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도 아니었다. 기차도 아니었다. 러시아 연해주 답사를 떠나는 답사팀이 몸을 실은 것은 커다란 '배'였다. 대한민국 강원도 속초항에서 러시아 연해주의 자루비노항까지, 17시간 동안을 밤새워 항해하는 '동춘페리'라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한국과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는 독특한 경험부터가 이번 답사 여행의 시작이었다.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NGO 단체를 주축으로, 아침편지 문화재단 고도원 이사장 부부와 '아침편지 사랑의 집짓기'로 잘 알려진 노블하우스의 류재관 대표 부부, 그리고 아침지기 다섯 명, 이렇게 모두 아홉 사람이 함께 동행하여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발해의 옛 땅 연해주의 우정마을을 돌아보고 고려인들이 일구어놓은 농업 현장과 실험 농장, 샤마라 해변, 그리고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러시아 답사의 주된 일정이었다.
옛 고구려보다 두 배나 넓었다는 발해의 땅, 발해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안으로만 좁혀진 시선을 밖으로 돌려, 유채꽃이 지평선을 이루고 비료도 농약도 쳐지지 않은 순 자연 그대로의 콩밭이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땅, 깨끗한 땅, 비옥한 땅, 자연그대로의 땅... 한때는 웅대했으나 아프고도 슬픈 역사가 켜켜이 밴,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이 솟구치고 있는 그 땅을 찾아 '마음의 영토'를 넓혀가는 꿈너머꿈의 여행이었다.
연해주(沿海州)... 러시아 이름같지 않아 왠지 낯설지 않은 그 곳엔 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려인'들을 빼놓고는 연해주를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늘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여전히 가슴 아픈 모습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 곳의 중심에 '동북아 평화연대'가 있었다.
그동안 여러 민족들간의 전쟁등 험난했던 역사로부터 벗어나 화해와 상생,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동북아시아를 만들고, 특히 이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앞장서서 다른 민족, 다른 문화의 집합체인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만드는 것, 그것을 꿈으로 가지고 있는 '동북아 평화연대(이후로는 '동평'이라 지칭)'.
'동평'이 5년여에 걸쳐 만든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촌인 '우정마을'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된 러시아 연해주 답사 여행에서 우리는 강제이주를 당했던 고려인들,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족들, 현지 러시아인들,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북한 동포들, 중국을 대표하는 한족들을 실제로 만나기도 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연관이 전혀 없는 듯 하지만 너무나 큰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그들이 모여 사는 곳 연해주는 만경평야의 수십수백 곱절에 이르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과 야생 콩밭, 그 넓은 영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구,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들과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듯한 인상의 러시아 남자들, 당장 쓰러질 듯 낡았지만 한 때는 무척이나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위엄있고 기품있는 건물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사실 이번 답사 여행은 몽골, 바이칼, 샹그릴라에 이은 또 하나의 특별한 아침편지 여행이 탄생될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안고 떠난 여행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섬광처럼 지나가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엔 뭔가 다르다.'
그 '뭔가 다른' 느낌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지금까지의 단순한 둘러보기 식의 답사 여행 차원을 벗어나 마치 저 멀리 꿈을 향해 가는 길에 반드시 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 때가 되어 알려주는 것 같은,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민족 혼의 시원(始源)을 본 듯 하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어차피 한 길을 가야 할 북한 동포까지를 포함하여 지금의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건너가야 할 미래의 징검다리가 바로 이곳 연해주에 있다는 생각, 그 '새로운 발견'이 '뭔가 다른' 느낌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140년에 걸쳐 강제 이주와 재이주를 통해 이곳 연해주 우정마을에 정착한 몇 안되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기억 저 멀리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아픔을 느꼈고, 그 감정은 다른 답사 여행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2004년 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이기도 한 고도원님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을 동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가슴에 담아 온 글을 '윤나라의 중앙아시아 여행스케치'란 이름으로 아침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내보냈던 기억...그때 아린 마음으로 보고 들었던 태바짐님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처절했던 삶이 다시금 가슴에 되살아났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상황이 돌변하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보며 그들의 절망이 내 절망처럼 느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던 그때의 마음이 연해주 우정마을에 재이주 후 정착해 반짝이는 눈빛으로 다시금 희망을 얘기하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작지만 분명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 이것이 나에게 이번 여행이 필연코 확실히 '다른' 여행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 것이다.
" 정말 잘 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조금 늦었다." 고도원님이 여행 중반 혼잣말처럼 하신 이 말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아직도 작은 파도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 때가 되어 다녀온 듯한 연해주, 정말 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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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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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길을 이용하기 위해 도착한 '속초 국제 여객터미널'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항까지 일주일에 세편의 배가 출항한다. (동절기에는 일주일에 두편 출항)
속초-자루비노-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뱃길안내도. 자루비노-훈춘-연길-백두산 경로가 눈에 띈다. 여름에는 많은 백두산 여행객들로 속초 국제 여객터미널이 북적거린다.
NEW DONG CHUN FERRY(뉴동춘페리).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배(1만3천톤, 총길이 133m). 답사팀을 태운 뉴동춘페리는 650명의 사람과 차량과 컨테이너까지 수송 가능한 대형 여객선이다.
동해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며 항진하는 동춘페리.
구름이 많이 껴 일몰을 볼 수 없었으나 갑판위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답사팀.
2개의 2층 침대와 작은 마루가 있는 일등실의 모습. 아침지기 최동훈실장과 박진희실장이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넓은 창으로 바다를 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
17시간을 배를 타고 도착한 자루비노항. 답사팀을 실어다 준 동춘페리의 모습이 보인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보이는 자루비노항의 외부 모습. 이곳에서 버스로 이동해서 크라스키노 세관까지 통관해야 입국에 대한 일정이 끝난다.
연해주 답사팀. 맨 앞 왼쪽부터 박노마님(고려인으로 운전을 맡음), 강은주님, 조순남님, 노블하우스 류재관대표, 고도원님, 아침지기 김구연, 안석현실장, 뒷쪽 왼쪽부터 아침지기 최동훈실장, 박진희실장, '동평' 강윤구간사. 답사팀의 또 다른 한사람인 윤나라실장은 촬영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푸른 초원을 달리다.
저멀리 지평선 끝으로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
평화로운 작은 시골 마을 풍경. 한참을 달리니 이런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전형적인 러시아 농가주택 모습. 겉보기에는 허름해 보이지만 건물도 튼튼하고 내부도 잘 꾸며져 있다.
시내로 들어서니 짧은 옷차림의 러시아 여인들이 눈에 띤다.
슬라브족들이 연해주 정착 초기에 지은 나무집들로 1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100년 전 매우 앞선 건축 기술이었고, 건물 또한 튼튼하다.
유채꽃밭이 보이자 답사팀이 멈춰섰다. 저 멀리 보이는 열차의 모습과 유채꽃밭이 한폭의 그림 같다.
이곳 러시아 땅을 둘러봐야 할 하나의 이유, 바로 이 지평선을 이룬 유채꽃밭이였다.
파란 하늘을 향해 한없이 걸어가고 있는 고도원님. 끝도 없이 펼쳐진 광대한 유채꽃밭을 걸으며 생각하고 있을 새로운 꿈과 그 너머의 '꿈너머꿈'이 궁금해진다.
답사팀이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우정마을'이었다. 'Friendship'(우정)을 연상케 하는 이쁜 이름 덕분일까. 처음 방문하는 곳인데도 왠지 모를 정이 느껴졌다.
자루비노항에서 3시간 정도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내달려 도착한 우정마을은 집이며 길들이 이제 막 정비 작업을 마친 듯한 한국의 여느 시골 마을에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겨운 동네의 모습에 모두들 '와'하며 탄성을 지르는 사이, 우리가 묵게 될 우정마을 내의 '솔빈마당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 답사팀을 맞아주신 약간 검게 그을린 듯한 동평의 대표 김현동님과 아내 주인영님의 따뜻하고 환한 환영의 웃음 덕분에 마치 시골 친척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우정마을을 실제적으로 만들어낸 주인공들, 그 분들의 꾸밈없고 순박한 웃음 덕분에 여행의 피곤함이 다 달아났다.
우정마을은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1998년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세운 것을 2004년에 동북아평화연대가 이어받아 꾸준히 공들여 만들어온 '고려인 정착촌'이다. 33개의 가옥에 고려인이 27가구를 이루고 있고, 러시아인 3가구, 그리고 한국인 가정이 2가구였다. 집집마다 무공해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비닐하우스와 청국장 제조 공간이 있었다. 이미 우스리스크에서는 이 우정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 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고려인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한국인'이라는 이름 대신 역사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몇 대째 이역만리 타지 생활을 하고 있고, '고려인' 임에도 우리말 대신 러시아말이 더 유창한 사람들. 그들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고려인 러시아 이주 14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140주년 기념관'을 돌아보며, 고려인들의 지난 역사와 오늘에 대해서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인들의 러시아 연해주 이주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63년, 쇠잔해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해 시작된 이주민이 1870년대에 8,400명, 1923년도에는 무려 12,000명이 넘었다는 러시아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 시기에는 그 숫자가 더 늘어 23만명에 이르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그 비극적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강행되었는데, 그 해가 1937년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갑작스런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예상해서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들 3천여명을 간첩이라는 누명 등을 씌워 처형했다. 그리고는 일반 고려인들에게 불시에 명령서를 전달한 후 곧바로 '라즈돌로니에'역으로 끌고가 기차 짐칸에 타게 하였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 한복판에 내동댕이 치다시피 버렸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삶은 더욱 끔찍했다. (이 이야기는 2004년 12월 16일자에 보내드린 '윤나라의 중앙아시아 여행스케치'를 참조 바람) 강제 이주 과정에서부터 정착하는 2년여에 걸쳐 죽은 사람만도 2만명이 넘었다. 토굴에서 짐승처럼 시작된 삶이었으나, 고려인들은 강인했다. 사회, 정치적으로 모든 것에 제한을 받으며 억압 속에 살면서도 중앙아시아를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킨 주역이 바로 고려인들인데,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놔도 풀이 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뒤 잘 사는 듯 했던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각기 독립하면서 또 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언어의 문제등으로 인해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연해주로의 재이주가 불가피하게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동 수단, 정착 비용 등 숱한 난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바로 이 난제들을 풀어가며 고려인의 재이주를 돕고 있는 곳이 '동북아 평화연대'이고, 마침내 우리가 방문한 '우정마을'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동평의 김현동 대표는 "구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연해주 재이주는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연해주의 하루는 길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서쪽 지평선 위에 해가 발갛게 걸려 있었다. 그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답사팀은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짙은 황토색 벽돌로 된 거의 같은 모양의 집들이 반듯반듯, 옹기종기, 깔끔하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우정로, 새마을로, 아리랑로... 한글로 만들어진 길 간판도 정겨움을 더했다. 아직은 적은 수이지만, 일단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그 부지런함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미 '안정감있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2004년 중앙아시아에서 보았던 절망감이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 저절로 '감사함'이 솟구쳤다.
특히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NGO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일신의 안위와 행복을 뒤로 한채 이곳에 들어와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며 고려인들을 위해 이 마을을 만들고, 또 재이주와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희망, 고려인의 희망, 연해주의 희망, 한민족의 희망이 이곳에서 이렇게 성큼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정마을에서의 이틀째 날 밤, 고려인 집에서 그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홉 명의 답사팀이 둘로 나뉘어 고려인 가족이 사는 집에 민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함께 상추를 뜯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또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차를 마시고 설겆이며 뒷정리를 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가족 이야기, 텃밭 이야기, 하는 일 이야기,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이야기를 나누며 얼굴은 웃고 있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뭔지 모를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 올라왔다.
모처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안방을 내주고 자신들은 거실을 택한 고려인 주인 내외분의 마음을 받아, 더는 거절 못하고 깨끗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 누웠는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신 분들이 그 동안의 오래고 고된 삶의 짐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터전인 이 우정마을에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를, 또 더 많은 고려인들이 꿈의 정착을 통해 더이상 '이주'의 아픔을 겪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2, 제3의 우정마을이 계속 생겨나길 바라고 또 바라며...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빨간 벽돌집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우정마을의 모습.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있다.
한 고려인의 집 입구. 대개 이와 같이 출입문, 대문 등이 제법 정리되어 있는 곳은 농경을 주로 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 온 고려인의 집이다.
아리랑로. 반듯한 사각형의 우정마을을 외곽으로 감싸는 네 개의 길은 '아리랑로', '우정로', '사랑로', '평화로' 로 모두 한글 이름이다.
연해주 답사기간 동안 아침지기들이 묵었던 솔빈센터. '솔빈'은 우스리스크 지역이 발해 시대 솔빈부였다는 데에서 따온 이름으로 우정마을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숙소 역할을 한다.
김현동(동북아평화연대 대표), 주인영 부부. 2003년부터 이 곳에 정착하여 오늘의 우정마을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아침편지 사랑의 집짓기'의 노블하우스에서 시공한 동평 사무실 '그루터기'. 지난해 KBS '6시 내고향' 프로의 '백년가약' 코너를 통해 류재관 대표가 직접 상주하며 지었다.
연해주 고려인들을 위한 소식지 '고려신문'과 자연농법에 사용될 각종 효소와 목초액.
한창 공부에 열중인 고려인 선생님과 러시아 학생들. 배우는 과목은 다름 아닌 한국어.
우정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러 우정 공원'.
솔빈센터의 텃밭에 조성된 비닐하우스. 상추, 깻잎, 향채 등 보기만해도 먹음직한 쌈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다.
부지런한 고려인들은 텃밭을 그냥 놀리는 법이 없다. 이 작물 저 작물 재배하다 보면 일손이 모자라는 법. 부족한 일손은 하루 150루블(한화 6천원)의 일당으로 러시아 사람들의 손을 빌리곤 한다.
연해주의 완전 무공해 야생콩에 차가버섯 진액을 혼합해 집에서 직접 발효중인 청국장.
고도원님이 청국장 가루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고 있다. 답사 기간 중 답사팀 모두가 청국장 가루를 먹었다. 다른 여행 때와 달리 속이 불편하거나 배변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가 없었다.
고려인 가정에서의 식사.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려인들과 이렇게 풍성한 식탁을 함께 할 수 있다니, 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다.
하루 민박을 제공해 준 고려인 유가이 이골님 가정에서 식사 후 기념촬영. 우측에서부터 유가이 이골, 고가이 이밀리아 부부, 류재관, 조순남 부부, 최동훈 실장.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우정마을에 아름다운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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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순야센마을로 이주한 최알렉님의 농가.
최알렉님 가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텃밭과 비닐하우스. 최알렉님은 소련 시절 '농업영웅'이었던 '김병화 농장' 출신으로 텃밭을 일구는 솜씨와 목재로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
올해 77세의 최알렉님의 장모님. 6세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후, 70년만에 다시 되돌아왔다. 70년의 애환이 그대로 남아있는 주름진 손을 고도원님이 어루만져 드리고 있다.
좌측에서부터 최알렉님의 장모, 며느리, 아들.
아시노브까 마을에 정착한 박블라디미르님 부부. 올 초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 온 가정으로 한켠에 걸려있는 태극기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아시노브까 센터에서 고려인들에게 연변 조선족 김철훈 소장(68세, 북방자연농업연구소장)이 자연농법적인 돼지사육 방법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우스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한민족문화학교. 700여명의 학생중 20%가 고려인. 한국말과 역사를 일주일에 한 차례씩 교육하고 있다.
육성촌에 있는 학교 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려인 전시관. '육성촌'은 고려인 6개의 성씨가 400가구 이상 거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강제이주 이후로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다. 액자 속의 여인은 몇달전 세상을 떠난 이곳의 마지막 고려인이었다.
육성촌 뒷동산에서 발견된 고려인 공동 묘지. 돌에 새겨진 문자에 이들의 이름과 기록들이 아주 정확히 남아 있다.
러시아 한인 140주년 기념관 2층에 있는 전시관에서 만난 조 하리똔 곡세비치님(78세). 역사 교사 출신으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 140년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셨다.
러시아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분들의 사진과 활약상이 전시되어 있다.
라즈돌로니에 기차역. 1937년 행해진 고려인 강제 이주의 시발점으로, 역사의 비극이 서려있는 곳.
지나간 역사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역 앞 노점에서 각종 먹거리를 판매하는 러시아 아주머니들.
20만 고려인들이, 이 철길을 따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애써 가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고려인 시인 김준의 시 '난 조선사람이다'. 읽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러시아의 땅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몽골에서 말타기' 행사를 진행하며 보았던 몽골 초원과는 또 달랐다. 그토록 광대한 몽골의 대초원도 휘 둘러보면 저 멀리 높고 낮은 언덕으로 둘러쳐져 그 끝이 보이는데, 연해주 땅은 아무리 둘러봐도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아 있는 지평선뿐이었다.
특히 '콩밭'은 더 장관이었다. 동평의 김현동 대표가 답사팀을 데리고 간 '야생 콩밭'은 몽골의 넓고 넓은 초원에 익숙한 나에게조차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눈앞에 펼쳐진 게 땅이 아니라 초록 바다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을 정도였다. 그 끝없는 콩밭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콩 종자를 가져와 심어놓기만 하면 비료도 농약도 필요없이 잘 자란다고 했다. 그래서 '야생 콩밭'이라고도 불리는 그 초록색 바다에 대한 놀라움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넓은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반도와 거의 같은 크기의 연해주 그 넓은 땅에 사는 인구는 겨우 200만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서울시에만 천만명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땅을 사용할 수 있는 '방식'도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돌아본 농장 하나의 크기가 12,600hr. 자그마치 3,800만평... 아직은 사회주의 체제의 연장선에 있어서 그 땅을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지만, 1ha(3,000평)를 빌리는데 우리 돈으로 연간 1천원만 지불하면 되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49년간 '임대'해 경작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희망'이 여기에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집을 구입하면(주택 등 건물은 자기 소유 등기가 가능하다) 텃밭 500여평 정도가 '무상'으로 함께 주어진다. 러시아인들은 이 곳에 자신들이 먹을 감자 정도를 심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고려인들은 그 곳에 비닐하우스 등을 만들어 최대한의 농업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연해주의 농가들 중에서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집은 거의 100% '고려인의 집'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텃밭 농사를 잘 짓다 보면 러시아인보다 몇 배의 수익이 생겨나고 당연히 많은 일손이 필요한데, 이 때 고용되는 일손은 대부분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고려인들이 농업에서 '슬라브인'을 리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잠깐이나마 '주객이 전도됐다'는 말이 스쳐갔다. 그러면서 이 땅이 과연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연해주 답사 기간 동안 고도원님께서 매일 밤 아침지기들과의 '정리 시간'마다 던지신 말씀들을 메모해 놓았던 것을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누구보다 깊이 연해주의 현실을 둘러보며 여느 답사 여행때보다 유독 말보다 생각이 많으셨던 고도원님의 말씀을 정리해 놓은 것을 다시 보니, 그 뜻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 메모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고도원님께 허락을 구하고 간략하게 정리해 아래에 올려본다.)
[6월22일 (답사 이틀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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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왔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늦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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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길에 길목이 될 것이다 - 역사의 문제, 민족의 문제, 식량의 문제, 네트워크의 길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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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의 광대한 땅덩어리, 고려인의 문제는 국가도, NGO단체도 풀 수 없는 미묘함이 있다. - 아침편지같은 곳에서 조용히 스며들어 가면서 마음의 영토를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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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점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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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돌고돌아 고려인 재정착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먹거리, 좋고 믿을 만한 음식의 농장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 -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고 현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답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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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이 안으로만 돌아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살펴봐야 한다. - 그게 비전이고 꿈너머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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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23일 (답사 셋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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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거의 자연의 땅이다. - 먼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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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땅, 깨끗한 땅, 비옥한 땅, 매우 싼땅, 자연그대로의 땅, 무한대의 땅 - 그 무한대의 가능성이 이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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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하나가 김해평야같은 넓이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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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등 다른 곳은 이미 일본, 중국, 독일이 광업권 등 모든 큰 인프라를 선점하고 있지만, 이 곳 연해주는 오로지 한국 사람만이 역사적인 아픔과 더불어 이 연해주 땅을 품고 있다. - 우리에게 절대절호의 기회의 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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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부로부터 49년 임대가 가능하고 그 안에 짓는 건물은 자기 소유가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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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만 하더라도 농가와 건물 가격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 당연하다. 부동산의 부가가치가 매우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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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빠를수록 좋다. - 아침편지 가족 중에 "나라도 가서 투자해보고 싶네. 고려인과 함께 큰 농장하고 싶네"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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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동북아 평화연대와 함께 하며 교육하고 농산물을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내면, 고려인에게, 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 그 중에 하나가 '콩'이다. | [6일24일 (답사 넷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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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음식 재료는 무공해여야 한다. - 최고의 경쟁력도 무공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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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비옥한 땅에서 비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이곳은 순 자연의 무공해 그 자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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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우리콩이 심겨지고, 연변 최고의 전문가가 자연농법으로 실험하며,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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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이 무기이다. 미래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 민족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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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콩밭을 직접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 보지 않았는가. 지평선을 이루는 콩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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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무농약 무공해 '반 야생콩밭' - '콩'이 연해주를 살리는 길이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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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적인 관심과 건강을 위해 콩을 찾아 많이 다녔다. - 한국인의 기본 식품인 두부, 된장, 청국장 등 항상 문제는 늘 '콩' 이었다. - 좀 팔린다 싶으면 중국콩으로 대체한다. - 국산콩은 상품은 좋지만, 단가가 너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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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안을 찾았다. - 연해주가 최고의 콩의 보고이다. - 이 좋은 콩을 어떻게 고스란히 한국으로 옮겨와서 아침편지 가족, 꽃마주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싼 값에 먹을 수 있게 하느냐가 숙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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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들이 차가버섯과 결합해 만든 좋은 청국장을, 제한된 수량으로나마 우선 꽃마주민에게 선보일 날이 있을 것이다. | [6월25일 (답사 다섯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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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찾아 천리만리를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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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제대로 만든 청국장을 발견한 것이 기쁘다. 오래전부터 아내와 더불어 '청국장'에 대한 관심이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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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부터 국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 청국장 박사 홍영재 박사와의 만남과 함께 다닌 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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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늘 콩이었다. - 한국에서 국산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좋은 콩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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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청국장을 직접 만드는 고려인 '또냐의 집' 방문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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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정통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여기에 차가버섯 결합해서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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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공장에서 만드는 것과 다른 맛과 경쟁력이 있다. - 자기 자신과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들이다. | [6월26일 (답사 마지막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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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무서운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임은 틀림없다. - 러시아와의 관계가 민족적 관심사의 중심에 있다. - 어떻게 우리나라와 연계해서 서로 역사적 상처를 내지 않고 시너지를 낼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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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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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현실의 불균형은 아직 주목거리다. - 러시아인 하루 인건비가 150루블인데, 김치찌개 250루블, 냉면이 400루블... - 우리로서 상상할 수 없는 불균형이 지금의 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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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발전하고 있지만 노동의 질에서는 요원하다. - 우리 같으면 한 달이면 될 공사를 3개월이 되어도 절반 수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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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럭저럭 굴러가지만, 대전환점이 반드시 다시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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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류재관대표가 우연하게 외화벌이 나온 '북조선' 사람들을 만났다. - 하루 일당을 150루블 받는 러시아인들과 달리 그 북한 동포들은 1,000루블을 받고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 게으른 러시아인들의 빈 자리를 빠르고, 열심히 하고, 손끝이 야무진 북한 동포들이 채우고 있다. - 여기에 또 하나의 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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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통일 후 북한 동포들이 나와도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땅이 바로 이 연해주이다. 협력의 자리, 매끄럽게, 부드럽게 갈 수 있도록 누군가 눈길을 보내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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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는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직접 봐야 보이고, 보아야 길을 찾을 수 있다. |
고도원님의 메모 내용을 다시금 읽어내려가면서 아직은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땅, 그러나 너무도 비옥하고 깨끗한 땅,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연의 땅, 그 러시아 연해주의 땅들이 어쩌면 자신들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자신들을 쓸모있는 땅으로 변화시켜 줄 진정한 마음의 주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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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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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끝까지 콩이 심긴 콩밭. 아무 풀이나 마구 자라는 야생 초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콩밭이다.
건강한 콩잎. 벌레 먹은 이파리조차 건강해 보인다.
콩밭매기. 끝없이 펼쳐진 콩밭에서 답사팀이 잡초를 뽑아주고 있다.
'초록 바다' 콩밭을 배경삼아 기념촬영. 가장 오른쪽(녹색 티셔츠)은 아시노브까 센터의 자원봉사자 구태희님.
순얏센 센터에서 김현동 대표가 동평의 여러 활동에 대해 직접 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다.
동평의 주된 활동내용. 고려인 농업 정착 지원 사업, 자연농업 교육, 연변 조선족과의 교류, 고려인 농가소득 증대 방안에 대해 늘 연구하고 있다.
구소련 시절 양계장으로 사용됐던 건물. 골조만 남은 사진은 구소련 붕괴후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주민들의 용돈벌이 수단으로 뜯겨져 나가 폐허로 변해버린 건물이다.
우스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농산물 도매시장의 모습.
농산물 도매시장 건물에 적혀있는 간판. 몇년전만 해도 중국인들이 상권을 잡고 있었으나 현재는 조선족과 고려인들이 큰 상권을 많이 잡고 있다고 한다.
"'신라면'도 보이네." 한 도매상의 창고 안에 가득한 상품 사이로 창고 끝까지 쌓여있는 신라면이 눈에 뛴다.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는 소매시장의 모습. 대부분의 공산품과 과일은 중국에서 수입되어 온다.
노천 탄광. 땅 속 깊이 굴을 파지 않고 석탄을 줍듯 캐는 모습이 낯설다. 그 규모가 엄청나 마치 인공 그랜드캐년을 보는 듯하다.
쑥이 지천에 널려있는 순얏센 농장 인근 호수가. 이 곳 지자체에서 동평 김현동 대표에게 어떻게든 잘 사용해보길 권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 곳을 거닐며 구상에 잠긴다는 김대표의 모습이 진지하다 |
연해주의 최대 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보고 속초로 떠날 배를 타기 위해 처음 도착했던 자루비노항으로 가는 것을 끝으로 답사팀의 7박8일 일정의 연해주 답사는 막을 내렸다.
우정마을이 있던 우스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에 라즈돌로니에 기차역에 잠시 들렀다.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막감만이 감돌던 기차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신한촌(新韓村)도 둘러보았다. 강제 이주를 당하기 전 번성했던 고려인의 집성촌이었으나 이제는 단 한 집도 남아있지 않고 기념비만이 혼자 외로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옛 발해의 기상이 웅비(雄飛)했던 고토(古土). 땅도 그대로, 그 위에 부는 바람도 그대로인데 발해인의 그 웅비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갈라지고 찢겨진 아프고도 슬픈 역사가 그 고토 위에 켜켜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가슴이 아렸다.
그런데, 갈라지고 찢겨진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어났다. 동평의 강윤구 간사가 예약한 '평양식당'이란 북한 음식점에서였다.
북한 사람이 직접 만드는 맛깔스런 북한 음식과 평양 냉면, 음식을 나르는 북한 미녀들의 '반갑습니다' 노래 공연을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즐기면서도, 여전히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지 못하는'분단의 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둘이었고, 둘이면서 하나였다.
바로 그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마음의 빗장'이 살짝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식사를 끝마치고, 북한 미녀들과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오는데, 평양식당 주인인 북한동포 김성옥님이 고도원님을 문밖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리고는 명함과 이메일 주소를 건네주며 특유의 사근사근한 북한 사투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도원선생님,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받아보는 그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저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재작년 고도원님과 함께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했을 때도 뚫리지 않았던 북한의 이메일이, 이곳 블라디보스톡 평양식당에서 처음으로 뚫린 것이었다. 고도원님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2001년에 시작되어 6년 동안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편지를 보내면서 어쩌면 지금이 가장 의미있는,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눈물의 의미를 감히 짐작해 보았다.
노블하우스의 류재관 대표님이 여정중에 우연히 만나 식사를 대접한, "통일되면 남한에서 돈벌고 싶다"던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들과의 만남도 그렇고, 평양식당의 김성옥님과의 의미있는 만남도 그렇고 이 곳이 연해주 땅이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러시아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뿐 아니라 실제 북한에 살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편지가 마음의 비타민으로 거리낌없이 배달될 수 있기를 꿈너머꿈으로 가지게 된 의미있는 러시아 연해주 답사 여행.
이 의미있는 연해주 답사를 떠나기 전날, 짐을 챙기면서 여행 가방에 유일하게 챙겨넣은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17시간 이상 배를 타고 오며 가며 읽을 요량으로 넣었던 그 책 속에서 여행 초반, 내 가슴을 치는 말을 발견했다.
"고난에 뜻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책에서 본 것 보다 훨씬 오래 전 어떤 일을 계기로 고도원님께 듣고는 어느 순간 내 삶의 '신조'가 된 '모든 것에는 뜻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것이어서 더욱 가슴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성공이든, 실패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 그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가져다 준 위로와 평안이 내 삶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평화를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어떤 연유였는진 모르겠지만, 이번 러시아 연해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땅과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통과 설움과 분노와 시대 상황 안에서의 무력함으로 전 생애를 살아온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러시아 연해주까지의 고려인들을 보면서 '고난에 뜻이 있다'는 이 말이 더더욱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140년 동안의 고난의 역사... 그 역사가 만들어 남긴 상처가 칼로 새겨진 듯 얼굴 모습에, 성격에, 문화에, 언어에, 생활 형편에, 하는 일에 깊이 박혀있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절망하는 나에게 그것만 보지 말고,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멀리 내다보라고 계속해서 나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고난은 그것을 견뎌내는 사람에게는 옥을 닦는 돌 같은 것이나, 거기 져버리는 사람에게는 망하게 하는 재난이 되는 것」이라는 책 속의 말처럼, 140년전 러시아행을 결심한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견뎌낸 고난이 '옥을 닦는 돌'이 되었기에 그 고통속에서도, 그 설움과 압박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겨내고 '바위에 나는 풀'처럼 생명력있게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고난에 지지 않은 그 끈질긴 살아냄이 다시금 이 러시아의 연해주에 '재이주와 정착'이라는 희망의 꽃을 피우고,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의미있는 단체를 움직이는 정신적 힘을 만들어내고, 드디어 러시아 연해주를 찾은 우리에게 '마음의 영토'처럼 꼭 봐야 할 것들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답사기 첫번째에 밝힌 '뭔가 다른 이번 답사의 섭리'가 바로 그 고난 가운데 있는 뜻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시종일관 일깨워주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 말이어서 그리도 내 가슴을 치고 떠나지 않았던가보다.
섭리를 발견케하고 '고난의 뜻'을 깨닫게 해준 이번 러시아 연해주 답사는 답사로 끝이 아니다.
국가와 정부의 힘만으로, 또 동평같은 NGO단체의 열정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 그 크고 의미있는 일을 위해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발견했고, 더욱 확고해졌다. '마음의 영토'를 넓히는 작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가슴 속에 옛 발해의 땅, 연해주가 이미 마음의 영토로 자리잡았기를 희망하며...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지기 윤나라 - |
-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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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유허비. 이상설선생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참석하여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해 알리고, 이후 블리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서거하셨다.
누가 먼저라 할것 없이 이상설선생 유허비 주변 휴지를 줍고 있는 답사팀.
옛 발해의 성터(내성). 1,0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수많은 발해의 유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발해역사와 발해성터에 대한 김현동대표(가운데 검정옷)의 설명을 아침지기 박진희실장(왼쪽에서 두번째)이 꼼꼼하게 메모하고 있다.
발해 절터를 찾아서... 나무와 수풀만 무성히 자라나 있다.
발해 절터에서 발견된 4개의 주춧돌.
발해 유적으로 추정되는 천년된 거북이. 2개의 같은 거북이가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이 곳 시민공원에, 다른 하나는 하바로프스크에 전시되어 있다.
1800만평 순얏센 농장 중심에 자리잡은 순얏센센터 '보금자리'에 도착한 답사팀. 이곳 농장과 센터는 대한주택건설협회(당시 회장 박길훈님)에서 동평에 기증한 것이다.
한국 젊은 청년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맨 오른쪽부터 김윤진, 전유리, 구태희, 강윤구 간사.
이 곳 '보금자리'에서는 고려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도 열고 있다. 10~15세 학생 19명이 고려인 역사와 농업, 한국어 교육을 받는다.
종이접기. 10~15세 19명의 어린이들이 자원봉사선생님들과 종이접기 수업을 하고 있다.
"잘 만들었죠?" 한 고려인 아이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랑하고 있다.
순얏센 센터 앞마당. 소박하지만 자연과 잘 어우러져 편안한 공간이다.
순얏센 센터 뒤편으로 나 있는 산책로. 나무와 풀과 흙길이 '걷기명상'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꿈너머꿈' 강연. 동평의 스탭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예정에 없던 고도원님의 특별 강연이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꿈을 이루면 행복해지지만, 꿈너머꿈을 가지면 위대해집니다." 고도원님의 얼굴에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강연 후 간담회에서 노블하우스의 류재관님(가운데)이 동평 김현동님(검정색 상의)의 손을 꼭 잡고, 그동안의 인연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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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라 해변. 우스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해변가로,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샤마라 해변 근처에 새로 지어진 짐추스나 호텔. 러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휴양, 숙박시설이 깔끔하게 갖추어져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블리디보스톡의 모습.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몇 척의 군함은 이 곳이 러시아의 군사요지임을 말해준다.
블라디보스톡의 시내모습. 고풍스러운 러시아식 건물들이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듯 하다.
국내 유명 기업의 광고 간판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역 근처의 레닌 동상. 비둘기 두 마리가 머리와 손 끝에 앉아 놀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 중심의 '혁명 광장'. 소비에트 용사들을 위한 기념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잠수함 박물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1대의 독일 선함을 침몰시킨 것으로 유명한 소련 잠수함.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잠수함 박물관 내부 모습. 전투 상황들을 재현한 물품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톡 역.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시베리아횡단 열차의 시발역으로, 1909년에 지어졌다.
블라디보스톡 역사 내부. 천정의 벽화는 모스크바(왼쪽)와, 블라디보스톡(오른쪽)을 상징한다.
최초로 시베리아를 횡단했던 증기 기관차. 류재관대표(아래)와 아침지기 안석현실장(위)이 열차에 올라보았다.
자연사 박물관(아르센에프)에 전시된 '발해의 지도'. 연해주와 만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
발해 원주민들. 이목구비가 우리 조상과 닮아 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이 이 곳 신한촌에 결집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이 곳 관리자인 '연해주 고려인 문화재단' 단장 이(李)베체슬라브님(오른쪽)이 설명해 주고 있다.
"발해의 땅, 고려인의 혼을 기리며... 한민족의 꿈과 '꿈너머꿈'을 찾고자 방문하고 이곳에 흔적을 남기다."
평양식당이 자리잡고 있는 건물 위에 태극기, 오성기, 러시아국기, 베트남국기,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있는 북한 음식점 '평양식당'. 식사 도중 '반갑습니다' 노래로 환영 인사를 하는 북한 아가씨들.
최초의 '북한 아침편지 가족'.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 아침편지를 보내달라며 이메일 주소를 넘겨주었던 평양식당 주인 김성옥님과 고도원님이 평양식당 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김성옥님, 아침편지 잘 받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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