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누라가 보던 책을 빼앗아 봤습니다.
날이 새도록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완독했습니다.
이덕일씨가 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란 책이었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친형으로 비밀 독립 결사인 신민회의 창설멤버이자 무장독립운동의 기반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고 이상설과 함게 헤이그 밀사파견과 고종 망명계획을 주도했던 분입니다.
유명한 신채호,김창숙과 함께 조선의열단과 다물단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사상을 검토하다가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여정에 가장 특징적이었던 것은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였다는데 있습니다.
그의 선조에는 영의정이 흔했는데 선조 때 이항복,영조때 이종성, 고종 때 이유원 등이 그런 분이죠
이회영의 부친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10년 12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6형제를 거느리고 엄동설한에 만주로 떠난 이유는 단 하나,바로 독립운동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벌써 44세나 되었습니다.
이회영 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형제들의 전재산을 급매로 팔아 약 4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쌀 한섬이 3원이었으니 지금 돈으로 치면 최소한 수백억원이란 거금입니다.
당시 양반계급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고 좋아라하던 것에 비하면 그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후 일제의 암살 위협과 만주비적들의 위혐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에겐 나라를 되찾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을 뿐 자신과 가족의 부귀영화는 조금도 탐하지 않았던
노블레스오블리제 그 자체였습니다.
그후의 인생은 차라리 죽음이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보다 못한 지난한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가산은 독립운동에 쓰느라 모조리 탕진해서 굶주림과 헐벗음은 그의 인생을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자기 딸의 옷가지조차 정당포에 맞겨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차비조차 없어 천진에서
강소성 소주까지 수만리의 길을 3개월간 걸어 도망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손주까지 가난과 질병으로 잃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당은 돈이 생기기만 하면 독립운동에 쓰든가 동지들을 돕는데 사용하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우당은 1932년에 일제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여 만주의 대련감옥에서 고문사를 하게 됩니다.
그의 자손에 바로 이종찬과 이종걸이 있습니다.
이종찬은 김대중때 국정원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이고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인 조계진입니다.
이종찬의 사촌에는 이종걸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안양시 만안구 국회의원으로 3선을 하는 분인데요. 바로 이회영의 손자되는 분입니다.
이분은 유신체제였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독재에 맞서 싸워서 이회영이 일제경찰의 감시를 안고
살았던 것과 같이 유신독재 경찰의 집요한 감시를 받고 사신 분이더군요.
이회영의 인생을 보면 우리나라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당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나라를 한미FTA로 빼앗기고 나면 다시금 일제에서 나라를 되찾던 투쟁을 재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당은 하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그리고 우당은 자신의 손자인 이종걸 의원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우당은 이종걸 의원에게 당장 국회의원 자리 때려치우고 총과 폭탄을 들고 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아니면 독립운동이 너무 힘드니 너라도 잘먹고 잘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한번 나라를 빼앗기면 다시 나라를 찾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겁니다.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이젠 주권은 놔두고 알맹이만 빼앗아 가버리니 주권을 잃었는지 유지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명목상은 독립국가인데 실질로 보면 식민지나 다름없는 나라가 되기에 독립운동이란 말조차 붙이기가 어려워지는 세상이란 거죠.
어쨌든 나라를 뺏기기 전에 지켜야 합니다.
첫댓글 이회영
이상설
신채호
윗분들 고행 하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겁니다
조중동님
좋은 재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