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내 모양이---” 귀에 쟁쟁하다. 어릴 때 하도 많이 봐서 눈에도 선하다. 과꽃과 금잔화, 꽈리, 달리아, 맨드라미, 백일홍, 채송화, 코스모스와 함께 화단을 장식했다. 흔해 빠진 쑥부쟁이는 두고 작달막한 노란 들국화를 캐와 심었다. 향긋한 꽃을 어루만졌다. 담을 넘는 붉은 장미와 얼굴만치나 둥근 해바라기가 마당을 훤히 비췄다.
거기다 작은 분꽃이 귀여웠다. 아침마다 피는 보랏빛 나팔꽃은 얼마나 예뻤었나. 그 꽃들이 지금은 살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세계 각처의 꽃들이 들어와서 화려하고 아름답다. 아무렇게나 얄궂게 섞여서 시들시들 물러서고 있다. 이름도 복잡해서 알기 어렵다. 지난날 동남아 아열대에서 들어온 한때 정든 꽃들이 그립다.
채송화인가 봤더니 송엽국이고 나팔꽃인가 했더니 접시꽃이다. 꽈리는 하얀 작은 꽃보다 삼각형 붉은 열매가 더 이쁘다. 여름 석 달 피는 여러 빛깔의 백일홍은 마당 가장 자릴 가득 메웠다. 싸리 울타릴 기어오르며 피어대는 나팔꽃과 아침은 동쪽 저녁은 서쪽으로 기울다가 해지면 사그라드는 해바라기다.
담 밑으로 오글오글 붉고 노란 꽃을 한없이 피워대는 채송화가 앙증맞아라. 늦가을 찬 바람에 휘둘려 줄기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반쯤 뽑혀서도 그 누런 꽃을 흐드러지게 웃으며 피워대는 금송화가 가엾어라. 굵은 마디를 굽히면서 이리저리 휘저어 무성히 자라선 겨우 짙붉은 꽃을 수줍게 피우는 분꽃이다.
다대포 문학 모임에서 요즘 채송화와 꽈리를 볼 수 없다고 했더니, 귀한 것을 키우고 있다는 장 회장을 따라가 몇 포기 얻어왔다. 텃밭 옆 귀퉁이에다 벽돌을 쌓고 예쁘게 화단을 만들었다. 손끝에 쥘 듯 벗어날 듯 아주 작은 채송화와 오래전에 본 적이 있는 귀한 꽈리도 심었다. 바람에 쓸리고 굵은 빗줄기를 두들겨 맞아 이게 크겠나 했는데 겨우겨우 자라 어설프게 꽃을 피우게 됐다.
꽈리 서너 포기는 시들하게 살더니 붉은 열매를 맺었다. 풀 뽑고 낫으로 벨 때 뽑히고 베이길 여러 번이나 어려움을 겪었다. 이듬해 봄 올라오려나 채송화와 꽈리 언저리를 살폈다. 잡풀이 수없이 올라오는데도 이건 보이질 않다가 겨우 눈곱만한 게 쳐드니 같잖다. 씨도 하도 작아 받기 어려웠다.
어절씨구 꽈리는 막 기어 나온다 여기저기서. 지난해 빨간 열매를 묶어 벽에 달아놨다. 보기 좋고 씨로 쓰기 위해서다. 그럴 필요 없어졌다. 뿌리로 번져나간다. 동쪽과 서쪽에도 옮겨 심었다. 수십 년 보지 못했던 꽈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리 잘 번지는데 어쩌다가 그리 볼 수 없었을까.
분꽃은 작은 꽃에서 씨앗이 굵다. 무슨 단지 모양을 한 까만 것이 소복 떨어져 굴러다닌다. 그것들이 얼마나 싹을 틔우는지 무더기다. 삽으로 떠서 여기저기 옮겼다. 우악스레 자라는 게 힘차다. 큰 꽃이 피려나 했는데 조그마한 붉은 게 살짝 피니 어처구니없어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엄지발가락에 감싸선 하룻밤 묶어둔다. 여름에서 가을, 겨우내 붉은 빛이 조금씩 밀려난다. 하얀 발톱 초승달이 보이고 이듬해 봄까지 끝에 조금 남았다가 사라진다. 다니다가 눈에 띄면 뜯어온다. 아내가 들여주는 양 엄지발톱 봉숭아 붉은 꽃물은 해마다 어정칠월 동동 팔월에 들인다. 목욕탕에서 친구들이 ‘발가락이 왜 그래’ 한다. 돌부리를 걷어차서 멍이 든 줄 안다.
그 꽃을 찾아 헤맸다. 집집이 흔하던 게 없다. 기독교 야외 문인 모임 때 회동수원지를 간 적이 있다. 시골 풍경의 호수 주변 텃밭에서 봉선화를 봤다. 배추와 무를 심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꽃을 피웠다. 밭 나물 가운데 같이 심어서 키우는 것을 처음 봤다. 그냥 손톱에 물들이는 붉은 것만 봤는데 진분홍 말고 연분홍, 하얀 꽃도 있었다.
이것들이 어울려 엄청 아름답게 보였다. 빨강과 하양이 골고루 피어있고 밑에는 씨앗이 주렁주렁 달렸다. 저걸 씨 받아야지 하고 손을 댔다. 톡톡 터지면서 튀었다. 움켜쥐고 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봄에 씨를 뿌렸더니 치켜들고 빽빽이 올라왔다. 없던 꽃이 귀하긴 봉숭아가 넘쳐난다.
멀대같이 부쩍 자란 것을 한 움큼 뽑아서 가지와 토마토, 고추밭, 이곳저곳 온 밭에 마구 뜨덤뜨덤 심었다. 연약한 줄기가 ‘아이고 허리야’ 하며 스러져 누웠더니 며칠 뒤 하나둘 실실 일어났다. 바로 서지 못한 건 굽어진 소나무처럼 구부정하고 삐딱하다. 그래도 시든 것 없이 다 살아나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알고서 심은 것처럼 빨강과 하양이 골고루 섞여 있다. 밭이 걸쭉해서인가 이것들이 길길이 자라 작물을 덮친다. 옥수수도 긴 잎이 드리워져 빛을 가리자 낫을 들고 무사처럼 휘저었다. 옆 가지와 잎을 쳐서 빛이 들어오게 했다. 쪽 바른 줄기만 남겨두고 헐렁하게 솎아서 좀 미안하다. 그러다 보니 색다른 게 있다.
보랏빛이 보인다. 씨 받을 때 이런 것도 있었나. 고라니와 멧돼지가 들어오는가. 길게 둘러친 그물 넘어 엎드려 따면서 얼렁뚱땅 되는대로 해서 제대로 못 봤다. 밭에 무슨 꽃을 이렇게 심었냐고 야단인 아내에게 ‘벌레 없애 준다는데’ 둘러댔다. 말마따나 정말이지 배추벌레와 고추 노린재, 바구미, 진드기, 풍뎅이가 줄어든다.
노랑 나방이 팔랑팔랑 날면서 잎에 새끼를 낳는다. 금세 고물고물 기어 다니며 뜯어먹는데 이내 굵어지는 파란 벌레다. 고춧대 위 줄기에 매달려 즙을 빨아 먹는 노린재가 수두룩하다. 잡아 바닷물에 던지는데 손이 가면 어느새 알고 줄기 뒤나 잎에 숨다가 안 되면 그대로 땅으로 굴러떨어진다. 눈치 한번 빠르다.
정말 그럴거나. 오롱조롱 줄줄이 피어나서 흥겨움을 더하고 있다.
첫댓글 텃밭에 화초까지 부지런하십니다
저는 어제 바람에 넘어진 참깨 세우느라
한나절 보냈어요
옛날 장독대 아래 붉은 꽈리를 심어
속을 파 내고 불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봉숭아,채송화,해바라기..마음쓰이는 꽃들이죠.저 어릴때 우리동네엔 집집마다 사루비아꽃을 심으셨었는데,언제부터 전혀 보이지않는꽃이 되어버렸어요.이름부터 토종꽃이라기엔 무리지만 저 어릴적 화단에서 봐왔었던 꽃이기에 제겐 토종꽃인데..쌤~사루비아도,내년엔...
박 회장님 장독대 꽈리가 좋았지요.
참깨 넘어지니 세우기 힘듭디다.
말리는데도 장마여서 바닥에 뽀얗게 떨어져요.
성도님 사루비아를 찾아볼 게요.
우린 옛 것이 좋아 자꾸 찾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