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야심찬하게(문학들)
김정원
1962년 전남 담양 출생. 2001년 《녹색평론》에 시를 발표하고 2006년 《애지》 신인상으로 활동. 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 『마음에 새긴 비문』, 『아득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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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은 광주 근교 담양의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 학교도 광주에서 마쳤다. 그리고 대안학교 한빛고에서 퇴직하고 고향에 여생의 봇짐을 풀었다. 그는 여행, 출장, 군복무 등, 불가피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평생 고향을 떠나 본 적 없는 남도 토박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남도 사랑, 이웃 사랑, 가족 사랑은 유난하리만치 각별하다. 이는 그가 영문학이나 영미시의 모더니즘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의 서정시, 특히 남도의 서정시에 몰입하게 된 배경이다.(에즈라 파운드, 엘리엇보다 예이츠, 프로스트의 시풍에 가까운) 김정원의 시 세계는 남도에 대한 천착과 남도인의 남다른 긍지가 요체다. 그 기본 정서는 자연과의 혼연일체와 사회적 부채의식이 주조를 이루는데, 전자는 곡진한 서정으로 내면화되고 후자는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외부화된다. 그리고 마침내 두 장르를 내밀한 사유의 질화로에 담아 흠집 없이 녹여낸다. 여기에서 남도 고유의 서정시는 통시적 비중과 깊이를 더한다. 권두시 「(화)접도」는 그 사실을 입증한다.
봄이 왔으니
나비 그림 한 점 보냅니다
꽃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비가 지금 내려앉는
빈 곳이 꽃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당신이
남국에서 온 왕처럼 들어서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됩니다
화창한 뜨락에서 당신과 함께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없어서
봄이 서러울 따름입니다
- 「(화)접도」 전문
화자는 한 폭의 단아한 수채화를 빌려 전통서정시의 진수를 선보이며 자연친화적 정감을 십분 발산하고 있다. 꽃은 자연의 미학적 자태와 향기를 표상하는 결정체다. 아울러 열매를 맺기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자는 나비만 그리고 나비가 내려앉는 꽃의 자리는 일부러 비워둔다. 꽃의 주가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지만 실은 꽃의 빈자리에 “당신”을 앉히기 위한 배려에서다. 꽃의 자리를 예약해 놓은 “당신”은 “남극에서 온 왕처럼” 소중한 존재다. 물론 그는 실제로 권력의 상징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적 신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그 묘연한 실체는 “화창한 뜨락에서 당신과 함께/완성된 그림을 볼 수 없어서/봄이 서러울 따름”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민주주의 때문에 봄이 와도 봄이 아닌 비상 시절, “당신”은 민주주의의 주체이면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민중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이 시는 목청이 높거나 호흡이 거칠지 않고 한용운의 「임의 침묵」처럼 지극히 서정적이다. 미흡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아픔을 누르고, 서정적 기조에 현실 개선의 리얼리티를 함축적으로 습합해 언어와 감정의 절제를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을 민중이 아니라 사랑하는 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경우, 의미의 확장성은 멈추고 단순한 연애시로 그 파생력은 급감한다.
-김규성(시인), 시집해설 「서정과 실존의 동행 그리고 근원에 대한 천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