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심장을 거닐다] 아빌라,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도시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드리드를 뜨겁게 달궜던 더위를 한 방에 날려줄 고마운 바였지만, 저 비를 맞으며 나돌아야 하는 입장에선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비를 피해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도시를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책자를 뒤적이는데, 아빌라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아빌라는 며칠 전 다녀온 세고비아와 같은 지역인 카스티야 이 레온 지역의 한 도시(아빌라 주의 주도)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중세의 모습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성녀 테레사 데 헤수스(Teresa de Jesus, 1515-1582)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민 끝에 아빌라를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그제야 새로 온 룸메이트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보다 세 살 많은 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스페인으로 무작정 떠나왔다고 한다. 미리 스페인에 대해 공부를 해 온 것도 아니라 그날그날 발길 닫는 대로 움직일 예정이란다.
“그럼 오늘 저와 같이 아빌라 가실래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고비아에 갈 때는 버스를 이용했지만 이번엔 기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북쪽에 위치한 차마르틴 역을 향해 동행과 함께 길을 나섰다. 비가 온다고 점퍼까지 챙겨 입고 나왔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마드리드다운 더위가 느껴졌다 차마르틴 역에 도착해 자동 매표기에서 기차표를 구입한 후 기차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도 부려본다.
아빌라 역에 도착하자 마드리드와는 다르게 많게 갠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구시가지에 가려면 역에서부터 약 20여 분은 걸어야 하기에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역 앞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빵집에서 점심용 샌드위치를 사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호기심에 도로를 가로질러 빵집으로 들어갔고 덩달아 우리도 그들처럼 한 개씩 사들고 나와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는다. 초행길이라 점점 불안해졌고 급기야 앉아 계신 현지인 아저씨께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질문을 듣던 아저씨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다급하게 지금 빨리 내리라며 손짓하신다. 덕분에 제대로 내린 우리는 인포메이션에서 지도를 한장 받아 들고 성벽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아빌라의 성벽은 11세기에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무려 길이 2529미터, 높이 12미터, 두께 3미터에 달한 규모임에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외부와 통하는 성벽의 9개의 출입문 중 동쪽에 있는 알카사르 문과 산 비센테 문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산타 테레사 광장(Plaza de Santa Teressa)과 마주한 알카사르 문으로 들어가자 성벽인 듯 성벽 아닌 카테드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12세기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하기 시작해 고딕양식이 혼재되어 16세기에 완성한 카테드랄은 성벽의 일부로 지어져 성당뿐만 아니라 요새 역할도 겸했다고 한다. 이 카테드랄을 비롯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산 비센테 문 앞에는 트렌 투리스티코(Tren Turistico)라는 꼬마 관광 열차가 멈춰 서있어 편하게 도시를 둘러볼 겸 타보고 싶어졌지만 애석하게도 시에스타 시간이라 운행을 하지 않았다. 시에스타 시간보다 일찍 도착 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구시가지의 중심인 메르카도 치코 광장(Plaza de Mercado Chico)으로 향했다. 광장은 마을의 규모답게 아담했으며 인적 또한 거의 없어 고요했지만 그 나람의 소박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만난 산타 테레사 수도원(Convento de Santa Teresa)은 17세기에 수도원 개혁에 노력한 테레사 데 헤수스가 태어난 곳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카톨릭 신자들의 순례지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또한 시에스타 시간이라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계속해서 시에스타가 아빌라 여행의 걸림돌이 됐고, 마드리드의 비구름이 이곳 아빌라까지 흘러 왔는지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언니, 우리 이쯤에서 마드리드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갈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최고의 뷰포인트를 보여주는 네 개의 돌기둥이라는 의미의 쿠아트로 포스테스(Los Cuatro Postes)라는 전망대만은 꼭 가보자며 동행과 입을 모았고 우리는 아빌라 서쪽에 있는 아다하 강(Rio Adaja)을 건너 전망대를 찾아 나섰다.
어느 노부부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으니 전망대가 멀찍이 보기기 시작했고, 눈으로 보기엔 멀게만 느껴졌던 그곳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쿠아트로 포스테스는 이름처럼 네 개의 돌기둥과 그 가운데에 돌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있던 몇몇 사람들은 멋진 풍경에 매료된 듯 너나 할 것 없이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듣던 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록 먹구름이 짙게 깔려 카메라 속에 그 진면목을 담아내지 못해 아쉬웠지만, 두 눈에 깊이 간직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돌아섰다.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이 미리 예고했듯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 중 이렇게 많은 비는 처음 만나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기차역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놓쳐버렸고, 길을 물어가며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우산은 나를 지탱하기 힘들어했고, 신발은 이미 물이 들어가 양말이 흠뻑 젖어 불쾌한 기분이 감돌았다. 동행은 우산드는 걸 포기하고 방수 자켓에 달린 모자 하나만을 의지한 채 묵묵히 앞서 설었다. 비에 젖어 으슬으슬 추워진 몸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간절히 원했지만 오후 5시까지 시에스타 시간이라 그런지 겨우 도착한 기차역 주변에는 문을 연 상점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에스타의 방해로 아빌라 여행이 살짝 미완으로 남아 아쉽기도 했지만, 유독 길을 헤맸던 아빌라에서 손짓 발짓으로 친절히 도움을 준 현지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