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가 경찰을 네명이나 깔아 죽이다니...
증 언 자 : 배용주(남)
생년월일 : 1946. 3. 3(당시 나이 34세)
직 업 : 광주고속기사(현재 광주고속기사)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5월 20일 밤 광주고속에서는 시위군중의 요구에 따라 버스 10여 대를 시위대에게 지원했는데 이때 광주-남원간의 정기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배용주 씨도 차를 가지고 시위에 동원되었다. 밤 9시경 시위대원 몇 명과 광주고속 기사 김갑진 씨를 싣고 노동청오거리 부근에서부터 상무관 앞에 대기중인 군경 저지선을 뚫던중 배용주 씨는 군경들의 무차별한 페퍼포그와 최루탄 발사로 정신을 잃고 운전대를 놔버렸으나 시동이 걸린 차는 그대로 군경 저지선을 향해 내달았다. 이 사고로 광주의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됐던 함평경찰서 소속 강정웅 경장(39), 박기웅(40), 이세홍(31), 정충길 순경(40)등 4명이 차에 깔려 숨지고 현장에서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배용주 씨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사면되어 1982년 12월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광주고속 기사로 일하다
나는 전남 화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화순 춘양중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1970년 군 제대 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주로 화물차를 운전했는데 보수는 아주 적은 편이었다. 광신여객 버스 회사에도 근무했으나 소규모 영세업체라 월급도 제 날짜에 받을 수 없을 뿐더러 보수 또한 15만 원이 고작이었다.
1979년 광주고속에 취직을 했다. 광주고속은 기사들의 수가 부족해 매우 바쁘게 일해야만 했다. 그대신 큰 회사라 기사들의 대우는 아주 좋았다. 월급도 30만 원 정도 받았으므로 나는 모처럼 저축이란 것도 해보고 앞날을 구상해 보며 하루하루 희망에 부풀어 살았다.
그런데 5·18로 인해 내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1980년 이후로는 그 사건이 자꾸만 떠올라 모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차를 가지고 시위에 참여
1980년 5월 나는 광주고속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는 주로 광주-남원간을 운행했다. 워낙 바쁜 직업이다 보니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 무렵 광주의 상황에 대해 나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손님을 싣고 광주를 빠져나갈 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잠깐 동안의 시위 모습과 터미널 안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잡아가는 모습을 간혹 보는 정도였다.
5월 20일 오후 7시에 남원에서 승객 7, 8명을 태우고 광주를 향했다. 남원에서는 그때만 해도 전혀 광주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목격한 사실과 동료기사들에게 들었던 광주의 상황을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남원에서 광주를 오려면 곡성을 경유하게 된다. 평소 이 시간쯤이면 우리 회사 버스 기사들이 숙식을 하기 위해 곡성 쪽으로 빠져나오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광주에서 뭔 일이 터졌다냐'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더욱더 불안감을 느낀 것은 광주가 가까워오는데도 고속도로에 차량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문화동으로 진입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시내로는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문화동에서 승객들을 내려주고 어떻게든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가기 위해 안내원만 태우고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해 오치를 통해 광주로 들어왔다.
전남대 앞 사거리를 거쳐 광주역 부근에 오니 군인 1개 소대 정도가 진을 치고 있어 다시 유동 삼거리로 빠졌다. 거리 곳곳에는 깨어진 돌멩이가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마치 자갈밭을 지나 는 듯했다.
유동 삼거리쯤 오니 시위대가 차의 라이트를 끄고 운행하라고 했다. 나는 라이트를 끈 채로 금남로를 거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들어갔다. 회사버스 3, 4대가 터미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터미널 안에서는 회사 중역들이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내 차를 보고는 회사 상무가 '차가 없어 걱정했는데 마침 잘됐다 앞에 나가고 있는 차를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회사의 간부가 시키는 일이라 '어디 사람들이나 실으러 가겠지' 생각하고 안내원을 내려주고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도로에 너무 사람들이 많아 차들이 빠지지를 못했다. 겨우겨우 사람들이 밀다시피 하여 시내 쪽으로 따라갔다. 영문도 모르고 나왔던 나는 시위대들의 '이제 광주고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한다'라는 말을 듣고 내 차가 시위에 동원되었음을 알았다.
내 차가 경찰관 4명을 죽이다니...
밤 9시가 다 되 었는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온통 가득했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동원된 앞 차를 따라 광주경찰서 골목을 통해 MBC방송국 쪽으로 빠졌다. 내 차에는 우리 회사 김갑진 기사와 시위대원 몇 명이 탔다.
노동청 앞에서 도청을 향해 차를 돌렸다. 도청과 상무대 앞에는 군인과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미 남도예술회관 앞의 군경 저지선은 우리 회사 버스들이 뚫었는지 회사 차 몇 대가 도로에 처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계속 나의 버스를 밀다시피 해 서서히 저지선을 향해 진입했다. 군인들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가스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이 우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상무관 앞에서 가스 때문에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어 운전대를 놓고 운전석 밑으로 몸을 움츠렸다. 최루가스로 눈물 과콧물이 뒤범벅되어 정신을 잃었다. 버스는 기아가 걸린 상태로 도로 귀퉁이로 미끄러졌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 소리로 미칠 것만 같았다.
차가 멈추자 빨리 어디론가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곧바로 버스 안에 있던 몇 명의 시민과 함께 부근의 지하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먹고 밖이 조용해진 것 같아 식당 뒤의 담을 넘어 거리로 나왔다. 예전에 함께 일한 화물차 기사와 거리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계림파출소 부근의 여관에서 잠을 잤다.
21일, 어젯 저녁 일이 궁금해 상무관 앞으로 가던중 문화방송 앞에서 우리 회사의 오석구 기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오메! 이 사람아 큰일났네. 어젯 저녁에 자네 차가 경찰관 4명을 죽여뿌렀어."
"뭣이여? 그것이 뭔 소리당가? 자세히 좀 말해 보소."
그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두 다리 뻗고 잠을 잤다니......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회사로 들어갔다. 회사에는 광주가 집이 아닌 사람들이 회사 경비를 선다며 모여 있었다. 나는 마치 큰 죄인이 된 기분으로 회사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물었다. 회사 상무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말했다.
"너무 걱정마시오. 우리가 변호사를 사서 뒷받침을 해주면 6개월 정도 감옥에서 살고 나오면 될 것이오."
그러나 말이 쉽지 어찌 그런 일을 나혼자 감당하란 말인가? 나는 단지 회사의 명령으로 차를 가지고 나가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사형을 선고받고
나는 별다른 대책도 없이 답답한 마음으로 그날 이후 회사에서만 지냈다. 도망을 쳐도 어디로 칠 것이며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차라리 누군가 빨리 와서 잡아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날 내 차에 탔던 김갑진 씨는 바로 그자리에서 군인들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다른 동료기사는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5월 29일 광주경찰서 형사 2명이 회사로 찾아왔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그들에게 끌려갔다.
광주경찰서에는 5·18 관련으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있었는데 시위대들에게 밥을 해줬다고 잡혀온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는 광주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곧바로 상무대로 옮겨졌다. 상무대에서 다시 보안대로, 보안대에서 다시 광주경찰서로 넘어와 한 달 동안 조서만 쓰다가 다시 상무대로 넘겨졌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때 당시 잡힌 김갑진 씨가 모든 책임 추궁을 당하며 엄청난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지 내가 상무대에서 그를 봤을 때 그는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수사관들에게 사실 그대로 얘기했다. 그제야 비로소 김갑진 씨가 살인혐의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석방 후 수감생 활에서의 많은 고문과 구타로 병을 얻어 86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상무대 영창에서는 밤 9시가 취침시간이었다. 그런데 수사관들은 꼭 9시가 넘으면 수감자들을 불러내 그들의 말로 '작업'을 시작했다. 두들겨패고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많은 고문을 하면서 수감자들은 못살게 굴었다.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았다. 나의 참고인으로 광주고속 상무인 이두호씨와 광주고속 조합장이 나왔으나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겠는가? 결국 나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0.75평 독방에서 혁수정을 차고 지냈다. 나는 1방에 있었는데 5·18 관련자로 사형을 받은 박노정이 2방에, 3방에는 서만석 씨가 있었다.
고등법원 재판에서도 나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나는 이렇게 해서 죽는가보다' 하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찌 이런 기분을 말로써 다할 수 있으리요마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나와 같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없는 좋은 세상이라도 한번 보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법원 재판 후 허규정(5·18 당시 도청 내무담당 부위원장), 안철 씨와 함께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후 국무회의에서 박노정과 내가 무기로 감형됐고 1981년 4월 3일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가 1982년 크리스마스 때 대전교도소에서 5·18 관련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광주고속에 근무하려 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광주고속 사장이 위로금이라며 50만 원을 주었을 뿐이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아내가 광주고속 버스 회사로 찾아가자 '차를 가지고 나가라고 했지, 누가 사람을 죽이라고 했냐'며 나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고 했다.
골병 든 나의 몸을 어디에서 받아주겠는가 싶어 아내와 함께 대여섯 마지기의 농사를 짓다가 화순광업소에 들어가 막일을 했다. 석탄 채취업에 필요한 통나무를 산에서 지게로 지어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막일에서마저 3일 만에 쫓겨나다시피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5·18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점점 먹고살 길이 막막해 1984년에 운전면허증을 다시 취득했다. 그 이전의 운전면허는 교도소 복역중 자동적으로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다시 광주고속에 취직하려 했으나 회사의 고위급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후배 차를 몇 개월 운전하다 몸이 아파 그 후로는 집에만 있었다.
1988년 4월 광주고속 기사로 시험을 치른 후 지금까지 광주고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근래에 접촉사고를 일으켜 승무정지를 당해 집에 있다. 어째서 5월만 되면 모든 일이 더 안 되고 몸도 마음도 병이 들어 움직이기가 싫은지 모르겠다.
5·18을 잊으려고 해도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악몽은 씻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5·18에 대한 올바른 의미규정이 되어야만이 나도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사.정리 김정기)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휴일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