오수(小老鼠)' 또는 '라오수하오(老鼠號)'라 부른다. 일본은 쓰나미의 원조인 태풍의 나라답게 '나루토(소용돌이)'라고 한다. 혹은 늘 하는 버릇처럼 일본식 영어로 '앳 마크'라고도 한다. 아무리 봐도 달팽이나 원숭이 꼬리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오리, 개, 그리고 쥐 모양과는 닮은 데라곤 없는데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니 문화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러니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30여 개의 인터넷 사용국 중에서 @과 제일 가까운 이름은 우리나라의 골뱅인 것 같다. 골뱅이의 윗 단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모양이나 크기까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무릎을 칠 것 같다. 더구나 e-메일의 @으로 찌개를 끓여먹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의 골뱅이뿐이다(물론 국제적으로 말썽이 많은 개와 달팽이를 뺀다면 말이다). @을 '앳 사인'이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의 그 건조한 디지털적 논리에 비해 시각과 미각까지 겸한 아날로그 한국 골뱅이는 얼마나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냐.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골뱅이'의 특성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벽을 넘어다니며 두 공간을 자유롭게 살고 있는 '번개미팅' 한국의 인터넷 유행에서도 발견된다. 말부터가 번개는 한국 토박이말이고, 미팅은 인터넷에서 80%를 점유한 영어다. 그러면서도 그 말이 줄어서 영어는 차차 자취를 감춰 번개로 통하고, 정규적으로 만날 때에는 '정모'가 되어 온라인.오프라인은 자연스럽게 온.오프로 스위치된다. 작은 인터넷 모임이 한국 전체의 거리와 광장을 뒤집어놓은 월드컵 붉은 악마의 힘도 그 골뱅이와 '번개'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일본에서 번개라고 하면 '피카추'의 전기 쥐 꼬리를 연상할 것이다. 그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공간이 완전히 닫혀 있어서 인터넷에 한번 갇히면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다. '히키고모리'나 '파라자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폐증 환자들이다. 연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지언정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세상으로 나와 번개미팅을 한다. 그래서 일본의 관계자들은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부러워한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6. 무한 진화 인터넷의 새 버전 '웹 2.0' 그렇게 박식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H G 웰스가 1901년에 출판한 '예상집'을 지금 읽어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비행기'는 수송 교통수단이 될 수 없고, '잠수함'은 함장이 바다 밑에서 질식해 죽는 광경만 보일 뿐 신무기로는 쓸모가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32년에 50년 뒤의 신문을 예상하고 쓴 기사에는 컬러 인쇄, 캐주얼한 옷의 유행, 그리고 공산주의의 몰락 등 좀 성급한 것도 있지만 그런대로 정곡을 맞힌 것도 있다. 하지만 화석 연료 대신 지열(地熱)을 쓰게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빗나간 실패작이 많다. 그러나 '세계의 뇌(world brain)'라고 명명한 그의 '인터넷'에 대한 예언만은 아주 정확했으며, 지금 보아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세계의 뇌'는 제2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던 때의 것으로, 예언이라고 하기보다 그의 절실한 희원이 담긴 아이디어였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지식 정보는 가속도로 늘어가고 있는데도 인류는 여전히 무지 속에 살고 있다. 그것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자동차와 비행기로 바뀌어도 인간의 두뇌는 마차시대에 멈춰 있다. 그래서 방대한 '정보 집배센터'를 구축해 '영구 세계 백과사전'을 만들어 잠시도 쉬지 않고 최신 정보를 기록해 세계 곳곳에 분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동수단과 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거리(距離)의 철폐'시대를 살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세계는 해도 (海圖) 없이 항해하는 느린 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뇌'는 국제사회를 통합시키고 전쟁 없는 지구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뇌' '영구 세계 백과사전'은 지구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영어로 기록될 것이며, 시시각각 수정.보충되는 정보들은 마이크로 필름에 담긴다. 그것은 세계 어느 도서관에서나 프로젝트를 통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다. 마이크로 필름을 디지털로, 도서관의 프로젝트를 PC의 모니터로 바꾸기만 하면 오늘의 인터넷이 된다. '세계의 뇌'에 대한 예언을 보면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평범한 말과 "미래의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묻지 말고,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게 된다. 이뿐 아니라 바로 지난해 5월 '팀 오레일리(Tim O'Reilly)'에 의해 태어난 web 2.0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2.0이라는 숫자가 암시하고 있듯이 인터넷 역시 지금까지 사용해 온 1.0과 1.5의 구 버전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하지 않고는 생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2001년 닷컴(dot com) 기업들이 버블로 붕괴해 닷컨(dot con- '사기'라는 뜻)으로 전락했을 때 모두 그런 운명을 실감했다.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뇌, 인터넷 역시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끝없이 진화한다. 젊은 대학 연구원들이 신개념으로 만든 검색 사이트 구글은 오히려 그 붕괴 속에서 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MS.야후 등 공룡 기업을 위협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만나게 될 web 2.0은 또 다른 IT 혁명을 위한 미래 전략은 예언이 아니라 그 창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신기술.신개념의 발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옆에서는 아직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것이라 하여 기피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름이야 어떻게 붙였든 인터넷 안에선 차세대의 신생아들이 무서운 거인으로 자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 구글로 web 2.0을 검색해 보면 950만 건이나 나타난다. 동시에 인터넷의 대륙과 해양을 지배해 오던 제국들이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쓸쓸한 뒷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디지로그 시대의 얼굴도 보일 것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7. 6차 분할의 원리와 싸이월드 웹2.0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종래의 인터넷 웹사이트와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더블 클릭'의 검색엔진이 1.0의 구버전이라면 '구글'은 2.0의 신버전이다. 홈페이지가 구버전의 것이라면 블로그는 신버전에 속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취미와 기호에 따라 모이던 인터넷 동호회나 '아이 러브 스쿨' 같은 아는 사람끼리의 버추얼 커뮤니티가 구버전이라면 6차 분할의 원리(6 degrees of separation)의 개념으로 만든 그것은 신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6차 분할'의 이론이라고 하면 남의 동네 이야기라고 미리 낯부터 가리겠지만 사실은 한국인에게 더 가까운 개념이다. 객줏집 같은 곳에서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만나 통성명을 했다고 하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뜻밖에도 그들이 다 같이 알고 지내는 사람 이름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벌써 그들은 남이 아니다. 반색을 하고 다시 인사를 나누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 참 좁네요!" 이 '좁은 세상'의 현상을 사회학자나 수학자들이 밝혀 내려 한 것이 바로 6차 분할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 여섯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다 아는 사람이 된다'라는 가설이다. 그 용어는 1930년대의 헝가리 작가 카린디의 단편 '사슬'에서 따온 것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연극.영화.게임 등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말이다. 다만 왜 그게 하필 6이냐. 호프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에도 "한 두서너 병" 가져오라고 말하는 한국인이라면 그냥 '서너 다리 건너기'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헷갈리게 만든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또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도 숫자로 꼭 짚어 말하려는 서양인들의 디지털적인 표현이 문제다. 한국의 시골 농부들은 "서너 다리 건너서 모르는 사람 있나?, 처음 본다고 티격태격하지 말고 잘들 지내여"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런 감각에서 나온 것이 지금 인터넷의 화두가 되어 있는 2.0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커뮤니티 사이트들이다. 처음 생긴 6degrees.com은 문을 닫고 말았지만 2003년 3월에 출범한 실리콘밸리의 프렌드스터는 불과 반 년 만에 1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돌파해 새 인터넷 시대의 총아로 부상했다. 종전의 인터넷 동호회들은 기호나 취미만 같을 뿐이지 거의 다 낯선 사람들이다. 그 익명성으로 가려진 인간관계는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고 거칠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동창회처럼 아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버추얼 커뮤니티는 오프라인의 인간관계를 연장한 것으로 그 폐쇄성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렇다. 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약점을 뚫고 연분이라는 '좁은 세상'의 인간관계를 사이버 공간에 살려 방대한 인간사슬, 광대한 인간지도의 디지로그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웹2.0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자기조직화의 증식작용을 거듭하며 번져 가는 이 '미지의 가치' 방앗간을 웹2.0의 선두주자 구글의 참새가 그냥 지나갈 리 만무하다. 프렌드스터를 3000만 달러로 매수하려다 실패한 구글은 독자적으로 28세의 젊은 사원 오큣에게 맡겨 개발자 이름을 그대로 딴 '오큣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www.orkut.com)를 만들었다. 직접 회원이 된 사용자의 실례를 보면 62명의 지인 등록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그들의 연줄을 타고 40만 명을 넘는 지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인터넷의 SNS 사이트가 세계 도처에서 돋아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천지개벽처럼 나타난 한국의 싸이월드가 인터넷 공간에 지진을 일으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국 인구 절반을 휩쓸어 소셜 네트워크로 끌어들인 싸이월드의 기적이야말로 '서너 다리 건너기'의 한국적 연분 '사이'문화가 사이버의 '싸이'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8. 사이(間) 문화가 낳은 싸이 문화 맥주는 개화기 때 서양에서 들어온 술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병 크기가 배로 커졌다. 혼자서 자작을 하는 서양 사람과 반드시 서로 술을 따라주며 대작하는 한국인의 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혼자 마시든 여럿이서 건배를 하든 서양 사람들의 술잔은 항상 자기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술잔은 너와 나 사이에 있다. 영어로 흥을 인터레스트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사이(inter)에 존재한다(est)는 뜻이니 잔은 사이에 있어야 신명이 난다. 술뿐이겠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그리고 친구 사이, 연인 사이 한국인은 '사이'에서 존재하다 '사이'에서 죽는다. 그래서 생존의 삼대 축인 인간(人間).시간(時間).공간(空間)에는 모두 사이 '간(間)'자가 들어 있다. '생각의 지도'를 쓴 리처드 니스벳의 실험 결과에도 나타나 있듯이 사물을 볼 때 서구 학생들은 개체를 보는 데 비해 아시아의 학생들은 개체와 개체 간의 관계를 본다. 그래서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인간 사이의 끈적끈적한 정분으로 풀이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시아의 부패와 경제성장의 장애요소로 중국의 콴시(關係)처럼 연고주의.정실주의를 드는 연구가도 있다. 평가를 어떻게 하든 한국의 '사이(間)'란 말을 세게 하면 '싸이'가 되어 그 순간 엄청난 인터넷의 폭발력이 생기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촌 맺기의 핵심 아이디어로 인터넷 인구의 절반을 휩쓴 싸이월드의 위력은 바로 한국의 '사이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들도 '싸이월드'를 '사이좋은 세상'이라고 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말로는 '사이'가 되고 영어로는 사이버의 '싸이(cy)'이다. 앞에서(17회) 설명한 것처럼 인터넷의 익명 관계를 오프라인의 '아는 사람'(연고 관계)으로 바꿔가는 추세로 한국은 서양보다 훨씬 유리한 풍향을 맞게 된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같은 아이디어로 출범한 '식스디그리 닷컴'(1997년)이 문을 닫게 되는 그해 (2001년) 거의 같은 시각에 한국의 싸이월드는 월간 1억 페이지뷰의 경이적인 세계기록을 세웠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조금 지난 최단기간에 이룩한 믿기지 않은 폭발력이다. 같은 비즈니스 모델인데도 한국의 '사이 문화' 때문에 배로 커진 맥주병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이' 문화가 낳은 '싸이'는 차가운 인터넷, 핏발 선 인터넷, 그리고 모두들 가면을 쓰고 광란의 춤을 추는 인터넷 카니발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가면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 그대로다. 따뜻하고 정감이 스며 있는 아름다운 인터넷, 카니발 광장은 정다운 친구를 맞이한 미니 룸이 된 것이다. 너와 나 사이를 위해 양탄자를 깔고 벽지를 바르고 신데렐라 마차같이 팬시한 실내장식 아이템들을 장만하려고 사이버 머니의 도토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한 개 100원 하는 도토리의 하루 평균 매출이 250만~300만 개로 3억원 가까이 팔려 경제적 효과도 크다. 거기에 배경음악, 스킨과 같은 것을 장만하기 위해 거래되는 싸이월드의 총도토리 수는 한국 전역의 숲에 있는 도토리 수보다도 많단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싸이질'이라는 신드롬까지 생겨났으며 일촌 맺기의 촌수는 10대의 소녀에서 젠더와 연령의 벽을 넘어 전국으로 퍼졌다. 한국 인구의 3분의 1이 싸이월드의 인간띠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문화적 효과다. 잠잘 때도 서로 손을 잡고 잤다는 끈끈한 형제애와 그 구식 자전거 기술이 인간 최초의 비행기를 날게 한 것처럼(6회) 우리의 뚝배기 같은 촌스러운 '사이' 문화가 최첨단의 인터넷 '싸이' 문화를 날게 한 것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9. 지식정보의 화수분, 지식IN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디지털 정보시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터넷 정보의 바다에선 구슬(DB)은 '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해일속(滄海一粟)이란 말 그대로 구슬보다 작은 좁쌀 알을 찾아내는 검색시장에서 패권을 잡은 것이 그 유명한 '구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구글이 한국에 오면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처럼 되고 만다. 미국에서는 인터넷 사용자의 39.8%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한국에서의 검색시장 점유율은 겨우 1.6%다. 한국 토종 1위 네이버의 68.72%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숫자다(코리안 클릭 조사 2005년 12월 기준). 물론 숫자만 가지고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네이버의 경쟁력은 검색엔진의 기술이 아니라 그 문화 마인드에 있다는 사실이다. '검색'이라 하면 구글이나 야후처럼 이미 인터넷 웹 페이지에 있는 자료(DB)들을 찾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네이버는 '있는 정보를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만들어 주는' 검색 방식을 택한다. 한글 DB는 영어로 된 자료에 비해 빈약하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콘텐트에 의존하기보다 사용자들이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면서 만들어가는 맞춤식 대화형의 '지식IN' 같은 DB 생성 프로젝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H G 웰스의 '세계의 뇌'(16회 참조)를 닮은 백과사전이 생겨나 분초 단위로 증식하면서 지식정보의 화수분 단지 노릇을 한다. 하루 평균 질문이 3만5000건, 답변이 6만5000건이라는 경이적인 숫자 뒤에는 남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지식 풍토도 가세하고 있다. '무식하다'는 게 욕이 되고 '무식이 죄'가 되는 선비의 나라에선 4000만 명이 다 선생이 되고 비평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더구나 익명사회의 인터넷 세상에서는 얼굴을 가릴 필요 없이 당당하게 무식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의 지식인은 밖(out)에서 지식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식 안(in)에 들어와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지식in(人)이 된다. 그것은 편집자가 항목(엔트리)을 정하고 권위자에게 의뢰해 집필을 하는 브리태니커형도 아니며 같은 개방 참여형이면서도 정답만을 올려 한 치의 오류라도 생기면 웹 전체가 발칵 벌집이 되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와도 다르다. 그 자원과 원천 기술은 한국의 품앗이나 계 모임처럼 서로 돌려가며 지식 재산을 모으고 공유하는 한국 전통 문화에서 온 것이다. 한마디로 IT를 RT(3회 참조)로 발전시킨 한국형 젓가락 네트워크의 산물이다. 그래서 아는 체하거나 틀린 대답을 해도 흉이 아니다. 틀린 답도 정보다. 때로는 그것이 맞는 정답보다 더 재미있고 요긴하게 쓰일 때도 많다. 네트워커들은 게임감각으로 여러 답 가운데 가장 잘 맞힌 답을 골라내 점수를 얻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필요 없는 국물은 단무지처럼 씻어 내버린다. 이를 테면 필터링 기술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국물을 그대로 두어 빡빡하지 않은 음식 맛을 낸다. 그래서 "국물도 없다"는 말은 욕이다. 틀린 대답도 삭제하지 않고 그냥 놔두어 그 빡빡한 인터넷 공간에 인간미를 돋운다. "전화 말고 휴대전화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무려 1300여 개의 해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다원적이며 복합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 가지 코드밖에 모르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똑똑한 백과사전인가.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20. 공명실 속의 인터넷 헐크 누구나 어렸을 때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큰 독이나 목욕탕 속에서 노래를 부르면 갑자기 자기 목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도밍고나 파바로티 같은 성악가가 된 느낌을 받는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이 같은 에코 체임버(공명실) 효과라고 부르는 환각작용이 일어난다. '구글'의 검색에서 와일드카드로 '*사모'라고 치면 34만8000개의 검색 결과가 뜬다. 물론 중복된 항목과 한자말의 사모(思慕)까지 합쳐진 숫자를 감안한다 해도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의 인터넷 모임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준다. 이제는 연설문이나 광고문에서 '강호제현!''사천만 동포'라는 그 구식 정형구가 사라진 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분극화(세그먼트) 사회로 접어들고 있음을 안다. 실상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혹은 무슨 일인가 좋아서 모인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봐도 인터넷 공간은 얼마든지 낯을 모르는 사람, 의견이 서로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정보의 홍수 현상이 일어나고 익사 직전의 개인들은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밀폐된 '노아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인터넷 공간은 장독 같은 좁은 공명실로 바뀐다. 환청 속에서 개인은 점점 비대화.극대화하고 과격해지면서 자기가 아는 세계로만 쏠리게 된다. 현실에서 듣던 진짜 자기 목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명가수가 된 것 같은 환상의 목소리가 자신을 지배한다. 거기에서 타자와의 상호이해가 전연 불가능한 분극화의 디지털 집단이 탄생한다. 그러한 사이버 집단은 종래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볼 수 있는 몸(자신)-가족(기업.사회)-나라-천하(세계)의 차례로 일관되게 발전해 가는 전통적인 공동체와는 전연 다른 성격을 띠게 된다. 무명의 레슬러 출신 벤추러가 3000명의 제시 네트(우리로 말하면 '벤사모') 그룹의 인터넷 힘으로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전에서 막강한 공화.민주 양당의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전자 민주주의의 앞날에 막힐 것이 없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명실 효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캐스 R 선스틴과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인터넷은 민주주의 편인가 적인가? 정치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같은 의견을 주고받고 확신하고 앵무새처럼 공명(共鳴)의 메아리를 반복하다 보면 그 목청은 점점 커지고 과격해져서 주위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예상치 않던 기회와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 광범위한 공통의 체험을 쌓아가고, 의견이 다른 타자의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시스템이다. 자기 입맛에만 맞는 정보만을 증폭시켜 주는 공명실 안에서는 그런 우연한 접촉의 기회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 결과로 중상.모략.비방.명예훼손 등 온갖 악성 루머와 괴담이 걸러지지 않은 채 헐크처럼 커져 현실 밖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넷심'이라는 여론이다. 그래서 추돌사고를 낸 티코의 젊은이가 "나 네티즌이야"라고 하자 큰 차에 타고 있던 정부 요인이 운전기사를 떠밀고 나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는 티코 시리즈 농담 신 버전도 생겨났다. 인터넷 게시판에 오르는 심판은 방청객만 있고 변호사도, 판사도 없는 단심제의 법정과도 같은 것이니 무서워할 만도 하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후원자인가 적인가. 그것은 SHELL 법칙(9회 참조)대로 인터넷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에 작용하는 라이브웨어(인간)의 성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