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공예청 주관으로 열리는 ‘컬렉트(Collect)’는 유럽 최고의 프리미엄 공예 페어로 알려져 있다. 수준 높은 공예 갤러리들이 참여하는데, 특히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등 박물관, 갤러리들이 소장품을 컬렉션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올해 열린 페어에서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장연순씨의 작품 <매트릭스 Ⅱ 201025>를 구매했다. 이 박물관이 한국인의 작품을 소장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물관은 그의 작품이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철학과 부드러운 섬유를 강단 있는 입체 구조물로 변화시킨 것”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그는 2004년 미국 파이버아트 인터내셔널에서 수상하고, 독일 유니페어에서는 Best 9에 선정되었다. 지난 2008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에 섬유예술가로는 이례적으로 선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소장한 그의 작품은 마닐라삼 섬유인 아바카(abaca)에 인디고 염색을 한 것으로 그가 이제껏 천착해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그동안은 우리 전통 소재인 삼베나 모시・명주 등의 직물을 가지고 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대형 설치작품을 하려고 하니 전통 장인들이 직조한 것은 워낙 고가라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소재가 아바카예요.”
마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아바카 섬유를 쪽빛으로 염색하고, 풀을 먹이고, 봉제하는 등 무려 12단계의 수작업을 거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컬렉트 페어 후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그를 찾아 서울까지 왔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제 작품에 대해 한국적이라고 느낀 것 같아요. 서양에도 인디고란 푸른색이 쪽빛과 비슷하지만, 염색 횟수와 담근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쪽빛에서 동양적인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가장 궁금해한 것은 섬유를 가지고 어떻게 건축물 같은 효과를 냈느냐 하는 점이었어요. 여러 차례 풀을 먹이는 과정을 설명했는데, 그 점이 독특하게 느껴졌나봅니다.”
그들은 섬유의 정련, 여맥, 다림질, 풀 먹임, 봉재와 방염법, 쪽염색 등 염색기법과 가공방식, 봉제방법 등 다양한 실험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미술평론가 김용대씨는 그의 작품 <매트릭스>를 보고 “장연순의 작업은 ‘반복’이다. 그는 같은 도형을 수없이 반복해서 나타낸다. 이 반복이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유사할 뿐이지 똑같지는 않다. 이 반복은 수행과도 같다”고 했다.
“인간의 몸은 무엇일까. 몸이 마음을 담는 상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끝에 얻은 결과가 상자라는 이미지예요. 그런데 이 상자는 ‘시간’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단전호흡과 수련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기도 하지요. 작가 이전에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했던 작업이에요.”
철저히 손으로 이루어지는 작업 과정에 대해 그는 “수련”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나의 작업은 마음과 몸에 대한 명상에서 시작된다. 동양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마음의 움직임을 내 속에 축적되어 있는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씨실과 날실이 성글게 교차하면서 짜여진 아바카 섬유는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한다. 쪽염과 반복되는 바느질을 통해 여성 노동의 신성성이 우주적 영성과 합일하며 나는 너를 비추고 너는 나를 비춘다. 나의 작품들은 부분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부분이 된다”고 그는 작업일기에 적어놓았다. 철저히 손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은 사실 옛 여인들에게서 전승되어왔다고 말한다.
“예전에 할머니들은 목화농사를 짓고, 실을 직접 자아 옷감을 만들고, 염색을 하고 재단을 했어요. 또 뜯어서 바느질을 하고 풀을 먹입니다. 한국 여성에게는 이런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조형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걸 작품으로 표현하지만,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로 올라가다보면 인류 태초의 어머니까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크게 나누면 12단계이지만, 작은 공정까지 합한다면 족히 20단계는 되는 일을 그는 그렇게 수행하듯 묵묵히 해왔다. 젊었을 때는 다양한 색으로 작업을 하다가 점점 ‘쪽빛’에 안착한 이유도 가장 기본적인 색이라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쪽 염색은 모든 염색의 기본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자연염색의 기본은 쪽빛이고, 그래서 더욱 친숙한 색이기도 합니다. 쪽 염색 위에 홍화나 나뭇잎 색이라든지 카키색을 낼 수 있는 것이지요. 염색 횟수와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데, 색이 짙어질수록 품위가 있어요.”
섬유예술은 우리나라에서 아직 생소한 장르인데, 그를 통해 현대미술의 한 갈래로 빛을 발하고 있다. 미국의 섬유 전문 갤러리인 브라운그로타갤러리 등 미국을 중심으로 해외 컬렉터들이 주로 그의 작품을 사들인다.
“작품은 나와의 싸움이 이루어낸 결과예요. 한순간도 반복되는 게 없어요. 작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나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젊어서는 색에 대해 욕심을 부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멋지게 나이 드는 법에 대해 고민해요. 나와 인간, 우주의 이야기가 담긴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토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매트릭스> 등 작품이 설치되어 있고, 그가 평소 작업한 드로잉, 그림, 사진 등도 보인다. 산책하다 주워온 돌, 나무뿌리 등도 있다.
“자연에는 모든 게 다 있어요.”
섬유 자체가 자연에서 온 것임을 생각하면 그가 ‘자연인’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