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切磋琢磨), 통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총리 통역 하려면 총리 아이큐는 돼야 해!”
사극 드라마의 한 장면. 고려인 태왕이 중원을 가로질러 오랑캐들과 맞닥뜨렸다. “너희는 머시기냐?” “우리는 거시기다, 너넨 뭐냐?” 이즈음 고개를 쳐드는 실없는 궁금증. ‘그런데 쟤들, 동네도 먼데 말은 어떻게 통했지?’ 통역사는 매춘부와 더불어 인류의 가장 오랜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 ‘통역사’ 하면 유명 인사를 수행하는, 잘 차려입은 프로페셔널한 워킹우먼이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통역사로 활동 중이거나 통역사를 꿈꾸는 통역대학원생들이 언어와 언어를 잇는 가교가 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들려줬다. 그 사연들을 가상의 통역대학원생 ‘수영’을 내세워 재구성했다.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을 위해 26일 오후 프랑스 파리 팔레 드 콩그레에서 열린 제142차 BIE총회에서 배유정씨가 한국 프리젠테이션(PT)의 사회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STEP1
통역사 되기로 결심하다
“엄마, 나 통역대학원 갈래.”
“응?”
“통역대학원 있잖아. 통역사 되려면 가야 하는 곳.”
“왜?”
나, 이수영은 멀쩡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 소리 들으며 상위권 대학 영문과에 진학했고, 빈틈없는 준비와 약간의 운으로 바늘구멍이라는 취업시장도 무난히 뚫었다. 사회생활 첫발을 디딘 곳은 외국계 기업 물류팀.
첫해까진 ‘해피’했다. 새로운 일상이 주는 기쁨과 배워야 할 일더미에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돈 버는 재미와 쓰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송장(送狀) 쓰고 전화 체크하고…. 화석화한 직장생활에 ‘원래 그런 거야’라는 위로도 언제부턴가 와 닿질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단순반복 업무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입사 2년차에 접어들 무렵. 매일아침 눈뜰 때마다 침대 밑으로 푹 꺼져 지구 밖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을 만큼 슬럼프가 심각해졌다. 그리고 오래전 마음속에 접어뒀던 꿈을 꺼내보았다.
동시통역사. 학부 시절 동시통역사 직업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직업군별로 성공한 선배들이 와서 직업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나는 이렇게 준비해서 불가능이란 산을 넘었다”는 유의 이야기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뭐 그런 자리였다. 초등학교 3, 4학년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내 영어실력은 유려하게 구사하기엔 약간 부담스러운 수준. 어려운 주제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영어를 잊지 않기 위해 꾸준히 ‘비즈니스 영어’ ‘고급영어회화’ 등의 수업을 들어왔다. 그런 내 마음을 잡아끈 건 국제무대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 인사의 소통을 책임지는 그 선배의 모습이었다.
“통역사는 연사가 말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청중, 또는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긴 대화 내용의 핵심을 뽑아내 외국어로 표현해야 하지요. 해당 분야 지식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늘 외국어실력을 되새김질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깨어 있는 직업입니다.”
그의 말이 달콤한 설득으로 다가와 ‘콩콩’ 심장을 울렸다. 회사생활과 공부를 병행할 것인가, 공부에 ‘올인’할 것인가. 부모님, 친구는 물론 어학원 강사, 선생 통역사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정말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리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때는 12월. 통역대학원 시험이 있는 내년 11월까지는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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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2
“언어는 ‘철판’으로 하는 거야”
학원에 갔다. 최다 합격생수를 자랑하는 강남 S어학원이다. 수업을 듣기에 앞서 결정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았다. 어떤 통역대학원(통대)에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과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이 ‘투톱’이다. 1979년 국내 최초로 개원한 외대 통대는 그간 한영·한불·한독·한노·한서·한중·한일·한아 8개 학과 1800여 명의 통역사를 배출했다. 두 대학 외에 선문대와 서울외국어대에 통번역대학원이 개설돼 있지만, 규모와 역사에서 아직은 두 대학이 단연 선두를 달린다. 한영과의 경우 매년 15~20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 일단 학원 관계자와 상담을 하기로 한다.
“이화여대와 외대 입시 요강이 많이 다른가요?”
“완전히 다릅니다. 일단 1차 시험에 외대는 단답형 문제가 출제돼요. 총 100문제가 나오는데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숙지하면서 준비해야 하지요. 독해, 한자, 문법, 띄어쓰기 등 한국어 시험도 치러야 하고요. 반면 이화여대 1차 시험은 영어 에세이예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영어로 논설문을 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2차 시험은 외대는 번역, 영어·한국어 에세이, 영어 구술시험 3가지가 포함되고, 이화여대는 한-영 순차통역 시험을 치러야 하지요. 외대 입시가 이화여대에 비해 다소 복잡하지만 본인의 특성과 강점을 고려해 판단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이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원래 이것저것 끼적이는 걸 좋아하는지라 메모리 위주의 문제보다 에세이의 매력이 컸다.
일단 ‘골인’을 위해 철저히 시험유형에 맞춰 준비하기로 한다.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고시(‘통역고시’라 치고)가 그렇듯 장수생이 되면 ‘고시 수렁’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소문처럼 떠도는 평균 준비기간은 1년8개월. 10개월 안에 ‘쇼부(승부)’를 본다는 계획을 잡고 전략을 짰다.
내가 공부해야 할 부분은 영한통역, 한영통역, 그리고 에세이. 긴 지문을 요약해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내가 구사해야 할 언어는 ‘막말’이 아닌 정제된 고급문장이다. 일단 6월까지는 단어, 문장, 구를 외워 어휘력을 늘리고, 8월까지는 한국어 뉴스 따라 읊기, 영어 연설문 외우기에 주력하기로 한다. 물론 영한, 한영통역 및 에세이 작성을 포함하는 학원 수업과 함께.
돌아온 수업시간. 학원 강사들 모두 통대 출신으로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다.
“이 수업은 영한 순차통역, 한영 순차통역, 문장구역까지 전방위로 이뤄집니다. 국내외 신문·잡지 등의 소스를 활용해 정치, 경제, 문화, 연예 등의 주제를 아우를 겁니다. 아시죠? 영어만 잘해서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는 거.”
수업은 발표 위주로 진행됐다. 지문을 듣고 난 뒤 바로 영어로 옮겨 발표해야 한다.
‘동물도 남을 의식할까. 동료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보고 듣는지 알까.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감정이입은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왔다. 남의 감정을 이해하고 동감하는 능력은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며, 인간만이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다고 간주했다….’
강사가 읽어준 지문을 듣고 바로 영어로 옮겨야 했지만 나는 입 없는 사기주전자처럼 굳어버렸다. 받아쓰라면 일필휘지일 것 같은데…. 일단 ‘메모리 스팬(기억의 범위)’이 부족했다. 길게는 5분가량 되는 지문을 구성을 잡아 기억하는 훈련이 돼 있질 않았다. 여러 학생 앞에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버벅’댄 뒤 창피하고 발표가 부담스러워 학원가기가 꺼려질 만큼 절망했다. 책상에 코를 푹 박은 내게 강사가 한마디 던졌다.
“언어는 ‘철판’으로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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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3
정년과 차별 없는 ‘전문직 프리랜서’를 향해
학원 수강생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며 틈틈이 수업을 듣는 사람,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접었다 재기를 꿈꾸는 사람, 대학 학부생 등등. 외국어, 경영, 이공계, 음악 등 전공도 각각이다. 연령대도 종잡을 수 없지만 직장 경험이 있는 20대 후반, 30대 초반 학생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어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영어공부를 해왔다는 것.
또 학원생 대부분이 여성이다. 일전에 언어학을 전공한 교수가 “음성학상 여성과 남성의 높이가 다른데 흡수범위가 여자 쪽이 크다. 즉, 생물학적으로 언어감각이 좋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들이 공들여 쌓은 저마다의 기반을 접고 ‘통대입시반’을 택한 건 프리랜서, 전문직 고소득, 여성 위주로 돌아가는 분위기, 그리고 정년이 없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다.
두어 번 시험에 떨어지고도 마음을 추슬러 재도전하는 이도 많다. 학원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 영주도 재수생이다.
“졸업하고 1년 동안 백수생활하면서 준비했는데 1차 시험에서 떨어진 거야. 집에서는 반대했지. 사법고시도 아닌데 뭘 2년씩 시간을 들이냐고.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던 차에 학원을 찾았어. 여전히 이어폰 귀에 꽂고 공부하는 사람들과 ‘한번 더 하면 붙을 수 있다’는 강사의 말에 힘을 얻어 다시 도전하게 됐지.”
영어 실력이 탄탄하고 평소 박학다식한 사람들은 더러 수개월 만에 붙기도 한다. 출발점이 다르기에 준비기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법학을 전공한 친구는 작년에 학원에 얼굴 몇 번 비추는가 싶더니 합격했더라.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나와 영어가 유창하거든. 한국어, 영어 모두 언어능력이 탁월하고 평소 책을 많이 읽으면 시험 유형만 익혀도 합격하기가 수월한가봐”라고 영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지만 네이티브라도 한국어가 부실하면 좋은 성적을 받기 힘들다. 특히 외대는 한국어 시험과 한국어 에세이 시험이 있기에 더 그렇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번 창피당하고 혼나던 수업과 스터디 6개로 굴러온 10개월의 세월이 머릿속에서 활동사진처럼 넘어갔다. 무엇보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심정적으로 의지가 됐던 건 ‘스파(스터디 파트너)’들이다. 통대 공부는 한 사람이 연사가 돼 지문을 읽고, 한 사람이 다른 언어로 통역하며 서로 실력을 평가해주는 형식이라 스파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또 논리, 문법, 어휘, 시제, 한국어 등 스터디 멤버마다 장점이 달라 서로 보완되는 부분이 크다.
드디어 시험. 1차 에세이 시험 주제는 ‘KBS 시청료 강제 징수에 대한 찬반론’. 오만 가지 주제로 에세이를 연습했지만 하필이면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주제다. 그래도 논리가 중요하다는 조언을 위로 삼아 꼼꼼히 적어내려 갔다. 1차 에세이 시험을 잘 못 봤다는 생각에 2차 시험까지 남은 1주일 동안 좌불안석으로 지냈다. 틈틈이 스파들과 시험대형으로 앉아 ‘아이컨택트’를 연습하며 대비했다. 실제 상황에서는 긴장돼 단순한 언어만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언어는 간단하게 사용하되 퍼포먼스를 살리는 쪽으로 전략을 짰다.
아무래도 구술시험을 망친 것 같다. 발표까지 흰 약처럼 쓰디쓴 시간을 견디던 중 예상외로 낭보가 날아들었다. 합격이다. 야호!
STEP4
팔방미인이 돼야 하는 이유
한영 통역학과 입학생 총 33명은 10여 명씩 세 반으로 나뉜다. 일정한 입학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고 매해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이화여대는 20~40명, 외대는 40~50명(한영과 기준)을 선발한다. 이화여대는 통역과와 번역과를 나눠 선발하는 데 비해 외대는 1학년 말 시험을 통해 국제회의통역(동시통역) 전공과 번역·순차통역 전공으로 나눈다.
대부분 동시통역과에 진학하길 바라지만 시험이 까다로워 국제회의통역과와 번역·순차통역과에 가는 비율이 4:6 정도 된다. 외대에는 1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한다고 한다. 까다로운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당해에 졸업하는 비율은 양교 모두 40~50%. 시험에 떨어지면 수료자로 남거나 이대는 졸업 후 2년, 외대는 3년까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반 분위기가 2년을 좌우한다. 서로 독려하며 건강한 경쟁을 하는 반은 다 함께 졸업시험에서 웃고, 그렇지 못한 반은 함께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사이좋게 지내라.”
교수들이 늘 강조하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시간에 자기 실력을 드러내 보이며 평가받다 보면 그 스트레스가 동기들을 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2년 동안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졸업할 즈음에는 자매같이 되어버린다. 한중과 3학기에 재학 중인 친구 경은이는 “특히 프리랜서로 나가 필드에서 활동할 때는 일을 알음알음 넘겨주고 소개하는 시스템이라 동기인맥은 더없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입학 후 한 달은 그야말로 아마존 정글이었다. 학원 다닐 때는 합격을 위한 공부만 하면 됐지만, 이곳에는 ‘상한선’이 없다. 도망갈 구멍도 없고 적당히 실력을 포장할 수도 없다. 론치(launch)를 라운치로 발음하는 정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디테일까지 완벽해야 한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잊고 있던 “학원 다닐 때보다 공부량이 엄청날 것”이라는 선배들의 으름장을 아프게 되새겨야 했다. 밤낮없이 영어, 통역 스킬, 상식 3가지를 동시에 연마하는 치열한 일상이 시작됐다.
1학년 수업은 순차통역, 통번역입문, 지역입문의 공통과목과 토론, 작문, 문장구역 중 1가지를 선택해 들어야 한다.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지만 그 가운데 상식이 특히 신경 쓰인다. 여러 언어가 섞여 통용되는 유럽 국가의 경우에는 한 분야만 전문으로 해도 통역사 활동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 모국어인 A언어,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가 가능한 B언어, 능동적으로 구사할 순 없지만 이해가 가능한 C언어 3가지를 함께 하는 통역사가 많은 이유다. 그러나 수요가 적은 우리나라는 한 분야만 특화해서는 사실상 일거리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경제연구소 주간보고서, 위내시경학, 초파리유전자 등 우주를 넘나드는 모든 주제를 아울러야 한다. “총리 통역을 하려면 총리 아이큐는 돼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렇게 배경상식을 탄탄히 하기 위한 수업이 영미지역입문이다. 중국 왕조, 축구, 물리, 수학 등 33개 주제를 한 학생이 맡아 영어로 발표해야 한다. 예컨대 야구라면 그에서 비롯된 용어들, 선수 이름, 야구 규칙 등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정리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과목으로 외대는 주제특강을 통해 경제, 금융, 법률, 생물,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의 지도적 인사를 초빙해 직업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해당 분야에 대한 견문을 넓히게 하고 있다.
순차통역 수업. 책상 위에는 빈 연습장만이 우두커니 주인을 노려보고 있다. “자, 시작한다”는 교수의 말에 모두들 ‘각’을 잡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순차통역 시간엔 연사가 읽어주는 텍스트를 곧바로 영어로 옮기는 반면 동시통역은 각자 부스에 들어가 동시에 테이프에 녹음을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The former President gave an unprompted and error-filled defence of Hillary Clinton´s false claim that she had landed under fire in Bosnia during a 1996 visit, just as the damaging issue was dying down….’
모두 연사의 발표를 들으며 손으로 빠르게 기호를 적어내려갔다. 예컨대 ‘지원하다’는 의미를 살려 ‘ ’, ‘인수합병’은 company가 결합한다는 의미로 ‘ ’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내려오는 기호 족보가 있지만 정해진 규칙은 없다. 한글, 영어 상관없이 clue(실마리)가 되는 나만의 기호라면 무엇이든 좋다.
STEP5
나 영어 잘하는 줄 알았는데…
“미국 정치에 대한 상식이 있다면 이해가 빨랐을 거예요. 참, 기록할 때는 모르는 부분이 나와도 몸짓을 의연하게 가지세요. 여러분처럼 고개 갸우뚱하고 볼펜 빙빙 돌리며 ‘잘 모르겠다’는 티를 내면 청중도, 연사도 불안해져요. 자, 이수영씨가 한번 통역해보죠.”
우리나라 동시통역사 1세대 임혜진 교수님. 평소엔 더없이 인자하지만 강의할 땐 잘 벼린 칼날같이 매서운 분이다.
“음…전직 대통령이 음…자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잘못된 주장에 방어를 했는데….”
이런, 학원 다닐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열심히 적은 기호들은 A4 용지 기준 한 페이지가량 되는 내용을 기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발표 뒤 이어지는 ‘크리틱(critique)’ 시간.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가만히 ‘처단’을 기다렸다.
“pause(멈추는 부분)가 너무 많았어요. 빠진 내용도 많았고요.”
“과감하게 세부 내용은 빼고 주요 내용만 짚은 건 좋았어요. 그런데 뉘앙스가 잘 안 살았어요.”
“일부 단어가 어색했어요. ‘종속자’는 ‘포로’로, ‘외부인’은 ‘이방인’으로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요.”
한바탕 학생들의 크리틱이 지나간 뒤 교수님께서 한마디하셨다.
“방금 네가 한 건 통역이 아니라 떡이다.”
순간 교실 전체에 ‘쌩’ 찬바람이 스쳤다. 핑 돌던 눈물도 기가 눌려 쏙 들어가버렸다. ‘떡’의 후유증은 컸다.
지난해 한일과를 졸업한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수년을 일본에서 지내 일본어가 유창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난 내가 네이티븐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어디 가서 네이티브라는 말을 절대 못 해.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모르는 표현, 단어, 구문이 너무 많은 거야. 한국말도 달리는 것 같고.”
우울한 마음에 동기들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학원 시절부터 스터디를 같이 하던 드림팀이다.
아기 엄마 세미 언니 : 수영아, ‘떡’ 얘기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실력 우린 다 아니까.
동갑내기 친구 희정 : 그래, 그 말씀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던진 경고 메시지일 거야. 초기에 군기 잡자는 의도로. “수업을 듣다 보면 본인 언어 실력에 무너지게 되는데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예방주사 놓던 교수들 얘기, 이제 이해가 간다.
나 : 준비할 때는 하고 싶은 공부 한다는 기분에 막막하지만 즐거웠는데, 지금은 툭하면 입에서 ‘힘들다’ ‘죽겠다’는 말이 나와. 꼴찌 된 기분, 바보 된 기분, 창피한 기분…. 유급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들고. 통대는 왜 왔을까….
희정 : 음. 그래도 차차 적응하고 다 졸업들 하잖아. 난 통역 자체가 좋더라고. 내가 누군가의 소통을 책임진다는 거.
세미 언니 : 통대 나오면 그게 하나의 전문자격증이 될 것 같아서 왔어, 난. 사실 요즘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잖아. 그런데 통역사가 꿈이 아니라면 굳이 통대를 올 필요는 없는 것 같아. 통대 수업은 언어보다 통역 스킬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발음, 문법을 바로잡아주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고. 그런 수업 시스템을 감수할 마음이라면 통대만큼 하나의 언어를 깊고 넓게 마스터할 수 있는 곳도 없지.
일상이라는 자전거는 자괴감을 바퀴 삼아 그렇게 굴러갔다. 매일 순차와 동시통역 스터디 하랴 수업준비 하랴, 하루가 짧다. 스파는 순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각자 애용하는 표현이 달라 교류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STEP6
느린 걸음으로
“지금은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게 힘들지라도 현장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부분이에요. 통역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노출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현장에서 자기 실력을 청중에게, 연사에게 바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학교와 동기와 선생들을 충분히 활용하세요.”
교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을 꿰뚫는 것 같다. 괴롭거나 지치거나 휴학하고 싶거나…심사(心思)가 새로운 페이지에 접어들 때면 힘이 되는 한마디를 무심하게 툭, 던져놓는다. 이런 위안이라면 ‘떡’이라는 소리는 몇 번이고 들을 수 있다.
수업은 보통 교수들이 진행한 기업, 관공서 등의 통역 자료를 활용한다. 배경지식 외에 분야별 트렌드, 예컨대 한일관계의 최근 흐름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자료가 도움이 된다. 이따금 들려주는 “영어를 영어로 재구성해 옮겼다”거나 “마이크를 끈 채 통역했다”는 등의 실수담, 그리고 퍼포먼스와 미팅 때의 에티켓 같은 경험담도 현장감각을 익히는 데 더없이 좋다.
수업 중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충분히 고민하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예컨대 나열되는 예문이 많을 때는 묶어서 처리할 것인지, 대표적인 한 가지만 얘기할 것인지, 구조는 어떻게 잡고 시제는 무엇으로 통일할 것인지 등을 잡고 들어가야 통역할 때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어느덧 1년. 구조가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논리력도 향상되는 것 같다. 방학 때도 통번역 아르바이트다, 스터디다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었다. 발표도 예전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해졌다. 지식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올림픽 최초 여성 참가자’ 따위의 주제로 동기들과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다반사니 관심사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흘려버리던 이야기들을 분석적으로 듣고 머릿속으로 가지를 쳐 내 언어로 표현하는 습관도 생겼다.
“프리랜서는 사실 인증시험(졸업생은 물론 현역 통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으로, 합격자수가 극히 미미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다)에 통과하지 않은 이상 졸업 후 바로 뛰어들기는 힘들어. 오랫동안 활동해온 기존 통역사들한테 일이 돌아가니까. 또 욕심에 덜컥 일을 받아도 곤란해.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인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길이 막히는 수가 있거든. 그러니 프리랜서 진입은 조심하는 게 좋아.”
오늘은 한불과 출신으로 외교통상부 서유럽과에 근무하는(3등서기관) 고등학교 선배 주연 언니를 만났다. 슬슬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 오늘 날 잡고 궁금한 것들을 다 물어보기로 한다. 통역사는 프리랜서 통역사, 관공서 또는 기업 소속으로 일하는 ‘인하우스(in-house)’ 통역사,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일하는 프로젝트 통역사로 나뉜다.
규모가 큰 국제회의 통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언어 분야에서 경력은 물론 실력을 인정받은 스타급 통역사들만 가능하다. 특히 서유진 교수님처럼 회의 진행과 통역이 모두 가능한 분들은 러브콜이 빗발친다고 한다. 인하우스 통역은 회사에 속해 통역일 외에 마케팅, 사무 등 다른 업무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 통역사는 주로 6개월, 1년 등 해당 회사가 통역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계약직으로 일한다. 프리랜서와 프로젝트의 경우 일이 몰릴 땐 몰리지만 일이 없을 땐 기약 없이 놀아야 하기에 불안정하다.
통번역 에이전시는 규모와 업무가 영세해 통대 출신이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프리랜서 일은 일을 맡다 보면 또 들어오고, 그러다 일이 겹치면 지인에게 소개하는 식으로 돌아간다. 보수는 프리랜서의 경우 요율이 하루 6시간 기준 80만원, 인하우스나 프로젝트의 경우 월 400만원 이상은 된다. 관공서는 대우가 이보다 못하지만 중요 인물의 통역을 맡을 수 있고 경력과 인맥을 쌓는 데 도움이 되기에 인기가 좋다.
“취업시장 전반이 힘든 만큼 통역사도 예전만은 못하지. 옛날에는 입도선매할 정도였다고 하잖아. 지금은 동시통역 시장은 제한돼 있고 기업들은 점차 순차통역을 선호하는 추세라 그냥 영어 잘하는 직원들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특히 영어과는 수요가 괜찮은 편이지만 불어, 중국어 등 다른 언어는 자리가 많지 않아 더 힘들지.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나처럼 다른 사무를 보면서 통역도 같이 하는 이가 많아. 일단 언어가 되면 주요 업무를 도맡을 수 있어 회사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 또 전혀 무관한 직업군으로 가기도 하지. 한영과 나온 지영이는 애널리스트로 갔고 또 누구 하나는 언론사에 갔고 일반 경영직으로도 가고. 일반 신입사원보다 좋은 대우로 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취업이 안 되서 학원 강의나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일반 대졸 대우로 취직하는 경우도 많거든.”
안정감 있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 기관에 소속되기를 택했다는 주연 언니는 “통역사는 다양하게 커리어패스를 관리할 수 있으니 찬찬히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STEP7
통역사로 산다는 것
다행히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은행 한 군데로부터 최종 합격소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분야가 다양하지만 금융에 관심이 있어 이쪽으로 특화하고 싶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초보 통역사로 다시 시작하는 사회생활이라 두 배는 더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 처음의 중요함을 잘 알기에 여유가 있어도 좀체 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1주일에 4번씩 스터디를 이어가고 있다. 그 옛날 학원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싱숭생숭한 마음에 존경하는 이영경 교수님을 찾아뵙기로 한다. 20년 동안 무려 1000여 회의 국제회의를 진행한 베테랑이다. 교수님 얼굴을 마주 하고 “다 잘될 거야”라는 말 한마디를 들으면 마법처럼 근심걱정이 달아날 게 분명하다.
“통역사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하니?”
“네, 그럼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아직 통역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많아. 힘들게 준비해서 멋들어지게 통역을 마쳐도 그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노고를 몰라줄 때도 많고. 하지만 난 언젠가, 곧 통역사가 ‘사’자 대열 직업에 오를 거라 생각해. 지금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말이야. 조선시대 중인인 의관, 율관, 산관이 지금의 의사, 법조인, 회계사, 즉 ‘현대의 귀족’이잖아. 그 가운데 하나인 역관이 지금의 통역사야. 자부심을 가지라는 얘기야.”
사실 한국에 통역사가 활동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9년 개원한 외대 통대가 1980년대 초부터 통역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외환위기 이후 외국 기업과의 프로젝트가 늘면서 통역시장이 커졌다. 특히 1991년 걸프전 때 CNN 생중계를 동시통역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통역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많을 거야. 수업 때 모의 동시·순차통역을 해봐서 알겠지만 순간의 판단력, 집중력, 순발력이 중요하거든. 계속 회의가 이어지는 정부 통역의 경우에는 3일 내내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계속 말해야 할 때도 있고. 또 끊임없이 변하는 경제와 국제정세, 속속 등장하는 신제품 등 공부도 계속해야 하지. 훗날 프리랜서가 돼서 수많은 통역사를 제치고 일을 따려면 국내는 물론 외신도 꼼꼼하게 모니터링하고 언어감각도 현상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해. 그렇게 경력이 쌓이면 전문분야가 생기는 날이 와. 너도 금융권 통역을 하면서 고급 정보를 접하다 보면 그 분야 통으로 성장해 다른 커리어를 가질 수도 있을 거고. 일본과 유럽에는 할머니 통역사도 많은 거 알지? 정년이란 게 없으니 길을 가며 계속 고민해도 좋아.”
“교수님, 일하면서 가장 힘들 때와 보람 있을 때는요?”
“북미회담, 6자회담, 북한대표 통역 등 내가 역사의 현장에 있다고 느껴질 때. 신제품 설명하며 시대 흐름을 먼저 아는 등 최신 정보에 근접해 있다는 기분도 좋고. 힘든 건 체력적인 부분도 있지만, 준비를 잘해도 연사의 발음이 이상하거나 속사포라서 통역이 엉망이 될 때, 그럴 때 제일 속상하지.
그나저나 통역사도 ‘끼’가 중요해. 컨디션, 신체조건,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통역 내용이 달라지지. 연사와의 궁합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야. 잘 맞아서 신들린 것처럼 통역이 잘되는 날이 있어. 또 끼를 타고난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만 3년은 지나야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서 실력을 측정할 수 있으니 이른 포기는 금물이야.”
교수님은 1980년대 중반, 막 통역사가 활동하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처음에는 못 미더워하다 한번 시켜보니 외국 클라이언트들이 만족을 표해 의학, 치의학, 금융, IT로 점차 분야를 넓혀갔다는 얘기, 일본어의 경우 당시 경제·사회적 책임 큰 어르신들은 대부분 일어를 조금씩 해 어설픈 실력으로 부스로 찾아와 “틀렸다”며 따지곤 했다는 얘기, 유럽에서 북한 통역사를 만나 반가운 한편 신기했다는 얘기들은 선배들이 닦아놓은 기반에 감사하는 마음을 아로새기게끔 했다. 해 질 녘, 교수님과 나는 “곧 동료 통역사로 필드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2008.5.1 신동아)
"정상회담 말짱 대통령은 전두환·김대중·노무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최정화 교수
논리적이고 탁월한 언변… 통역사들 높은 평점
프랑스 유학시절 첫 시험서 꼴찌 수모… 공부하다 2번 쓰러지기도align=center국내 1호 국제 회의 전문통역사에 아시아 첫 통번역 박사 학위까지
지난 15일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의 첫 미국, 일본 순방이 21일로 끝났다. 1주일간 공식 행사만 40여개에 양국 간 주요 이슈는 촘촘히 나열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이명박 대통령은 양국 정상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 최정화 교수가 최적임이다. 최정화 교수는 국내 1호 국제회의 전문통역사로 영어와 불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뿐 아니라 국내 가장 많은 대통령의 통역을 담당한 장본인이다.
최 교수는 파리 제 3대학 통번역대학원(ESIT)에 유학, 1981년 한국인 최초의 국제회의 통역사가 됐고 86년 아시아 최초 통번역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의 국제회의 전문가다. 그렇게 되기까지 최 교수는 결코 쉽지 않은 외길을 묵묵히, 당당하게 헤쳐왔다.
경기여중과 경기여고를 다니며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최 교수는 처음 실시된 74년 서울대 계열별 모집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는 “이 좌절이 또 하나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이때 한국외대로 진로를 바꿔 불어과에 지원한 그는 평생 프랑스어와 인연을 맺게 됐다. 대학 4학년 때 불어과 학과장실 조교를 맡아 교직원에 한해 자격이 부여된 프랑스 정부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했고 수석으로 붙었으나 ‘어린’ ‘여성’이란 이유로 대학 교수에게 자리를 내주는 경험도 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파리 제 3대학 통번역 대학원 원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결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언어의 달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의기양양하게 떠난 유학에서 그는 현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통역이 아닌 번역학부에 입학했고, 첫 시험은 20점 만점에 2점이란 수모를 겪기도 했다. 꼴지 중에서도 2등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는 ‘확실한 꼴지’였단다. 이때부터 르몽드지 사설을 읽고 분석, 요약해 교수에게 첨삭을 받는 과외가 시작됐다. 딸기밭 교정 노트를 받은 지 12개월,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통역학부에 입학했다.
이 후 더 혹독한 훈련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 13~15시간 공부에 매달리느라 당시 8kg이나 몸무게가 늘어났다. 두 번은 공부하다 ‘쓰러진’ 경험도 했다. 대학원 진급시험을 신청하러 갔다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간 후에도 혈압, 맥박, 심전도 등 의학용어를 프랑스 어로 물어보는 악바리 근성을 보였다고. 그렇게 프랑스에서 3년을 공부한 후 그는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을 딴 후 최 교수가 맡은 첫 통역은 1981년 당시 윤석헌 주불대사와 프랑스 미셸 조베르 대외통상부 장관과의 면담이었다. 성공적으로 데뷔전을 치른 후 그는 국제회의에서는 빠지지 않는 단골이 되었다. UPU(만국우편연합), IPU(세계의원연맹),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서울 총회, ASEM 런던 정상회의, APEC 마닐라 정상회의 등 대규모 국제회의를 1800여회 이상 통역했다.
86년 한불수교 100주년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까지 모두 5명의 대통령의 한불 정상회담 통역을 진행했다. “첫 정상회담 통역이 전두환-미테랑 대통령 통역이었는데 처음이라 무척 떨렸죠. 본격적으로 통역사 활동한 게 81년부터니까 5,6년차에 의뢰를 받은 거죠. 어린 나이에 국가 원수를 만난다는 생각에 처음 1,2초는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챘지만, 저한테는 2, 3년보다 더 긴 시간 같았습니다.”
최 교수에게 통역을 의뢰하는 쪽은 90%가 프랑스다. 한국의 경우 정상회담 통역은 대부분 외교관이 담당한다고. 5명의 대통령 중 노무현 대통령과 알제리 부트플리카 대통령 간 정상회담도 통역은 한국정부에서 의뢰해 진행된 경우다. 통역으로 확정되어도 담당 통역사에게 특별히 주어진 ‘팁’은 없다. 양국 현안과 국제 문제 등을 통역사가 스스로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양국 정상이 만날 때 쌍무회의만 하는 건 아니에요. 국제현안, 그러니까 테러나 기후변화문제 등 국제 공조가 필요한 전 세계 현안과 양국 현안을 함께 의논 합니다. 한국과 프랑스 모두 아셈회원국이니까 지역별 현안도 얘기하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당시 떼제베와 핵 발전 등을 논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어 최 교수는 “통역사는 보안이 중요한 직업이에요. 통역의 구체적인 내용은 절대 통역사의 입에서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고 했다.
'통역 프렌들리' 대통령은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정상회담에서 보았던 ‘말 짱’ 대통령은 누구일까? 최 교수는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았다. 통역사들 사이에서 이 세 資?전직 대통령은 ‘통역 프렌들리’ 인사로 꼽힌다고. 최 교수는 “통역을 할 때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에 대해 높은 점수를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세 분의 정치색에 대해 판단할 권리는 없고, 통역사이니까 통역사의 시각에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통역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논리성이에요. 말을 횡설수설하면 통역하기 참 힘들죠. 모든 통역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꼽는데 그 세 분이 그랬습니다.”
정상회담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직선적이면서도 간단하게 말했다. 최 교수는 “회담 분위기를 리드하는 면에 있어서도 미테랑 대통령과 비교해 밀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항상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논리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최 교수는 “추측에는 야당 생활을 오래하고 고비를 많이 겪으셔서 인지 항상 상대방에게 논리적으로 주장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탁월한 언변 능력을 보였다고. 최 교수는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정상회담에서 사용하는 말이 굉장히 논리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렇다 할 특징이 거의 없었어요. 정상회담에서 어떤 말을 하셨는지 제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특징이 없던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투리 억양이 강해서 저 뿐 아니라 모든 통역사들이 조금 어려워했습니다. 사투리도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경우는 사투리가 강하신 편이었죠. 하지만 억양 때문이지, 모든 대통령들이 다들 말씀을 잘하셨습니다.”
첫 순방길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의 화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최정화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프랑스 환경장관과의 회담에서 통역을 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화법에 대해 그는 “소탈하고 편안한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당시 프랑스 환경부 장관과의 대화가 정상회담 형태가 아니었지만, 통역하기 아주 편했던 분입니다. 주제를 돌려 이야기 하지 않고 그대로 꺼내는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자신의 논리를 갖고 이야기 하셨죠. 소탈하면서도 논리가 있는 대화였습니다.”
최 교수가 두 번째로 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CICI(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 연구원)에서 주최하는 행사의 수상자로 왔을 때다. 당시 프랑스, 영국, 일본, 러시아 대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완벽하지 않지만, 영어로 대화를 했다고. 최 교수는 “그때 모습을 떠올리며 이 대통령이 당선 후 영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본인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소통을 다 하시거든요.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아시는 거죠. 이 대통령은 문법적으로 100% 맞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말하고,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위트 있는 블레어, 매너 짱은 시라크
최정화 교수가 만났던 각국 정상 중에 최고의 재담가를 물었다. 최 교수는 우선 유머감각이 풍부한 인사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를 꼽았다. 모든 사안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지만 상황에 대한 기지와 위트가 아주 돋보였던 정상이라고. 블레어 총리는 긴장 된 순간, 농담으로 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셈회의에 참석할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최 교수는 당시 상황을 예로 들었다.
“독일의 전 총리 헬무트 콜이 풍채가 아주 좋은 분인데 당시 함께 아셈회의에 참석했었죠. 모든 정상의 의자가 다 똑같잖아요. 그때 블레어 총리가 각국 정상들의 넓은 의자를 보고 ‘헬무트 콜을 위해서 의자까지 신경썼다’고 말해서 웃음바다를 만들었던 적이 있죠. 영국 주최로 런던에서 회의가 시작됐을 때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회의에 늦은 적이 있어요. 그때도 ‘시라크 대통령이 조금 전 영국 여왕을 만났다는 데 왜 늦었을까요?’라고 위트있는 말을 해서 모든 정상들을 웃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매너 부분에서는 프랑스의 시라크 전 대통령을 최고로 꼽았다. 2000년 한국에서 아셈회의가 열리던 날, 동시에 김대중 대통령과 한-불정상회담도 있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항상 여자 통역사인 최 교수를 배려해 회의장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에서도 앞서 가라고 했고 카메라 플래시가 최 교수에게 터졌다고.
“정상회담 중 통역을 하다가 볼펜을 떨어뜨린 적이 있는데 회담 중에 대통령이 볼펜을 주워주셨죠.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여자가 몸을 굽혀서 물건을 줍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순간에는 대통령과 통역사의 관계가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순간이라 생각하는 거죠. 서양 사람들의 여성에 대한 존중, 매너입니다. 유명한 일화로 드골 대통령은 여자 통역사를 쓰지 않았어요. 만의 하?여자통역사가 펜을 떨어뜨리면 주워줘야 하는데 드골 대통령은 고령이니까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거든요.”
각국 정상 이외에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을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박식하면서도 말을 잘하는 인사로 소개했다. 특히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공식석상에서의 연설을 즉석에서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비유와 반전을 쓰는 특유의 화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마지막으로 말 잘하는 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쉽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다. 이어 그는 말 잘하는 것만큼이나 잘 듣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성격이 급해 상대방의 말을 듣기 보다는 말을 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경청을 잘하는 스타일로는 한승수 국무총리를 꼽았다. 최 교수는 “한 총리는 늘 상대방의 말에 경청할 뿐 아니라 메모하고 바로 피드백을 준다”고 말했다.
“협상에서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허를 찔러가면서 해야 우위를 가질 수 있는데 할 말만 하고 얘기는 별로 안 들으니까 금방 허를 놓쳐 협상의 주도권을 뺏기는 걸 많이 봅니다. 동서양 대화 스타일이 각자 장단점이 있지만, 협상에 있어서는 노하우를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주간한국 2008.4.22)
배유정
(2006.5.12)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오래전부터 역할모델이 되었던 그녀. 막연히 동시통역사이자 방송인, 배우라는 멀티플레이어로 참 매력적이다 라고만 생각했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적극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았었다.
너무 진솔하고 솔직한 그녀의 대답. 아직도 내가 정말 택할 길은 어느 곳인가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나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너무나도 도움이 되는 그녀의 말들이다.
정확한 이정표가 될 수 는 없지만 적어도 삶의 가치와 치열했던 그 무언가. 열정. 그런 것들.
정말 내 자신이 원하는것에 대해 자문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현실적인 것이었나. 최근 통역일을 많이 하면서 통역대학원에대해 다시 고민하다가 배유정 이라는 검색어 덕택에 정말 멋진 인생충고를 얻었다.
그녀는 지적이지만 지적이지 않고 부지런하지만 부지런하지 않고 철두철미해 보이지만 철두철미하지 않고 보수적이지만 보수적이지 않다.
방송에서 언론에서 만들어내는 그녀의 이미지와 저 인터뷰에서 묻어나는 진짜 그녀는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 또는 소스라치게 같은지. 두 모습 다 진짜 그녀겠지만 보통 전문직에 몸 담고있는 여성들이 갖고 있을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이나 약간의 가식은 전혀 없는 내용에 놀랐다.
이와 다른 어느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외교관 자녀로서 사춘기시절 외국에 거주할 기회가 있었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이지만,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동양인으로서 언어소통에어려움을 많이 겪고 방황하고 친구가 없었던 것, 일탈의 시기를 겪은것, 대학에 와서도 오랜기간 담배를 피고 방황하며 자아를 찾지 못했던 것 지금은 건강상의 문제를 느껴 담배를 끊었지만, 가장 후회하는 일이 담배를 시도했던 일이라는것을 말했다는 것. 언론에서 비춰지는 지적이고 유능한 여성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 등등.
그녀의 고백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진솔한 그녀의 고백을 통해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솔직함과 꾸밈없음에 더욱 그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의 인터뷰를 읽음으로 인해 만나지 않고도 그녀가 추구하는 삶은 어떤것인지 얼마나 매력적일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는것. 엄청 길어도 끝까지 읽어보면 분명 도움이 될 그녀의 인터뷰.
오늘은 동시통역사이시기도 하고요 연극배우, 방송인... 사회의 일반적인 공식을 뛰어넘어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그 일들을 해내시는 천 가지 재주꾼, 배유정씨를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앉아도 되요?
안녕하십니까? 강의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요. 저는 그런 거 할 줄 모르고요.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제 소개를 좀 말씀드릴게요. 제 이름은 배유정이라고 하고요. 저는 제 이름을 싫어합니다. 유정 낙지집, 유정 여관 등등 싫어하고요. 여러분은 자기 이름을 싫어해본 적 있나요?
음...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했는데, 일단 저는 좀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굉장히 게을러요. 이상주의자에다 부지런했으면 어디 가서 시위하고 환경운동하고 난리가 났을 거예요. 게으르기 때문에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하고 환경운동연합에 회비는 내지만, 나오라고 하면 절대로 안가는 그런 사람이고요.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에요. 오늘 같은 날씨에 외출하는 거 너무 싫습니다. 그 다음에 나이를 물으면 항상 거짓말을 해요. ‘숙녀의 나이를 왜 물어봐’ 라며 빠져나가고요. 그런 걸 보면 허영심이 있는 거죠.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허영심을 버릴 수 없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를 어떻게 소개를 할까.
컨벤션(convention: 관습, 관행)이라고 하죠. 관행이나 그런 거에 욕심이 없습니다.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거죠. 이 사회가 강요해도 내가 아니면 안 해요. 관행적으로 해왔으니까 해야 한다, 그런 건 잘 안 따르는 편이에요. 대대로 해왔으니까 너도 해라 하는 것들... ‘내가 봤을 때 비합리적인데 왜 해야 하는가?’하고 반문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연습을 어렸을 때부터 해왔어요. 한마디로 부모님에게 굉장히 골치 아픈,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었던 거죠.
그 다음에 저는 여성입니다. 태어난 게 여자니까 여성으로서 여성의 시각을 못 벗어나요. 여성으로 태어나서 저는 기뻐요. 남자가 아니라서 굉장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남성분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남자와 여자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남성들은 문제해결적으로 접근을 해요.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면 입 꼭 다물고 이걸 어떻게 할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데, 여성은 수다로 풀어 하소연해요. 자기한테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말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잖아요. 상대가 교감을 해줄 때 해결되고. 정서적으로 교감을 필요로 하는 동물이거든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정서적 교감을 중요시하는 여성이라는 점이 위로가 되고 기쁩니다. 그리고 저는 육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 4, 5년 전부터 고기를 안 먹어요. 회식을 가면 괴로워요. 거창하게 말하면 철학이지만, 생각을 바꾼 거에요. 제가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취하지 않아도 요즘은 워낙 다양한 먹거리가 있으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동물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가끔 고기가 그립습니다. 그러나 저의 믿음,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고기를 안 먹고 있습니다.
저는 고양이 엄마에요. 저희 집에 고양이 아홉 마리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고양이 같은 예쁜 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통 옆에서 만나 데리고 오거나, 남이 버린 고양이 입양을 해서 키워요.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를 입양하다 보니까 많아졌어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눈 주위가 다 부어요. 그래서 오늘도 다 부어서 나왔습니다.
저는 별로 도덕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불법 운전의 여왕이랄까. 속도위반 무지하게 합니다. 제가 낸 범칙금으로 조그만 골목 하나쯤 닦았으리라 생각하고요. 거짓말도 많이 하고. 사람을 배반도 해봤어요. 고무신 거꾸로 신은 적도 있어요. 제가 굉장히 도덕적이고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까 굉장히 많은 잘못을 하더라고요. 아주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권위적인 거 안 좋아하고요. 조직 정말 싫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년 전까지 직장이 없이 프리랜서로 일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약간 약해지는 순간, 2년 전에 이대 전임으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매우 허덕이고 있습니다. 곧 쫓겨나지 않으면 제 발로 나온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결, 위생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손톱검사 하잖아요. 근데 패스에요. 얼굴이 하얗고 그래서. 성격은 털털해요. 여러분들 만난다고 하니까 차려입고 나온 거예요. 동네에서 마주치면 아무도 못 알아봐요.
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를 하냐면, 보통 자기소개 좀 해봐 하면 ‘저는 이대 영문과를 몇 년에 졸업하고’ 이렇게 나와요. ‘그건 이력서에 있는 얘기니까 자기의 이야기를 해봐요.’하면 거기에 대해서 준비들이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기소개를 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여러분들은 웃으시겠지만 제가 받는 가장 많이 받는 오해가, ‘MBC에서 시사프로 진행하고 하니까 제가 굉장히 똑똑하고 완벽주의자고 까다로울 것이다’하는 거예요. 근데 가장 먼 이야기거든요. 그게 미디어가 조작해낸 이미지일 뿐이에요. 사실 저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력서에 나온 것, 언론이 조작해낸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 내 소개를 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고등학생, 대학생 이런 분들이 모였다고 들었는데 대학 입시 들어가서 ‘자기소개 좀 해봐’ 그랬을 때 한번 다시 생각해보세요. 이력서에 나와 있는게 여러분일까요?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측면이 있는 입체거든요. 어느 학교, 몇 년 이상의 여러분이 있거든요. 저는 장황하게 말했지만 여러분들이 앞으로 자기소개 할 때 ‘어떤 게 나의 본질인가’라는 생각을 먼저 하셨으면 해요. 15분 다 됐습니까? 아 5분 남았어요. 큰일 났다.(하하)
학부에서는 전혀 상관없이 심리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통역을 공부했어요. 사실 동시통역사란 말은 없어요. “국제회의 통역사”예요. 동시통역은 통역의 종류 중 하나에요. 순차통역, 동시통역 등등이 있는데, 동시통역이라는 말이 익숙하니까 이름이 붙은 거예요.
통역사로 일을 하다가 좀 싫증이 났어요. 통역사로 자신이 생기고 경제력도 생기니까 학사편입을 해서 연극영화과로 갔어요.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편입을 해서 연극 공부를 2년을 했어요. 그래서 국립극단에 들어가서 2년을 있었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잠깐 했고,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호주 방송에서 영어 모노드라마를 한 게 기사가 나서 라디오에 게스트로 초대됐어요. 그러다가 PD에게 전격 캐스팅이 돼서 방송을 시작한 거예요.
많이 받은 질문이 자신을 어떤 직업으로 소개하느냐 인데요. 연극계에 가서는 배우입니다. 배우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배우에요. 통역에서는 연극하고 방송하는 게 아무런 프리미엄이 안 돼요. 제가 순차통역이면 사인해달라고 해요. 그럼 주빈인 연사들이 싫어해요. 통역계에서는 단순통역사.
나비씨가 소개할 때 영화배우라고 하셨는데 제발 좀 빼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영화에 한번 출연해서 굉장히 수모를 당했는데요. KBS에서 영화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돌발 퀴즈가 지나가는 거예요. 지금도 잊지 못할 수모의 순간이었어요. ‘우리나라 3대 여배우가 아닌 것은?’ 강수연, 이미숙, 이미연, 4번 배유정. 그거 가지고 두고두고 놀림 받고 있어요. 저 영화 딱 한편밖에 안했거든요. 저희 아버지도 영화 다 끝나고서도 못 알아보셨어요. 영화배우란 애기 안했으면 좋겠어요. 연극으로만...
자, 15분 됐나요? 앞으로의 계획 이야기는 나중에 할게요. 감사합니다. 들어주셔서.
원체 바쁘셔서... 오늘도 낮에 계속 밖에서 스케줄이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강의가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잘 말씀해주시다니.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박수를 한번 드리겠습니다. 예, 저희가 영화배우란 이야기를 일부러 넣으려고 그랬다기 보다는...(하하하).
여러분, 저도 방송 쪽에 종사를 하지만 방송에 나온다고, 지면에 활자화된다고, 진실은 아닙니다. 새겨두셔야 합니다.
배유정씨에 대한 편견을 벗고 진실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고요. 이건 제 개인적인 욕심입니다만 뒤에 이 작품, 본인을 살짝 쪼금이라도 닮지 않았습니까? (바라보며)
원래는 사진이었는데 픽셀이 너무 커서... 자, 딴 짓 안하고 질문 하죠.
전위예술로 표현된 제 얼굴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몇 배나 부지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배유정씨의 청소년기가 궁금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소개 때 말씀을 드렸고요. 게으른데 제가 좋아하는 거에만 부지런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물론 두루 성실한 분도 계시겠지만.
청소년기에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외국에 나갔어요. 조기 영어 그런 거 없었을 때고, ABCD는 중학교 들어가서 배웠거든요. 이태리 로마로 가서 중학교 1학년 수업을 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유럽에 동양인도 없었어요. 버스타면 사람들 다 쳐다보고.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1학년 나이니까 고개도 못 돌리고 숙이고 다녔어요.
일단 말을 못하니까 학교에서 바보죠. 성격도 어두워졌어요. 스스럼없이 누구에게 다가가서 친구하자 이런 성격 절대 아니거든요. 밝지 못한 성격인데 말도 못하지, 외국 애들이지, 하니까 성격이 어두워지고 더 비뚤게 나갔어요. 잘하는 게 있어서 칭찬을 받아도 그것도 기껍게 들리지가 않는 거예요. ‘진심의 칭찬이 아닐 거야.’하며 그대로 못 받아들였죠.
제가 그림은 좀 그렸어요. 선생님이 잘 그렸다며 미술가를 해도 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좋게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때 선생님한테 굉장히 혼났어요. ‘애가 왜 이렇게 삐딱하냐, 칭찬을 해줘도 저렇게 나오고.’ 어머니가 점점 걱정을 하기 시작하고,
물론 학교에 남아서 따로 과외를 받고,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 왜, 1년만 갖다오면 영어는 다 된다고 하잖아요? 천만의 말씀. 유치원생 때,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돼요. 쓰는 단어가 몇 개 안되기 때문에. 문장의 구조도 매우 간단하고. 제 동생은 5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저보다 훨씬 친구도 빨리 사귀고 말도 빨리 텄어요. 그런데 저는 너무 힘든 거예요.
1년쯤 되니까 숙제는 뭔지 알겠는데도 자신감은 여전히 없는 거예요. 1년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석 달인데, 어머니가 선생님한테 ‘얘가 영어를 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숙제를 주십시오.’라고 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영문과 출신이신데, 방학도 없이 딱 잡아놓고 앉혀서 매일매일 숙제만 시켰어요. 석달을 하루도 안 빼놓고 했죠. 개학을 하고 첫 번째 시간이 문법을 도해하는 시간이었어요. 나는 밥 먹고 그것만 했잖아요? 반에서 내가 제일 잘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해서 친구도 사귀고, 긍정적인 시각도 갖게 되고... 그런 전환기가 있었어요. 제가 그거 안했으면 로마에서 삐딱 소녀로 자랐을 거예요.
그렇게 3년 반쯤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 가지 좋은 거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그 느낌 모르죠? 그 해방감. 내가 익명의, 여러 명 중의 하나가 된거죠. 남들이 볼 때는 10대 소녀가 버스 탔는데 뭐가 특이하겠어. 거기 이태리는 모든 눈동자가 나를 보거든요. ‘내 나라가 좋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외교관 자녀들이 외국 사는 거 싫어하는 사람 되게 많아요. 마이너리티(minority: 소수자)가 돼보는 게 어떤 지 잘 알거든. 문화적 상대주의에 눈을 일찍 뜬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 후 한국에 나왔는데 교복을 입는 거예요. 외국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화장하고 머리 맨날 고데하고 그러는데, 한국에서는 바로 날라리로 찍혀서 요주 인물이 되요. 하여튼 그러니까 얼마나 문화충격이었겠어. 그때가 70년대 말이었거든요. 80년도에 고등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었고. 학교에 가면 교문에서 딱 잡는 거야. 머리를 땋는 게 3개로 나와야 되는데 머리가 짧아서 2개가 됐었거든. 그러면 교문에서 푸르고 다시 땋고 들어가요. 참고로 저 예고 나왔어요.
또 나에게 충격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전학 온 학생하고 친구를 안 해요. 공부는 못해도 ‘어머 너 외국서 살다왔구나’ 친하게 해주는 애들이 있어요. 너무 고마운 마음에 이 친구들과 같이 광화문에 가서 라면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그랬어요. 근데 그 첩보가 바로 교무실로, 그 다음 엄마 귀에 들어갔죠. ‘내가 떡볶이 집에 가서 떡볶이 먹는데 왜 선생님이 걱정할 일이야? 학교 끝난 이후의 생활은 선생님 간섭하지 마요’ 이렇게 못되게 나가는 거죠.
그 뒤 모의고사를 봤어요. 모의고사는 국영수만 보잖아요? 제가 책은 좀 읽었기 때문에 국어는 따라가고, 영어도 되었고, 수학도 좀 해서 성적이 좀 잘나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성적이 나오니까 친구가 물갈이가 되데? 반장, 부반장 하던 친구들이 ‘이리와 친구 해줄게’ 이런 분위기고. 선생님도 나를 다르게 보고. 근데 나는 예민하기 때문에 그게 너무 싫었어요. 이런 걸로 사람을 평가를 하나? 그래서 맨날 놀던 친구들이랑 놀고. 그러니까 학교생활이 좋았겠어요? 안 좋지. 억압적으로 느껴지고.
미술을 했는데 그것도 문제였어요. 윤성자 선생님이라고 유학 갔다 오셨는데, 그 선생님한테 미술을 배웠어요. 선생님하고 비 오면 집안에서 유화를 그리고, 비 안 오면 선생님은 데생하고 우리는 수채화 그리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미대 가봐라 해서 예고를 지원했는데 우리나라 입시에 딱 그게 있어요. 학교마다 스타일이 있어서... 소묘도 딱 그렇게 가르치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랑 너무 다른 거야.
학교 그렇지, 선생님도 성적으로 학생들 재단하고, 교우 관계 간섭하지... 그나마 위안이 그림 그리는 건데, ‘너가 뭘로 갈 거냐? 응용 미술로 갈 거냐? 회화과로 갈 거냐?’ 그림도 다른 걸 그려야 된다고 하고, 너무너무 답답하죠. 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꿈 많은 학창 시절 너무 미화하곤 하는데, 나는 사춘기가 너무 싫었고요. 한국 와서도 고생했었고, 사춘기는 안 돌아가고픈 시기예요.
청소년기가 답답한 게 뭐냐면 머리는 크고 조숙해서 자기 나름의 가치관은 있는데, 힘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부모님에게 의존해야 하고. ‘나 이렇게 안할래.’ 그러면 아버지는 ‘네가 내 집에 있는 한, 내 밥을 먹는 한, 내 맘대로 해’ 딱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집을 나간다고, 몇 번이나 부모님과 갈등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권위적인 분이세요. 고집 세고. 지금은 부모님이 연로해지시니까 화해가 되더라고요.
청소년은 어떻게 보면 가장 힘이 없는 집단이에요. 예민하고 순수해서 어른들보다 꿈이 뚜렷한데, 현실은 나를 조그만 틀에 가둬놓거든요. 요즘은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도 하더라만, 저희 때는 그럴 기회도 없었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걸 바라는 사람들 틈에서 사니까 괴롭죠. 저는 늙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청춘 그립다, 돌아가고 싶다 하는데 저는 20대도 너무 싫었고. 대학 가면 바뀔 줄 알아요? 비슷해요. (청중 웃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기득권을 잡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오죽하면 10대 때 소원이 마흔이 되는 거였거든요. 지금 마흔이 됐거든요. 너무 좋아요.
‘열다섯 때 영어는 띄었고요’가 아니라서 너무 다행스럽지 않아요? 갑갑한 시절이 많았고 지금 나이가 들어서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갑갑하고 충분히 방황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충분히 해내시잖아요. 남들이 하지 않는 걸해서 오는 불안감. 보통은 따라가 주는데 그게 아닌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나요?
불안감은 항상 있죠. 연극하는 동안 돈은 못 벌잖아요. 집에서 다 반대했죠. 통역사로 잘 하고 있는데 뭐 하러 그걸 다 버리냐고. 연극은 배고픈 직업인데 뭐 하러 하느냐. 통역사는 프리랜서기 때문에 일을 안 하면 고객이 다 떨어져 나가요. 20대 후반에 통역사로 돈을 좀 벌어놨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의존 안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던 건데, 연극을 하면 부모님에게 또 손 벌리게 될까봐 불안했죠. 그때 불안감을 극복하고 일을 했던 건,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고 워낙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에요.
아무 비전도 없고 보장도 없지만 하고 싶은 거에 대한 희열, 그거에 모든 걸 거는 거예요. 무계획, 무모한 성격이라고 하는 게 딱 맞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거 때문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부지런해서, 일욕심이 많아서 라고 얘기하는데 그거 아니라니까요.
무모하다고 하셨는데 용감한 성격이시거든요.
무식하니까 용감한 거에요.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예요. 저는 공연 보는 걸 좋아했어요. 무대도 화려하니까 멋져 보였죠. 문학을 좋아하니까 희곡도 많이 읽었거든요. 미술 했으니까 무대 미술에도 관심이 많고. 저는 연극배우랑 말 한번 해본 적도 없었어요. 요즘 같으면 좀 알아보고 했을 거예요. ‘연극하는 사람에게 벌이는 어때요?, 캐스팅은 어떻게 하나요?’하고. 아무 것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했어요.
방송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라디오를 안 듣고 자란 세대에요. 저는 10대 때 테이프만 듣던 세대고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라디오도 들어본 적이 없고. 당시 저를 발탁했던 PD 부인이 모니터링을 해주는데, 하는 말이 ‘여보, 이 사람은 방송을 안 들어본 사람 같애.’라고 했대요. 몰랐기 때문에 했던 거죠. 진행이 뭐 그러냐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TV방송을 시작할 때는 제가 해서 망신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영화 음악 진행하면 영화는 보여주나요?’ 물었더니 다 공짜래요. 어 나 영화 좋아하니까 좋다, 그래서 한 거라니까요. (하하)
용감한 선택을 해오셨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몰라도 내 나이는 알잖아요. 어떤 사람은 광고에도 나왔는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은 더 심하게 20대는 뭐할 나이, 30대는 뭐할 나이, 이런게 굉장히 분명한데 ‘어떤 나이에 무엇을 하는 것’이 굉장히 달랐을 것 같거든요,
저를 가르치는 사람이 저보다 어려도 무조건 선생님이에요. 제가 뭘 배우러 가서 ‘내가 너보다 나이는 많거든’ 이건 아니거든요. 내가 가르침을 받으러 갈 때는 ‘인도해주세요’하면서 매달리는 거예요. 저 연극영화과 들어갔을 때, 만 열아홉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어요. 저는 학생이 된다는 기분에 룰루랄라 하면서 다니고. 연극했던 동기들이 권해효, 유오성... 또 있어 하여튼. 밖에는 선생님 소리 듣고 통역사 대접받지만 안에서는 누가 날 알아줘요. 내가 '배우겠습니다' 들어가면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여요.
저희 아버지 얘기 해드릴까요? 예순이 다 되셔서 용산에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어요. 새벽 4시면 눈뜨시는데, 모르는 걸 물어보고 싶어서 선생님 일어나는 시간 기다리다가 7시에도 전화를 해요. ‘어 난데 말야 이거 어떻게 하는거야.’ 그렇게 열의를 보이는 만학도 학생을 누가 밉다고 하겠습니까. 이제 저희 아버지는 간단한 프로그래밍도 하시고, 조립한 컴퓨터를 자신이 업그레이드를 해가면서 쓰세요.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같아요. 맨날 지금 들어가서 될까 그런 건 여러분들의 기우(杞憂: 쓸데없는 걱정을 이르는 말)예요.
내 나이대가 아닌데 들어간 사람은 필요가 있어서 들어간 거잖아요. 내가 지금 대학 나이를 놓쳤는데 지금 대학에 들어가야 겠다고 생각하면 들어가는 거예요. 그냥 시간 때우러 오는 학생하고 그 사람하고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열심히 하겠어요? 나는 만학도들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안정된 직업? 여러분들은 지금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돼요. 지금은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요. 옛날에는 인생 참 웃기는 게 '한 우물을 파야지' 그 소리 많이 들었고요. ‘한 가지도 못하니까 여기저기 다니는 거 아니야’ 이런 소리 들었는데, 사회가 바뀌니까 ‘멀티태스킹(multitasking: 다중처리, 동시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것을 말함)에 강하다’ 그런 소리 나와요.
50대 통역사들 아직 현역으로 일해요. 그리고 다들 젊게 사세요. 하지만 몸도 젊지 마음도 젊은데 할 일은 없고, 굉장히 힘들어져요. 오랫동안 자기가 스스로 단련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해요. 경제력도 생각안할 수 없어요. 인구가 자꾸 감소하고, 저출산 국가잖아요. 그러니까 점점 살기 어려워지죠. 나중에 여러분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내준 연금으로 살아야 되는데, 지금 10만원 내는데 나중에 2, 3만원 밖에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그거 걱정해요.
제 2, 3의 커리어도 생각해야 되요. 어린 사람들하고 다시 배워야 되거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 시대가 올 거고 당연히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된다고 봐요.
제 2의 커리어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매우 필요한 조언이었던 것 같은데요. 조금 다른 애기 해볼게요. 여러 가지 영역에서 일을 하는데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특히 극단에서도 일을 하셨는데 극단은 성차별이나 권위적인 구조가 심하다고 들었는데요.
여성의 정체성, 작용했죠. 왜냐하면 부모님이 굉장히 독특한 교육을 하셨어요. 딸만 둘인데, 결혼해라, 시집가서 잘 살아라 그런 얘기를 한번도 안하셨어요. 여자도 경제력을 가져야 된다. 여자도 배운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된다, 이런 말씀만 하시고. 나중에 엄마한테 왜 결혼하란 말은 안하셨어요? 그랬더니 ‘난 당연히 할 줄 알고 안했는데.’하시더라고요.
저는 학구적인 타입이 절대 아니에요. 활동적이고 밖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열심히 연애를 하고 무지하게 실연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더라고요. 그 당시만 해도 대기업에 여성들이 진출을 하면 대졸 사원들도 커피 심부름 시키고 중요한 일은 안 시키는 분위기였어요. 영어로 이라고 하죠. 지금도 통역 나가보면 최고경영자 혹은 여성 임원들은 없어요. 그 당시에는 더 심했죠. 조직은 위계질서가 강하고 수직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이 강했어요. 그래서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여성의 정체성이 한번 작용을 한 거고. 속으로 ‘여성도 남성과 권리면에서 동등해야지’ 생각하지만, 내가 이런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페미니스트로 나서야 되지만 비겁하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탁 빠진 거죠.
통역사로 일하는데 여성이 불리하지 않아요. 외국은 남자 통역사가 많은데, 유독 일본과 한국만 여성 통역사가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이 통역대학원을 나와도 다 취직을 해버려요. 프리랜서만 해도 보장된 직업이 아니었거든요.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에 적합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끔 테크니컬한 통역을 할 때 남자들을 보내달라는 주문을 해요. 그럼 없는데요 하죠. (웃음)
연극에서 사실은 성차별이 롤(role:역할)적인 면에서는 있을 수 없어요. 문제는 극작가들이죠. 굉장히 심각한 고뇌의 인물을 연기할 때 남자를 써요. 햄릿이 남자거든요. 그런 거는 남자가 해요. 여성의 역할 자체가 조연이라든가 청순가련이 대부분이죠.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는 역할이 오필리아(햄릿에 나오는 여주인공)예요. 오필리아는 정말 운명에 휘둘리고 가장 주체가 없는 역이에요. 사실은 왕비가 인간적 갈등과 고뇌가 더 많아요. 왕비가 사실은 더 매력적인 역인데, 흔히 오필리아라고 생각을 하지요. 역할 자체에서 오는 어떤 극에서의 무게감, 이런 게 여성 역할에 많이 안주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극단 내에서는 모르겠어요. 제가 막내로 들어갔을 때는 여성만 두 명 뽑았기 때문에. 극단에서 선후배 관계는 굉장히 따지는데 성차별적인 그런 건 좀 열려있어요. 연극하시는 분들이 순수하고 개방적이에요. 너무 디스플린(discipline: 규율, 기강?) 없는 게 탈이죠. 열려있고 따뜻하고 양성평등적인 면이 많다고 봐야죠.
통역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네이버 검색을 해봤더니 ‘통역사가 되고 싶어요’ 라는 질문에 답변이 ‘리스닝이 반입니다’, ‘단어도 뭐도 다 중요하지만, 저도 6학년인데 통역사 준비하고 있습니다.’고 나오더라고요. 굉장히 깜짝 놀랐는데 답변자 의견 달기 부분에 ‘여러분이 뭔가 잘 모르시나본데 동시통역사는요........신입니다’ 라고 나오더라고요. 통역사란 직업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시려면 많은 초등학생(?)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통역대학원에 온 학생들을 보면, ‘왜 왔어요 딴 거 하세요’라고 얘기해요. 솔직히 전문직이가 사회적 위상, 지위도 인정을 받지만, 진짜 솔직하게 까놓고 이야기하면 보수가 적어요. 통역사는 ‘사’자 리스트에서 가장 하단에 있다고 보시면 되요. 의사, 변호사, 회계사... 이런 분들은 만약 자기가 변호사면 소송건을 맡고, 굉장히 고액이 걸려있으면 탄력적으로 수입이 들어와요. 의사는 병원을 어떻게 경영을 하느냐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설계를 할 수가 있어요. 약사도 가능하죠. 자기 밑에 보조 약사를 두고 늘릴 수 있는 거죠.
통역사는 내가 현장에 직접 나가야 돼요. 누구를 대신 보낼 수 없어요. 일반인이 의뢰한 통역이나 대통령이 의뢰한 통역이나 액수도 똑같아요. 6시간까지 얼마. 똑같아요. 통역사가 버는 수입은 최대 일년에 얼마, 이렇게 딱 정해져 있어요. 제 때는 여성들에게 열린 직업이 몇 없었어요. 그래서 통역사가 매력적인 직종이 될 수 있었어요. 몇 없으니까. 지금은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훨씬 많아요. 수익적인 면에서도. 통역사는 화려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음에도 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외국어를 잘하시는 분들이 통역사하려고 많이 생각하시는데요. 동시통역 같은 경우는 영어도 외국인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건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고요.
가장 요구하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 이해력 이예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두루 하잖아요. 오늘은 IT, 내일은 통일연구원에서 한국 대북 정책, 그리고 그 다음날은 전혀 다른 통역을 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텍스트를 굉장히 빨리빨리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요. 보통 언어에 치중을 하고 목숨을 거는데 논리적인 사고, 순발력과 이해력이 더 필요해요. 사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다릅니다. 우리말을 잘해야 해요. 영어 잘하는 교포, 우리 학교 오면 졸업을 안 시켜줘요. 영어도 뛰어나게 구사하면서 논리적, 이해력, 순발력 그 요건을 맞추기가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학원 올 수준이면 그 동네에서는 영어하면 그 사람, 학교에서 영어하면 그 사람, 하던 사람들이 와요. 그런데 영어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사실은 영어보다 중국어를 권하고 싶습니다. 중국의 부상을 생각하면. 중국어의 중요성을 무시 못 합니다. 하지만 중국어가 됐든 영어가 됐든, 영어는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요. 영어를 발판으로 뭐든 할 수 있거든요. 해서 손해 볼 일 없다는 거죠. 그런데 통역사가 되기 위한 요건을 맞추려면 그거 갖고는 안 된다는 거죠.
통역사들끼리 얘기하면 ‘타고나야 한다.’는 말을 해요. 사실 전문직 중에 많은 부분이 그래요. 70%는 타고난 사람, 30%는 학교에서 가르친 것. 통역이 전혀 체질에 안 맞는 사람이 많아요. 영어도 잘하고 통역도 잘 하는데 이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순차통역을 한다면 연사가 말을 하고 그걸 필기를 하고 1~2분이 경과된 다음에 이야기를 하는 건데. 남의 말을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얘기하려니 스트레스가 굉장히 가해지는 거예요. 동시통역은 부스라고 해서 조그만 나무 박스가 있어요. 나비씨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면 헤드셋으로 듣고 동시에 통역을 해요. 그러면 대중 앞에 나오는 게 아니고, 대중을 대변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조금 낫죠. 통역사 1~2년 하다가 그만 두는 사람도 많아요. 언어적 적성, 논리적 머리, 이해력, 순발력이 있어야 돼요. 사람들 앞에서 퍼블릭 스피킹(public speaking: 말 그대로 공중,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것. 연설, 웅변 등을 말함)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저희들이 그런 거 매우 강조해요. 연사가 말하면 통역사가 그에 못지않은 설득력으로 딱 잡아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목소리가 작거나 하면 그 사람의 말 자체는 전달이 될지 몰라도, 서브 텍스트(sub-text: 문장의 숨은 의미?)랄까, 열정 이런 건 전혀 전달이 안 되고 여과되어 버리는 거죠.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시 통역사까지 될 수 있는 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그러나 영어 공부는 광범위하게 하시면 좋습니다.
통역사 그렇게 멋진 직업 아니에요. 돈도 조금 벌고. 저희는 호텔에서 많이 일해요. 맨날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힐튼, 하얏트... 일주일 내내 도니까 화려해 보이지만, 연사들은 레드 카펫 밟고 올라오는데 저희는 종업원들 다니는 곳으로 다녀요. 통역 부스 들어가서 음지에서 양지를 그리며 일을 하고. 돈도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요. 바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호텔에서 밥을 먹어야 하거든요. 그러면 정말 지출이 엄청 많아져요. 솔직히 통역사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통역이 안 되면 아무 것도 전달되는 내용이 없으니까. 아무나 불러서 써도 되는 줄 알고 대접 안 해줘요.
그러나 통역사가 나쁜 직업은 아니에요. 장점도 많아요. 자유롭고, 그것도 또 프리랜서가 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나흘만 일하고. 하지만 7, 8, 9월 팍 쉬고 외국 여행 같은 건 힘들어요. 고객 관리를 해야 되거든요. ‘어 배유정씨 연락 안 되네’하며 내 역할이 내 동료 경쟁자에게 가게 되는 거예요. 프리랜서들이 거의 다 그렇지만 사실 통역사들은 불안해서 여행 못 다녀요. 충성스런 고객 베이스를 갖고 있는 사람이나 여행 다니고 하지. 장단이 있어요.
통역사에 대해 혹 직접 질문을 던지고 싶으시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디지털 고등학교 일학년 박지훈이라고 하는데요. 유년기나 청소년기 때 꿈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지금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문이 뭐냐면요. 미래 계획이 뭐냐 하고,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느냐 이건데. 이런 자리 오면 통역사가 꿈이었고, 열심히 코피 터지도록 공부해서 통역사가 되었다며 귀감이 되는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요. 저는 그 목표가 없어서 방황을 했어요.
자기가 목표가 있으면, 목표 의식이 있으니 갈 길이 나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없어서, 저희 어머니가 저를 의지 박약아라고 하셨어요. 내 마음대로 끌리는 대로 이것저것 해보니까 그림도 그려보고 노래도 해보고.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셨는데 본인은 뭐 되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기획자. 게임 기획자가 되고 싶거든요.
박지훈군은 굉장히 운이 좋은 거에요. 게임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게임 방송도 열심히 보고 직접 게임도 할 거고 할 텐데 저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꿈이 없는 경우가 많다니까요. 그런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답답하죠? 근데 그것도 괜찮다는 거예요, 몇 년을 살았다고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예요. 나는 통역은 그냥 했지만, 연극은 제가 목표의식을 가지고 했어요. 연극 공부하는 동안 신이 나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른 공부할 때는 정말 재미없었거든요. 운이 좋아서 졸업을 한 거지.
사실은 오랫동안 뭘 하고 싶은지를 못 찾았어요. 서른 넘어서야 ‘이거 하고 싶다’하고 발견한 게 연극이에요. 만약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갑갑하다’ 그럼 당연하다고 생각하세요. 내 짝은 있는데 왜 나는 없지 하면, 나를 조금 더 열어놓고 인생 경험 두루두루 해봐야지...하고.
인생에서의 불확실성은 평생 가져가는 거라고 봐요. 10대, 20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죠. 현재 위치에서 인생에서 확신을 가지냐? 그건 아니에요. 어렸을 때는, 빨리 결정 안하면 안 되는데 왜 가고 싶은 과가 없지, 남들은 다 어떤 기업을 목표로 하는데 나는 왜 없지? 그때는 인생의 길이 그거밖에 없는 줄 알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여유가 조금 있어요. 다른 선택도 있고 대안도 있다는 걸 지금은 아니까. 제가 너무 방황을 했기 때문에. 하나로 정한 게 없었기 때문에 더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변호사가 되어야지 했으면 고시 공부만 했겠지만, ‘이것도 재미있네!’ 하다보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방송 쪽에 관심이 많은, 10대보다는 조금 편해진 나이고요. 오늘 이야기를 해주신 게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부분, 살아오면서 ‘나는 이것, 이것, 이것을 해보다 보니까 싫어져서, 하고 싶은 게 생겨서 바라보는 위치다‘라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저희같이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보입니다. 남들이 보는 성공에 서셨다고 생각하거든요. 다 전문직종인 분야에서 남들이 인정할 만한 커리어를 쌓으실 수 있었던 데에는 배유정님만의 특별한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해가 안가서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운 좋게 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 저한테는 ‘거짓말 하시는 거죠’ 라고 들리는데요? 제가 쉽게, 쉽게 이야기를 하는데.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어요. 여러 가지 해보니까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어요. 통역대학원 1학년 때 공부를 열심히 안했어요. 마음을 먹고 들어간 게 아니었잖아요. 제가 2학년 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죠. 제가 뒤쳐져있다는 걸 깨달아서 2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배짱이 클럽>을 형성했어요. 그때부터는 죽어라 공부한 거죠. 제 성격이 그래요. 계획을 세워서 공부하는 스타일이고, 굉장히 인텐시브(intensive: 집중적으로)하게 공부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통역대학원 학생들은 고등학교 3학년하고 똑같아요. 10시, 11시 반에 집에 가고 주말도 없고 방학도 없어요. 그런 수련의 기간 다음에 전문직종이 탄생하는 거죠. 그리고 또 방송은, 방송도 일가를 이루셨다고 해서 제가 씩 웃었잖아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바라봤을 때처럼 방송도 여러 개를 하고, 통역사로도 여러 가지 회의를 나가고 했으니까 탄탄하게 안정적이구나 하시는데요. 그런 안정감이라는 건 평생 오지 않는 거 같아요. 성공한 사람이 가장 불안해요. 그리고 저 방송에서 일가 이룬 사람 아니에요. 방송인으로서 굉장히 일을 많이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통역이나 사회를 더 많이 보기 때문에 방송은 EBS <시네마 천국>만 해요.
여성으로서 방송일 한다는 거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나라에서는 노련한 여성 앵커들에게 설 자리 주지 않아요. 저는 MC로 출발했고 좀 더 독특한 제 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야에서는 생명이 긴 거예요. 황금 방송 시간대 여자 아나운서들 같은 경우 계속 교체되고, 밑에서 후배들 자꾸 올라오죠.
기업체들 같은 경우에 통역사들 비행기 태워서 데리고 갈 때 이코노미 좌석 타고 가면 안 되겠느냐 하면, 어떤 후배는 ‘이코노미 타고 가겠습니다’ 해요. 그러면 데리고 가요. 저는 ‘저 사람 아니면 안 되겠다’ 그걸 아는 기업에서 저를 쓰죠. 예산 가지고 빠듯한 기업은 저를 안 써요. 싸게 노동을 공급할 수 있는 통역사들 써요. 그렇다고 제 위치가 공고하냐? 절대 아니에요. 성공이 안정을 의미하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성공 = 불안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혼하면 안정적이라고 하죠. 요즘 이혼율이 얼마나 높은 줄 알아요? ‘불안정이 보통이다’ 라고 생각해야지, 안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요.
제가 여러 가지 커리어를 쌓았지만 하나도 쉬운 일이 없었어요. 제가 아침에 SBS 아침방송을 3년 반 하는데 목 뒤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분장하고 나가야 하거 때문에 건강이 너무너무 나빠졌어요. 아침 방송 하는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힘든데 견디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저의 비결은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안될 일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연기자였던 게 도움이 많이 되요. 순간 최면을 거는 거예요. 매번 새 거 보는 것처럼. 아침 방송 찍으면 똑같은 주제, 똑같은 지방, 똑같은 특색음식... 그래도 ‘아 저런 게 있구나, 새로운 걸 발견하는 게 즐겁다’ 그런 자기 착각 속에 빠지는 거예요. 힘든 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거죠.
통역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움직이지 않아요. 물론 30분씩 교대를 해요. 그러나 30분간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맥락을 알아야만 다음 30분 동안 계속 갈 수 있거든요. 쉬지 않고 계속 들어줘야 해요. 심포지움 끝나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요. 모두 스트레스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나죠. 너무 재미없고.
그러나 항상 나는 통역사여서 재미난 면을 계속 찾을 수 있어요. 신지식들이 저를 경유해서 나가잖아요.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거죠. 뉴스에 나오는 거도 전날 내가 통역한 거고, 매일매일 새로운 걸 알게 되니까 너무 즐거운 거죠. 그런 마음가짐, 일종의 최면, 그런 게 필요해요. 연극 공부한 게 방송에도 많은 도움이 되요. 연기, 자기 최면. 연기할 때는 다른 인물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방송, 연극, 통역이 시너지랄까. 상대적으로 전환되었던 부분이 있어요.
너무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은 사람을 보면 놓친 토끼는 없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죠. 모든 일이 쉽지 않았음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낙천적으로 자기 최면 걸어 여기까지 오신 것 같아요. 배유정님께서 오늘 오신 여러분들께 하나의 메시지를 적어왔습니다. 그 메시지가 뭔지 한번 들어볼게요. 이거 못 날리면 오늘 말한 거 다 소용없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운문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산문적인 사람입니다. 때로는 젊음도 버거울 수 있습니다.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뜹니다.
배유정
동시통역사, MC
1964년 1월 13일생(부산광역시)
한국외국어대학교통역대학원 석사
1997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04년 이화여자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 전임강사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 폐막식 사회 1997년~1998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대학원 강사 이명박 당선인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년 외신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뒤 통역의 말을 듣고 있다. 왼쪽은 통역 김일범씨.
2008.1.17일 이명박대통령 당선자의 첫 외신 기자회견에선 이 당선자 오른쪽에 앉은 30대 청년이 유창한 영어로 통역을 맡았다.외교통상부에서 파견된 김일범(35·외무고시 33회) 서기관이다. 이 당선자는 당선 전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통역을 구해 썼지만, 당선자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외교부에서 정식으로 통역요원을 지원받았다. 지난 4일 페리(Perry) 전 미 국방장관 등 미국인사들이 이 당선자를 방문했을 때도 당선자 옆에는 김 서기관이 있었다.
김 서기관은 외국어 능통자를 대상으로 하는 '외시 2부 수석' 경력이 말해주듯 외교부 내에서 손꼽히는 영어 실력자로 통한다. 이 때문에 김대중대통령 후반기와 노무현대통령 초기에도 통역을 맡는 등 '영어'로만 3대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연세대 재학 시절 교내 그룹사운드 '소나기'의 드러머로도 활동한 재주꾼이다. 싱가포르 덴마크 대사, 오사카 총영사 등을 지낸 김세택 전 대사가 그의 아버지다. 한편 노 대통령의 영어통역은 김 서기관 이후 이여진(34·외시31회)·이성환(32·외시33회)·정의혜(33·외시31회) 서기관이 이어받았다. 이성환 서기관이 통역을 담당할 때 아버지인 이태식대사가 주미대사에 임명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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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움되는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