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사문이 되기 위해 입산한 행자들이 행자교육원에서 올바른 수행자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하고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욕망 집착 버리고 행복을 얻는 ‘출가’
자유자재 경지에서 중생구제 원력 ‘실천’
출가(出家)는 세속을 떠나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진일보(進一步)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속(俗)의 세계와 성(聖)의 세계가 다를 수 없지만, 사바의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대자유인(大自由人)의 세상에 진입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고타마싯다르타가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고행의 길에 들어선 출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는 12일 출가재일을 앞두고 출가의 진정한 의미와 그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일어나 많은 이야기들을 고전(古典)과 경전, 일화 등을 참고해 살펴보았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 혜능(慧能)스님은 출가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밝혔다. 신출가(身出家)와 심출가(心出家)이다. 신출가는 부모님 슬하를 떠나 세속의 광영(光榮)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심출가는 세속에서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안정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을 찾는 것이다. 몸만 집을 나섰다고 출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음까지 예토(穢土)의 욕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몸과 마음이 세속을 떠나 진리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 ‘진정한 출가’라는 가르침이다.
고려시대 탄문(坦文, 900~975) 스님은 출가할 당시 “뜻은 세간의 진로(塵勞, 번뇌와 같은 의미)를 여의는데 있다”면서 “자취를 치문(緇門, 삭발염의와 같은 뜻)에 의탁하고, 마음을 금계(金界, 불문에 들어서는 것)에 의거할 것을 발원한다”고 사문이 된 이유를 밝혔다. 탄문스님의 모친 또한 “내생(來生)에는 나를 제도해줄 것을 원할 뿐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며 불문에 귀의한 아들을 격려했다. 어찌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이 집을 버리고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세속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아가 중생구제의 원(願)을 실천하기를 기원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세속의 행복을 과감히 버리고 출격장부(出格丈夫)의 길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다. 중국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464 ~ 549)가 사신(捨身) 공양으로 출가했으며,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 ~ 540) 과 진흥왕(眞興王, 534~576)도 왕업을 성취한 후 출가해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기메 국립아시아 미술관에는 ‘양무제의 삭발례’라는 벽화가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양무제는 불연이 깊었다. 평생 네 번의 출가를 시도했다고 하며, 그가 치세(治世)할 당시 양나라는 중국 남조(南朝)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양무제의 별칭이 ‘불심천자(佛心天子)’였던 것도 그의 깊은 신심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불가에 전해오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은 양무제가 세상을 떠난 황후 치씨를 위해 편찬한 참회문이다. 양무제는 중국에 불법을 전한 달마대사와 인연이 깊었고,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는 등 부처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공헌했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집필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아들 법원(法源)스님 에 대해 쓴 <사자삭발재소(捨子削髮齋疎)>에는 출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한기문 경북대 사학과 교수의 <고려시대 승려 출가 양상과 사상적 배경>에 인용된 <사자삭발재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사랑하던 자식을 떼 내어 저 계단(戒壇)에 바치니, 수염을 깎는 칼을 따라 연운(煙雲,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이 텅 비고 어깨에는 새 가사를 걸쳐서 산수가 환히 드러납니다. … 한 마음의 정결한 정성을 나타내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인자한 바름을 멀리 퍼뜨리고 지혜의 그늘로 널리 가호하사 … 정각의 몸을 이룩하게 되어 유일한 참된 경계에 노니시며, 나아가선 고해(苦海)에 헤매는 모든 중생까지 함께 자항(慈航, 중생을 자비심으로 구하는 일)에 의지하기를 원하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출가를 바라보는 ‘늙은 아비’의 심정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이규보는 스님이 된 아들이 마침내 정각을 이루어 자유자재의 삶 속에서 중생구제의 길에 나서길 간절히 기원했던 것이다.
원효스님은 “마음의 애착을 여읜 이를 사문이라 이름하고 세속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難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고 했다. 초기경전에서 ‘출가의 공덕과 이유’를 밝힌 부처님의 육성이다. 동국역경원의 번역을 참고했다. “집에서 사는 것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먼지가 쌓이는 생활이다. 그러나 출가는 넓은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 출가한 것이다. 출가한 다음에는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입으로 저지르는 나쁜 짓도 버리고 아주 깨끗한 생활을 하였다. … 출가했다. 그것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욕망에는 위험이 있으나, 출가는 안온하다는 것을 알아 힘써 정진한다. 내 마음은 다만 이것을 즐기고 있다.”
희로애락 등 ‘고통의 바다’인 현실을 부정하고 ‘집을 나서는 것’이 바로 출가이다. 하지만 출가가 현실 도피의 수단은 아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 용맹정진해서 얻은 깨달음의 결과를 중생에게 회향할 때 출가의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부처님의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을 앞두고 돌아본 ‘출가의 정신’은 개인 차원의 깨달음 성취에 머물지 않고, 그 결과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에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사진> 프랑스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무제 삭발례’ 벽화. 13세기말에서 14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3m×1.3m.
■ 스님들의 출가변(出家辯)
“생사를 벗어나 ‘군생’을 이롭게 한다”
스님들의 출가 이유 또한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교화한다)의 ‘큰 뜻’에서 비롯되었다. 스님들의 출가변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구류(九流, 중국 한나라 때 분류된 제자백가의 아홉 유파)가 답답하여 입도(入道, 불교에 입문)한다.” 무염(無染, 801~888)스님
“제자백가(題者百家)를 두루 익힌 후 불교 경전을 보고 출가하게 됐다.” 대통(大通, 817~884)스님
“출가하여 망극(罔極)한 은혜를 갚겠다.” 행적(行寂, 832~916)스님
“일념(一念)의 복(福)이 다생(多生)에 미치는 것을 보고 출가하게 됐다.” 진관(眞觀, 912~964)스님
“출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황은(皇恩)과 불은(佛恩)을 일시에 갚겠다.” 진정(眞靜, 1206∼?)스님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인 삼계(三界)를 벗어나 군생(群生, 백성.중생)을 이롭게 하겠다.” 나옹(懶翁, 1320∼1376)스님
■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 出家詩)
곳곳이 총림이요. 쌓인 것이 밥이거니 대장부 어디 간들 밥 세그릇 걱정하랴.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알지 마소. 가사 옷 얻어 입기 어려워라.
이내 몸 중원천하(中原天下) 임금 노릇하건 만은 나라와 백성 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인간의 백년 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풍진(風塵) 떠난 명산대찰 한 나절에 미칠 손가.
당초에 부질없는 한 생각의 잘못으로 가사 장삼 벗어 치우고 곤룡포(袞龍袍)를 감게 됐네. 이 몸을 알고 보면 서천축(西天竺) 스님인데 무엇을 인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자라나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내라 더니 눈 한 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백년의 세상 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대우씨(大禹氏) 구주 긋고(劃定)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진시황(秦始皇) 육국 먹자, 한태조(漢太祖) 새 터를 닦았네.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자손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그만 하소. 수 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이 동서남북 사방에 한줌 흙으로 누워 있네.
올적에는 기뻐하고 갈 적에는 슬퍼하네. 속 없이 인간세에 와서 한 바퀴를 돌단말가. 애당초 오지 않았으면 갈일 없을 텐데 기쁨이 없을 텐데 슬픔인들 있을 손가.
나날이 한가로운 내 스스로 알 것이라. 이 풍진 세상 속에 온갖 고통 여의고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몸 위에 입는 것은 누더기 한 벌 원이로다.
사해와 오호에서 자유로운 손님 되어 부처님 도량 안에 마음대로 노닐세라. 세속을 떠나는 일 쉽다 말을 마소. 숙세(宿世)에 쌓아 놓은 선근(善根)없이 아니 되네.
18년 지나간 일 자유라곤 없었도다.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더냐.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천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 할 것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