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며 살기
김 광 화
“너, 멋있어 보이려고 블랙커피 마시지?” “아니야! 커피 마시고 들쩍지근하게 달라붙는 설탕 맛이 싫어!” 민망함에 흰자위가 드러날 만큼 째려보면서 발끈하는 나를 오빠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나의 ‘척하며 살기’ 시작은 블랙커피부터 시작된 듯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다가, 음미하듯 커피를 마시는 주인공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 따라 하기 시작한 걸 오빠에게 들켜버렸다. 물론 커피를 마신 후 입안에 오랫동안 남는 단맛이 싫다는 것도 사실이고, 지구 두 바퀴를 돌아도 프리마 때문에 찐 옆구리 살이 안 빠진다는 낭설 때문에 블랙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지만, 오빠에게 속내를 들킨 것은 창피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커피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가루 커피를 뜨거운 물만 부어서 마시는 커피가 고등학생인 내가 음미한다고 하기엔 너무 쓰긴 했다.
“멋있어 보이려면 겉멋 말고 제대로 해봐.” “어떻게 제대로 해?” “ 커피의 역사, 생산지, 커피에 따른 에피소드나 음악, 그림 같은 거를 함께 알아보는 거야.” “굳이?” “겉멋은 쉽게 바닥이 드러나지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진짜로 멋있게 보이거든.” 모든 면에서 우수하고 뛰어나 나의 히어로였던 오빠의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했지만, 그 당시에는 지식을 접하기도 어려웠고, 진학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어영부영 지나고 말았다.
여기저기 카페가 생겨나면서 가루 커피를 마셨던 시절과는 달리 여러 종류의 커피를 맛볼 수 있게 된 대학 시절, 음악전공을 하는 친구를 따라 DJ가 소개하는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고전 음악감상실에 가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감상하는 날이었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난 뒤의 슬픔을 표현한 바흐의 가장 슬픈 음악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와 바이올린의 가장 굵은 G 음만으로 연주되는 「G 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니 바흐의 마음속 깊은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또 파국을 맞거나 행운을 맞을 때, 장난처럼 내뱉었던 ‘띠리리~’로 시작하는 멜로디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단조」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나의 무식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 곡으로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는 딸에게 커피를 마시면 시집 보내지 않겠다는 아버지와 커피 마시게 해주는 남자와 결혼하면 된다는 발칙한 딸과의 대화를 유쾌하게 노래한 「커피 칸타타」를 들었다. 아리아 속에서 ‘커피! 커피!’라는 대사가 자꾸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커피의 유래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DJ 덕분에 ‘아! 오빠가 얘기했던 공부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커피를 좋아했던 음악가 중에는 슈만도 있었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있는 카페바움의 단골이었고,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곡을 했다고 한다. 경주에 있는 ‘슈만과 클라라’라는 카페도 커피를 좋아했던 슈만의 이름을 따 온 듯하다.
떠나버린 사랑과 먹먹해지는 청각 앞에서도 격동적 정서의 풍성하고 꺾이지 않는 음악 세계를 창조한 음악가 베토벤도 지독한 커피 애호가였다고 한다. 커피를 추출할 때 커피콩 60알을 정확히 세어 추출해 마셔 커피 호사가들은 숫자 60을 ‘베토벤 넘버number’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우연히 들렀던 양산 통도사 근처 ‘베토벤의 커피’라는 카페에서는 음악가 조희창 씨의 해석 있는 음악회도 한다고 하니 베토벤과 커피와 음악은 떼놓을 수 없는 존재인듯하다.
브람스도 베토벤처럼 매일 아침 5시경에 일어나 진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귀중한 일과였고, "아무도 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만들 수는 없다."라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는 이야기도 커피에 관련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일화들이다.
에디오피아의 칼디라는 양치기가 우연히 발견한 커피가 아랍에서 유럽을 거쳐 함부르크에 첫 커피하우스가 개장되어 수많은 커피 애호가가 생겨났다는 얘기, 남북 양 회귀선의 커피 벨트(커피존), 커피 생산지의 기온과 품질에 따라 나뉘는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커피의 가장 기본 에스프레소가 만들어 내는 여러 커피 종류, 볶는 정도(약배전, 중배전, 강배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등등. 커피에 관해 조금은 알게 된 사실에 도취해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처럼 아름다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라는 커피에 대한 감상을 표현한 문구를 커피 마실 때마다 잘난 척하며 인용하기도 했다.
사회인으로 첫 월급을 받고 갔던 일본 여행에서 1948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커피집 ‘카페 드 람브르’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마셔봤던 핸드드립 커피 맛의 신세계! 진한 듯 부드럽고, 혀끝에 여운을 두고 머무는 풍미는 지금까지 내가 마셨던 인스턴트커피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원두를 살 때, 일본인은 "제일 좋은 커피 주세요." 한국인은 "싸고 맛있는 거 주세요." 중국인은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니 일본에서는 좋은 원두로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마트에서도 팔고 있었다.
그 후 바리스타 자격증도 갖게 되고, 진로교사가 되자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틈틈이 찾아오는 선생님들께,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고, 기다림의 시간을 들여 정성껏 내린 커피를 드리자 어느 순간 진로실은 소통의 장으로 변해 갔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선생님들로 퇴근 후에 업무를 마감해야 하는 날도 늘어났다. 그러나 학과별 선생님들에게서 얻은 정보로 학생들과의 진로상담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으니 그런 시간까지도 소중한 하루가 되었다. 교장 선생님과 다른 학과 선생님들도 진로부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아군이 되어 있었던 것도 커피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기억으로 학교생활을 마치고 싶다는 소망대로 학교와 지역 만기로 퇴직한 후, 아침이면 포트에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과도 사랑에 빠진다. ‘똑, 똑, 똑’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표현한 「피아노 전주곡」을 들으며 커피를 내리고, 자랑스러운 한국인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손열음 때로는 임윤찬이 연주하는 「녹턴」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가을의 피아노와 비, 그리고 커피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다.
커피로 시작했던 나의 ‘척하며 살기’가 음악, 미술, 체육 그리고 문학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내 생각에 한 걸음 다가온 듯하다. "척하며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 딸이 했던 말이 생각나 쿡! 나오는 웃음과 함께 온 집안에 가득 커피 향이 담긴다.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